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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1일 성 볼프강 주교 / 소년성인 유대철베드로 축일

Berardus 2021. 10. 30. 18:44

 

Coronation of the Virgin between St Wolfgang and St Benedict-PACHER, Michael
1479-81. Polychrome pine. Parish Church, Sankt Wolfgang
 
10월 31일
성 볼프강 주교

St. Wokfgan
ST. WOLFGANG
San Volfango di Ratisbona Vescovo
924 in Swabia -
31 October 994 at Pupping, Linz (Austria)
Canonized :1052 by Pope Leo IX
 
 
스바비아 가문의 후손인
 성 볼프강은 라이키난 대수도원과 비르쯔부르그에서 수학하였고,
그의 친구인 헨리꼬와 더불어 비르쯔부르그와 트리엘의 대성당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의 친구인 헨리꼬는 956년에 트리엘 대주교로 봉사하였으나
 964년에 서거하였다.
 
그 후 볼프강은 아인지델른(오스트리아)에서 베네딕또회원이 되었는데,
그는 그곳의 수도원 학교장이 되었다.
그는 971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후 그는 판노니아의 마갸르인들에게 선교활동을 하던 중,
972년에 레젠스부르그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즉시 교구 내의 성직자와 수도원 개혁을 단행하는 한편,
여러 지역을 다니며 선교활동에 직접 관여하고 설교하였으며,
특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적으로 증거하여
 높은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는 수차에 걸쳐 교구를 떠나
 은수자로 살려고 시도하였지만, 번번히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황제를 수행하여 프랑스를 여행하였고, 바바리아의 아들인
헨리꼬 공작(성 헨리코2세)의 개인교수로도 활약하였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린즈 교외 푸핑겐에서 서거하였고,
1052년에 레오 9세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오스트리아의 황제와 많은 귀족들은 그가 수많은 기적을 하는 것을 불신했으나
큰 기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다하며,
주교로써 겸허한 삶을 살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었고 살아 생전에도
이미 성인으로 존경을 받으셨다고합니다.
 
*성 헨리코2세 축일:7월13일.게시판1272번
*성녀 쿠네군다황후 축일:3월3일.게시판996번,1644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 성녀 쿠네군다 수도자(2회, +1292년)축일:7월23일,게시판1285번
 
 
성 볼프강은 920년경 독일의 남방 스웨덴 귀족의 출신이다.
소년 시대는 당시 유명한 라이헤나우에 있는 베네딕토 수도원에 맡겨져 교육을 받았는데,
그 천부적 재능은 학업에 탁월한 진보를 보게 되었다.
한편 신심에도 매우 열심하여 일찍이 주님의 성소를 깨닫고 몸을 바쳐
수도자 되기를 열망했다.
 
같은 수도원에는 교육을 받은 명문 출신의 자제가 많았지만,
그는 특히 웰츠부르크의 주교 포포의 동생인 헨리코와 두터운 친교를 맺고
,이 둘은 뜻을 같이하여 그 시에 있는 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런데 영성 지도 선생인 이탈리아인 스테파노는 볼프강의 재능이 탁월해
가끔 자기의 실력을 능가함을 시기해 그를 퇴학 처분하려 했다.
그러나 온순하고 인내심이 강한 그는 이 같은 비행을 말 한마디없이 꾹 참았다.
그러는 동안 트리르 대주교로 선임된 헨리코의 초청으로 그 시(市)에 있는 신학교에
 영성 지도 신부가 되어 덕을 닦으며,
솔선수범하며 맡은 바 직무를 완수하고 학생들을 훌륭한 사제로 육성하는데 전심했다.
그러나 거기서도 종종 불쾌한 일이 있어 쓰라린 경험을 맛보게 되었다.
 
그의 뜻이 실현되어 스위스에 있는 베네딕토회인 아인지델룬 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것은
친우 헨리코 주교의 서거 후 얼마 안되어서였다.
그는 겸손한 마음으로 신품 성사 받기를 진심으로 사양했으나
 아우구스부르크 주교 우달리코(울릭)의 명을 어길 수 없어 그의 손으로 서품되어 사제가 되었다.
 
곧 그는 하느님의 특별한 계시로 전교에 열망을 품고,
당시 남 독일에 침입한 헝가리 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허락을 얻어
 수명의 수사를 거느리고 그 지방으로 떠났다.
그러나 불행히도 여러 장애 때문에 전교 활동이 좋지 못했다.
그래서 헝가리를 떠나 그 국경선 지대인 독일의 파사우 시의 주교 필그림 밑에서
 다시 전교의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자 필그림 주교는
그의 탁월한 인격과 학덕을 겸비한 출중한 인물됨을 알고,
당시 공석 중이던 레겐스부르크의 주교좌에 가장 적임자로 인정해
교황 요한 12세에게 주교로 추천했는데,
그 교구의 성직자, 신자들도 이를 매우 환영했으므로
 사르츠부르크의 대주교의 집전 하에 주교로 축성되었다.
그는 뜻하지 않은 일에 놀라 자기와 같은 사람은
그 중임을 감당하기에 부족하다고 사양했으나
도저히 피할 길이 없어 마침내 승낙하고 말았다.
 
볼프강이 주교로 임명된 것이
 하느님의 뜻이었다는 것이 차츰 명백하게 되었다.
그것은 당시 신앙이나 수덕에 대한 열의가 냉랭해지고 염증을 일으키는 사제, 수사,
수녀들이 그의 솔선수범과 적절한 훈계로 그 폐풍에서 벗어나게 되고,
생각 이상의 쇄신 실적을 거두었고, 신자들은 더욱 신앙심이 깊어지고,
성당 건립이며 미신자 냉담자의 개종하는 수가 엄청나게 많았다고한다.
한편 그는 주교의 영직에 있으면서도 과거 수도원 시대의 검소하고 준엄한
고행의 생활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또한 빈민, 병자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애정으로 대하며
가난한 이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름을 습관으로 했다.
 
 
볼프강은 후일 독일 황제가 된 성 헨리코와 그 3형제를 교육할 책임을 맡았다.
“나라를 성화 하려면 성스러운 군주가 필요한 것이다.”
가끔 이런 말로써 그들을 격려했던 그는 과연 그 나라를 성화시킬 기회를 얻었다.
 
즉 그의 정성어린 교육을 받은 헨리코가 마침내 황제가 되자 주님의 뜻을 받들어
선정을 베풀며 신앙에 열심했던 것이다.
따라서 볼프강의 성덕의 감화는 비단 레겐스부르크 뿐만 아니라
 이 고귀한 제자를 통해 전 독일에까지 미쳤다.
 
그런데 헨리코가 즉위하자 그는 곧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여행 중 그는 오스트리아의 푸핑센에서 병을 얻어 정성스럽게 성체를 영한 후
 주님의 청빈을 본받는 뜻으로 맨땅에 누워 조용히 눈을 감았다.
때는 994년 10월 31일이었다. 그는 1052년에 레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10월 31일
소년성인 유대철베드로 축일

1826-1839(14세)포청옥에서 교수형
1925년 7월 5일 시복.
1984년 5월 6일 시성.
 
소년 성인 유대철(劉大喆)은 성인 유진길의 아들로
 어려서 아버지의 모범과 가르침을 받아 입교하여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성 유진길아오스딩의 집안은 대대로 벼슬하는
 서울의 유명한 역관(譯官) 중인 집안 이었다.  
 
천주교에 대해 적대시하고 방해하는 어머니와 누나에게 끊임없는 괴로움을 당했는데,
그때 마다 어머니에 대한 효성을 보여주었으나 신앙에 대해서는 양보하지 않았으며,
 어머니와 누나를 위해 항상 기도했다.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어나자 많은 교우들의 순교사실과 아버지의 체포소식을 듣고
 순교하기로 결심하여 자수하였다.
재판관들은 어린 소년을 배교시키기 위해 천만 가지 방법을 다 사용하였지만,
소년 유베드로의 마음은 변치 않았으며,배교시키기 위한 갖은 방법에도 변함없이
 오히려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어 형리들을 놀라게 하였다.
 
어린 나이로 견디기 어려운 혹형과 고문을 이겨냈다.
허벅지의 살을 뜯어내며
"이래도 천주주교를 믿겠느냐?"하고 으름장을 놓는 형리에게
"믿고 말고요. 그렇게 한다고 제가 하느님을 버릴 줄 아세요?"라고 대답했다.
화가 난 형리가 다시 시뻘건 숯덩이를 입에 넣으려 하자 "자요"하고
 입을 크게 벌려 형리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처럼 견디기 어려운 형벌과 매질로 늘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으나
 항상 만족스럽고 평화로운 표정을 띠었?
 
관원들은 어린 소년을 공공연하게 죽이면 군중이 반발할까 두려워
1839년 10월 31일, 형리들을 옥 안으로 들여보내
 상처 투성이가 된 그 가련한 작은 몸뚱이를 움켜잡고
 목에 노끈을 잡아매어 죽이도록 하였다.
가장 어린 순교 소년 유대철은 아버지와 함께 순교하여,
우리 민족의 모든 어린이들의 신앙적인 모범이 되었다.
이때의 나이는 14세 이었다.
 
성모자와 한국 성인들 - 월전 장우성(月田 張遇聖,요셉,1912- )
1949년, 각 185x108cm. 종이에 채색, 바티칸 인류복음화성 고문서고
 
성화 해설
이 작품은 1950년 바티칸에서 열린 성모성년을 기념하여 세 폭의 연작으로 제작된 것이다.
가운데는 성모자와 세례자 요한이 있고 좌측에는 순교자 강완숙과 성 김효주, 성 김효임이 있다.
우측에는 성 김대건 신부와 성 남종삼, 성 류대철이 서 있다.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순교한
우리나라 성인의 모습이 단아하면서도 거룩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운보 김기창 - 성모영보
 
★성 유진길 아우구스티노(劉進吉,1791-1839)
’용심’으로도 불렸고 또 순교 당시
 정3품 당상역관(當上譯官)의 높은 벼슬에 있었던 유진길은
 서울의 유명한 역관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특히 철학과 종교 문제에 관심을 갖고 세상만물의
 기원과 종말에 대해 명확히 알고자 10년 동안 불교와 도교를 깊이 연구했다.
그러나 ’만권의 책과 동서고금의 학문이 가슴에 가득한 사람’이라는
세상 사람들의 칭찬과는 달리 유진길은 오히려 진리를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23년 우연히 [천주실의]의 일부분을 구해 읽고는 사방에 수소문한 끝에
 한 교우를 만나 천주교 진리를 터득하고 곧 입교했다.
1824년 동지사(冬至使)의 수석 역관으로 북경에 가서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후 유진길은 북경교회와의 연락을 담당하며 전후 8차에 걸쳐 북경을 왕래하면서
정하상(丁夏祥), 조신철(趙信喆)과 함께 성직자 영입운동을 전개하였다.
마침내는 교황에게 성직자의 파견을 간청하는 편지를 북경주교에게 전달했고
그 결과 유방제(劉方濟) 신부, 나(모방) 신부, 정(샤스탕) 신부,
범(앵베르) 주교 등이 입국하게 되었다.
유진길은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7월 17일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주교와 신부들의 은신처를 대라는 관헌으로부터
 매우 가혹한 형벌을 받았으나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주교와 신부들이 체포되자 의금부에서 그들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다.
마침내 유진길은 9월 22일 정하상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49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운보 김기창-아기예수의 탄생.
 
아래의 글은 "한국순교자연구소"의 글입니다.
윤민구도미니코신부  www.rimartyrs.pe.kr
 
★기해(1839년)박해의 순교자들과 한국 천주교회 초기의 모습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 이후 한동안 잠잠했던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1839년(헌종 5년)에 이르러 다시 시작되었다.
1839년이 기해년이었기에,이 때의 박해를 흔히 기해박해라 한다.
 
기해박해 때에는 조선에 들어와 활약하던
앵배르(Imbert)주교와 모방(Maubant)신부 샤스탕(Chastan) 신부 등
3명의 불란서 선교사와 더불어 모두 114명 이상의 신자가 순교를 하였다.
 
기해년의 박해가 일어나자
 앵배르 주교는 순교자들의 사적을 기록하기 시작하였으며,
자신도 곧 체포될 것을 예감하고 그는 정하상과 현석문에게
 순교자의 사적을 면밀히 조사하여
기록하는 일을 계속하도록 명하였다.
이 일을 부탁받았던 정하상은 곧 체포되어 처형되었지만,
현석문은 숨어 다니며 교우들로부터 모아들인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자료를 정리하고 기록하여
{기해일기}란 책을 완성하였다.  
 
이 {기해일기}는 한동안 실전되었다가,
1904년경 당시 제8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뮤텔(Mutel)주교에 의해
 한글본이 발견되어
 이듬해인 1905년에 그대로 출판되었다.
 
이 {기해일기}에 의하면 당시에 순교한 사람이 모두 114명이 넘었다고 되어 있으나,
여기에는 78명의 순교사기만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기해일기}는 그 사료적인 정확성이 입증되어
 여기에 기록된 78명 가운데 69명이 1925년 7월 5일에 복자위에 올랐으며,
이들은 1984년에 성인품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운보 김기창 - 제자들을 만남.부르심.
 
★기해일기에 나타난 신문기록의 재구성중에서
형 관: (대대로 벼슬하는 역관 중인인 유진길 아오스딩을 체포하여 . .
 한말만 하라 하되 듣지 아니하고 관전에 이르니
포장이 불러 만단으로 회유하되 종래 듣지 아니하는지라 할 수 없이 잡아내려)
네가 국록을 받는 신하의 몸으로 나라가 금하는 일을 하니
 뉘에게 배웠으며 가르치기는
 얼마나 하였으며, 당과 책을 대라.
 
유진길 아오스딩: 전라도 가서 치명한 이경언 바오로(1827년 순교)에게
 배우고 가르치기는 남은 고사하고 집안 가속도 못하였삽고 책도 없나이다.
형 관: 네 집처럼 책이 많은 데가 없는데 모른다 하느냐? (하며 다섯 차례나 혹형을 가함.
그리고 이어서 서양의 신부가 온 까닭을 힐문함)
 
유진길 아오스딩:
서양 선비가 우리 나라에 오기는
 천주의 광영을 현양하고 사람을 가르쳐 천주 십계를 지켜
 천주를 공경하고 영혼을 구할 이런 도리를 전하여
죽은 후에 지옥의 영원한 고통을 면하고
 천당에 올라 무궁한 진복을 누리게 함을 위함이니,
이런 착한 도리를 가르치려 하매
어찌 자기는 선한 일을 하지 않으면서 남은 선하라 하리오.
그런 연고로 먼저 정결히 수신하여
덕을 가진 후에 외국에 전교하나니 높은 지위와 재물과 색을 탐하려 하면
어찌 서양의 번화 부요한 본고장을 버리고 구만 리 외국에 구사일생하여 나오며,
또 주교위가 높으시니 무슨 지위를 탐하시며,
본국 은전을 내어다가 쓰니 무슨 재물을 탐함이 있으며,
 천주께 허원하고 종신토록
 동정을 맹세하고 몸을 정결히 하사 신부가 되어 계시니
 무슨 색을 탐함이 있으리오.
 
형 관: 누가 데려왔느냐?
유진길 아오스딩: 소인이 데려왔나이다.
형 관: (고문하며 두 신부 사정을 묻다)
유진길 아오스딩: (대답치 아니함)
형 관: 또 주장한 사람이 있을 것이니 다 대라.
 (하고 육차 수형에 주리를 틀며 고문)
유진길 아오스딩: (한결 같음)
 
 
운보 김기창 - 물위를 걸으심.
 
★기해박해 시 심문기록에 나타난 천주교 신자들의 세계관
앞에서 제시한 기해박해 때의 천주교도 심문기록을 보면 새삼스러운 해설이 필요가 없을 만치
 생생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리고 당시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던 천주교도들은 매우 다양한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증언은 공통된 것이었다.
 
이들은 배교하기를 거부하였다는 점에서 공통될 뿐 아니라,
 죽어도 신앙을 버릴 수 없는 이유를 너무나 명백하게 밝혔다는 점에서 비슷하였다.
이들은 모두 천주가 이 세상 만물의 주인이시기에 "사람된 자는
부득불 천주를 받들어 섬겨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심문하던 형관은 "인륜을 폐하고
 나라가 금하시는 일을" 어찌 할 수 있느냐고 추궁하면서
 배교할 것을 명하였으나, 이들은 모두 배교하기를 거부하였다.
 
이들은 "이 세상의 주인도 섬기다가 배반치 못하거든 하물며 천지 만물의 대주이신
 천주를 어찌 배반하오리까?"라고 하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당시의 천주교도들은 조선왕조의 체제를 뒤엎기 위한 행동을 취한 적은 없었다.
소극적인 의미에서 그들은 국가에 전혀 해를 끼칠 수 있는 입장에 있지도 않았으며,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조선왕조가 요구하는 내용과 천주신앙이 상충될 때는
자신의 신앙이 요구하는 것을 더 중요시하였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이들은 이미 정신적으로 더 이상 조선왕조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이들은 제사를 기본으로 하는 유교적인 윤리를 거부한 사람으로 취급되었다.
 
이처럼 위의 심문기록을 보면 누가 보더라도 심문하는 사람보다도
심문을 당하는 사람들이 펴는 논리가 더욱 당당하고 정연한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기에 말이 먹히지 않으면 형관은 가차없는 고문을 가하였던 것이지만,
 더 이상 고문으로 이들의 생각을 돌려 놓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사실 위의 심문기록에 나타나는 사람들의 신분을 일일이 다 알기는 어렵지만,
이들 가운데는 정하상 처럼 과거 유명한 양반가문의 후예인 사람도 있고,
유진길 처럼 대대로 역관중인이었던 사람도 있다. 그러나 궁녀라든가 또 신분을 알 수 없는,
그러나 사회의 하층에 속했던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모두 그러한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나의 신앙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당시는 아직도 조선왕조의 양반중심의 신분체제가 강력하게 남아있던 때이기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기해박해 때의 순교자들의 생각은 이때에 순교한
 정하상의 {상재상서}라는 글을 통해 더 체계적으로 알 수가 있다.
 
 
운보김기창-게세마니의 기도
 
★정하상(丁夏祥)의 상재상서(上宰相書)
정하상은 1780년대 후반에 이미 최초의 교리서를 썼으며,
그 자신 당시 유명했던 남인가문의 출신이요 당시의 대표적 실학자로 알려진
정약용의 형이었던 정약종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리고 기해박해가 일어나던 때 그는 교회의 핵심적 인물로 활약하였다.
 
심문과정에서 형관은 정하상에게, "네가 조선 풍속을 따르지 아니하고
 외국의 도를 행하여 사람을 가르쳐 혼탁하게 함이 옳으냐?"고 물었다.
이에 대하여 정하상은 "외국의 좋은 물건은 취하여 쓰고 천주 성교는
 외국의 도라고 (하여) 옳은 일을 배반하오리까?"고 반문하였던 것이다.
 
당시 교회내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던 정하상에 대한 심문 기록은 너무나 짧지만,
사실 정하상은 체포될 것을 예감하고 1839년 박해 직전에,
미리 "상재상서(재상-당시 우의정인 이지연-에게 올리는 글)"라는 글을 써서 남겨 두었다.
그러므로 이 글은 박해에 대한 정약종의 답변이며, 그런 의미에서
위의 심문기록에 단편적으로 나타난 순교자들의 생각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상재상서}에서 정하상은 천주교도들에 대한 참혹한 박해가 부당한 것임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천주 성교를 금하는 까닭은 그 뜻이 어찌된 것이오이까?
처음부터 그 도리가 어떠한가 애당초 묻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지극히 원통한 말로 애매하게 邪道로 만들어 버리었나이다.
그리하여 신유년(1801) 전후에도 원통하게 죽은 사람이 적지 아니하건만,
하나도 그 뿌리와 줄기를 알고 밝히고자 한 일도 없이,
무고한 인명을 헛되이 죽이오니, 이 어찌 슬프고 한심한 일이 아니겠나이까?
응당 이 나라에도 성현군자들이 많으련만,
이 일에 대하여서는 왜 이렇게 적막하고 이렇게 박절하오이까?
 
사람의 죽고 삶이란 세상에서 가장 큰 일이라,
늙고 병든 이와 어리고 철모르는 아이들이라도 죽는다고 하면 무서워하고 놀라와 하나이다.
불쌍하도다, 이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이여! 이들도 다 같이 죽기를 싫어하는 목숨이라
 어찌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리오만,
알고서는 아니하지 못할 천주 성교를 봉행하다가 나라의 명을 거스른다 하여,
원통한 말을 아뢸 곳도 없이 원통하게 죽어가나이다.
백성은 다 일반이라, 어느 백성이 국명을 범하고자 하오리까?
 

운보 김기창-십자가를 지심.
 
그는 천주교 박해의 이유도 명백하게 밝히지도 않고,
또 천주교가 어떠한 종교인지도 알아보지도 않고 무고한 사람을 이렇게 죽이는 것이 과연 합당하며,
성현군자로 자처하는 당시의 유교적 지식인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침묵을 지키는 것이
 도리에 맞는 일인지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나섰다.
그리고 원통하게 죽어가는 천주교도들에 대한 한없는 동정을 표현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어서 자신들이 믿는 천주는 "천지 위에 스스로 계신 大主宰神"이며,
 천주를 볼 수도 없어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아비 죽은 유복자가 제 눈으로 그 아비를 보지 못하였으니,
나에게 아비가 있었다는 말을 믿지 못하겠노라고 하는 말과 무엇이 다르리오"라고 반문하였다.
그러므로 "만물을 내신 천주를 내 눈으로 보지 못하였다고 하여도, 이 만물을 보면,
그것을 만들어 내신 천주가 계신 것을 어찌 믿지 못하겠나이까?
한심하고 가련한 일이나이다."라고 하며 천주의 존재를 밝혔다.
 
그리고 그는 십계명을 열거하면서 "천주를 만유 위에 사랑함과
사람 사랑하기를 제몸같이" 하라는 것이라고 천주교 가르침의 핵심을 요약해 제시하였다.
그리고 천주교가 진실로 참된 것이라 함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 . .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은 인지상정인데. . .
죽어도 결코 천주 성교는 배반치 아니하고,
천주를 위하여 의연히 굴하지 아니하는 일이 그 증거이옵나이다. . .
이것으로 보아도 족히 천주 성교가 참된 도리임의 바른 증거가 되지 아니하오리까? . . .
우리 천주 성교를 믿는 사람들은 죽일수록 그 수가 없어지지 아니하옵고, 점점 더 성하여 가오니,
이 도가 바르지 아니하오면 어찌 이러하오리까?
일언이폐지하고, 천주성교는 지극히 거룩하고, 지극히 공번되고, 지극히 바르고, 지극히 참되고,
지극히 온전하고, 지극히 하나이요 둘이 없는 도리이옵니다.
 
그는 천주교도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그러나 죽인다하더라도 천주신앙을 포기할 수는 없으며,
또 아무리 죽여도 천주교는 더욱 번성할 것이라고 확언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 글을 관대한 처분을 바라는 뜻에서 쓴 것이 아니라,
어떠한 어려운 처지에서도 자신들의 믿음이 꺾이지 않을 것이며,
 목숨을 이처럼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천주교는 거룩하고, 참된 종교임을 천명한 것이었다.
 
 
운보 김기창 - 십자가에 못 박히심.
 
그리고 박해자들이 천주교는
 나라의 금령을 범했다는 주장에 대하여는 이렇게 답변하였다.
세상의 도리에 높고 낮음과 일의 가볍고 무거운 사정이 있사옵나이다.
한 집안에서 중한 이는 아비 만한 이가 없사오나,
아비보다 더 높은 이는 나라 임금이시고, 임금보다 더 중한 이는 천지대군이신 천주이시나이다.
아비 말을 듣고 임금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오면 그 죄가 무거울 것이요,
따라서 임금의 명을 듣고 천지대부모의 명을 듣지 아니하오면, 그 죄가 더욱 중대할 것이옵나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천주를 받들어 공경하는 것은 임금의 명을 짐짓 거스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오라,
마지 못하여 하는 일이거늘, 어찌 이것으로써 임금도 부모도 몰라본다고 하나이까?
 
결국 정하상의 말은 임금이나
 나라의 명이 옳으면 모르거니와 그 명이 천주의 가르침에 비추어
그른 것이라 할 때는 따르지 못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정하상은 추상과 같았으며, 심문기록에 나타난 다른 순교자들의 뜻도
이와 같은 것이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하상의 심문기록에는 단지 천주교가 외국에서 온 것임을 들어
죄를 추궁하는 내용이 있다.
이 점에 대하여도 정하상은 {상재상서}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외국의 도라 하여 금한다는 말이 있사온데, 다시 비유로써 말씀드리리이다.
금이라 하는 것이 아무리 훌륭한 보배라도 그것이 있는 땅을 가리지 아니하고
아무 곳에서 났든지 금이면 보배로 치나이다.
도라고 하는 것도 지방을 가리지 아니하고, 아무 도이든지 도만 바르면 참 도가 되는 것이옵나이다.
어찌 참된 도가 나라와 지방을 가리겠나이까?
 

운보 김기창 - 부활
 
이처럼 박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힌 다음
 정하상은 {상재상서}의 마지막에 박해를 중지할 것을
다음과 같이 요청하였다.
 
어떤 사람이든지 그 행동과 심성을 살펴보오면, 그 사람의 어떠함과
그 행하는 도의 어떠함을 능히 알 것이오이다.
우리 천주 성교를 믿는 사람들이 일찍이 모반에 걸린 이가 없으며,
간음이나 도둑질하는 죄를 범한 일이 없으며,
사람을 다치거나 물건을 해치는 일을 멋대로 한 일이 없나이다.
그런데도 오히려 법 외의 형벌을 많이 받고, 천지대부모를 욕하고 배반하라 하오니,
어찌 자식이 아비를 욕하고, 백성이 임금을 배반하오리까?
사람으로서는 천만 못할 일이오이다.
 
어찌 영혼을 결합한 사람이 차마 할 일이오이까? . . . 슬프도다! . . .
옥중에서 스러지고 문 앞에서 목벰을 당하는 일이 뒤를 이어 끊임이 없사오며,
눈물과 피가 도랑을 이루고 울음소리가 하늘에 넘쳐, 아비는 그 자식을 부르고,
 형은 그 아우를 부르며, 어찌할 줄을 모르옵니다.
맑고 밝은 세상에 이것이 무슨 광경이옵나이까?
 
대저 목숨을 바쳐 순교함으로써 천주 성교가 진실된 가르침임을 증명하여,
천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우리들의 본분으로 삼는 일이옵니다.
죽음에 임하여 용감히 말해야 할 때에
 한 번 고개를 들고 크게 외쳐 보지도 못하고, 말없이 불쌍히 죽으면,
쌓이고 쌓인 회포를 백년 뒤에까지 스스로 밝힐 길이 없사오니,
엎디어 빌건대, 밝히 굽어 살피사,도리의 참되고 거짓됨과 그르고 바름을 가리시옵소서.
그러한 뒤에 위로는 조정으로부터 아래로는 백성에 이르기가지 지극한 도리를
 일변하시옵기를 바라나이다.
그리하여, 나라의 금령을 늦추시고 잡아들이는 일을 그만 두시는 동시에,
옥에 갇힌 억울한 죄인들을 놓아주시어,
온 나라의 백성이 평안히 생을 즐기고, 함께 태평을 누리게 하시옵기를 천만 바라나이다.     
 
 
운보 김기창-승천   
 
이상에서 정하상이 순교직전에 쓴 {상재상서}의 중요한 내용을 정리하여 보았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무고한 많은 천주교우들이 무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에 대하여
무한한 슬픔과 동정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죽음을 당하면서도 자신들이 믿는 신앙이 너무나 옳은 것이기에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의지를 확고하게 표명하였다.
 
한 번 잡혀가면 자신의 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처형될 것을 예상한 그는
 이처럼 한 편을 글을 남겨 두었다.
이 글은 제목 그대로 박해를 추진하는 정부의 고위 관료에게
 천주교도들의 입장을 이해시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잡혀가 순교를 앞 둔 교우이거나,
뒤에 살아 남은 교우들에게 어려운 시절에 신앙을 지켜야 할 명백한 이유를
 다시 한번 강조해 두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하상의 {상재상서}에 체계적이면서도 논리 정연하게 전개된 생각들은
온갖 배경을 지닌 순교자들이 심문관 앞에서 펼친 증언과 그대로 일치하는 것임을
쉽게 알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 한국순교자연구소(윤민구도미니코신부, www.rimartyrs.pe.kr) 에서-
 

운보 김기창-교회, 수녀 그리고 비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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