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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8월 1(일) [녹] 연중 제18주일

Berardus 2021. 7. 31. 05:30

[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8월 1(일)

[녹] 연중 제18주일

제1독서(탈출 16,2-4.12-15)

제2독서(에페 4,17.20-24)

복음(요한 6,24-35)

 

하늘에서 은혜로이 내리는 주님의 양식

 

온갖 불평과 불만에 사로잡혀

자존심 팽개친 이스라엘 백성

주님은 그들에게도 사랑 베풀어

세상 혼란해도 하느님 뜻 따르길

 

 

성경을 읽다 보면

성경이 왜 하느님의 말씀인지 깨닫게 됩니다.

온통 하느님의 생각일 수밖에 없다고

여겨지는 내용들이 가득하니,

도무지 인간의 생각을 넘어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성경에는 우리의 삶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해주는 힘이 있는데요.

하느님의 시선과 새로운 통찰력으로

땅의 모든 변화에 대처하는 지혜를 선물 받게 됩니다.

특히 요한복음에는 주님과의 대화 장면에

숱한 말씀의 심지가 담겨 있기에 그

것을 찾아내는 재미가 있지요.

하지만 오늘은 예수님과

이스라엘인들의 대화에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그토록 혼신을 다해서 주님을 찾았던 열성에 비할 때,

그들의 속마음이 너무나 허술한 것이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들에게는 주님의 뜻을 받아들여

실행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는 게 훤히 들여다보이니까요.

 

이렇게 따지니 오늘 독서가 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도 딱하기만 한데요.

어느새 하느님의 은혜는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하느님을 원망하기에 급급하니 답답합니다.

이것도 불만이고 저것도 성에 차지 않는다며

불평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인해서 노예생활에서 벗어난

참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진정한 자유를 놓치고 있으니,

갑갑합니다.

주님께 선택된 백성의 영예로움을 잃고 하느님 백성의

거룩한 자존심을 버린 그들의 모습이 초라하고 가엽기도 했는데요.

결국 진리이신 주님을 배척하는 결말에

이를 것을 알고 있으니, 더욱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건이

벌어진 이후의 상황을 전하는

성경의 문장에 마음이 쿵쾅댔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불평하는 소리를 들었다.”

하느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던 순간,

모세는 간이 콩알만큼 쪼그라들었을 것만 같았던 것이지요.

‘이제는 다 죽었다’라는 생각을 했을 것도 같았습니다.

모세의 입장에서 배은망덕한 그들의 행태는

하느님께서 분노를 터뜨리시는 것이

백 번 천 번 마땅하다 여겨졌을 테니까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전혀 상상 밖의 말씀을 내리십니다.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양식을 비처럼 내려 줄” 것이라는

따뜻하기 이를 데 없는 약속을 선포하십니다.

하느님만이 베풀 수 있는 이 놀라운 은혜에 모

세는 말문이 막혀서 입이 떠억 벌어졌을 것이라 싶습니다.

 

어쩌면 그날 주님을

애타게 찾아 헤매다 주님을 만났던

이스라엘 군중들이

주님의 진심을 외면했던 사건을 기록하던

사도 요한의 손이 가볍게 떨렸을 것도 같았는데요.

주님의 진리에 청맹과니처럼 따로 놀던 그들이 결국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고

기록해야 했던 현실이 너무 슬펐을 것이란 얘기입니다.

 

그날 그들은 혼신을 다하고

최선을 다해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을 찾아낸 그들은 진심으로 기뻐했습니다.

밤새 예수님을 찾기 위한 시간도 수고도 전혀 아깝지 않고

오히려 뿌듯하고 자랑스러웠을 것입니다.

물론 이제 곧 틀림없이 배부르게 빵을 먹고,

맛나는 생선을 먹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제일 기분 좋았겠지요.

때문일까요? 그들은 예수님께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합니까?”라는 순수한 질문을 드리며 다가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답변에

순식간에 심사가 뒤틀려버립니다.

이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라느니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라며 꼬치꼬치 따지듯

예수님을 들볶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를 믿게 하려면 먼저 이것도 해주고

저것도 처리해주어야 마땅하다는 뻔뻔한 모습입니다.

이야말로 험한 광야에서 밤낮으로 지켜주신 하느님의 은혜를

고작 “모조리 굶겨 죽이려고” 작정하는 못된 인간의 심사에 빗대며

툴툴대고 반항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똑 닮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진리로 답하시며

그들의 무지를 일깨워주려 애쓰시는 주님이 안쓰럽기만 합니다.

 

저는 그날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불평하는 소리”마저 끌어안으시는 분,

당신의 아버지를 기억하셨을 것이라 짐작해 봅니다. 지

금 당장, 시시때때, 일일이 판단하지 않고 평가하지 않으며

오래오래 참으시는 아버지의 지대한 사랑을

아버지와 똑같이 행하기 위해서 우리 예수님,

무척이나 애를 쓰셨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지금 세상이

혼란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서 모두의 일상이

좁아지고 짧아지고 불편해졌습니다.

그만큼 우울해지고 속이 상할 여지가 큽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우리의 기도는 그날

주님을 열심히 쫓았던 군중들과 달라야 하리라 싶습니다.

무엇 때문이냐고 캐묻고, 왜라고 따지며

주님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는 세상에서

하느님의 편이 되어드리면 좋겠습니다.

때문에 저는 오늘 “주님 안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아니, 간곡히 당부 드립니다.

힘든 세상에서 함께 아파하시며 변치 않는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고뇌하고 계신

주님의 성심을 헤아려 주십시오.

그렇게 언제나 어느 때나 당신의 은총을

“비처럼 내려” 채워주고 계신

하느님 사랑의 증거자가 되어주십시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의 뜻은 모두 좋고 선하십니다.”

아멘.

 

-장재봉 신부-

 

△제주 새미 은총의 동산

 

 

[한주간 전례]

 

2021년 8월 2일 (월) [녹]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4,13-21

 

‘가엾은 마음’은 애끊는 마음,

곧 자식의 고통을 보고

내장이 끊어질 듯한 고통을 느끼는 어미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 헤매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십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마르 6,34)입니다.

그 가엾은 마음은 예수님을 움직여

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보시고는

그들의 병을 고쳐 주십니다.

저녁이 되자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는 것을 알게 된 제자들은 군중을 돌려보내어

각자 스스로 먹을거리를 구하게 하자고 예수님께 건의합니다.

군중을 가엾이 여기시는 예수님께서는 빵과 물고기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시어

여자와 어린이들 말고 장정만도 오천 명 가량이나 배불리 먹이십니다.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는데,

이는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베푸신 선물이

열두 지파인 이스라엘에 풍성하게 흘러넘침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기적은, 하느님께서 모세 시대에

광야에서 베푸신 만나의 기적과 엘리사가

보리빵 스무 개로 백 명의 사람을

먹인 기적(2열왕 4,42-44 참조)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두 사건을 통하여

당신의 구원 계획을 실현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예수님께서 이르시자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다고 발뺌하던 제자들은

군중에게 빵을 나누어 주는 봉사를 합니다.

제자들도 이제 예수님의 마음,

곧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나 봅니다.

우리도 이기심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가엾이 여길 수 있도록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볼 때,

자신의 것을 나눌 수 있습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2021년 8월 3일 (화) [녹] 연중 제18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4,22-36

 

“유령이다!” 두려워 소리 지르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자 베드로 사도가 얼른 나서서 말합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걷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물에 빠집니다.

왜 물에 빠지게 될까요?

성경은 베드로가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져 물에 빠져 들기 시작했다고 전합니다.

 

아마도 “오너라.” 하시는 말씀을 듣고

배에서 내려 예수님께 향하던 베드로의 눈은

오로지 예수님만을 향하여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센 바람과 함께 물결이 일어 그의 뺨을 때리는 순간,

베드로는 예수님이 아닌 거센 바람 쪽으로 눈을 돌렸을 것입니다.

순간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아, 내가 물 위를 걷고 있네…….’ 하며

예수님을 잊습니다.

갑자기 발이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자 소리를 지릅니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아 살려 주십니다.

물론 한마디 하시지요.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물 위를 걷던 베드로 사도가

거센 바람을 보고 물에 빠진 것처럼,

‘나도 사제로 살면서 예수님이 아닌

세상의 것을 보는 순간 유혹에 빠질 수 있겠구나!’ 싶습니다.

그러나 이내 안도의 한숨이 쉬어집니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베드로 사도가 소리친 순간,

예수님께서는 바로 손을 잡아 구해 주셨습니다.

‘나도 예수님께 구해 달라고 소리치면 되겠구나!’ 생각하며

마음이 한결 편안해집니다.

물론 한 말씀 듣겠지만,

매달리기만 하면 그분께서 살려 주실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그 한 말씀은

“왜 의심하였느냐?”입니다.

이 말씀은 “왜 마음이 둘로 갈라졌느냐?”로

바꾸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며 그분만을 바라보는

삶의 자세가 우선되어야 하겠습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2021년 8월 4일 (수) [백]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은

1786년 프랑스 리옹의 근교에서 태어났다.

1815년 사제품을 받은 그는 시골 마을

아르스의 본당 사제로 활동하면서

겸손하고 충실한 목자로 존경받았다.

 

그의 고행과 성덕이 널리 알려지면서

여러 곳에서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는

정성을 다하여 영적 가르침과 고해성사를 베풀었다.

평생을 아르스에서 겸손하고 가난한 삶을 산 그에게

해마다 2만여 명이 고해성사를 받고자 찾아왔다고 전해진다.

1859년 선종한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를 1925년

비오 11세 교황이 시성하고,

4년 뒤에는 ‘본당 사제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복음묵상] 마태오 15,21-28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십니다.

이곳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항구 도시로,

이방인 지역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도착하시자마자

마귀가 호되게 걸린 딸을 둔 가나안 부인이 나타나 소리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가

나안 부인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쓰는

‘다윗의 자손’과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이 쓰는

‘주님’이라는 호칭을 한꺼번에 사용하며 간청합니다.

얼마나 다급해서였을까요?

그녀는 예수님 일행을 쫓아다니며 끈질기게 매달립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쓰여진 복음입니다. 그

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선민의식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이교도인 가나안 여인이

자비를 얻으려면 수모를 참고 받아야 하거나,

유다인 자녀들이 먼저 배불리 먹은 뒤에나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 한계를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뛰어넘어 예수님께서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다른 민족에게도 복음을 전하신다고 가르칩니다.

 

이 가나안 여자의 믿음 이야기는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는

가르침(마태 15,1-20 참조) 다음에 나옵니다.

유다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음식 규정을

무색하게 하신 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지역으로 들어가십니다.

이는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 선포를 암시합니다. 또

한 유다인들이 이방인들에 대한 적대감을 가졌음에도,

예수님께서는 가나안 여인의 청을 들어 그녀의 딸을 고쳐 주시고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비는 민족이나 종교를 차별하지 않고

모든 이에게 베풀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2021년 8월 5일 (목) [녹]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6,13-23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 사도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신앙 고백이 이루어진 카이사리아 필리피는

갈릴래아 호수에서북쪽으로 사십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유다인들이 사는 가장 북쪽 지역입니다.

베드로의 이 신앙 고백 사건을 기점으로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지방에서

복음을 선포하던 일정을 바꾸시어

예루살렘을 향하여 남쪽으로 내려가는 수난 여행을 시작하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고백함으로써 하느님께서는 거짓 신이나

생명이 없는 우상들과 달리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고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며,

그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

곧 ‘메시아’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이 신앙 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교회’라는 단어는 복음서에 두 번 나오는데,

이때의 교회는 건축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새롭게 불러 모으신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가리킵니다.

‘교회’(Ecclesia)라는 말은 ‘밖으로’(ex)라는 단어와

‘모으다’(clein)라는 단어가 합쳐진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사람들 가운데 우리를 불러 밖으로,

곧 당신에게로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세상 속으로 하느님의 일을 하라고 파견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

느님의 일을 하려면 목숨을 다하는

애끊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부활만이 아니라 십

자가의 죽음이 먼저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이 말씀은 ‘떠나라!’가 아니라

‘내 뒤로 물러가라!’입니다.

예수님 뒤로 물러나 예수님께서 걸으신

그 수난의 길을 따라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2021년 8월 6일 (금) [백]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 17,1-2).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은 공관 복음이

공통적으로 전하는 이 말씀에 따른 것이다.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을 기리는 축일이다.

 

오늘 축일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

(9월 14일)의 40일 전에 지낸다.

교회의 전승에 따라,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40일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인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보여 주시고자 거

룩한 변모의 표징을 드러내셨다.

1457년 갈리스토 3세 교황이 로마 전례력에 이 축일을 도입하였다.

 

[복음묵상] 마르코 9,2-10

 

예수님의 변모 이야기는

예수님의 수난 예고와 베드로의

수난 거부 사건 뒤에 자리하며,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더욱 확고히 하는 동시에

사람의 아들이 부활하리라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오르신

높은 산은 특별한 가르침이 이루어지는 곳이고,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 변모하시고

옷이 새하얗게 빛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하신다.’는

신앙을 가르쳐 준 모세와,

하느님께 되돌아갈 것을 가르치던 예언자를 대표하는

엘리야와 대화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천상의 존재요,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예수님의 변모 뒤에

구름 속에서 들려온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하신 말씀은

예수님의 세례 때 들려왔던 말씀인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마르 1,11)와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과 수난을 시작하시기 전,

곧 예수님의 삶에 큰 획을 긋는 중대한 전환점마다

하느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리고 오늘은 세례 때와는 달리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를 덧붙여

예수님의 수난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합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필리 3,21)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오심을 우리가 미리 맛보게 해 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사도 14,22)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도 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556항).

 

-(서철 바오로 신부)-

 

2021년 8월 7일 (토) [녹] 연중 제18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7,14ㄴ-20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간질병으로 고생하는 아들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애원합니다.

그를 고치지 못한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가

마귀를 쫓아내지 못한 이유를 여쭙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라며

제자들의 불완전한 믿음을 상기시키시고,

나아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못 할 일이 없다고 하십니다.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란 지금 이 순간

‘하느님의 전능하심에 온전히 의존하는가?’

아니면 ‘내 힘으로 하려 하는가?’의 싸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나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도 하느님께서 내 곁에 계실까?

여기에서 신학교에 다닐 때는 기도하고 시험을 보면

이상하게도 아는 문제가 나와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었는데,

그게 이탈리아에서도 통할까?’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첫 학기 첫 시험에 대비하여 45분 공부하고

15분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하루에 열 몇 시간씩 공부하였지만,

시험이 다가오자 불안감은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그래서 책을 덮고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느님, 제가 이 나이에 여기 로마까지 와서,

지은 지 400년도 넘는 건물 안에 갇혀

이게 뭐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친구 신부들은 지금본당 신부로 재미있게 살고 있는데,

저는 뭔가요. 이 나이에 시험공부를 하려니 정말 죽겠습니다!”

 

기도하고 나니 점차 편안해지며

마음속에서 이런 말이 올라왔습니다.

“하느님, 당신께서 저를 이곳으로 부르시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유학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께서 책임지십시오.

당신은 전능하신 분이시니

당신과 함께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공부할 터이니 함께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고 난 뒤 시험 준비를 하였더니

꼭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나왔습니다.

지금 하느님의 힘에 온전히 의탁합니까?

아니면 내 힘으로만 하고자 합니까?

 

-(서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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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낮의 온도가 30여도를 오르 내리는 날입니다.

무더위 속에서도 올림픽경기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모든 선수들이 이 경기를 위하여 준비해 온 것을 생각하면

금, 은, 동의 메달이 큰 보람으로 다가 올 듯 합니다.

우리도 올 해의 결실을 위하여 차근차근 준비해야겠습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