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10월 17(일)
[녹] 연중 제29주일
제1독서(이사 53,10-11)
제2독서(히브 4,14-16)
복음(마르 10,35-45)
갈망의 교육학
높은 자리를 바라는 제자들에게 명확한 ‘금지 규정’ 가르치신 예수님
이루고자 하는 열정이 있더라도 주님 말씀을 통해 계속 교육받아야
하느님의 금지 명령 깊이 새기면 각자 본분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어
“바라는 것, 갈망은 그 사람 자체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제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려봅니다.
바라는 대로 이루어졌으면 정말 행복했을까요?
인생의 어느 시기에 바라는 것,
갈망이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
무언가 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도 하느님 말씀으로 계속 교육받아야 합니다.
■ 복음의 맥락
이번주 복음은 제자직을 주제로 구성된
마르코 복음 중앙 부분(8,22-10,52)에 속합니다.
마르코 복음서의 수난 이야기는 8장 27절부터 시작됐는데,
지금 제자들은 수난과 죽음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세 번째 수난과 죽음 예고 직후 두 제자는 예수님에게서
아무 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예수님께
자신들이 바라는 것을 들어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오해와 몰이해는 제자들
자신이 어떤 것을 그분께 청해야 하는지에 대한 무지와 연결됩니다.
‘바라다’라는 동사가 본문의 처음과 끝
(마르 10,43-44: 높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이,
첫째가 되기를 바라는 이)에 등장하여 수미상관을 이루는데,
제자들이 바라는 것과 예수님이 바라는 것이
다른 상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갈망을 교육합니다.
■ 바라다
예수님이 선택한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설명한 것처럼
말씀을 듣자마자 곧바로 사탄이 와서 그들 안에 뿌려진 말씀을
앗아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마르 4,15)
두 번째 수난 예고에서는
예수님 뒤에서 높은 자리로 다투던 제자들이,
세 번째 수난 예고 후에는 예수님 앞에 정면으로 등장해
자신이 원하는 출세를 담대하게 표현합니다.
“저희에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앞에서 솔직하게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의 갈망을 교육하는 기회가 됩니다.
서로 평행선을 달리는 ‘대화’지만 이런 대화라도 존재할 때
배움의 공간에는 ‘교정’과 ‘성장’의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예수님은 가르치는 선생님이기에
모든 환경을 가르치는 배움의 공간으로 삼습니다.
‘바라다’(셀로)라는 동사는
성경 안에서 단순한 갈망만이 아니라
목적, 선호도, 좋아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바라다’에는 항상 목적어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바라는 것은 높은 자리고 예수님이 바라는 것은
섬기는 자리, 모든 이의 종이 되는 자리입니다.
인간의 갈망과 하느님의 뜻 사이에서 일어나는
유혹과 긴장을 예수님도 체험했다는 것을 제2독서인
히브리서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사막 교부가 한 말이 떠오릅니다.
“내가 한 번 하느님에게 청한 것을 들어주셨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 이후에는 그분의 뜻만을 행하는 것을 그분에게 청했습니다.”
복음서 전체는 ‘갈망들의 교육학’입니다.
인간의 갈망을 하느님의 갈망과 비교하며 하느님 뜻에 따라
원하고 청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권고처럼, 연약한 우리처럼 유혹을 겪으며
하느님 뜻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대사제께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나아간다면 그리고 그분에게 우리의 은밀한 사연을
솔직하게 아뢴다면 우리는 좋은 선택을 할 것이고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예수님은 높은 자리를 바라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라고 명확한 금지 규정을 말합니다.
제자들은 이 ‘금지’를 따르는 정도에 따라 제자가 되어갈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여러 가지 긍정적인 말, 좋은 말을 많이 하지만 “~하지 말라.
그래서는 안 된다”며 금지하는 것도 많습니다.
좋은 말씀은 마음에 새기지만 금지는 쉽게 망각하곤 합니다.
자율과 자기 선택권을 강조하며 모든 것이 본인 중심인 우리 시대에
외부로부터의 어떤 ‘금지’는 개인의 행복을 방해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금지는 정말 우리 시대에 인기 있는 단어는 전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느님이 인간에게 한 첫 말은
선악과 열매를 따 먹지 말라는 금지 명령이었습니다.(창세 2,15)
제자들은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라는 스승의 금지명령을
마음에 새길 때에만 제자로서 자신의 본분을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금지 명령에 이어서 제자들이
따라야 할 모델로 그분 자신을 소개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
제자들이 높은 자리를 바란 것은
자신들이 따르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그분 사명이 무엇인지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또 조금 알아들었다 하더라도 그 길을
자신의 운명으로 선택하는 것이 부끄럽고 두렵고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제자들 모습은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기원후 64~69년 경
네로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이후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 때문에
핍박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 살던 마르코 공동체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 성찰
“도서관은 죽은 이들이 산 이들의 눈을 열어주는 장소입니다.”
성경도 도서관이라고 하는데,
오늘 제자들의 모습도 우리에게 모델이 됩니다.
제자들의 세속적인 갈망을 잘못된 것이라 바로 비난하지 않고
주의 깊게 경청하는 예수님 모습에서도 섬긴다는 것,
‘종’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배웁니다.
예수님처럼 많은 이들의 죄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줄 수는 없겠지만 예수님의 섬김을 본받을 수는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봉사했습니까?
그분과 만나는 사람들은 변화를 체험하게 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을 온갖 굴레에서 자유롭게 하는데 삶을 바쳤습니다.
사람들을 돌보면서, 치유하면서, 가르치면서!
그런 방식으로 그분은 “많은 이들의 몸값”(마르 10,45)이 되었습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주님의 종을
으스러뜨리고 병고를 시달리게 하여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어놓게 한 것은 주님의 뜻이었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영광은 하느님의 겸손한 종으로 살아가며 섬기는 모습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유일한 바람이 되도록 매일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합니다.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자애를 베푸소서.
”(화답송) 아멘!
-임숙희(레지나) -
[한주간 전례]
2021년 10월 18일 (월) [홍]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전승에 따르면, 루카 복음사가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현재 터키의 안타키아) 출신이다.
바오로 사도의 전교 여행에 함께하였던 그는
주님의 복음과 복음의 선포 상황을 기록하였다.
곧 루카 복음과 사도행전이다.
루카는 다른 복음사가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관한 부분을
성모 마리아와 함께 상세하게 묘사함으로써
‘성모 마리아를 최초로 그린 화가’라고 불리기도 한다.
또한 그의 직업이 의사였다는 전승이 있는데,
예수님의 치유 기적들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묵상] 루카 10,1-9
오늘은 루카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그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일대기를 기록하였습니다.
그가 남긴 복음서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천 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난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서는 다른 복음서들과 구별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탄생과 그 전후의 이야기를 비교적 자세하게 들려줍니다.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와 탄생, 예수님의 탄생 예고와 유년 시절 이야기,
특히 성모님과 관련된 이야기는 루카 복음서가 지닌 고유한 특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루카의 시선은
예수님과 함께 그분 곁에 있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가장 먼저 맞이하고
하느님을 찬양한 사람들은
이름 없는 목자들이었습니다(루카 2,15-20 참조).
이처럼 루카는, 예수님의 탄생이
힘과 능력을 지닌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힘없고 미천한 사람들을 위한
구원의 기쁜 소식이라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바라보는 루카의 마음은
‘마리아의 노래’에도 잘 담겨 있습니다(루카 1,51-53 참조).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자 일흔두 명의 파견도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루카가 전하는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그 누구보다도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먼저 주어집니다.
루카는 사도는 아니었지만,
사도들과 함께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탄생과 공생활
그리고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고,
이를 복음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의 축일을 지내는 오늘,
그가 전해 준 예수님을 다시 떠올리고,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전할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하면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2021년 10월 19일 (화) [녹]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루카 12,35-38
오늘 복음은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과
그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종이 주인에게
문을 열어 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종이 이렇듯 당연한 일을 하였을 뿐인데,
주인이 그 당연한 일을 한 종들을 위하여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힌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듭니다.
종과 주인의 역할이 바뀐 듯합니다.
세상에 어떤 주인이 이러한 변화를 자처할까요?
어떤 주인이 자신의 종을 위하여 시중을 들까요?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이 비유는,
우리가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예수님께서 주인이시지만
기꺼이 종이 되어 주신다는 복음의 핵심을 전합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깨어서 성실히 주인을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다만 잠을 자지 말라는 뜻은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깨어 있음’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먼저, 우리는 주인이 아니라 주인을 기다리는
종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인이 자리를 비웠다고 해서 종이 주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다음으로, 주인이 돌아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인은 반드시 돌아옵니다.
주인이 오지 않으리라는 생각도, 상상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늦더라도 주인은 반드시 돌아옵니다.
주인이 돌아온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는다면,
종은 주인이 들어올 문을 바라보지 않고,
등불을 끄고 잠을 자거나 술을 마실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한 종이 되기를 바라지,
불행한 종이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행복한 종이 되고자 깨어 노력하는 사람과
행복한 종이 되기를 바라면서도 깊은 잠에 빠지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돌아올 주인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종입니다.
행복한 종이 되시렵니까?
아니면 불행한 종이 되시렵니까? 선택은 온전히 우리의 몫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2021년 10월 20일 (수) [녹]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루카 12,39-48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루살렘은 매우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주님의 집, 곧 성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집’이라는 말 그대로 성전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장소였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을 향해
순례의 길을 떠나는 일은 기쁨이었습니다(시편 122[121],1 참조).
성전에 도착한 사람들은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지금까지 보살펴 주시고 돌보아 주심에 감사하고,
하느님께서 함께하셨기에 위험과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음에 또한 감사하였습니다.
나아가 그들은 감사함을 표현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일상 속 구원 체험을 바탕으로 하느님을 향한 신뢰와 신앙을 고백합니다.
오늘 화답송의 시편이 바로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시편의 저자는
“우리 구원은 주님 이름에 있네.”라고 고백하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성전이 있습니다.
그 성전에는 하느님 사랑의 절정을 품고
우리를 위하여 당신을 온전히 내어 주신 예수님의 몸,
바로 ‘성체’가 모셔져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성전도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몸입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1코린 3,16)
세례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우리는,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 죄에서 해방되어
의로움의 종”이 되었기에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의로움의 도구”답게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주님께서 오시더라도 “행복하여라.” 하시며,
당신의 모든 것을 맡기실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때때로 성전을 향하는 마음과 발걸음이 무겁고
또 성전으로서 합당하게 살아가기가 참으로 버겁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주님 이름에 있음’을 기억하며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확신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우리의 성전은 ‘기쁨의 집’이 될 것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2021년 10월 21일 (목) [녹]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루카 12,49-53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불’과 ‘분열’에 대한 말씀을 듣게 됩니다.
구약에서부터 불은 하느님 심판의 도구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퍼부은 불이 그러하였고(창세 19,24 참조),
오십인대장과 그 부하들을 삼켜 버린
엘리야의 불이 그러하였습니다(2열왕 1,10-14 참조).
그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와 요한은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자,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들을 불살라 버릴지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루카 9,54 참조).
이처럼 불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심판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불은 심판의 의미만 지니지 않습니다.
불에 타는데도 타서 없어지지 않는 떨기나무는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었고(탈출 3,2-3 참조),
병들거나 해로운 것들을 태워 정화하기도 하였습니다(레위 13,52 참조).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불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는 구원이었기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불은 심판의 의미만이 아니라
구원의 의미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불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는 구원이,
반대의 길을 걷는 이들에게는 심판이 되는 것이지요.
모든 것은 예수님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분열은 대개 가장 작은 공동체인 가정에서 시작합니다.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서 일어나는 분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분열의 의미는,
혈연이 아닌 예수님을 중심으로 새로운 하느님 백성
공동체를 이루려는 ‘가치의 전환’입니다.
태생적으로 주어진 가족 공동체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기준으로 구성원들이 모인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붙이신 불,
그 불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모든 것을 태워 버리는 심판의 불인가요?
아니면 하느님 안에서 가슴 뛰게 만드는 열정의 불인가요?
예수님을 우리 삶 한가운데에 모실 때,
우리는 마음에 구원의 불을 안고, 분열이 아닌
일치를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습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2021년 10월 22일 (금) [녹]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루카 12,54-59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토라)은 매우 중요하였습니다.
그것은 목숨과도 같았으며, 율법의 준수 여부가 행복이나
축복 또는 저주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은 곳곳에서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드러냅니다.
오늘 화답송의 시편은
율법에 대한 신심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구절입니다.
시편 119(118)편은 전체 150편 시편 가운데 가장 긴 시편으로,
모두 176절로 되어 있습니다. 굉장히 길지요.
이를 이른바 ‘알파벳 시편’이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어에는 스물두개의 알파벳이 있는데,
시편 119 (118)편은 하나의 알파벳을
여덟 절마다 사용하여 총 176절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시편이 알파벳의 순서에 따라 구성된 것은
규칙과 질서를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동시에 시편 119(118)편은 율법을 ‘법령’,
‘계명’, ‘가르침’이라고 다르게 표현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을 제시합니다.
율법에 성실하고, 율법을 충실하게 따르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는 가르침을 주려는 것입니다.
‘율법’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마음부터 생깁니까?
긍정적으로 따르고 싶은 마음인가요,
아니면 부정적인 거부감인가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하여 내리신
예수님의 ‘불행 선언’ 때문에,
어쩌면 율법에 대하여 그리 긍정적인 생각이
들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성실하게 지키는 것,
그것이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가르침을
“저의 즐거움”이라고 찬미하였듯이,
주님의 법령과 계명, 가르침과 규정이
우리에게도 기쁨이 될 수 있도록,
시편 저자의 의도를 헤아리며 시편 119(118)편을
다시 한번 읽고 되새겨 봅시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2021년 10월 23일 (토) [녹]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루카 13,1-9
이스라엘 백성은 ‘행위와 결과’,
‘인과응보’, ‘상선벌악’이라는 분명하고 명확한,
그래서 기계론적이기까지 한 신앙의 논리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는 하느님 말씀에 충실하면 ‘상’과 ‘복’을 받지만,
그러지 않으면 ‘벌’과 ‘저주’를 받는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생명을 잃거나,
사고를 당하거나, 병에 걸리는 등
좋지 않다고 여기는 것들을 죄의 결과로 바라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빌라도의 손에 죽은 사람들,
실로암의 탑에 깔려 죽은 열여덟 사람이
유다인의 눈에는 죄의 결과로만 비쳤을 뿐입니다.
나아가 죽지 않은 자신들이 그들보다
의롭다는 생각으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행위와 결과’라는 도식으로
사람들의 죽음을 바라보려는 유다인들에게
두 번이나 같은 표현으로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그들의 죽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청중의 의로움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더 죄를 많이 지었는지,
죄의 대가로 벌을 받았는지가 아니라
모든 종류의 죄에서 돌아서는 것, 곧 회개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회개’일까요?
먼저 지금 우리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특별히 큰 죄는 짓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하느님을 잊고 살아가는 것,
하느님 말씀보다 세상이 주는 달콤한 이야기에 귀를 더 기울이는 것,
온종일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시간을 보내면서
하느님의 이름은 잊고 살아가는 것 ……,
이와 같이 우리의 일상에서 하느님을
조금씩 밀어내는 행동들이 죄의 씨앗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눈과 귀는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그동안 하느님을 향하며 살아가지 못하였다면,
우리의 마음에 조금씩 하느님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드리는 것,
그것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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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흐린 날이 많았지만
그래도 청명한 가을 하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변화가 많은 만큼
비록 지금 어렵다 하더라도 조만간 맑은 날이 오게 됨을
요즘 날씨에서 알게 해 줍니다.
-Berard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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