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프란치스코에게 육신의 고행보다도 영신적 극기에 대해서 지도를 받았고,
숨은 선덕의 아름다움을 배웠다.
그녀는 실수로 인해 자기 남편을 죽인 사람을 물론 미워하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나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용기를 내어 그 사람을 만나서, 지금까지 맺혀있었던 모든 원한을 깨끗이 씻어버리는 뜻으로
그 사람의 딸의 세례 대모가 되어 주었다.
자녀들이 이제는 다 컸으므로 그녀는 어머니로서의 일도 적어졌다.
그래서 요안나는 소녀시절에 품었던 수도 생활에 대한 동경을 다시금 갖게 되었다.
그녀는 지도 신부인 성 프란치스코에게 그뜻을 밝혔다. 그녀는 가르멜회 입회를 원했지만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은 전부터 있던 수녀원에는 들어갈 수 없는 과부들을 위한
새 수도원을 세우려고 했던 참이므로 그 계획은 즉시 실현되어 요안나는 그 계획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것이 곧 ’방문회’의 시초이다.
수녀가 되려면 물론 사랑하는 자녀와 정든 아버지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것이 정이 많았던 요안나에게 있어 가장 어려운 것이었다.
더구나 그들이 한결같이 수도원 입회를 반대했으므로 그녀의 고민은 더욱 커질 따름이었다.
그러나 수도자가 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인줄 안 요안나의 신념은 동요됨이 없이
결국 사랑하는 자녀와 아버지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고 수도 서원을 발했다.
그 외에 하느님과 개인적으로 선한 것이라 인정되는 것은 꼭 실행한다는 서원도 발했다.
그녀는 새로운 수도회의 총장으로서 그 자매들에게 될 수 있는 데까지
어머니다운 태도로써 대하고자 노력했다.
그리하여 기회 있는대로 건축한 분원(分院)의 수는 그녀의 임종 직전만 해도 무려 75개소에 달했다.
그동안 그녀의 성덕을 시기해 고의로 그녀의 사업을 방해하는 이도 있었다.
또 유게노 전투에서 큰아들을 잃었고, 딸과도 사별하게 된 일이 있었다.
이러한 것들의 하나 하나가 다 그녀에게는 비애의 날카로운 칼이 되었다.
그 중에도 가장 비통한 일은 그녀의 영적 아버지인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의 서거였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실망하지 않았다. 더욱 분발해 많은 자매들을 이끌고 덕행의 길로 매진하는 한편
수도회의 발전을 도모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본부의 소재지인 아네시이에 무서운 페스트가 만연하자 사보아의 공작 부처는
요안나의 신변을 염려해 안전 지대로 피신할 것을 권유했으나,
그녀는 자매들을 남겨두고 떠날 수가 없다고 하며 도리어 시내에 나가 환자들을 돌봐 주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녀를 위안의 천사라고까지 부르게 되었다.
1641년, 요안나는 파리에 있는 수녀원을 방문하고 아네시이로 돌아오는 도중 폐렴에 걸려 위독하게 되어
물렝에서 12월 13일에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성 프란치스코 드 살 곁에 묻혔다.
그녀는 클레멘스 14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그녀는 수도 생활을 하면서 한때 커다란 영적 시련을 겪기도 하였다.
그것은 내적 고민과 암담함,영적 무미 건조함이었다.
샹탈은 영적인 무미건조함을 겪고 또 영혼의 어둔 밤을 수차례나 경험하면서 영성적으로 더욱 성장하였다.
그녀는 공동체의 분원들을 방문하는 중에 세상을 떠나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곁에 묻혔다
수많은 난관이 있었지만, 이 수녀회는 프랑스 전역으로 펴져나갔으며
생존시에 이미 60여 수도원이 세워졌던 것이다.
성녀는 1767년에 시성되어 중세시대의 수도자 영성에 큰 발자취를 남긴 분으로 공경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