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9월 19(일)
[녹] 연중 제25주일
제1독서(지혜 2,12.17-20)
제2독서(야고 3,16-4,3)
복음(마르 9,30-37)
제자의 은밀한 사연을 아시는 주님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돌봄과 신뢰를 받는 어린아이와도 같은 존재
악인은 하느님을 상기시키는 신앙인의 삶을 시험하며 멸망시키려 해
아이처럼 온유하고 인내하며, 주님께 의지하고 영혼을 돌볼 수 있길
‘주님은 마음의 비밀을 모두 아시나이다.’
2017년 구약학자 월터 부르그만이 지은 책 「시편적 인간」의 부제목입니다.
성공회 전례에서 성만찬 직전 신자들은 마음의 정결을 위해 기도하며,
하느님을 “마음의 비밀한 사연들을 아시는 분”으로 찬미하는데
이 기도문의 일부를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성경을 알아가는 시간이 쌓일수록
하느님 말씀 전체가 ‘영혼의 해부학’처럼 우리 자신도 파악하기 힘든
우리 마음의 미로를 탐색하게 한다는 것,
마음의 비밀을 하느님께 폭로하도록 이끌어간다는 것을 체험합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예수님은 제자직에 대해 가르치면서
신앙 선조들의 신앙을 본받도록 초대합니다.
■ 내 영혼은 젖 뗀 아기와 같아
마태오 복음서에서 마르코 복음서로 넘어가면
마르코가 제자직에서 체험하는 흑암,
시험과 유혹의 문제를 심오하게 다루고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마르코 복음(8,31-10,52)의 제자직에 관한 가르침은
예수님이 세 차례 자신의 고통, 죽음, 부활을 예고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이어 제자들의 몰이해가 일어나고,
예수님은 제자직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가르칩니다.
신앙생활의 근본은 “예수님을 본받는 것”인데
그 모델로 어린이를 보여줍니다.
어린이는 누구입니까?
먼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어린이(‘파이도스’)라는 말에는 ‘섬기는 종’이라는
의미도 들어 있는데 루카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7)고 말합니다.
또한 어린이는 예수님을
닮아야하는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구약 지혜문학에서도 스승이 제자들을 ‘아이들’이라고 부르는데
예수님도 제자들을 이런 용어로 부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티베리아 호수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난 예수님은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라고 말을 건넵니다.
이 맥락에서 강조하는 어린이의 특징은 순진무구함, 단순함,
자연스런 애정보다는 방어 능력이 없고 도움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참교육자에게 제자는
도와주어야 할 ‘어린이’입니다.
마르코 복음서에서 제자들의 몰이해,
완고한 마음을 보면서도 예수님이 끝까지 그들을 교육한 것은
제자들을 ‘내 아이들’로 바라봤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길 위에서’ 무한한 돌봄과 신뢰, 일관성 있는 교육을 받고 있음을
의식하는 것은 우리가 제자로서 성장하는데 가장 중요한
자기 확신의 바탕이 됩니다.
가르멜회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를 비롯해 많은 영성가들도 자신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특징짓는 영혼의 태도를 ‘작은 아이의 길’로 표현합니다. 성 요한 23세 교황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개최해 ‘가르치고 지시하는 교회’에서 ‘세상을 위하여 봉사하고 섬기는 교회’로 거듭나게 한 분입니다. 그분은 ‘영혼의 일기’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시편이 131편이라고 고백합니다.
시편 시인은 자신의 마음이
오만하지 않고 눈이 높지 않으며 자신의 주제를 넘어서는
거창한 것을 찾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저는 제 영혼을 가다듬고 가라앉혔습니다.
어미 품에 안긴 젖 뗀 아기 같습니다.
저에게 제 영혼은 젖 뗀 아기 같습니다”(시편 131,2)라고 말합니다.
자기 영혼을 ‘젖 뗀 아기’라고 부를 수 있는 정도에 이른 것은
뒤죽박죽인 인생 안에서 ‘영혼을 가다듬고 가라앉히는’
선택과 훈련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 제자와 악인의 거리
음악 연주자들에게 연주하는 시간이 없다면
아름다운 음을 내기 힘들 것입니다.
영혼도 악기와 같아서 잘 가다듬지 않으면 오랫동안
그리스도의 제자직의 길을
걸어온 사람이라 하더라도 쉽게 악인이 될 수 있습니다.
지혜서 저자는 악인의 태도와 의인의 태도를 대조하는데,
이는 청중이 지혜롭고 의롭게 되어 어리석음과 약함을 피하도록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에서 악인은 ‘어리석은 자’,
‘무지한 자’로 불리는데, 둔감하다 못해
깨닫는데 실패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지적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만이 아니라
도덕적, 영적 식별력의 부족에 관한 문제입니다.
의인의 특징은 하느님에게 철저하게 의존하는 것인 반면
악인은 하느님 없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갈 수 있다고 생
각하는 점에서 은밀한 무신론자입니다.(시편 73,6-12)
악인은 하느님을 상기시키는
의인의 삶이 성가시고 불편하기 때문에
그들을 ‘시험’하면서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악인은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없이 사는 삶이 얼마나
풍요롭고 멋진 것인지 부러움을 갖게 합니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라는 말이 이런 경우에 해당합니다.
악인의 삶이 정상으로 보이는 부러움에서 시기와 탐욕,
다툼, 혼란과 무질서, 정체성의 혼란이 생겨납니다.
제2독서에서 야고보서의 저자는 이런 요소들이
‘땅에서 오는 지혜’의 특성이라고 말합니다.
의인이 악인의 시험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젖 뗀 아기처럼 ‘위에서 오는 지혜’를
온유하게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런 지혜의 특성은 여덟 가지로 요약되는데 행복선언에
드러난 그리스도의 인격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수하고,
그다음으로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야고 3,17)
성 김대건 신부님은
처음 만나는 신자를 알아보는 표시로
“당신은 예수님 제자이오?”라는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 제자의 삶을 선택했기 때문에 직면하는
특별하고 구체적인 ‘시험’은 고통스럽지만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분별하는 은총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크고 작은 일상의 시험이 없다면 자신이
악인인지 제자인지 생각하지 않고 살아갈 것입니다.
화답송인 시편 54편에서 시인이
“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시편 54,6)라고
담대하게 고백하는 순간은 이방인과
포악한 자에게서 시험을 당한 후였습니다.
코로나19 시대에 성사와 말씀 안에서 하느님에게
우리의 은밀한 사연들을 말씀드리는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고
우리 영혼을 돌보는 일은 우리가 제자의 길을 벗어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줍니다.
아멘!
-임숙희(레지나) -
[한주간 전례]
2021년 9월 20일 (월) [홍]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우리나라는 18세기 말 이벽을 중심으로 한
몇몇 실학자들의 학문적 연구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들 가운데 이승훈이 1784년 북경에서 ‘베드로’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신앙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마침내 한국 천주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선교사의 선교로 시작된
다른 나라들의 교회에 비하면 매우 특이한 일이다.
그러나 당시 한국 사회는 전통을 중시하던 유교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어,
그리스도교와 크게 충돌하였다.
결국 조상 제사에 대한 교회의 반대 등으로 천
주교는 박해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신해박해(1791년)를 시작으로
병인박해(1866년)에 이르기까지 일만여 명이 순교하였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의 해인 1984년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이들 순교자들 가운데 한국인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와
평신도인 정하상 바오로를 비롯한 103위를 시성하였다.
이에 따라 9월 26일의 ‘한국 순교 복자 대축일’을 9월 20일로 옮겨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현재 한국교회는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를 중심으로
아직 시성되지 못한 순교자들의 시복 시성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복음묵상] 루카 9,23-26
2세기 테르툴리아누스 교부는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하였습니다.
순교자들의 피는 헛되지 않았고,
그들의 신앙 고백은 교회가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박해가 끝난 뒤 순교자들의 피로 심은
교회의 씨앗에 물을 주고 자라게 한 것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신자들의 믿음과 일상 속 신앙의 증언입니다.
오늘 제2독서를 통하여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를 주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늘 기념하는 한국의 첫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동료 순교자들은 살아서는 부끄럽지 않은 삶,
그리고 죽더라도 영원히 사는 삶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순교자들의 신앙을 우리도 간직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도움의 은총을 청하여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오늘날
교회에 가장 큰 신앙의 걸림돌을
물질주의와 세속화 현상으로 보셨습니다.
물질주의와 세속화 현상은
우리에게 좀 더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라고 속삭입니다.
‘지금 같은 시대에 뭘 그렇게 열심히 하니?’
‘요즘 시대에 이 정도는 괜찮아!’
또한 교회의 가르침이나 교리가
나의 사고와 맞지 않으면, 합리적, 이성적,
일반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나의 하느님’을 만들고 추종하게 합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로는 순교자들의 신앙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쉽고 편안한 길을 가기보다 옳은 길,
주님께서 알려 주시는 길을 갈 때,
가장 안전하게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9월 21일 (화) [백] 한가위
▦ 오늘은 우리 민족의 큰 명절인 한가위입니다.
계절의 변화를 섭리하시고
수확의 기쁨을 주시는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리며,
이웃과 서로 나누며 살아온 조상들의 아름다운 마음을 본받읍시다.
자신을 위해서만 재화를 모으는 어리석은 부자가 되지 않도록,
우리도 나눔을 실천하기로 다짐하며 주님의 잔치에 참여합시다.
[복음묵상] 루카 12,15-21
민족의 큰 명절 한가위입니다.
한가위에 가족과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여
기쁨과 형제애를 나누는 것은 큰 즐거움입니다.
그리고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과 조상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도리입니다.
주님께서는 복음을 통하여,
우리도 당신을 따라 사랑을 실천하라고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복음은 아름다운 이론이나 추상적인 방법론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길입니다.
명절에 가족이 함께 모여 나누는 사랑은 신뢰를 쌓고, 소
통을 통하여 이해와 깊은 유대를 형성합니다.
하상욱 시인은 가족을 ‘영어’ 같다고 하였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게 표현이 잘 안 되기” 때문이랍니다.
또 때로는 ‘한국어’ 같다고도 합니다.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참 모르겠기” 때문이랍니다.
우리 가족은 어떠한가요? ‘영어’ 같은가요?
‘한국어’ 같은가요? 우리가 마음으로 대화한다면
우리 가족은 영어도 한국어도 아닌,
‘나눔과 희생을 통한 사랑의 언어’와 같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풍성한 수확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이를 이웃과 나눔으로써,
어리석은 부자가 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풍요로운 한가위에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우리의 마지막 날을 생각해 봅니다.
인생의 마지막 날 죽음 앞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고,
우리는 하느님 덕분에 살아갑니다.
하느님과 이웃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사랑을 나눈다면 더욱 행복한 한가위를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9월 22일 (수) [녹]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루카 9,1-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열두 제자에게 주시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파견하십니다.
그리고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하고 당부하십니다.
가까운 곳으로 잠깐
여행을 갈 때도 짐이 많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은 물론이고 휴대폰 충전기,
화장품 등등 …….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가져갔다가
꺼내지도 않고 도로 가져오기도 합니다.
우리는 준비성이 투철한 사람들입니다.
미래를 철저하게 대비하는 유비무환의 정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생각이 다르신 것 같습니다.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여정은 우리의 여행과는 분명히 다르고,
세상 것에 애착을 보이면 이룰 수 없는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하느님의 은총만을 의지하라고,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것 가운데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의탁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필요 없는 짐일 뿐입니다.
결코 제자들이 잘나서 예수님께 뽑혔고,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 주는
능력을 지니게 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제자들의 사명은 오로지
다른 이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과 힘은
주님을 따라 살아가 기 위한 도구입니다.
이웃과 나눔으로써 우리는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9월 23일 (목) [백]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오상(五傷)의 비오 신부’로 널리 알려진
비오 성인은 1887년 이탈리아의 피에트렐치나에서 태어났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1910년 사제가 된 그는
끊임없는 기도와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을 섬기며 살았다.
비오 신부는 1918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1968년까지
50년 동안 예수님의 오상을 몸에 지닌 채 고통받았다.
곧, 그의 양손과 양발, 옆구리에 상흔이 생기고 피가 흘렀던 것이다.
이러한 비오 신부를 2002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복음묵상] 요한 9,7-9
현대인의 많은 질병 가운데 하나가
신경 정신 의학에서 말하는 불안 장애나 공황 장애,
강박 장애 등 불안과 스트레스 관련 질환이라는
연구 논문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으로 고생하는 사람은 우리의 가정이나 직장,
이웃 가운데 있을 수도 있고
또는 내가 그런 사람 가운데 한 명일 수도 있습니다.
외부에서 끊임없이 들어오는 요구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병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며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함께 나누고 이해하며 사랑함으로써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유독 나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충돌이 많다면, 스스로 성찰하여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성숙시킬 수 있습니다.
이기주의자나 배려 없는 사람이 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말씀처럼 “하느님도 당신을 사랑하시는데,
왜 당신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까?”라는 물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세상의 부귀와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두려움에 휩싸여 살아가는 헤로데를 만납니다.
일찍이 요한을 죽인 헤로데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예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헤로데는 자기 자신도 요한도 몰랐기에 예수님도 어떤 분이신지 모릅니다.
하느님과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에 두려움에서 빠져나올 수도 없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헤로데와 같이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찾아 자신을 사랑하며 다른 이들에게도 열린 존재입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9월 24일 (금) [녹] 연중 제25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루카 9,18-22
지금도 존재하지만,
한동안 ‘가짜 뉴스’라는
용어가 사회적 이슈가 된 적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가짜 뉴스가 “독자를 기만하거나 조종할 의도로,
존재하지 않거나 왜곡된 자료에 근거하는
허황한 정보와 관련된다.”
(제52차 홍보 주일 담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
하는 목적을 위하여 끊임없이 확산되는 가짜 뉴스는
거짓을 위한 자유이며, 거짓된 진리를 우리에게 전함으로써
다툼과 분열을 조장합니다.
주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한 8,32)라고 하셨습니다.
가짜 뉴스는 우리를 자유롭게도 평화롭게도 하지 못합니다.
오직 진리만이 우리에게 참평화를 줍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가짜 뉴스가 매우 많았던 듯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요한으로,
엘리야로, 옛 예언자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고
사람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심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어떤 수고와
수난을 겪고 부활하실지 알려 주십니다.
오늘 미사의 입당송에서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백성의 구원이다.
어떠한 환난 속에서도 부르짖으면 내가 들어 주고,
영원토록 그들의 주님이 되어 주리라.” 하고 노래하였습니다.
주님을 참되게 알고 깨우쳐 그분께서 나의 구원자이심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떻게 현실을 살아야 하는지 알려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듣고
올바로 실행에 옮길 때,
신앙인은 어려움 속에서도 진리와 함께 자유롭게 됩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9월 25일 (토) [녹]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루카 9,43ㄴ-45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주님의 수난에 대한 말씀을 듣고도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조차 두려워하였다고 전해 줍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관심이 있었기에 듣고는 있었지만,
그 뜻을 이해하지는 못하였습니다. 두려움 때문입니다.
또한 현실에서 주님의 부재는 물론이요
그분의 수고와 수난은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 자체가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고 부활하시어,
임마누엘 하느님으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약속의 이행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지나치게 이기적인지도 모릅니다.
서로 다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다양한 표현을,
우리는 자기 방식대로 이해하고 판단하고
때로는 듣지 못한 것처럼 행동하기도 합니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내 방식만을 고집하고 이해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고 그가 한 말의 뜻을 알아 가며 노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온전한 사랑의 방법, 인류 구원의 방법을 끊임없이 들려주십니다.
내 방식과 판단을 잠깐 접고,
상대에게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그의 말을 경청한다면
‘사랑은 함께 하는 것’이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믿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에 믿는 것입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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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두산 성지에는
한 낮의 더위가 여름철을 방불하지만
많은 순례객들이 성지에 찾아오고 있습니다.
요즘 방역에 맞추어
성지내에서의 미사는 미리 예약을 받고있지만
코로나 상황에서도 많은 교우 분들이
순교자들을 발자취를 찾아 보고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Berard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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