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공간 ▒▒ /∞ 말씀♡묵상

[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10월 10(일) [녹] 연중 제28주일

Berardus 2021. 10. 9. 07:06

[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10월 10(일)

[녹] 연중 제28주일

제1독서(지혜 7,7-11)

제2독서(히브 4,12-13)

복음(마르 10.17-30)


생명의 길은 ‘소유’가 아닌 ‘비움’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재물도 한 줌 모래 기득권 버리고 이웃과 함께 나눠야
신앙인으로서 형제애 실천하고 생명이신 주님 섭리 충실히 따르길



연중 제28주일인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가난’에 주목해봅니다.

가난이라면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신

예수님’(필리 2,7)의 겸손과 그리스도를 닮아

‘가난 부인’(Lady Poverty)을 품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비움을 되새깁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복음 환호송)

우리는 기도하면서

하느님께 은혜를 청합니다.

솔로몬처럼 기도로 청하면 성령의 선물인 지혜를 얻습니다.

주님의 진리인 ‘지혜의 손’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富)가 들려 있습니다.(제1독서)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물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혜 앞에서는 온 세상의 금도 한 줌의 모래이고, 은도 진흙처럼 여겨집니다.

주님을 아는 것이 지혜의 시작입니다.(잠언 9,10)

하느님께서 세상을 지혜의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질서 있게 다스리십니다.

지혜에서 아름다움이 계속 나오기에 건강이나 미모보다 더 사랑합니다.

솔로몬은 하느님께서 주신 지혜(1열왕 5,9)로 예루살렘 성전의 건축과 봉헌이란

장엄한 업적을 이뤄 백성의 마음을 한 분이신 하느님께로 향하게 합니다.

영원하신 하느님의 자애를

간청(화답송)하며 유한한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우리는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겪는 비참한 고통에 인내합니다.

주님께서 저희 손이 하는 일에 베푸시는 자비와 은총에 감사드리며

생명의 길로 기쁘게 나아갑니다.

성경에는 선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섭리인 생명의 말씀이 담겨있습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쌍날칼보다 날카로워

사람 속을 꿰찔러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제2독서)

하느님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드려야 합니다.”(히브 4,13)

교회는 언제나

성경의 말씀을 주님의 몸처럼 공경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생명의 양식’인 말씀은 성찬례를 통해 모시는

‘생명의 빵’(요한 6,35.41.48.51)입니다.

하느님께 어떻게 셈을 해드려야 할까요?

히브리서 저자는 영원하신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고,

선행과 나눔의 ‘형제애’를 계속 실천할 것을 간곡히 권고합니다.(히브 13장)

유다 사회에서 율법 교사들에게는

‘랍비’(Rabbi 스승) 존칭이 주어집니다.

부자의 눈에는 예수님이 율법 교사로 보이나 봅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마르 10,17)

예수님께서는 선하시다는 표현을 가늠하고 부인하시면서

존재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게 이르십니다.

그리스도의 인성(고통과 죽음도 포함)은

성부와 사랑의 일치를 이루고 있고,

그분의 완전한 신성이 본래 자리임을 알리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질문에 해답은 누구나 알고 싶어 합니다

. 예수님은 십계명의 둘째 돌판에 나오는

이웃사랑에 대한 계명(탈출 20,13-16; 신명 5,17-20)을 열거하십니다.

신앙인의 윤리의 토대이고 영적 성장의 출발점인

계명을 어려서부터 충실히 지켜온 그는 완전한 사람이 되길 바라나 봅니다.

주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고

제자로 삼는데 부족한 하나를 이르십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소유 아닌 비움의 길로 초대하십니다.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는 부자는

소유의 길을 선택하고 슬퍼하며 떠나갑니다.

자기를 버리고 하늘의 보물을 차지할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듯이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란 참으로 어렵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재물의 소유를 문제 삼지 않습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신비는 ‘자기 비움’입니다.

비움은 재물의 소유를 포함한 자기 기득권을 버리고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는 형제애의 실천입니다.

‘시간은 돈’이라며 일에

대가를 바란다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주고받는’ 세상의 법칙을 따르면

하늘나라의 보물창고에 쌓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충실한 제자는 현세에서 박해를 받을지라도

주님의 충만한 축복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창조 질서(창세 1,28-29)와

인간다운 삶에 재화의 보편적인 목적이 있으며,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인 선택은 그리스도 사랑의 실천에

으뜸가는 원리요 교회의 전통입니다.(사회교리 174. 182)

박봉에 소유한 것이 없어

어린 자녀들에게 성경 외에는 물려줄 것이 없다고

일러준 샐러리맨은 신자의 의무를 지킵니다.

가난한 과부가 동전 두 닢의 전 생활비를

헌금함에 넣는 모습을 보신 주님은 누구보다 더 많은

돈을 넣었다고 하십니다.(마르 12,41; 루카 21,1 이하)

모든 것을 포기한 수도자들은 수도 생활을 하면서도 청빈의 삶을 삽니다.

자비하신 주님,

진리의 말씀과 성찬으로 저희를 길러주시는 은총에 감사드립니다.

마음을 어지럽히는 재물과 돈에 저희가 집착하지 않도록 이끌어주소서.

가진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가난한 마음으로

참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아멘.

-김창선(요한 세례자)-


[한주간 전례]

2021년 10월 11일 (월) [녹]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루카 11,29-32

지난주 금요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을 때,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베엘제불의 힘을

빌린 것이라고 이야기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루카 11,15-16 참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표징을 요구하는 이 세대가

악하다고 말씀하시는 부분을 앞의 내용과 연결해서 보면,

유다인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안에서

표징을 읽어 내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표징은 무엇일까요?

표징은 단순히 기적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표징은 하느님의 약속을 보증해 주는 사건입니다.

유다인들이 표징을 요구한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안에서

하느님 구원 약속의 성취를 읽지 못하였고,

예수님께서 그들이 간절히 기다렸던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으며,

그 결과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그저 일종의 구마 행위로 바라보았음을 알려 줍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3,4) 요나 예언자는

니네베 사람들에게 이 한마디만 선포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

고 그저 요나 예언자의 이 한마디면 충분하였습니다.

요나 예언자가 선포한 뒤에,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 걸리는 큰 성읍

니네베의 모든 사람이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고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단 한마디의 선포로 회개합니다.

이방 민족인 니네베 사람들도 요나의 한마디를 통하여 회개하는데,

자칭 하느님 백성이라고 자부하던 유다인들은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보고 들었음에도 그것을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합니다.

이제 우리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몸을 직접 모십니다

.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들려오고,

말씀 자체이신 분께서 우리에게 빵이 되어 오십니다.

이 만남 안에서 우리 또한 유다인들처럼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박형순 바오로 신부)-

2021년 10월 12일 (화) [녹]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루카 11,37-41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행동이

율법과 대조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어야 하는 율법을 따르지 않으십니다.

율법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던 바리사이가

그 모습을 보고 놀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렵고 복잡한 계명이 아닌,

일상의 계명을 왜 지키지 않으셨을까요?

그 답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는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마태 5,17 참조).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대조되는 이미지들을 보여 줍니다.

‘깨끗함과 더러움’, ‘겉과 속’, ‘탐욕과 자선’이 그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적용하는 율법은 외적인 모습에만 적용됩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정함(바름)과 부정함은 손을 씻었는지,

잔과 접시는 깨끗한지,

먹으려고 하는 음식이 정한지 부정한지가 중요하였습니다.

자연스레 율법은 하나의 기준만을 제시하였습니다.

‘맞고 틀림’, ‘합당과 부당’, ‘정함과 부정함’을 나누기만 하였을 뿐입니다.

이에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형식에 매일 것이 아니라,

본질을 기억하도록 일깨워 주십니다.

율법이 내면을 향하고 마음을 움직여 내 것만을 추구하는 탐욕과

사리사욕에서 벗어나 이웃을 생각하는 자선을 행하지 않는다면,

율법은 절대로 축복과 구원을 자동으로 가져다주는

장치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제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인의 의무,

곧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율법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요.

외면이 아닌 내면을 향하는 주님의 법이 지닌 본질을 잊는다면,

우리의 모습도 바리사이들과 같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2021년 10월 13일 (수) [녹]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루카 11,42-46

종교 지도층을 향한 “불행하여라!”라는 선언은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미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였던 이들을 향해서 “불행하여라!” 하고 일침을 가하였습니다

.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에게 ‘불행 선언’을 들은 이들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불행 선언’을 들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공통점을 지녔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이야기하지만

하느님께서 존재하지 않으시는 듯 살았고,

하느님의 계명과 율법을 지키고 가르치면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삶의 중심에는 하느님이 아닌 자기 자신들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언자들과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구약에서 신약 시대를 거쳐, 오늘날에도 유효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먼저 오늘날의 종교 지도자들을 향합니다.

윗자리를 좋아하고 인사받기를 좋아하지는 않는지,

신자들에게 힘겨운 짐을 지워 놓고 자신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 하지 않고 있지는 않은지,

종교 지도자들은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족한 모습이 있다면,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들과 같이 되지 않도록 변화하여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이 말씀은 종교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을 향하고 있습니다.

주일의 의무만을 지켰다고, 봉사 활동에 참여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하느님을 내 삶의 중심으로

모시고자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실천하는 하느님 사랑은 우리를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있음에도,

하느님 때문에, 또 예수님 때문에 양보하고 실천하는

작은 희생이 우리를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우리가 기꺼이 그렇게 할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행 선언’이 아닌 ‘행복 선언’을 들려주실 것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2021년 10월 14일 (목) [녹]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루카 11,47-54

지난 화요일 복음에서는

어떤 바리사이가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식사 자리에서 들려주신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 복음까지 이어집니다.

식사 초대 장면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말씀하시자,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그분을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어 자리에 앉으셨다”(루카 11,37).

사실 그의 초대는 예수님을 옭아매거나 시험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아니라 좋은 의도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식사 자리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불행하여라.”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과연 그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좋은 의도에서 시작된 마음이 독한 앙심으로,

또한 그분을 옭아매려는 마음으로 변하고 맙니다.

이러한 마음 변화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태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살아 있는 하느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들을 향한 저주라고만 여겼습니다.

그들이 올바른 눈과 귀를 지니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그들은 보고 듣고 깨우쳐 회개하지 않았고,

예수님을 향한 적대감을 키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오히려 그 말씀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호의가

독한 앙심으로 변화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가끔

주님의 말씀이 나의 약점을 드러나게 할 때,

불편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는 모습에 자괴감이 들기도 하고,

때로는 잔소리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괴롭히는 말씀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자비의 말씀입니다.

바리사이처럼 독한 앙심을 품으시겠습니까?

아니면 말씀을 회개의 주춧돌로 삼으시겠습니까?

선택은 온전히 우리의 몫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2021년 10월 15일 (금) [백]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아빌라의 데레사’로 널리 알려진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1515년 스페인의 아빌라에서 태어났다.
가르멜 수도회에 들어간 그는 평생을 완덕의 길에 정진하며 살았다.
그는 수도회의 발전을 위한 개혁을 추진하면서

많은 어려움에 맞닥뜨렸으나 주님께 매달리며 곤경을 이겨 나갔다.
수도 생활과 영성 생활에 관한 많은 저서를 남긴 성녀는 1582년에 세상을 떠났다.

1622년 그레고리오 15세 교황이 데레사 수녀를 시성하였고,

1970년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복음묵상] 루카 12,1-7

오늘 복음은 몇 가지 단편의 모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두려움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집중해 보고자 합니다.

이 부분의 본문에는 ‘두려움’이라는 단어가 다섯 번 나옵니다.

처음과 마지막은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으로 하나의 테두리를 형성하고,

그 사이에 ‘두려워하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처음 언급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대상은,

육신은 죽일 수 있으나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입니다.

반면 마지막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대상은 하느님입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이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육신을 죽이는 자들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러한 존재에 대하여 가지는 감정은 대개 공포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신 하느님을

우리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소개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실 정도로

우리를 극진하게 아끼시는 분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보며 보살피시는 하느님이시기에,

공포가 아닌 경외심으로 하느님과 하나 될 수 있는 소중한 존재가 됩니다.

나는 지금 공포 속에서 살아가고 있나요?

아니면 하느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살아가고 있나요?

우리가 공포에만 머문다면,

우리를 사랑으로 품어 주시는 하느님마저도

공포의 대상으로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짓누르고 괴롭히는 공포에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는 깨달음이

오늘 은총 안에서 주어지기를 기도합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2021년 10월 16일 (토) [녹]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루카 12,8-12

오늘 복음은 예수님에 대한

증언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그 증언의 첫째 자리에 와야 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있음’입니다.

예수님을 모르는데 어떻게 예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울러 그 증언은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 사이가 아니라,

예수님을 모르고 부정하고 싫어하는 사람들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 예수님을 따르고 좋아하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는 것도 민망하고 쑥스러운 일인데,

예수님을 싫어하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증언한다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을 것입니다.

신자가 아닌 사람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식사 전 기도를 하려고 성호 긋기도 어려워하는 우리입니다.

하물며 예수님을 부정하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증언하기가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어떻게

이야기하고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지

성령께서 알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예수님을 알기도,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하기도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증언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주님이시라고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 가운데

성령을 모독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

그것은 성령께서 이끄시도록 자리를 내어 드리지 않는 삶의 자세입니다.

성령의 이끄심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알게 되고 증언하는 가운데,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아버지께 우리를

잘 알고 있다고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께서는 우리를 성부와 성자와 일치시켜 주십니다.

내 생각과 말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대한 믿음 안에서

성령의 활동을 위한 자리와 시간을 내어 드리면 어떨까요?


-(박형순 바오로 신부)-

 

***************************************************************

 

요즘 길가에는 가을 꽃들이 한창입니다.
코스모스, 해바라기, 과꽃등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시간의 흐름이 이젠 가을입니다.

짧은 가을 날.
묵주를 손에 간직해 보면 좋겠습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