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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11월 21(일) [백]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Berardus 2021. 11. 23. 06:08

[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11월 21(일)

[백]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제1독서(다니 7,13-14)

제2독서(묵시 1,5ㄱㄷ-8)

복음(요한 18,33ㄴ-37)


주님이 그립습니다

허세 부리는 빌라도에게 자신의 진리와 자비 보여주신 예수님
신앙인의 사명은 죄와 죽음이라는 현실을 세상에 알리는 것
주님을 그대로 반영하는 사랑의 그림자 되어 그분 닮은 삶 살길



위령 성월을 맞으면 어릴 적,

왠지 엄숙하고 갈앉았던 성당의 분위기를 추억하게 됩니다.

가령 맨 앞줄에 전용석을 가지셨던 할머니들의 뒷모습에서 엿보이던 간절함이랄지,

위령 성월에 세상을 떠나면 하늘 문이 활짝 열려서 곧바로 천국에 들어간다던

큰 수녀님의 속삭임도 곁인 듯 가까워지곤 합니다.

물론 신학적 근거는 없지만 저는 온 교회가 한 마음으로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바치는 호소를 하느님께서 외면하실 리가 없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더욱 위령 성월의 기도에 마음을 모읍니다.

그리고 삶 안에서 주님과 동행하려 노력했던 분들을 기억하며 기립니다.

오늘 빌라도는 주님을 향해서

“나는 유다인이 아니잖소?”라며 무시하며 비웃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하찮은 세상 권세로 허세를 떠는 빌라도에게

당신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십니다.

밉살맞은 빌라도에게도 진리를 감추지 못하는 주님 모습에서

새삼 세상의 어느 누구도 당신 사랑에서 배제하지 않는 주님의 자비심을 봅니다.

죄인을 온통 껴안아 품으시는 그분의 진실함을 만납니다.

이렇게 거짓말을 모르는 분의 순수를 그리다가

문득 2019년에 세상을 떠나신 삼촌 신부님이 떠올랐습니다.

늘 천진한 표정으로 지내시던 삼촌 신부님의 삶은 지극히 소박했음에도

세상을 떠나신 후에 전해 듣는 이야기가 감동이기에 그렇습니다.

여태, 함께했던 본당 가족들로부터 신부님의 삶을 따라 살고 있다는 고백을 듣게 되니,

해맑은 아이처럼 낮은 삶을 사셨던 삼촌 신부님의 진정한 승리라 생각됩니다.

얼마 전에도 삼촌 신부님의 옛 본당 신자분의 얘기를 들었는데요. 택

시를 타면 항상 기사님께 팁을 주시는 삼촌 신부님께 이유를 여쭈었더니

“예수님과 늘 함께 있으니까 예수님 몫을 챙겨드리는 것”이라고 설명을 하시더랍니다.

이후 그 자매님도 줄곧 팁을 주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매사에, 예수님과의 동행을 기억하는 참 좋은 방법을 배운 무딘 조카는

세상을 떠난 후에 남은 이들에게 간직된 그리움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선물해주신 주님의 향기라 싶었습니다.

지난여름, 세상을 떠나신 본당 자매님은

교회 일에 충실하셨고 레지오 활동에도 매우 열심이셨습니다.

레지오 장을 치르는 게 소원이라서 더 열심을 내는 것이라고 늘상 말씀하셨는데요.

삶의 막바지,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임시 퇴원을 해서

병자성사를 받으실 만큼 열정적인 믿음인이셨지요.

그런데 자녀 중에 신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레지오 장을 청하지 않아서 자매님의 평생 바람을 이루어드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무엇보다 그분을 위한 연미사가 없다는 사실이 마음 아팠습니다.

이야말로 믿음인의 ‘불상사’라 싶었습니다.

신자들에게 “이제부터 하루에 1000원씩 5년 정도 모으자”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장례미사와 백일미사를 준비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천국 길을 예비하자고 당부드렸습니다.

감사하게도 많은 분이 긍정해주셨는데 무엇보다 고마운 것은,

이후에 본당 미사에서 그 자매님을 위한 연미사가 계속 봉헌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이 소속되었던 레지오 단원들이, 자매님을 기억하는 많은 교우분이

그 자매님을 위한 연미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마음을 모아주고 계신 것입니다.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 하루하루가 감격입니다.

쉼 없이 봉헌되는 자매님의 연미사에서 제 영혼은 대책 없이 화사해지곤 합니다

. 이 복되고 복된 일을 소문내는 심정, 이해되시지요?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알면서 지은 죄, 몰라서 지은 죄, 무의식적으로 행한

죄까지도 속속 드러날 ‘그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기에 인생에서 가장 심각하고 중요한 일은 죄와 죽음의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세상은 죄와 죽음에 관한 논의를 꺼립니다.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죄와 죽음의 치명적이고 결정적인 사안을 외면하도록

영혼을 마비시키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긴박한 현실을 세상에 알리는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죄의 감옥에서 신음하는 세상에 그분의 생명과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선물해 줄 의무가 생겼습니다.

성경은 “율법은 장차 일어날 좋은 것들의 그림자”(히브 10,1)라고 증언합니다.

이렇게 그림자는 참모습이 존재할 때 생기는 것이고

그림자는 실제로 ‘있는’ 것만을 반영한다는 점을 부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주님을 그대로 반영하는 사랑의

그림자가 되어야 할 것이라 헤아립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그림자가 되어 그분 닮은 삶을 살아냄으로

이 세상에 주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라 믿어집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무슨 일에나

항상 사랑과 연민으로 우리 곁에 계신 그리스도 왕을 찬미해 드리는 오늘,

그분이 그립습니다. 그리운 마음에 그분의 사랑이 차오릅니다.

벅차오른 마음을 시편 마지막 구절에 실어 봅니다.

“숨 쉬는 것 모두 주님을 찬양하여라. 알렐루야!”

-장재봉 신부 (부산교구 월평본당 주임)-

늦 가을날에 핀 철쭉


[한주간 전례]

2021년 11월 22일 (월) [홍]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체칠리아 성녀는 로마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독실한 신앙인으로 자랐다.
성녀의 생존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260년 무렵에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며,

박해 시대 내내 성녀에 대한 공경이 널리 전파되었다고 한다.
‘체칠리아’라는 말은 ‘천상의 백합’이라는 뜻으로, 배교의 강요를 물리치고

동정으로 순교한 성녀의 삶을 그대로 보여 준다.

흔히 비올라나 풍금을 연주하는 모습으로 그려진 체칠리아 성녀는

음악인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복음묵상] 루카 21,1-4

주일 미사를 혼자 봉헌하기 싫어 옆 본당을 찾습니다.

제단이 아닌 신자석에 앉아 조용히 미사를 준비할 때면 또 다른 느낌이 듭니다.

미사가 시작되고 예물 봉헌을 할 때 순간 고민합니다.

평소에 헌금을 봉헌하지 않아 봉헌금을 들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어색해서입니다.

그러나 봉헌을 하지 않고 자리에 그냥 앉아 있는 것이 더 어색할 것 같아 봉헌을 합니다.

잠시 본당 사목의 소임을 맡았던 때 교무금으로 십일조를 하였던 기억도 납니다.

그런데 봉헌금과 교무금을 냈던 마음을 곰곰이 돌이켜 보면 부끄럽습니다.

봉헌금을 낸 이유가 다른 사람의 시선 때문은 아니었나 싶기 때문입니다.

교무금도 좋은 의도라기보다는 ‘본당 신부도 교무금을 낸다.

그러니 당신들도 십일조의 원칙에 따라 교무금을 내라.’ 하는 암묵적 지시였는지도 모릅니다.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봉헌금이 많고 적음을 떠나 그들의 마음과 자세에 집중하십니다.

가난한 과부가 넣었던 렙톤 두 닢은

지금 우리나라 돈으로 치면 1,500원 정도

(1렙톤은 당시 하루 일당인 1데나리온의 1/128 정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과부를 보시고는 보잘것없지만 자신의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봉헌하는 마음,

그리고 많이 내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어머니께서는 신권을 쓰지 않고 모아 두셨다가 봉헌금으로 내셨습니다.

깨끗하고 구겨지지 않은 돈이 없을 때에는 다림질을 해서 봉헌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의 봉헌의 마음과 자세를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무엇을 봉헌하는지, 어떻게 봉헌하는지,

그리고 그 마음과 의도는 어떠한지를 되돌아봅시다.

그런 우리를 보시며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오늘 복음 안에서 들어 봅시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11월 23일 (화) [녹]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루카 21,5-11

텔레비전에서 강의하는 아들 신부의 모습을 보고

오랜만에 지인이 연락을 해 왔다며 부모님께서 웃으며 전화를 하셨습니다.

속 썩이던 하나뿐인 아들이 신부가 되었고

다른 이들이 누리는 행복마저도 포기하게 만들었기에,

부모님께는 그 아들이 십자가였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 때문에 부모님께서 오늘은 행복해하십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때로는 무겁고 힘겨운 십자가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그 십자가 때문에 행복해하고 삶의 이유를 찾기도 합니다.

유다인들에게 성전은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종교가 그들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였기에 성전 없는 삶은 상상도 못 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엇보다 화려하고 웅장하게 성전을 지었고,

유다인이라면 누구나 성전을 민족의 자긍심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그 성전이 무너진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신들의 삶의 중심이고 자랑이며 자부심인 그 성전이 무너지면서 재난이 시작되고,

또한 그 재난에서 구하여 줄 그리스도, 구원자가 여기저기에서 나타난다고 하십니다.

전쟁과 반란, 큰 지진과 전염병의 표징 또한 종말의 징조라고 하십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이 모든 것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일상의 삶에서 누군가를 미워하고 싸우며,

누군가로부터 배신당하고 또 자신을 위해서 누군가를 외면하고 배신합니다.

그래서 많은 것을 잃고 고통스러워합니다.

그것이 십자가가 되어 우리의 어깨를 끊임없이 짓누릅니다.

우리는 지금 그 종말의 때를 살고 있습니다. 두렵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의 두려움보다는 그 삶에서 움트는 또 다른 희망을 이야기하십니다.

당신의 가치로, 당신의 사랑으로 다시 시작하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자신의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을 때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11월 24일 (수) [홍]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성 안드레아 둥락 신부는 1785년 베트남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사제가 된 뒤에는 베트남의 여러 지역에서 열정적으로 사목 활동을 펼쳤다.
베트남 교회의 박해 시기에 교회의 주요 인물이었던 안드레아 둥락 신부는

관헌들의 끈질긴 추적으로 체포되어, 1839년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1988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그를 비롯한 베트남의 순교자들을 시성하였다.

[복음묵상] 루카 19,11ㄴ-28

몇 년 전 피정 때 산책을 하면서 선배 신부님과 나누었던 대화가 기억납니다.

“신부는 참고 인내하며 살아가는 사람이지 않을까요?” 하고 제가 말하였더니,

선배 신부님이 “어쩌면 너도 나를 참아 주며 살았겠지만,

나도 너를 견디며 살았다! 니만 견딘 것이 아니여!”라고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언제나 자신이 참고 인내한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상대가 나를 더 많이 참아 주고 견디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인내합니다.

삶의 목줄을 쥐고 있는 이 앞에서 비굴하게 견뎌 내고,

곁에 있는 가족들은 늘 마주하여야 하기에 또 서로를 견뎌 냅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 아무 일 없는 듯 견뎌 내기도 하고,

모든 것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에 상대를 견뎌 내기도 합니다.

분란과 분열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참기도 하고,

나보다 내가 바라보는 이가 더 행복해지게 하려고 인내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인내하고 참고 견뎌 내는 이유’입니다.

생명을 얻고자 하는 인내는 자신을 위한 인내가 아닐 것입니다.

자신을 위한 인내는 한계가 있지만, 사랑을 위한 인내는 한계가 없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 그러셨고 성모님께서 그러셨으며 우리의 부모님이 그러셨습니다.

순교자들은 아프지 않아서 두렵지 않아서 고통을 참아 냈던 것이 아닙니다.

그 고통보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더 크기에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인내의 이유가 사랑이었으면 합니다.

그 사랑의 마음은, 우리에게 아픔과 고통이 참아 내야 하는 무엇이 아니라,

당연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행복이 되게 해 줄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을 얻는 일입니다. 더 많이, 더 자주, 더 열렬히 사랑하십시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11월 25일 (목) [녹]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루카 21,20-28

전신 마취를 하고 수술대에 올라 본 경험이 있습니다.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 수술실로 이동하면서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냥 누워 있는 것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누운 채로 눈을 뜨지 못한다면 …….’ 대개 두려움이란,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이고 다른 거대한 힘에 의하여

자신의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생각에서 찾아옵니다.

그 힘에 우리는 모든 것을 내맡겨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잃으면, 사랑하는 사람도 만날 수 없고,

내가 이루고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생각이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마지막 날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유다인들에게 가장 소중했던 도시인 예루살렘의 멸망,

임신한 여자에게 가장 소중한 배 속의 아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젖먹이 아이 ……, 그 소중함을 더 이상 볼 수도, 만질 수도,

사랑할 수도 없다는 두려움이 닥쳐옵니다.

나약한 인간에게는 너무나도 거대한 자연의 힘이 이제까지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다는 공포가 밀려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 두려움을 온몸으로 맞이할 뿐입니다.

그런데 정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까요? 아닙니다.

마지막 순간일지라도 서로의 소중함을 느끼며 한 번이라도 더 바라볼 수 있습니다.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의 삶이 행복했다고, 미안하다고 안아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종말의 때를 살고 있습니다.

내일 당장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두려움 때문에 우리의 소중함을 깨닫는 데

소홀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오셔서 행하시는 그 전능한 힘에 온몸을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이 모든 것을 잃게 하는 힘이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하는 희망의 힘임을 믿고 살아가는 신앙인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소중함을 잊지 마십시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11월 26일 (금) [녹]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루카 21,29-33

유학 시절 독일에 도착하여 지도 교수님을 찾아뵙고

처음으로 논문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때 들려주셨던 교수님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성경 속의 신학과 하느님에 대하여 말할 때, 오늘이 반영되지 않으면 죽어 계신 하느님,

성경이 쓰인 시대의 하느님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러니 오늘을 살아가는 지금의 하느님을 늘 생각해야 한다는 충고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오늘을 바라보려 노력합니다.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 그들과 나누고 있는 삶의 이야기,

그리고 우리 시대가 직면하여 있는 상황 속에 하느님께서 언제나

활동하시고 찾아오신다는 진리 때문입니다. ‘시대의 징표를 보아야 한다.’,

‘시대정신을 고려해라.’라는 말은 어쩌면 지금의 삶에 대한 충실함을 이야기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그 흐름을 쫓는 것이 힘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변하지 않고 반드시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는 사실도 분명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만 집중해서 살지 않는 일입니다.

자신의 것에만 집중하다 보면 주위를 둘러보지 못합니다.

또한 자기 생각에 갇혀 여유롭지 못합니다.

빠르게 달리는 차 안에서는 지나온 길에 무엇이 어디에 있었는지 잘 모르지만,

천천히 산책을 하다 보면 깨닫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희망을 찾아 위로를 얻고 버틸 수 있는 힘을 얻는

‘바라봄’은 ‘우리’를 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라는 공동체, 그 공동체의 삶, 공동체 안에서의 ‘우리’라는 관계 …….

이처럼 ‘우리’의 모습을 바라볼 때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살아 계심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11월 27일 (토) [녹]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루카 21,34-36

강의를 시작하기 전,

모든 준비를 마치고 사람들 앞에 서면 처음에는 언제나 긴장이 됩니다.

강의 준비를 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처음 강의를 하는 것도 아닌데,

그 긴장감과 떨림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때마다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며 성호를 긋습니다.

그런데 긴장감 없이 어떤 일을 하다 보면 꼭 실수를 연발합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아주 작은 실수 때문에 그 일을 완전히 망쳐 버리는 때도 있습니다.

긴장감은 어쩌면 더 많이 준비하고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고민하였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더 많이 준비하였기에, 세밀한 부분까지 알고 있기에,

평범하고 당연한 것들도 평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방탕과 만취, 일상의 근심도 날마다 반복되면 습관이 됩니다.

습관이 되면 실수하는 것 또한 일상이 되어 버립니다.

그 습관 때문에 누군가 상처받고 아파하지만, 그 상처와 아픔조차 평범한 일이 되어 버립니다.

한 번의 실수에도 고민하고 반성한다면, 긴장하며 일상을 살아갈 것입니다.

또한 그 긴장감은 나의 약함을 바라보는 계기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많은 준비를 하고 반성을 하며 완벽해지려고 하지만,

결과를 돌아보면 언제나 부족함이 보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실상 그리 많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언제나 기도를 할 때, 주님께서 함께하여 주시기를 청합니다.

일을 시작하며 바치는 기도는 “오소서, 성령님. 저희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저희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라고 시작합니다.

맡겨 드린다는 것은 우리 안에 열정을 키우는 일입니다.

사랑의 불, 일에 대한 열정, 그 열정을 통하여 실수가 있더라도

내가 하는 일이 하느님의 가치를 전하는 당신의 일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늘 그렇게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 깨어 바라보고 준비하고 기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 긴장감을 오늘도 즐기기를 기도합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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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력으로 마지막 주일입니다.
마지막이란 단어가 새삼 다가옵니다.
단풍에 물든 철쭉 사이로 꽃이 피였습니다.
철 모르는 꽃이 마지막을 더욱 상기시킵니다.
마지막을 기억하며 오늘을 되돌아 봅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