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int TERESA BENEDICTA of the Cross
Santa Teresa Benedetta della Croce (Edith Stein) Martire
(Breslavia, 12 ottobre 1891 - Auschwitz, 9 agosto 1942)
Born:12 October 1891 at Breslaw, Germany (now Wroclaw, Poland) as Edith Stein
Died:gassed on 9 August 1942 in the ovens of Auschwitz
Beatified:1 May 1987 by Pope John Paul II in the cathedral at Cologne, Germany
Canonized:11 October 1998 by Pope John Paul II
1891년 10월 12일 독일 동북부 지역의
브레슬라우(Breslau)의 전통 유대인 가정에서 11번째 아이로 태어난 성녀
에디트 슈타인(Edith Stein)은 두 살 때 목재상을 하던
아버지 지그프리트(Siegfried Stein)를 일사병으로 여의고
, 열심한 유대인이었던 어머니 아우구스트(Auguste Stein Courant)에 의해 양육되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거행되는 유대교 전통 예식을 보며 자랐고,
유달리 고집스럽고 사색과 독서를 좋아하는 학구적인 성격의 아이였다.
11세 때 숙부의 갑작스런 죽음을 경험하면서 삶의 궁극적인 의미에 대해,
그리고 유대인들이 믿고 있는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하였다.
또 가족과 친지들의 형식적인 유대교 의식과 기도에 실망하여
더 이상 참석하지 않기로 결단을 내리기도 하였다.
십자가의 성녀 데레사 베네딕타(에디트 슈타인)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까지는 브레슬라우에서,
그리고 1913년부터는 괴팅겐(Gottingen) 대학으로 옮겨 심리학
, 철학, 역사학, 독일어학 등을 공부하였다.
다양한 학문을 공부하던 중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잠시 간호사로 활동하기도 했던 그녀는 1916년
프라이부르크(Freiburg)에서 후설(Edmund Husserl)의 지도
로 박사학위를 받고 그의 개인조교가 되었다.
그 후 독자적인 연구 활동을 하며 교수 취임 논문을 제출하고
후설이 직접 추천서까지 작성해 주었으나,
당시 독일 학계에서 여성이 교수로 재직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십자가의 성녀 데레사 베네딕타(Teresia Benedicta,
또는 성녀 에디트 슈타인 Edith Stein)
그 후 브레슬라우로 돌아와 계속 철학 연구 논문들을 집필하던 중
1921년 여름 같은 괴팅겐 학파 친구인 콘라트 마르티우스와
그녀의 남편이 경영하던 농장에 머무르게 되었다.
친구 부부가 외출한 어느 날 서재에서 우연히 손에 잡힌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생애”를 읽고,
그녀는 자신이 오랫동안 실존적으로 회의하고 있었던 신이 그녀를 사랑해 왔으며,
그녀가 전 인격으로 그 사랑에 응답하기를 기다려 왔음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하느님 체험 후 그녀는 평화를 얻었고,
이듬해 1월 1일 테레사 베네딕타(Teresia Benedicta)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음과 동시에 성녀 테레사 베네딕타는
카르멜 수도원에 입회할 의지를 확고히 하였으나,
어머니의 반대와 지도신부의 만류로 이를 연기하였다.
그 대신 지도신부의 제안으로 1931년까지 슈파이어(Speyer)에 있는
성 막달레나 수도원 교사 양성 학교와 도미니코 수녀회의
여학교에서 독일어와 역사를 가르쳤다.
그리고 점차 후설의 관념론적인 철학 노선을 떠나
그리스도교 철학의 실재론적인 사상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계속 왕성한 교육 및 학문 활동을 하던 그녀는
발처 아빠스로부터 카르멜 수도원 입회를 허락받고
어머니와 힘겨운 이별을 나눈 뒤 1933년 10월 14일
쾰른의 카르멜 수도원에 입회하면서 수도명을
십자가의 테레사 베네딕타(Teresia Benedicta a Cruce)로 정하였다.
입회한 후에도 수도원 원장의 적극적인 학문 지원에 힘입어
지속적인 연구와 저술활동을 할 수 있었다.
1936년 9월 14일 첫서원을 하였으나,
바로 그 해 어머니가 사망하였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어머니가 지녀왔던 유대교 신앙을 존중해 주었다.
1938년 4월 21일 종신서원을 하였다.
그러나 나치의 유대인에 대한 위협은 날로 심해져 갔고,
성녀 테레사 베네딕타는 이를 피하기 위해 수도원의 주선으로
비밀리에 그녀의 언니 로사(Rosa)와 함께 네덜란드의
에히트(Echt) 카르멜 수도원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그녀는 십자가의 성 요한(Joannes)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는 저서
“십자가의 학문”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이때
네덜란드의 주교들이 독일의 반유대주의를 비난하였고,
이에 화가 난 히틀러는 모든 비아리안계 가톨릭 신자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 이로 인해 1942년 8월 2일 언니 로사와 함께
게슈타포에게 체포된 그녀는 많은 유대인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함께
아메르스포르트(Amersfoort) 수용소를 거쳐 베스터보르크(Westerbork)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 해 8월 7일 이들 중 987명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해되었는데,
두 자매는 이틀 후인 8월 9일 가스실에서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대인 여자 에디트 슈타인-저자 마르타 메스자로스(시간 97분,베네딕도미디어)
유대인 철학자이며 가르멜 수녀였던
에디트 슈타인(1891-1492)의 생애와 사상을 담은 영화.
독일의 브레슬라우(현재 폴란드령)에서 태어난 에디트 슈타인
은 현상학의 창시자인 에드몬드 후쎌의 애제자요,
조교로서 끊임없는 진리추구에 헌신했으며,
스피르, 뮌스터 등에서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였고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녀가 사망한 지 20년 만인 1962년 1월 4일
쾰른의 대주교 프링스(Josef Frings) 추기경은 그녀의 시복을 위한 소송을 제기하였고,
1980년에는 독일 주교회의를 거쳐 로마에서 시복절차를 위한
공식적인 청원이 이루어졌다.
그 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가
독일을 방문한 1987년 5월 1일 쾰른에서 순교자로 시복되었고,
1998년 10월 11일 로마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시성식에서 그녀를 “이스라엘의 탁월한 딸이자
전세계를 위한 성인으로서 교회의 충실한 딸”이라고 칭송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듬해 10월 1일 자의교서를 통해
시에나의 카타리나(Catharina) 성녀와
스웨덴의 비르지타(Birgitta) 성녀와 함께
유럽 대륙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 성녀 에디트 슈타인(1891∼1942)
1942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치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순교
한 유대인 출신의 철학자 겸 수도자.
전통적인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난 그녀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여성의 존엄성과 인간의 자유등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며
독일 현대철학의 제일선에서 활약.
그리스도를 죽인 유대인, 유대인을 증오하는 그리스도교 신자들,
유대인을 박해하는 독일인 사이의 화해는 십자가밖에 없다고 판단해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했다.
교황은 1998년 그녀를 시성하면서
“그녀는 자신과 자신의 민족에게 드리워진 죽음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해한 참 그리스도인”이라며
“그녀의 순교는 20세기 유럽사의 극적인 상징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