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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4일 성 파치피코 사제

Berardus 2021. 9. 24. 07:21

 

[이콘]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18세기.32.5 x 27cm.중앙러시아.

 

이 성화(Icon)에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힌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 성화의 화면은 표면에서 약간 뒤로 들어갔으며

 그 가장자리 윗부분은 반원형을 이룬다.

 

십자가는 목판의 한 중앙에 위치한다.

십자가의 긴 횡목 위에는 두 명의 비천하는 천사들이 슬퍼하고 있는데

 그들의 손은 수건으로 덮여 있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는 아랫 횡목(橫木) 위에 서있고,

그 밖에 십자가의 수직목(垂直木) 양옆에는 창과 식초를 적신 막대기가 꽂혀 있다.

 

십자가 아래에는 골고다의 동굴이 열려 있으며 아담의 해골이 보인다.

전설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구원해야 될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무덤 위에 십자가를 세웠다고 전한다.

 

십자가의 왼쪽에는 마리아, 마리아 막달레나, 안나가 서있다.

오른쪽에는 그리스도의 애제자였던 성 요한과 개종한 장교 롱기니오스가 서있다.

여기에 묘사된 장면은 낡은 성벽 앞에서 전개되었다.

 



924

성 파치피코 사제


San Pacifico da Sanseverino Marche

ST. PACIFICUS of San Severino

Born :1 March 1653 at San Severino
Died :24 September 1721 at San Severino
Beatified :4 August 1786 by Pope Pius VI
Canonized :26 May 1839 by Pope Gregory IX
Pacifico = mansueto, mite, significato evidente(mansueto, mild, meant obvious)

Name Meaning:peace (=Pacific)

 

 

산 세베리노의 성 파치피코 수도자
(Pacifico of San Severino; 1653~1721)


성 파치피코는 안토니오 디비니와 마리아 브루니의 아들로서 세례명은 카를로 안토니오였다.
다섯 살 때에 양친을 잃은 그는 거칠고 난폭했던 외삼촌댁에서 자랐다.
외삼촌은 그를 마치 하인인 양 마구 다루었으나
어린 파치피코는 17세가 될 때까지는 오로지 참기만 하였다.

1607년, 그는 포라노에 있던 프란치스코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파치피코란 수도명을 받았다.


정상적인 교육을 받은 그는 25세 때에 사제가 되었으며,
회원들에게 2년간 철학을 가르치다가, 인근 마을이나 교회가 없는 곳을 골라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의 강론은 지극히 부드럽고 단순했음으로 

 청중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넉넉하여 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재앙으로 인하여
그는 눈이 멀고 말도 못하는 상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리조차 불구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오로지 기도와 보속에만 전념하다가 운명하였다. 
그는 사보이가 터키인들을 무찌르고 승리하리라고 예언한 것이 이루어져 큰 공경을 받았다.


또 그는 미사 중에 자주 탈혼에 빠지기도 했는데,
때로는 이것이 몇 시간 동안 계속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수도회홈에서)-

 


The Crucifix of San Damiano

  

파치피코는 1653년 3월 1일에 안코나 주의 산 세베리노에서 태어났다.

안또니오 디비니와 마리아 브루니의 아들로서 세례명은 까를로 안또니오였다.

다섯 살 때에 부모를 여의고 백부의 밑에서 자란 그는 고생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안되었다.

독신이었던 백부는 가사의 일체를 두 명의 가정부에게 맡겼는데

웬일인지 그들은 파치피코를 싫어하고 매사에 모욕과 조소로써 심하게 대했다.

 

그러나 그때부터 이미 하느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아 한 마디의 불평도

백부에게 말하지 않고 일체를 감수 인내하며 가정의 평화를 유지했다.

외삼촌은 그를 마치 하인인 양 마구 다루었으나 어린 빠치피코는

17세가 될 때까지는 오로지 참기만 하였다.

파치피코는 평화의 사자(使者)라는 뜻인데 과연 명실공히 뜻이 통하는 바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보속하는 정신을 가진 그는

 여러 행동에 있어서도 사람을 감탄케 할만한 일이 종종 있었다.

그는 포라노에 있던 프란치스꼬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바치리꼬란 수도명을 받았다

그가 18세의 어린 몸으로 프란치스코 수도원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있었어도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의 평소의 행동으로 미루어 보아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집에 있을 때부터 신앙이 두텁고 열심했던 파치피코는 수도자가 된 후는

더 한층 분발해 덕행의 길로 매진하고 회칙이 명하는 고행은 물론이고

자발적으로 더 많은 단식재와 극기를 실행하며

청결, 청빈, 순명, 인내, 겸손 등 모든 덕을 닦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계속했다.

 

더구나 수도원에 들어간지 8년만에 서품 받아 신부가 된 후에는

더욱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불태워 세라핌 천사를 연상케 했고

미사를 드릴 때는 탈혼이 되어

 얼굴은 광채 찬란하고 몸은 공중에 떠있을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도 들여다보고 장래를 예언하는 힘도 가졌으니,

이런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완덕에 진보한 성인이었던가를 알 수 있다.

 

파치피코는 죄인을 회개시키며 신자들의 열심을 북돋아 주는데 있어

어떠한 희생도 사양하지 않으며 부지런히 사제로서의 성무를 이행하기를 5,6년

이것도 하느님의 성의였음인지, 그는 병석에 눕게 되어 이후

30년이라는 장수한 세월을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사제로서의 할 일을 조금도 하지 못했으나 원망하지 않고,

육신의 고통이나 정신의 고민을 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의 고통과 함께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며 부자유스러운 중에도 자유의 천지를 발견하고 있었다.

이런 탄복할만한 희생에 의해 구원된 영혼은

사제직을 제대로 이행함으로써 구원된 영혼의 수보다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파치피코는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병석을 십자가로서 달게 참아 받으며

쓸개의 잔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시고 정성되이 병자 성사를 받고,

1721년 9월 24일을 일기로 이 세상을 떠났다.

 

사후 그의 전구로 인한 기적이 많았으므로 1786년에는 복자위에,

1839년에는 성인품에 오르는 영광을 얻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