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공간 ▒▒ /∞ 말씀♡묵상

[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9월 12(일) [녹] 연중 제24주일

Berardus 2021. 9. 11. 05:15

[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9월 12(일)

[녹] 연중 제24주일

제1독서(이사 50,5-9ㄴ)

제2독서(야고 2,14-18)

복음(마르 8,27-35)


십자 나무의 열매를 맺는 사람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러 오신 분
우리 모두 충실한 주님의 제자로 십자가 지고 희생하는 삶 살아가야
세상 모든 고통과 갈등 속에서도 은총의 씨앗은 참사랑의 열매 맺어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앞둔 연중 제24주일입니다.

“Follow me(나를 따르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 중에 삶의 의미를 찾던 기억이 납니다.

주님의 충실한 제자로 신앙에 뿌리를 내린 십자 나무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인 줄 압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전하는 ‘주님의 종’의 노래(제1독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주님께서 귀를 열어주시니 종은 거역하지 않고, 물러서지도 않으며,

모욕과 매질을 당하는데도 얼굴을 가리지 않습니다. 수치를 당하는 일도 아니고,

주님께서 도와주심을 알기에 얼굴은 차돌 같습니다.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대적하고 단죄합니까? ‘

주님의 종’의 모습은 충실한 제자 같습니다.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내리신 사명을 거부하지 않고 자진해서 순종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 종의 말에 순종하는 자”(이사 50,10)입니까?

사랑이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주님과 함께 생명의 길을 걸어갑니다.

자비하신 주님은 가난하고 비천한 이들을 돌보시고,

삶의 고통과 죽음의 공포에서 구해주십니다.

우리의 애원을 들어주시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화답송)

믿음은 무한한 가치를 지닌 자유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제2독서).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 가난한 사람에게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야고 2,16)

진리와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을 믿고,

구원의 희망 속에 삶의 고통을 인내합니다.

주님의 은총과 성령의 친교가 함께하는 가운데 완덕의 길을 걷습니다.

가장 작은 이들에 대한 나눔과 돌봄(마태 25,35-40; 루카 11,41)이 사랑의 표현입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은

이방인 지역의 가장자리인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가시는 길에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물으십니다.

그들의 대답은 요한 세례자, 엘리야, 예언자로 모두 예언자적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물으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마르코 복음의 시작(마르 1,1)입니다.

대중의 여론은 예언자이고, 제자들은 스승을 메시아로 믿습니다.

메시아의 사명에 대한 인간적인 생각에 혼란을 피하고자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원에 관하여 침묵을 지키라고 엄히 당부하십니다.

주님께서 친히 ‘사람의 아들’이란

불가사의한 호칭을 사용하십니다.

다니엘 예언자가 본 ‘사람의 아들’(다니 7,13)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십니다.

성령이 충만한 스테파노가 순교 직전 본 ‘사람의 아들’(사도 7,55)은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십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성자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분”(마르 10,45)이십니다.

유한한 시간과 공간의 역사적 조건 안에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기 위해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신 성자께서 존재의 의미를 겸손히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세 번 예고하시는 가운데 오늘은 첫 번째입니다.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주님을 배척하는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대사제가 의장인 ‘산헤드린’(Sanhedrin, 71명의 의회)의 구성원들입니다.

메시아의 사명에 수난과 죽음은 배제하려는 베드로는

예수님을 꽉 잡고 반박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에 걸림돌이 되는

베드로의 말에 호통을 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마르 8,33)사탄은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가로막고자 거짓으로 유혹하는 악마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주님께서 제자들과 군중들에게 하신 당부의 말씀입니다.

자신을 버림(자기부정)은 충실한 주님의 제자가 되고자

가진 모든 것과 가족들과의 인연을 끊는 일입니다.

십자가는 무거운 짐을 지고 견디는 희생(죽음 포함)적 삶의 은유적 표현입니다.

골고타 언덕에 들어 올려진

십자 나무에서 구원의 생명이 솟아납니다.

무거운 통나무에 못 박히신 지극한 사랑의 주님께서

큰소리로 외치신 마지막 말씀을 되새겨봅니다.

우리를 위하여 원수를 용서하는 회심,

영원한 생명에 대한 목마름, 성모님에 대한 공경,

사도직 사명의 완수, 천주 성부께 의탁하신 마음의 기도입니다.

십자가로 세상을 구원하신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립니다.

인간다운 생활 양식을 위해 저희는 세상의 온갖 고통과

갈등 속에서도 주님을 따르는 불림을 받은 십자 나무입니다.

나무의 됨됨이는 열매를 보고 압니다.(마태 7,17)

주님 은총의 씨앗이 자란 십자 나무에 강인한 생명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참사랑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십자 나무가 숲을 이루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사랑의 일치를 이루게 하소서. 아멘.

-김창선(요한 세례자) -

▲제주 김대건신부 제주표착기념관


[한주간 전례]

2021년 9월 13일 (월) [백]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4세기 중반

시리아의 안티오키아(현재 터키의 안타키아)에서 태어나

독실한 어머니의 신앙을 물려받았다.
수도자들과 함께 엄격한 극기 생활을 하던 그는

은수자를 본받아 광야에서 기도와 고행의 시간을 보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자선과 저술 활동에 전념하다가

사제품을 받고 주로 설교자로 활동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로 임명된 그는 개혁을 부르짖으면서,

악습에 젖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심지어 황제나 황후에게도 잘못된 점을 거침없이 지적하였다.
그 때문에 성인은 유배 생활을 하다가 407년 무렵에 선종하였다
탁월한 설교로 ‘금구’(金口: 황금의 입)라고도 불리는 그는

설교자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복음묵상] 루카 7,1-10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로마 백인대장의 이 겸손한 고백은 우리가 성체를 받아 모실 때마다 바치는 기도입니다.

천주교 신자에게 영성체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주셨고,

미사를 통하여 날마다 임마누엘 하느님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주님께서는 이 사랑의 성사를 통하여 우리와 일치하시고,

우리가 당신 안에 함께 살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늘 주님 안에서 살 수 있도록

오늘 복음의 백인대장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백인대장의 확신에 찬 말은

예수님께는 믿음에 대한 감탄으로, 그리고 그 종에게는 치유의 은총으로 다가갑니다.

세상의 수많은 방해와 불신 속에서

하느님을 진심으로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요.

우리의 눈은 한계가 있어 실지로 많은 것을 볼 수 없고,

우리의 뇌는 기억하고 있는 것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왜곡하고 조작하기도 한다고 뇌과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본 것, 우리가 경험한 것만을 진실이라고 믿기도 합니다.

백인대장이 보여 준 믿음은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스스로 삶을 성찰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영원의 시간,

신비 안으로 초대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9월 14일 (화) [홍]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속죄하시려고 지신

십자가를 묵상하고 경배하는 날이다.
이 축일의 기원은 정확히 알 길이 없다.

전승에 따르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의 노력으로 찾아내게 되었다.
황제는 이를 기념하고자 335년 무렵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무덤 곁에 성전을 지어 봉헌하였다.

그 뒤로 십자가 경배는 널리 전파되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9월 14일로 이 축일이 고정되었다.

[복음묵상] 요한 3,13-17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신”(필리 2,8)

예수님의 죽음은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며’, 그분을 드높임은

‘자신의 희생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기 위한 것’(요한 12,28 참조)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골고타 언덕은

믿는 이들에게 무지막지한 형벌의 장소가 아닌,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기꺼이 수고와 수난을 받아들이신

성자의 사랑을 드러내는 장소입니다.

이 사랑의 장소는 구약에서 하느님과

모세를 믿지 않음으로 죄를 지어 죽음에 다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리 뱀을 쳐다봄으로써 생명을 얻었듯이,

하느님 아버지께서 세상을 용서하시고 당신과 화해하게 해 주시는,

조건 없는 사랑과 생명을 주시는 곳입니다.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오신”(마르 10,45)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이시며,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1코린 1,30).

이제 십자가는 하느님 사랑의 명백한 표시이며 증거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기도할 때 십자 성호를 긋습니다.

사제들은 십자 성호로 하느님의 축복을 전해 주고,

신자들은 십자 성호로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을 되돌려 드립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십자가의 삶인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십자가는 희생과 사랑을 통한 영광이며,

그리스도인에게 희망의 표지입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9월 15일 (수) [백]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은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함께하신 성모님의 고통을 기억하는 날이다.
자식의 아픔은 어머니에게 더 크게 다가오는 법이다.

시메온은 성모님의 고통을 이렇게 예언하였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하고 기억하는 신심은 오래전부터 널리 퍼져 있었으며,

1688년 인노첸시오 11세 교황이 이 기념일을 정하였다.
1908년 비오 10세 교황은 이 기념일을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 날인

9월 15일로 옮겨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과 연계하여 기억하게 하였다.

[복음묵상] 요한 19,25-27

오늘의 묵상 예수님의 부모가

아기 예수님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성전에 들어섰을 때,

의롭고 독실한 시메온은 성모님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이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이라 예언하였습니다(루카 2,34-35 참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성모 마리아께서는

시메온이 예언한 시간의 가장 중심에 서 계십니다.

십자가 아래의 성모님께서는 그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구세주의 수난에 동참하고 계십니다.

고통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고, 인간은 다양한 삶의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나 이 고통이 모두 의미 없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 수난 성금요일의 수난 없이 파스카의 부활은 없으며,

그리스도의 희생 없이 우리의 구원은 없기 때문입니다.

아드님의 수난을 두 눈으로 목격하신 성모님의 고통은,

이집트에서 피난살이하며 겪은 고통(마태 2,13-15 참조)이나

어린 예수님을 잃어버려서 헤매던

고통(루카 2,41-51 참조)보다 더 크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이 고통을 피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받아들이십니다.

그것은 바로 성모님께서,

우리도 우리의 삶의 고통과 마주하여 하느님께서 주시는

더 큰 계획 안에 함께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복되신 동정녀께서도 신앙의 나그넷길을 걸으셨고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아드님과 당신의 결합을 충실히 견지하셨다.

거기에 하느님의 계획대로 서 계시어(요한 19,25 참조),

성모님께서는 당신 외아드님과 함께 극도의 고통을 겪으시며

당신에게서 나신 희생 제물에 사랑으로 일치하시어

아드님의 희생 제사에 어머니의 마음으로 당신을 결합시키셨다.

마침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성모님을 제자에게 어머니로 주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27 참조)”

(교회 헌장 58항).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9월 16일 (목) [홍]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고르넬리오 교황은 251년에 교황으로 뽑혀,

로마 박해 시대에 2년 동안 짧은 교황직을 수행하면서

배교를 선언하였던 신자들을 용서하고 다시 교회로 받아들였다.

그는 이단에 맞서 교회를 지키다가 유배되어 253년에 순교하였다.
치프리아노 주교는 고르넬리오 교황과 같은 시대의 목자로서

교황의 권위를 강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북아프리카 출신의 그는 늦은 나이에 개종하여 사제품을 받고

카르타고의 주교가 되었다.

치프리아노 주교는 박해 속에서도 고르넬리오 교황을 도와

교회의 재건에 힘쓰다가 258년에 순교하였다.

[복음묵상] 루카 7,36-50

오늘 복음에서

죄 많은 여인은 예수님을 찾아와 참회하며,

눈물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청합니다.

이 여인이 구체적으로 어떤 죄를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주님께서는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잃어버린 평화와 자유를 되찾아 주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가 예수님께 다가와 향유가 든 옥합을 깨어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는 동안 바리사이는 매우 불편해합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여인의 죄를 용서하신다고 하자

바리사이와 식탁에 초대된 사람들의 불평이 터집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용서’입니다.

물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하지만,

나의 말이나 행동으로 그들을 괴롭혀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어제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에

우리는 ‘고통의 무게는 모두 다르지만,

모든 고통을 피하지 말고 마주하여,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과 은총을 찾고

하느님과 일치하려고 노력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죄 많은 여인은 주님의 용서를 통하여

평화와 자유를 얻지만, 바리사이와 초대된 사람들은 평화와 자유를 빼앗겼습니다.

나의 이기심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진정 자유로워지고 평화를 되찾으며 크든 작든

우리의 죄도 하느님께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9월 17일 (금) [녹]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루카 8,1-3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에

헌신적으로 도움을 준 여인들이 나옵니다.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

그리고 다른 많은 여자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을 도왔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에도 복음 선포에 도움을 준 여인들이

사도행전과 바오로 서간에 자주 등장합니다. 리디아(사도 16,14),

프리스킬라(사도 18,2), 에우오디아와 신티케(필리 4,2),

클로에(1코린 1,11), 포이베(로마 16,1) 등입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박해 시대에도

복음 선포에 자신의 삶을 바친 여인들이 많습니다.

목숨을 바쳐 순교한 이도 있고,

숨어 살면서 고귀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하였습니다.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여성 회장으로 알려진 강완숙 골룸바는

자신의 집을 모임 장소와 피난처로 제공하고,

주문모 신부와 교우들에게 음식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여인이 교회 안에서

자신의 탈렌트를 사용하여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열심히 봉사하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때로는 실망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목적을 잊어버린 채 무조건 열심히만 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느님께 정확히 초점을 맞추고 묵묵히 봉사한다면,

우리의 삶은 실망을 넘어 기쁨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예루살렘 여인들처럼,

또 한국 천주교회의 초창기 교우들처럼 우리의 봉사에 대한

하느님의 영원한 갚음을 기억하며, 기쁨 안에서 신앙생활을 해야겠습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9월 18일 (토) [녹] 연중 제24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루카 8,4-15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가르쳐 주십니다.

이 ‘신비’는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드러내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 자체이시며

당신 스스로 하느님 나라를 보여 주신 분이시고,

그 신비를 몸소 지니신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는 은총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지 없을지는 예수님께 달렸으나,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지 거부할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말씀의 씨앗이 길에 떨어진 경우처럼,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악마가 그 말씀을 마음에서 앗아가 버려

올바로 믿지 못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위에 떨어진 말씀처럼 뿌리를 내리지 못하여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합니다.

짧은 인생이라고 하지만,

그 안에서 여러 가지 상황과 마주하며 울고 웃고,

때로는 낙담하고, 때로는 희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좋은 토양을 가지고자

마음의 밭을 잘 가꾼다면,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밝게 빛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간직하고

신앙의 항구함을 간직하는 방법을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과

복음 환호송은 이렇게 가르쳐 줍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