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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11월 14(일) (녹) 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Berardus 2021. 11. 14. 05:36

[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11월 14(일)

(녹) 연중 제33주일·

(세계 가난한 이의 날)

제1독서(다니 12,1-3)

제2독서(히브 10,11-14.18)

복음(마르 13,24-32)


이야기에 물드는 삶

임박한 종말, 공동체를 향해 “깨어있으라” 메시지 강조하신 예수님
세상의 끝은 ‘무(無)’가 아니라 주님의 날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상징
하느님의 빛과 지혜로 고난 극복하고 새로운 삶 속에서 행복 찾길



“가까이 오라/우리도 언젠가는 가련한 낙엽이 되리라.”(래미 드 구르몽)

인생을 마무리하는 죽음을 생각하는 위령 성월인 11월,

전례력으로 연중 제33주일은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이고 다

음 주일은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이자

성서주간을 시작하는 주일입니다.

올해 처음으로

“왜 ‘세계 가난한 이의 날’ 주일 후

성서주간이 이어질까?”라는 질문을 하게 됐습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말이나 체험은 기억 안에 저장돼

계속 재해석하면서 삶을 빚어가는데요,

제가 성서사도직을 하면서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해석학’입니다.

성경에서 가난은 물질적인 가난만이 아니라 영적인 가난,

곧 하느님과 사람 앞에서 경청하는 마음,

자신을 낮추는 능력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은 가난해지고 가난해지기 위해서 성경을 읽습니다.

■ 복음의 맥락
복음은 가난한 이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분인 예수님 생애의 마무리에 해당합니다.

마무리이지만 절정이지요.

마르코 복음 13장의 중심 주제는 ‘예수님의 종말론’ 가르침입니다.

원래 이 본문의 의도는 사람들이 종말을 준비하도록 돕는 것이었는데

마르코는 이 본문에서 임박한 종말에 대한 기대를 지향하는

영성을 보여줍니다.(마르 13,26.29-30)

13장 담화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깨어있으라”입니다.

마르코 공동체는 핍박과 박해를 받는 공동체로 알려져 있는데

이런 공동체를 향한 마르코의 메시지는 부활한 예수님이 박해당하는

사도 바오로에게 준 메시지와 거의 일치합니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

■ 예수님 이야기, 내 이야기
마르코는 가난하고 핍박당하는 마르코

공동체 신자들의 삶을 위해 오늘 본문을 기록했지만

오늘날 우리 삶에도 적용할 것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세례란 “예수님과 함께 고난당하고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나는 것”(로마 6장)이라면 예수님 생애의 신비는

바로 우리 생애의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예수님은 속임수와 희망한 대로 되지 않을 때

좌절하게 되는 그릇된 종말론에 대한 흥분을 다시 바로 잡습니다.

이 모든 것은 종말에 대한 기대가 늦춰지고 있다고 여기는

초대 교회 독자만이 아니라 신앙에 반대하는 온갖 것들에 마음이 끌리고

신앙의 의미에 대한 의식이 약화되고 있는 우리 상황에도 도움이 됩니다.

우리 죄의 용서와 구원을 위해

자신을 십자가 제물로 바친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어떤 아름다운 예술, 사상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세상의 끝은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온갖 기대를 넘어서며 누구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충만함 안에서 인간의 온갖 희망이 이어질 것입니다.

“마라타나, 오소서, 주 예수님!”(1코린 16,22) 주님의 날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간직하는 것은 우리가 현재

삶을 제대로 살아가게 하는 방향을 갖는 것과 같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그분의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해 말하고 무화과 비유를 통해

그분에게 다가올 수난에 대해 말합니다.

예수님은 영광에 이르기 전에 수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중세 영국 독수자인 노르비치의 줄리아나는

「하느님 사랑의 계시」에서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라는 말을 반복합니다.

우리도 많은 고난을 겪겠지만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시편 화답송에서 고난을 겪는

한 가난한 사람이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은 제 몫의 유산, 저의 잔.

당신이 제 운명의 제비를 쥐고 계시나이다.

언제나 제가 주님을 모시어,

당신이 제 오른쪽에 계시니 저는 흔들리지 않으리이다.”

하느님의 섭리 아래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힘든 상황에서도 감사하는 자세를 유지할 것입니다.

감사는 자기 삶이 온전히 창조주에게 달렸음을 믿는 신앙의 행위이자

자신이 선물로 받는 것을 헤아릴 줄 아는 행위입니다.

셋째, 우리의 정체성과

우리 삶을 해석하는데 있어 성경 이야기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나를 읽는다!’ 옛날에는 성경을 공부하기 위해 했었는데

요즘은 제 삶의 비밀을 발견하기 위해 성경 이야기를 읽습니다.

스스로에게는 감추어져있지만 하느님에게는 환히 드러나 있는 것!

각자 소명에 따라 빛깔과 모양은 다르지만

하느님 안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예수님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복음서에

예수님 생애의 아름다운 순간들이 많이 나옵니다.

행복선언이나 주님의 기도 같은 놀라운 가르침,

경이로운 병자 치유,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와의 지혜로운 논쟁….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에 다양하게 지속적으로 영감과

영향을 주는 이야기는 그분의 영광스러운 재림과 고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초대 교회 신자들도 이미 체험한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도 이 체험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로마 8,18)

■ 성찰
몇 달 전 성경 특강을 마치고

신천지에 몇 년 있다 탈퇴한 젊은이와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습니다.

신천지에서 들은 것과 강의 내용이

차이점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질문했더니

이 지혜로운 젊은이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성경을 역사와 맥락 안에서 해석하라는 점이 달랐어요.

신천지에서 들은 좋은 말과 중첩되는 것들도 있었는데,

저는 왜 이 좋은 이야기를 성당이 아니라

신천지에서 먼저 들었을까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이 불안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에게 정체성과 삶에 대한 해석을

제공할 수 있는 이야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잃어버린 젊은이들을 포함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그들의 삶을 비춰주고 해석할 이야기입니다.

바로 하느님 이야기 말입니다.

예수님 이야기에서 흘러나오는 빛과 지혜는

현재의 고난을 극복하게 하고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초대합니다.

삶을 이끌어가는 이야기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아멘!

-임숙희(레지나)-

▲서소문성지


[한주간 전례]

2021년 11월 15일 (월) [녹]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루카 18,35-43

운전을 하다가 터널에 진입하였는데,

갑자기 앞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전조등도 켜져 있었고, 터널 안에 전등들도

이상 없이 불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어두운 거지?’ 알고 보니

강한 햇볕에 눈이 부셔 썼던 선글라스 때문이었습니다.

쓰고 있던 선글라스만 벗으면 될 일을 기계의 오류나

터널 자체의 문제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창피하고 우스운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삶을 바라보는 우리의 판단 또한 이와 같을 수 있습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처럼 어떤 상황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잘못보다는 세상과 주변의 문제점을 먼저 생각합니다.

나는 잘하고 있는데, 주위에서 도와주지 않는다거나

내 생각을 받아 주지 않는다며, 실망하고 짜증을 부립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리코의 눈먼 이가 예수님을 찾아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닌 듯합니다.

“다시” 볼 수 있기를 청하지요. 볼 수 있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마지막 수난 예고(루카 18,31-34 참조)

바로 다음에 예리코의 눈먼 이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이곳 예리코는 갈릴래아를 떠나

사마리아를 거쳐 시작된

예루살렘으로의 여정(루카 9,51─19,27 참조) 중 마지막 장소입니다.

이렇게 루카 복음사가는 갈릴래아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을 거치며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삶을 바라본 사람들에게

또한 자신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 독자들에게

예리코의 눈먼 이를 빗대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제대로 보고 있는지 묻습니다.

예수님을 본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욕심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야 합니다.

욕심과 욕망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예수님과 세상을 바라보았기에

예루살렘에서의 비극은 발생합니다.

그 색안경을 벗을 때, 비로소 우리에게도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요.

세상이 달라지려면 자신이 제대로 보고 있는지,

자신의 색안경이 어떤 색깔인지 바로 보는 것이 먼저입니다.

“주님, 제가 제대로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11월 16일 (화) [녹]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루카 19,1-10

지난 7월, 미사를 부탁받아 한 본당을 찾았습니다.

마침 『매일미사』에 묵상 글을 썼던 달이라

강론을 묵상 글의 내용으로 할까 생각하였습니다.

‘내가 묵상한 글이고 내가 살아왔던 나의 이야기이니 괜찮지 않을까?’

잠시 고민하였지만, 새롭게 준비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 다르고, 듣는 사람들이 다르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또한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변하지 않지만 복음을 듣는 우리가 변하기에,

그 의미와 메시지도 때마다 다르게 전달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어쩌면 그러한 마음이 성경에 대한 저의 열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열정이 변하지 않고 지치지 않는 저의 목표가 되었으면 합니다.

현재의 삶에 만족하는 사람은 열정이 사라집니다.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현실에 안주하기 쉽습니다.

자캐오는 부자이면서도 그 돈이

자신의 권력이 되어 버린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였습니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은 열망이 있었다면 그

는 계속 세관에 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더 큰 권력을 얻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다면

그는 권력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떠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예수님을 보고 싶은 열망만이 있었습니다.

현실적인 어려움(예수님을 보려고 모인 많은 사람, 키가 작으며,

공동체에서 소외당하는 자신의 모습) 때문에 그 열망이 위기에 부딪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캐오가 예수님과 시선을 맞추고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변화하고 구원되는 모든 과정의 시작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지 않는 열망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간절함입니다.

예수님을 보고 싶은 열망,

그분과 눈을 맞추고 싶은 열망,

그분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열망,

그분처럼 살아가고 싶은 열망, 그분처럼 사랑하고 싶은 간절함,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 간절함이 우리를 예수님께 인도할 것이고,

그분께서는 우리의 손을 잡고 당신의 품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지금 어떤 열망과 간절함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11월 17일 (수) [백]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엘리사벳 성녀는 1207년 헝가리에서 공주로 태어났다.
남부럽지 않게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었으나 어려서부터 신심이 깊었던 성녀는

참회와 고행의 생활을 하며 많은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었다.
엘리사벳은 남편이 전쟁으로 사망하자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가입하여

기도 생활과 자선 활동에 전념하였다.
1231년 스물넷의 이른 나이에 선종한 엘리사벳 성녀는 자선 사업의 수호성인으로,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복음묵상] 루카 19,11ㄴ-28

복음에 따라 살아가고자 우리는

‘순명’(順命, oboedientia)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필리 2,8)하셨기에,

그 삶을 본받아 순명의 삶을 살아가라고 교회는 권고합니다.

사제로서 그 삶은 선택이 아닌 의무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순명의 마음을 가지기는 쉽지 않습니다.

주교님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내 나름대로 하고 싶은 일도 있고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지만,

저에게 그 일을 명하지 않으십니다.

때로는 반대되는 것을 명령하시고, 원하지 않는 것도 명하십니다.

쉬운 길이 있는데 어렵게 돌아가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가끔은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그 명령을 따릅니다.

‘자신을 희생하며 의지를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명령을 따르는 것이 순명’이지만,

가끔은 그 안에 희생과 의무만 있고 기쁨은 사라져 버릴 때도 있는 듯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미나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평생을 주인 곁에서 심부름만 하던 종들에게,

주인이 나누어 준 돈으로 벌이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처음 해 보는 일이라 막막하기도 하고, 주인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잘못해서 돈을 잃으면 벌이 기다리고 있음에 두렵기도 했겠지요.

어떤 종은 주인이 이 과제를 주며 명령한 이유와

주인의 생각이 과연 무엇인지 고민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행동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의도와는

다르다고 비판하고 짜증 내고 불평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또 그 과제 안에서 자신의 이유를 찾으려 고민합니다.

그러나 어떤 종은 불평과 불만, 두려움과 나태함으로

그런 고민조차 하지 않고 그냥 “예.”라고 대답만 할 뿐입니다.

순명의 가치는 같은 것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것을 위에서 내려다볼 때와 아래에서 올려다볼 때,

모습은 다르지만 분명 같은 것을 보고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으로 이해하려 고민하고,

행동하려 고민하고, 같은 것을 같은 모습으로 바라보며

고민하는 흔적이 순명의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순명의 길을 오늘도 나섭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11월 18일 (목) [녹]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루카 19,41-44

예전에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

굉장히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초등학교 때 친구와 싸우고 나서 울면 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니까요.

그런데 요즘은 자주 울컥합니다. 강의를 할 때도,

영화를 보거나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조용히 눈물을 훔칠 때가 많습니다.

‘눈물’은 단순히 슬픔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전혀 다른 감정 안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분노하거나 억울하고 안타까울 때도 눈물을 흘립니다.

어쩌면 눈물의 의미는 ‘감동’과 ‘공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기쁨과 슬픔에 감동하고 공감하며

자신의 추억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립니다.

반대로 누군가가 자신의 생각과 마음에 공감해 주지 못할 때,

그리고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해 주지 못할 때 억울해하며 눈물을 보입니다.

오늘 예루살렘 도성을 보고 흘리신

예수님의 눈물은 어떤 의미일까요?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하시며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안타까움이 엿보입니다.

예수님의 눈에 보이는 뻔한 결과를 그들이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억울함도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당신께서 그들을 위해서 그렇게 많은 말씀과 사랑을 베푸셨지만,

그들은 변하지도 달라지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안타까움은 또한 그들이 겪을 아픔에 대한 공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혼란에 빠져 얼마나 힘들어할지 걱정하고 아파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를 보시면서도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안타까움에, 분노와 슬픔에, 그리고 우리가 겪고 있는 아픔과

고통에 함께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런데 혹시 다른 눈물을 흘리고 계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회개하는 모습, 당신 뜻을 따라 잘 살아가고 있는

모습에 흘리시는 기쁨과 감동의 눈물 말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 어떤 의미의 눈물을 드리고 있습니까?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11월 19일 (금) [녹]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루카 19,45-48

저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1코린 9,22)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좋아합니다.

사제로서 신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

이 말씀과 같아야 한다고 평소에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이 바라는 방식으로,

그들이 원하는 무엇인가가 되어 주는 사제

, 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늘 그렇게 하지는 못합니다.

때로는 싸우고 외면할 때도 있습니다.

상처를 주고받으며 다투고 얼굴 붉히며 살아갑니다.

내 실수를 인정하며 반성하기도 하지만,

그런 자기반성보다는 상대의 아집과 욕심 때문이라

판단하고 분노하며 다투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변화하지 않고 안주하려는 마음에 안타까워하기보다는

쉽게 인정해 버리고 포기하며 외면할 때도 많습니다.

그런데 다툼과 분노가 잘못된 것일까요?

다툼과 분노 그 자체보다는 무엇을 위한 싸움이고

분열인지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노하셨습니다.

성전에서 물건을 팔고 있는 사람들을 보시고 분노하시며,

그들의 탐욕과 잘못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날마다 하느님의 집에서 말씀을 전하시며,

그들이 성전 안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침내는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외면당하시기까지,

그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시면서도 그들 또한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싸울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 잘못 때문에 미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싸움과 다툼, 미움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성전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과 유다의 지도자들이

예수님과 부딪친 이유와 예수님께서 그들과 부딪쳤던 목적과 이유는 다릅니다.

그들은 자신만을 위해서 다투고 싸웠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위하여 그리고 싸우고 있는

상대를 위하여 그들과 맞서 싸우셨습니다.

여러분의 ‘분노와 다툼의 이유’를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 주는 것은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가치를 전해 주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려면 맞서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11월 20일 (토) [녹]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루카 20,27-40

텔레비전의 토론 프로그램이나 청문회,

아니면 국회에서 실시하는 대정부 질문 영상을 보면서 때로는

‘정말 궁금해서 질문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답은 정해져 있고 질문에 답하는 사람을

궁지에 몰기 위하여 질문합니다.

상대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내 생각과 주장이 옳음을 드러내려고 질문합니다.

나아가 상대방 자체를 판단하고 규정지어 그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을 비판하고 잘못된 것으로 몰아갑니다.

우리가 하는 질문들을 살펴보아도 이런 판단과 확증 편향은 비일비재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에게 그런 식의 질문을 받으십니다.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고 있는 그들은 마지막으로

자신들의 질문을 통해서 그분을 고발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합니다.

그런 그들에게도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의미와

하느님의 구원에 대하여 설명해 주십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아마도 사두가이들은 그들의 선조들이 체험했던

하느님 안에 갇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지금 여기에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와 만나십니다.

또한 나에게만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찾아오십니다.

자신들의 이론과 배움, 체험과 경험에만 갇혀 있던 사두가이들은

이를 제대로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으며,

제대로 판단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 논쟁으로

사두가이들을 이해시키려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평생을 지녀 온 그들의 신념을 예수님의 한마디로 바꿀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열린 마음,

받아들이는 여유를 바라신 것은 아닐까요?

자신이 언제나 옳을 수는 없음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나약함, 부족한 이해와 판단을 바라보라고

이야기하신 것이 아닌지 짐작해 봅니다.

그러한 열린 마음이 지금 여기에서

나와 함께 살아가시는 하느님을 느끼게 해 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산 이들의 살아 계신 하느님이십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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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문턱인 듯 싶더니만
추운 겨울이 바싹 다가왔습니다.
미사 참례 인원도 예전보다는 대폭 늘어
많은 신자들과 만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랜만에 인사를 나누면서
이렇게 만남이 중요한지를 새삼 깨달으면 좋겠습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