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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9월 26(일) [녹] 연중 제26주일

Berardus 2021. 9. 25. 08:15

[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9월 26(일)

[녹] 연중 제26주일

제1독서(민수 11,25-29)

제2독서(야고 5,1-6)

복음(마르 9,38-43.45.47-48)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혼란스럽고 가혹한 세상에서도 주님 뜻 따르는 신앙인의 삶
여호수아처럼 담대한 믿음으로 힘없는 이웃에게 사랑 베풀길

 


순교자 성월의 첫날을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로 정하여 기도했던 교회는

이제 마지막 주일을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로 기립니다.

이렇게 거듭, 가난한 이웃과 지구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여 줄 것을

요청하시는 주님의 음성이라 싶어서 마음이 저릿합니다.

하느님의 소원은 모든 사람이 당신의 뜻 안에서

기쁘게 감사드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을 왜곡했고

하느님의 사랑을 외면하며 무시했습니다.

문제는 이런 인간의 오만과 오판이 아직도 건재하다는 사실입니다.

강자 독식의 세상 법칙은 오늘도 힘없는 이들에게 가혹하기만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고국을 등지고 정든 고향을 떠나는 이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들의 겁에 질린 모습이 바로 인류의 민얼굴입니다.

놀라운 과학 문명을 이뤄낸 세상의 민낯입니다.

오늘도 세계 곳곳에서 들려오는 갖은 재해와 수해 소식은

이미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이제 더는 견딜 수가 없어서 신음하고 있는 땅과 하늘의 비명입니다.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실천해야 할 사명은 명백합니다.

그 무엇보다 앞서 “당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시기를 진심으로 원해야 옳습니다.

온전한 믿음의 기도야말로 주님의 도우심을 땅에 임하게 하는

튼튼한 동아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세상에서 하느님을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차별화 된 삶이야말로 세상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40년 광야 생활은 모세에게도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수월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오늘 우리보다 훨씬 더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냈을 것입니다.

도무지 아닌 짓거리에 매달려서 어둠 속에서 헤매는 세상을 위해서

모세처럼 주님께 납작 엎드려 빌고 은혜를 청하는 통 큰 믿음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힘든 세상이기에 더욱 그리스도인들은 모세처럼

세상을 위한 중재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 세상의 죄를 고백하며 세상의 죄를 보속하며

세상을 위하여 ‘이 죄인’을 먼저 때려 주십사 청하는

담대한 믿음을 기꺼워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독서에서 만나는

모세의 모습은 우리가 살아내야 할 삶의 모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주님께서 내려주신 만나를 보잘것없다며 투정을 부리는

어리석은 백성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의 편이 되어 호소하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저마다 제 천막 어귀에 앉아 우는 소리”를 내면서

하느님 속을 뒤집고 있는 그들 앞에 나서서 오히려

“저를 죽여주십시오”라며 목숨을 건 탄원을 올리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오늘 독서 말씀과

복음에서 만나는 모세의 시종 여호수아와 주님의 수제자

사도 요한의 모습에서 희망을 만나게 됩니다.

그날, 이스라엘의 원로 일흔 명 가운데 두 명이 자신의 장막에 있다가

하느님의 영을 받아서 예언했다는 얘기를 듣고

“그들을 말리셔야 합니다”라고 나섰던 속이 좁은 여호수아에게 베푸신

하느님 은총의 크기를 우리는 알고 있으니까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을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막아보려 했다며 으스대듯 보고했던 졸장부 사도 요한의 변화 역시 잘 알고 있으니까요.

바라건대 오늘, 2021년 연중 제26주일이

우리 인생의 전환점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편이 되려는 조급함으로

상대를 판단하며 상처를 주는 일을 삼가기 바랍니다.

옹졸하고 성급하고 까칠하여 ‘끼리끼리’ 편을 먹고

담을 쌓는 어리석음이 사라지기 바랍니다.

하여 하느님께서 꼭 좀생이 같은 우리를 여호수아처럼 담대한 믿음인으로

변화시켜 주실 수 있도록 틈을 드리면 좋겠습니다

. 졸렬하고 치사한 우리 모두를 사도 요한처럼

엄청난 사랑을 살아내도록 이끌어주실 수 있도록

영혼의 문을 열어드리면 좋겠습니다.

구실만 생기면 오만해지고 조그만 틈에도 사랑은 새어나가기 마련이란 걸

명심하여 깨어 지내면 정말로 좋겠습니다.

한없이 허술하고

허약한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이 계십니다.

앓고 있는 세상의 모든 것을 회복시키시고 새롭게 하시려

당신의 희생을 봉헌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힘없는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고 부탁하십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고통받는 이웃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요청하십니다.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사랑을 실천하라고 명하십니다.

부디 그리스도인 안에서만은

땅의 뜻에 따라서 하늘을 움직이려는

억지가 사라지기를 기대합니다.

이제 더 이상은 감히 미사를,

기도를 자신의 영달을 위한 방편으로 삼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참으로 소중한 이들을 보듬어 살펴 돕는

진정한 복음을 살아내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인해서 세상 모든 사람이 살맛이 나기를 소원합니다.

더 배려하고 넉넉히 나눔으로써 하느님을 감동시키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우뚝하시길, 축복합니다.

-장재봉 신부-

- 함안 대산성지성당내 입구-



[한주간 전례]

2021년 9월 27일 (월) [백]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빈첸시오 드 폴 성인은 1581년

프랑스 랑드 지방에서 소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프란치스코 수도원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공부한 그는

1600년에 사제품을 받았고,

1617년에 가난한 이들을 만나는 체험을 하였다.
이때 그는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이 곧 하느님을 섬기는 것’임을 깨닫고,

자선 단체인 사랑의 동지회, 전교회, 사랑의 딸회를 창설하여,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 일생을 바쳐 봉사하였다.

1660년에 선종한 빈첸시오 사제는 1737년에 시성되었다.

1885년에 레오 13세 교황은 그를 ‘모든 자선 사업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오늘날 수많은 이가 성인의 영성을 실천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도 사랑의 딸회, 사랑의 씨튼 수녀회,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와

평신도 사도직 단체인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가

서로 연대하며 활동하고 있다.

[복음묵상] 루카 9,46-50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머물며 성장하게 합니다.

제자들은 ‘누가 우리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이냐?’ 하고 논쟁을 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속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 놓으시고는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위대한 사람은 많은 일을 해내거나,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몸소 가르쳐 주신 이타적인 사랑을 실천하며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묵묵히 자신을 내어 주며 살아가는

평범한 이웃과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린이와 같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순진하고 단순하며 작고 연약하기에 어른의 보호가 필요한 어린이처럼,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과 우리 자신이 살아갈 힘을 얻고자

하느님의 보호를 청하는 순수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성령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로마 8,15 참조).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처럼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느님께 우리의 마음을 열고 기도하며,

사랑을 실천하고 주님의 모범을 따른다면

우리는 진실과 정의 안에서 하느님의 참백성이 될 것입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9월 28일 (화) [녹] 연중 제26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루카 9,51-5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신다는 말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을로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야고보와 요한은 마치 구약의 엘리야가

적들에게 벌을 내린 것처럼(2열왕 1,10-12 참조)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라고 여쭙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두 제자를 꾸짖으시고는 다른 마을로 발길을 돌리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파스카의 신비를 이루시고자,

사람들을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고자 오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뒤에 필리포스를 통하여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복음의 선포(사도 8,5-25 참조)가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아직 당신의 사명을

이해할 때가 되지 않았음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대할 때 흔히

상대방을 이해하기보다는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고는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때로는 화를 내기도 하고,

거친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때 상대방과의 관계는 가뭄에 땅이 갈라지듯 메마르게 됩니다.

단비로 다시 땅이 촉촉하게 젖어 들 듯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이럴 때 어떻게 생각하시고

행동하실까?’라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기도가 될 수 있으며,

그 기도의 응답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고 살아가야 하는지 알려 줄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며 살아간다면

오늘 복음의 두 제자처럼

예수님의 생각과는 동떨어진 매정한 마음이 아닌,

자비롭고 사랑 가득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자비롭고 사랑 가득한 마음은 우리가

세상의 빛이며 소금임을 드러나게 합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주님을 드러내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9월 29일 (수) [백]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 대천사 축일

교회는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1215년)와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년)에서

천사의 존재를 신앙 교리로 선포하였다.
그러나 천사에 대한 학자들의 여러 학설에 대해서는

유권 해석을 하지 않았다.
다만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 이외의

다른 천사의 이름은 금하고 있다.
천사들의 축일도 오늘의 세 대천사 축일과

‘수호천사 기념일’(10월 2일)을 정하여 천사 공경을 권장하고 있다.
세 대천사 가운데 미카엘은 ‘누가 하느님 같으랴?’,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사람, 영웅, 힘’, 라파엘은

‘하느님께서 고쳐 주셨다.’라는 뜻이다.

[복음묵상] 요한 1,47-51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의 마음속에 담긴 진실한 갈망을 보시고,

그를 참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요한 1,45)으로 예수님을 소개하였을 때,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요한 1,46)라고 퉁명스럽게 말하였습니다.

오경은 물론 라삐 문헌들을 연구하고

메시아를 갈망하던 나타나엘에게

필립보는 “와서 보시오.”(요한 1,46)라며

그를 예수님께 초대합니다.

나타나엘은 예수님과 대화에서 자신이 갈망하던 이스라엘의 구원이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짐을 고백합니다.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다니엘서 7장을 상기시키시고,

종말의 광경이 당신에게서 시작되며,

당신의 현존이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하는 구원 성취의 시작임을 알려 주십니다.

오늘은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 대천사 축일입니다.

구원의 역사 안에서 대천사들은 저마다 자신의 역할에 충실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알려 줍니다.

“천사들보다 잠깐 낮추셨다가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신”(히브 2,7) 인간을 위하여,

주님께서는 천사들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알리시고

우리가 실천할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이는 우리가 천사들을 통하여 어떤 영적이고

신비한 체험을 기대하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마지막 날까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도록 이끄시는

하느님의 배려이며, 자비로우신 마음입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9월 30일 (목) [백]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예로니모 성인은 340년 무렵

크로아티아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부터 로마에서 라틴 말과

그리스 말을 깊이 공부한 뒤 정부의 관리로도 일하였으나

, 수도 생활에 대한 관심으로 사막에서 오랫동안

은수 생활을 하며 히브리 말을 연구하는 데 몰두하였다.
사제가 된 그는 다마소 1세 교황의 비서로 일하면서

교황의 지시에 따라 성경을 라틴 말로 번역하였다.

‘대중 라틴 말 성경’이라고 하는 『불가타』(Vulgata)가 그것이다.

또한 성경 주해서를 비롯한 많은 신학 저술을 남겼다.
420년 무렵 선종한 예로니모 성인은 암브로시오 성인, 그레고리오 성인,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함께 서방 교회의 4대 교부로 존경받고 있다.

[복음묵상] 루카 10,1-12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가장 먼저 말하라고 가르쳐 주신 축복의 인사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제자입니다.

주님의 참다운 제자란 온 세상에 파견된 사람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참평화의 전달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모든 제자에게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마라.” 하십니다.

세상의 것에 신경 쓰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전할 수 없기에,

복음 전파에 온 힘을 기울이고 그 밖의 것은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라는 뜻입니다.

또한 제자들이 할 일은 세상 사람들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축복을 전하고,

아픈 이를 낫게 하며 구원의 날이 왔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실지로 우리는 많은 시간을

세상의 것에 신경 쓰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걱정하고 신경 쓰는 것의 대부분은

쓸데없는 생각이나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상상입니다.

또는 나의 오해에서 비롯된 근심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에 얼마나 자주 주님께 기도합니까?

잠깐이라도 세상 것을 내려놓고 주님과 소통하는 시간을 마련한다면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를 흔들지 못할 것입니다.

평화가 깨어지지 않고,

주님께서 주신 참평화를 이웃에게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순간의 만족을 가져다주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영원한 만족을 가져다주는 것에 집중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10월 1일 (금) [백]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1873년 프랑스의 알랑송에서 태어났다.

열다섯의 어린 나이에 리지외의 가르멜 수도원에 들어간 그녀는

결핵을 앓다가 1897년 24세의 젊은 나이에 선종하였다.

짧은 기간의 수도 생활이었지만 데레사 수녀는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면서 고행하였다.

일상의 단순하고 작은 일에 충실하였던 그녀는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그리고 사제들,

특히 먼 지역에 가서 선교하는 사제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였다.
선종한 뒤에 나온 데레사 수녀의 병상 저서들은

세계 각지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많은 이를 감동하게 하였다.

1925년 비오 11세 교황은 그녀를 시성하고,

1929년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하였다.

1997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성녀를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성녀는 ‘소화(小花) 데레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복음묵상] 루카 10,13-16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 고을은 도대체 무슨 일로

“불행하여라!”라는 예수님의 ‘불행 선언’을 듣게 되었을까요?

『성경』 부록에 있는 ‘신약 시대의 팔레스티나’

지도를 살펴보면, 코라진,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이

갈릴래아 호수 북쪽에 삼각형 모양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 고을은 예수님께서 주로 활동하셨던 갈릴래아 호수 주변의 고을이었습니다.

카파르나움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처음 시작하셨던 곳이며

(마태 4,13; 마르 1,21; 루카 4,31 참조),

벳사이다는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고(마르 8,22 참조),

제자들과 함께 자주 들르셨던 동네였습니다(마르 6,45; 루카 9,10 참조).

그러한 이유로 오늘 복음인 루카 복음과 병행하는

마태오 복음에서는 이곳들을 “예수님께서 ……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마태 11,20)이라고 알려 줍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가장 많이 활동하셨고

가장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던 고을이었지만,

그곳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과 말씀을 보고 들었지만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구약 시대부터 수많은 임금과 예언자가 보고 싶어 하고

또 듣고 싶어 했던 것들을 직접 보고 들었으면서도 그들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내려진 ‘불행 선언’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이제 우리를 돌아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미사 안에서 당신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빵의 기적을 보여 주십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것을 보고 들을 수 있는

바른 눈과 귀를 가지고 있는지요?

우리의 눈과 귀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불행하여라!”가 아니라 “행복하여라!”라는

말씀을 들려주실 수 있도록 우리의 눈과 귀가 오롯이 그분을 향하면 좋겠습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2021년 10월 2일 (토) [백] 수호천사 기념일

수호천사는

사람을 선으로 이끌며 악에서 보호하는 천사다.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주님께서는 누구에게나

천사를 정해 주시어 그를 지키고 도와주게 하신다.
다음은 수호천사에 관한 『성경』의 표현들이다.

“그분께서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어,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시편 91[90],11).

“저를 모든 불행에서 구해 주신 천사께서는

이 아이들에게 복을 내려 주소서”(창세 48,16).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복음묵상] 마태오 18,1-5.10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천사는

주로 하느님 백성을 불행과 어려움에서 ‘지켜 주고’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곳으로 이끌어 줍니다

(창세 48,16; 탈출 23,20; 시편 91[90],11 참조).

이처럼 구약 성경은 천사들이

우리의 일상 안에서 함께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알려 주시는 천사는 어떤 모습인가요?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저마다 수호천사가 있으며,

그들이 하느님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음을 알려 주십니다.

우리의 모습을 돌아봅니다.

하느님보다는 세속의 성공과 물질의 풍요를

더 높은 기준으로 삼아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갑니다.

끊임없이 경쟁하고, 때로는 복음의 논리보다

약육강식의 법칙을 따르기도 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보다

우리 자신과 가족만을 생각하는 마음이 더 큰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수호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가 다치지 않도록, 힘겨워서 쓰러지지 않도록,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을 잊지 않도록!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잊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우리를 지켜 주고 보살펴 주는 수호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잊고 지낼지라도,

우리의 수호천사는 하느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일상이 무척이나 바쁘고 힘들겠지만,

하루에 한 번이라도 하느님을 기억하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면 어떨까요?

아무런 조건없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수호천사를 보내 주신 것처럼,

우리도 아무 조건 없이 하느님을 찬양한다면,

하늘 나라의 수호천사들도 우리의 소리에 맞추어

함께 더욱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찬미할 것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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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에 있는 대산 성지 성당입니다.
입구에 들어서면 맨 먼저

"우리는 순교자의 후손입니다" 라는

현판이 눈에 들어 옵니다.
우리 모두가 마음을 다시한번

되새기는 귀중한 기회였습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