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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10월 3(일) [녹] 연중 제27주일

Berardus 2021. 10. 2. 07:07

[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10월 3(일)

[녹] 연중 제27주일

제1독서(창세 2,18-24)

제2독서(히브 2,9-11)

복음(마르 10,2-16)


결혼으로 맺은 남녀 인연으로 새로운 인생 여정이 시작되는 것
배우자는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 알아야
오늘날 숱한 이유로 이혼 늘면서 사회적인 문제 심각한 현실
부부는 한몸, 하느님이 맺어 주신 인연 임의로 깨뜨리면 안 돼
혼인은 하느님 안에서 이뤄진 거룩한 계약임을 절대 잊지 말길

 

■ 혼인, 또 다른 하나의 우주를 만나는 일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를 연구하던 한 학자가

기막힌 내용의 글귀를 발견했답니다.

“요즘 아이들, 정말 버릇도 없고 문제가 심각하다.” 참 재미있습니다

. ‘청소년 문제’, 오늘 우리 시대만 심각한 것인 줄 알았는데,

이미 수천 년 전 어른들도 머리 싸매고 고민했던 문제가 청소년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혼문제도 마찬가지임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복음서가 쓰인 후 벌써 2000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요즘 우리 시대만 이혼문제가 심각한 줄 알았는데,

예수님 시대 당시뿐만 아니라,

더 거슬러 올라가서 모세 시대 역시

이혼문제는 큰 골칫거리였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혼인의 불가해소성’을 완화시키고,

이혼을 합리화시키려는 경향이 모세 시대뿐만 아니라

예수님 시대에도 만연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모세가 이혼장을 써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해줬는데,

그렇다면 살다가 마음에 안 들면 이혼해도 큰 문제없지 않겠느냐?’고

예수님께 따집니다.

사람들이 가만히 있는데, 괜히 모세가 앞장서서 이혼을 허락했겠습니까?

또 별 이유도 아닌데 이혼을 허락했겠습니까?

사람들이 당시 백성들의 지도자였던 모세에게 갖은 협박을 가하고 괴롭히니,

할 수 없이 특별한 케이스에 한해서 선별적으로 허락을 해준 것을 가지고

바리사이들은 이토록 물고 늘어진 것입니다.

이혼하는 부부들,

그들 나름대로의 사정을 들어보면

참으로 ‘기막힌’ 케이스들이 많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헤어지는 것이

서로가 사는 길인 부부도 있습니다.

속아서 결혼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혼 사유로 ‘성격 차이’를 내세우는 분들도 있는데,

이것만큼은 재고되어야 합니다.

30년 40년 서로 다른 가정환경, 문화, 분위기,

가족관계 안에서 살아오던 두 사람이 결혼을 통해서 한배를 타게 됩니다.

‘성격 차이’는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성격이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합니다.

결혼은 어쩌면

또 다른 하나의 세상을 만나는 것입니다.

결혼은 어쩌면 또 다른 하나의 우주를 만나는 것입니다.

결혼은 어쩌면 스승 한분을 만나는 것입니다.

결혼을 통해 부부는 긴 항해를 시작합니다.

결혼을 통해 부부는 공부를 시작합니다.

어쩌면 배우자는 새 하늘 새 땅입니다.

갖은 다양한 탐구거리로 가득 찬 새로운 대양이 배우자입니다.

결혼생활을 영위하시는 분들,

상대방을 내 소유물로 설정하지 마십시오.

상대방을 내 성취의 도구로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상대방을 내 욕구충족의 대상으로도 여기지 마십시오.

그는 멀고먼 은하계에서 오직 나만을 찾아

정확하게 내 안에 떨어진 하나의 별입니다.

그는 나의 성장을 위해,

나의 구원을 위해 다가오신 또 다른 하느님입니다.

슬픈 일이지만 결혼은 현실입니다.

사람은 이슬만 먹고 살지 않습니다.

결혼은 사랑에 밥 말아서 먹고 사는 것일 거라는

환상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나는 것이 좋습니다.

텔레비전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입니다.

결혼은 때로 쓰디쓴 현실입니다.

길고 험난한 자신과의 투쟁입니다.

결혼은 수도생활 못지않은 오랜 자기 수련과 고행의 길입니다.

■ 혼인은 성사(聖事)입니다

오늘 바리사이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확대해석해서

너무나도 당연히 이혼장 운운하고 있는 것입니다.

완고하고 독선적이며 아전인수의 대가인 바리사이들 앞에

예수님은 더 이상 뒤로 물러서지 않으십니다.

아주 강경하게 결혼과 관련된 불변의 원칙을 재천명하십니다.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마르코 복음 10장 8~9절)

예수님 시대 당시

‘이혼장’이 악용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습관은 신명기 24장 1-4절에 근거한 것이지요.

거기 제시된 율법에 따르면 아내에게 무엇인가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한 남편은

그 여인을 쫓아내기 전에 이혼장을 써야만 했습니다.

이 이혼장을 손에 쥔 여인은 전 남편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혼장은 또한 재혼을 위해 필요한 서류였습니다.

모세는 너무도 문란한 결혼생활,

또 그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들을 최소화하기 위해

예외적으로 이혼장을 사용할 것을 당부했지만,

유다인들은 이 관습을 남용했습니다.

그리고 유다인들은 아내와 이혼할 수 있다는

자신들의 이 관습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혼장은 점점 더 남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내에게 수치스런 일’이란 원래 아내의 불륜만을 지칭했지만,

후에는 그에 대한 적용이 더 확대됐습니다.

결혼 후 10년이 지나도 아이가 없는 아내,

남편과 말다툼 하는 아내,

친척 앞에서 불손한 태도를 취하는 아내,

베일을 쓰지 않고 외출한 아내,

다른 남자와 말을 하는 아내,

고기를 지나치게 바싹 구운 아내, 국을 끓였는데

간을 제대로 못 맞춘 아내,

가정사를 남에게 퍼트린 아내 등,

별의 별 이유를 들어 아내를 내쫓게 되었습니다.

이혼장은 유다 백성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유다인들의 고집 센 기질, 굳어진 마음,

문란한 생활, 끝도 없는 타락 때문에

겨우 예외를 허락해 준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입법자로서의 모세는 당연히

이혼을 금하는 법령을 제정하고 일관되게 밀고 나갔어야 했는데,

히브리 민족의 윤리적 타락이 그것을 불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을 돌아봅니다.

숱한 이혼들로 인한 사회적 문제가 심각합니다.

물론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결혼생활보다는

이혼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도 예외적인 규정을 정해

이혼한 사람들을 구제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억할 것은

혼인은 성사(聖事)라는 점입니다.

하느님 안에 이루어진 거룩한 계약입니다.

이혼 앞에서 더욱 심사숙고를 거듭해야 마땅합니다.

-양승국 신부-

지리산 천왕봉


[한주간 전례]

2021년 10월 4일 (월) [백]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프란치스코 성인은 1182년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아시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기사의 꿈을 안고 전투에 참가했다가

포로가 된 그는 많은 보석금으로 석방되었다.
프란치스코는 다시 예전처럼 자유분방하게 살다가 중병에 걸렸다.

생사의 갈림길 에서 헤매다가 회복한 그는 마음의 변화를 일으켜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며 기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그에게 젊은이들이 모여들자 그들과 함께

프란치스코회(작은 형제회)를 설립하여 복음적 가난을 실천하였다.
프란치스코는 1224년 무렵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다섯 상처(오상)를 자신의 몸에 입었는데,

이러한 오상의 고통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226년에 선종한 그를 2년 뒤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이 시성하고,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복음묵상] 루카 10,25-37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유명한 말씀입니다.

너무도 익숙한 말씀이기에,

오늘은 ‘사마리아인’이 아닌

‘율법 교사’의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합니다.

그의 행동을 주목해 보면, 그는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또 자기의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그의 의도가 몹시 불순합니다.

아울러 그의 질문은 매우 형식적이며 기계적입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고,

또 이웃이 ‘누구’인지를 묻지만,

이 질문을 다시 살펴보면, “나는 그 ‘무엇을’ 잘하고 있으며,

나의 이웃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라는 교만함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다른 화법으로 접근하십니다.

“누가 이웃이다.”라고 대답하지 않으시고,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되물으십니다.

율법 교사에게는 ‘아무개’라는 이웃의 이름이 중요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이웃이 되어 줌’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율법 교사에게 하느님의 가르침,

곧 율법은 일종의 수학 공식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를 가르치는 교사였으니,

율법의 계명에 관한 지적인 앎은 충분하였습니다.

그는 계명을 바탕으로 ‘무엇’과 ‘누구’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있었지만,

계명을 통해서 정작 중요한 하느님의 자비를 배우지는 못하였고,

따라서 누구에게나 자비를 베풀며 이웃이 되어 줄 줄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그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고

그분의 계명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읽어 내지 못한다면

우리 또한 율법 교사의 모습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2021년 10월 5일 (화) [녹]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루카 10,38-42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자매,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마르타가 많이 억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집으로 모셨고,

시중드느라 이리저리 분주하였습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그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자매의 이러한 상반된 모습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강한 대조를 이룹니다.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마르타의 모습은 주도적으로 보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오고,

나서서 갖가지 시중을 들며 그분을 극진히 모십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어떠하였습니까?

마리아는 이 장면에서 한마디 말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목적어로 삼고 있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을 주어로 삼고 있습니다. 복

음은 두 자매의 뒷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 주지 않습니다.

다만 이 장면을 바탕으로 유추해 보면,

마르타는 ‘나는 예수님을 우리 집에 모셨어!’라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내게 말씀하셨어!’라고

전혀 다르게 반응하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둘 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전하지만,

마르타는 자신이 주체가 되고,

마리아는 예수님을 주체로 모시는 것이지요.

문득 미사 참례 뒤에 우리는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에 생각이 미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내게 말씀을 들려주시고,

당신 몸을 내어 주셨어.”라고 하는지,

아니면 “오늘 나는 미사에 다녀왔어.”라고 하는지 말입니다.

예수님이 아닌 ‘나 자신’을 첫자리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봅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미사에 참석하고,

성당에서 활동하는 모든 것의 첫째 이유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 사실을 잊는 순간, 우리도 예수님 말씀을 듣는 것을

그 무엇보다 앞세우는 사람들을 못마땅해하는

마르타의 모습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2021년 10월 6일 (수) [녹]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루카 11,1-4

우리는 지난 월요일부터

제1독서를 통해서 요나 예언서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요나서는 다른 예언서들과는 달리 이야기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요나 예언자의 모습도 여느 예언자들과 매우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다른 예언서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거부하지 않고 백성에게

하느님 말씀을 전하였지만,

백성은 그들의 선포를 귀 기울여 듣지 않았고

오히려 탄압하였습니다.

반면에 요나 예언자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피하여 도망가기도 하였으며,

단 한 번의 선포만을 하였을 뿐입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3,4)

더욱 놀라운 것은 예언서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예언자의 선포를 들은 사람들이, 가

장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부터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임금까지,

모두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의 시간을 가진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요나 예언서가 3장에서 끝났다면,

모든 것이 행복하게 끝나는 결말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4장에 이르러,

너무나 당황스럽게도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였던

요나 예언자가 불만을 터뜨립니다.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도,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도 마음에 들지 않아

투정을 부리는 요나 예언자의 모습이 오늘 제1독서에서 그려집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선민의식’과

하느님 구원의 ‘보편성’이 충돌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으니,

하느님께서는 우리만의 하느님이 되셔야 한다는 인간적 고집이 드러납니다.

반면에, 요나서의 중심에는

인간의 편협함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자애가 있습니다.

요나 예언서는, 우리의 편협한 시선과 생각이

하느님의 자비를 방해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만의 하느님이 아닌,

세상 모든 이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2021년 10월 7일 (목) [백]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16세기 중엽 오스만 제국

(현재의 터키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제국)은

영토 확장을 위하여 유럽을 침공하였다.
1571년 10월 7일 그리스도교 연합군은

그리스의 레판토 항구 앞바다에서 벌인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제국을 무찔렀다.
비오 5세 교황은, 이 전투의 대승이 묵주 기도를 통한

성모님의 간구로 하느님께서 함께하신 덕분이라 여기고,

이를 기억하고자 ‘승리의 성모 축일’을 제정하였다.

나중에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이름이 바뀌었다.

[복음묵상] 루카 11,5-1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의 자세’를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을 청하고 바랄 때,

줄곧 졸라 대는 지속적인 태도,

곧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간절한 마음을 지니라는 가르침을 전해 주십니다.

그러면 필요한 것을 얻고, 문이 열릴 것이라는 희망도 함께 말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이러한 자세로 기도할 때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던가요?

하느님께서 응답해 주신 적도 있겠지만,

그러지 않으신 적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청하고, 찾고, 두드리며’

하느님께 기도를 드려도,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많습니다.

그러한 체험들은 때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기 어렵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기도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요?

먼저, 하느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하느님을 향하여

온전한 믿음을 지녀야 합니다.

이는 하느님만이 모든 일을 온전히 하실 수 있는 분이시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무엇이든

가장 좋은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느님께 청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혹시 ‘뱀’이나 ‘전갈’은 아닌지요?

‘좋은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을 청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 눈에 좋게 보이는 것이

하느님의 눈에는 뱀과 전갈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늘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바라는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이심을 말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2021년 10월 8일 (금) [녹] 연중 제27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루카 11,15-26

하느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

어느 나라가 더 크고 힘 있는 나라일까요?

우리의 신앙은, 하느님의 나라가

사탄의 나라보다 더 크고 힘이 세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며 마주치는 모습들에서

하느님의 손길보다 사탄의 힘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제 착각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하느님의 힘이 아니라 사탄의 힘으로 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이미 와 있는 하느님의 나라였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하느님의 나라로 바라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직접 보고 들은 사람들의 반응도 그러하였는데,

하느님의 말씀보다 세상의 이야기를,

그분의 가르침보다 성공하는 방법을

더 좋아하는 지극히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우리가,

하느님의 손가락이 펼치시는 능력을 바라보기는

더욱 쉽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사탄이 지닌 힘은 절대 약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진리보다

사탄의 유혹이 더욱 부지런하게 우리에게 손짓합니다.

사탄은 하느님께 향하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어떻게 해서든지 멀리 떨어뜨려 놓으려고

더욱 부지런하고 달콤하게 다가옵니다.

또한 유혹에서 한 번 벗어났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악하고 강한 영이 우리를 위협합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은

하느님과 사탄의 투쟁 속에서 전개됩니다.

분명 하느님의 힘이 사탄의 능력보다 더 강하고 위대합니다!

그분의 힘을 믿으면서 오늘 우리 자신에게 다가오는

작은 유혹 하나를 이겨 낸다면,

날마다 우리 안에서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2021년 10월 9일 (토) [녹]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루카 11,27-28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들려주시는 말씀은 성모님을 깎아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성모님께서 행복하지 않으시다고 말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주목해 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루카 복음사가는,

말씀이신 예수님의 탄생 예고를 들으신 성모님을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신 분’(루카 1,38 참조)으로 소개합니다.

그는 성모님께서 예수님과 혈육의 인연을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셨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라고 알려 줍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으로 볼 때, 성모님의 삶이

그리 행복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성모님께서는 혼인 전에 예수님을 잉태하시어

파혼의 위기에 몰리기도 하셨고,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수난과 죽음의 여정을

묵묵히 바라보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성모님의 여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과는 제법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며 그것을 지키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행복을

보증해 주지 않을 수도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도 그러한데,

그것을 잘 지키고 간직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더욱 힘든 일입니다.

경쟁으로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겉옷만이 아닌 속옷까지 내어 주는 삶이란 쉽지가 않지요.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면 세상에서 뒤처지는 것 같고,

그렇다고 안 지키자니 마음이 불편하다 못해

죄인이 되는 기분까지 들기도 합니다.

우리는 세상이 이야기하는

행복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이 다른 모습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귀 기울임이,

그분 말씀을 지키려는 작은 노력들이,

우리를 세상이 주는 가짜 행복이 아닌

참행복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그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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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시작입니다.
비록 코로나로 여러가지 제약이 많이 있지만
그래도 나름의 계획을 세워 봅시다.

10월엔 시간을 내어
우리들의 전구자 성모님께

묵주기도를 정성껏 바처봅시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