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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5월 16(일) [백] 주님 승천 대축일

Berardus 2021. 5. 15. 07:05

[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5월 16(일)

[백] 주님 승천 대축일

제1독서(사도 1,1-11)

제2독서(에페 1,17-23)

복음(마르 16,15-20ㄴ)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승천하신 당신 떠나보낸 뒤 하늘 보며 아쉬워하는 제자들
따뜻한 위로와 함께 “복음을 선포하여라” 말씀 남긴 예수님
이별은 또다른 만남의 약속… 이 땅에 주님 뜻 실현시켜야

 

 


존경하는 선배 신부님의 장례미사 때의 일입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수도자들의 경우 종신서원과 동시에

사후(死後) 시신 처리 및 장례 절차와 관련된 유언서를 작성 합니다.

저 같은 경우도 이미 인위적 연명 조치 포기,

시신 및 장기 기증 그리고 화장(火葬) 등을 요지로 한

유언서를 작성한 바 있습니다.

그 선배 신부님께서도 장기 및

시신을 기증한 상태였기에 장례 절차가 너무나 간단했습니다.

장례미사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니 의과대학병원에서 보내온

구급차가 기다리고 있더군요.

담당직원들의 숙련된 움직임에 의해

신부님의 관이 구급차 뒤의 공간에 실리고,

문이 ‘탁’ 닫히니 그걸로 모든 것이 끝이었습니다.

다른 장례식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따로 운구차도 버스도 대절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매장이나 화장에 필요한 비용도 필요 없었습니다.

장지에 따라갈 필요도 없었습니다.

구급차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참 허망했습니다.

진한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그제야 살아생전 신부님의 아름답고 멋진 생애가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떠오른 생각 하나, ‘마지막 가시는 순간까지 이렇게 ‘쿨’하게,

그리고 멋지게 떠나시는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때 제 머릿속에 떠오른 성경 한 구절이 있었습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사도행전 1,11)

승천하신 예수님을

떠나보내고 난 제자들의 심정

역시 신부님을 떠나보낸 우리의 심정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굉장히 허망하고 무척이나 아쉬웠을 것입니다.

스승님과 함께했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 찬 나머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분께서 떠나신

하늘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의 심정을 잘 헤아리셨던 예수님이셨기에 떠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되는 따뜻한 한 마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마르코 복음 16장 17~18절)

물론 제자들이 앞으로 수행해야 할 사명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은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코 복음 16장 15~16절)

■ 이해하기 힘든 예수님 승천 사건 앞에서

예수님 부활에 이은 승천,

그리고 성령 강림, 이 모든 사건들은 인류 역사 안에서

전무후무했던 특별하고도 기상천외한 대사건이었습니다.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너무나 기이한 사건이었기에

목격자들조차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때,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뢰 없이, 어린이다운 전폭적인 의탁 없이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하고 수용할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 각자 앞에 던져진 하나의 큰 과제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예수님의 승천을 바라보는

우리 각자의 시선을 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사랑의 눈, 희망의 눈이 필요합니다.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태도가 필요합니다.

어린이다운 신뢰심이 필요합니다.

교회 공동체와 함께,

교회 공동체 안에서 깨어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승천 앞에 뭐가 뭔지 제대로 파악이 안 된 우리들,

어리둥절한 표정 짓고 있는 우리를 향한 외침은 날카롭기만 합니다.

“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이제 하늘이 아니라 땅,

우리 모두가 아등바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으로 시선을 돌리라는 말입니다.

이제 이 지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라는 말입니다.

이 땅에 머무시는 동안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가르침과

업적을 찬양하며 인간 세상 안에서 그분의 공동체를 건설하라는 말입니다.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이 공존하는 이 세상에서

또 다른 그리스도, 제2의 그리스도가 되어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라는 말입니다.

■ 또 다른 이별 앞에서

승천 사건을 통해 제자들은

다시 한번 스승과 이별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번 이별은 지난번 이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이별입니다.

지난번 헤어짐이 고통과 슬픔의 이별, 엄청난 상처와 충격,

큰 두려움을 가져다준 이별인데 비해, 이번 이별은 축제의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영영 이별, 이제 떠나가면 다시 못 뵐 마지막 작별이 아니라

또 다른 만남을 전제로 한 잠깐의 이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의 첫 번째 이별 때의 분위기가 기억납니다.

떠나가시는 예수님께 대한 예의도 전혀 갖추지 못했습니다.

작별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목숨이 두려웠던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후환이 두려워 멀리멀리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비겁하게 골방에 숨어서 전해오는 소식을 듣곤 했습니다.

제자로서의 도리를 전혀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이별은 철저하게도 다른 분위기입니다.

예수님 부활 체험 이후, 눈이 밝아진 제자들,

늦게나마 귀가 뚫린 제자들은 비로소 예수님의 실체를 파악하게 됩니다.

이제 그분께서 만물의 창조주이자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제대로 된 신앙고백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을 떨치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더 이상 그들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없었습니다.

남은 것은 오직 하나, 죽기 살기로 예수님을 전하는 일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이었기에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기쁜 얼굴로 보내드릴 수 있었습니다.

비록 스승께서 자신들을 떠나가지만,

제자들은 한 가지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 무엇도 스승과 제자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다는 진리 말입니다.

그 어떤 권력자도, 그 어떤 두려움도, 죽음조차도

스승 과 제자 사이를 떨어트려 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제자들은 언제 어디서나,

그 어떤 상황에서나 스승께서는 자신들과 함께

하시리라는 사실을 완전히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역시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더 이상 외로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소외시킨다할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크게 신경 쓸 것도 없습니다.

그저 주님께서 내 일생 전체에 걸쳐 함께 해주실 것이니 감사하고

기뻐하며 찬양 드리는 일, 그것만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양승국 신부-

 

▲서울 돈암동성당 성모상

 


[한주간 전례]

2021년 5월 17일 (월) [백] 부활 제7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요한 16,29-33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나약한 모습으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이 끝이 아님을 당신의 부활로 보여 주십니다.

또한 세상의 모든 악과 그의 권세인 죽음에 대한 승리임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라는

사도 신경의 부활 신앙은, 빈 무덤이 주님의

부활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가 아니더라도,

제자들이 체험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이며 역사를 초월하는 사건’이라고

(『가톨릭 교회 교리서』, 639-647항 참조)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괜히 모든 것을 잃고

손해 보는 것’으로 여겨지는 예수님의 방법은

인간 세상의 방법과 전혀 다름을 알게 해 줍니다.

무조건적이며, 아낌없이 내어 주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은 사랑”이심을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통하여 세상에서 승리하게 될 것이며,

사랑을 통하여 움츠려 있던 우리의 몸을 펴고 용기를 내어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렵고 힘들수록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는 자신의 것을 내어 주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삶에서 지치고 힘들 때마다

우리에게 위로와 힘을 주는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그리스도 안의 새 생활’(로마 12,1-21 참조)을 실천하도록 노력합시다.

우리는 부활의 삶을 향하여 용기를 내어 나아가야 합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

2021년 5월 18일 (화) [백] 부활 제7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요한 17,1-11ㄴ

오늘 복음은 성자께서

자신의 전 존재를 성부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왔음을 아시고

그 시각을 향하여 나아가십니다.

이 ‘때’는 사람의 아들이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순종과 겸손으로 이루어진,

영광스럽게 되는 때이며(마태 25,31 참조),

성자께서 성부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때입니다.

또한 성자를 보내신 성부께서 이끌어 주시어(요한 6,44 참조)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을 거저 선물로 받는 때입니다.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히브 9,14)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날마다 성찬례를 통하여

당신의 생명에 동참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미사 안에서 믿음으로 주님을 알아봅니다.

미사 때 사제가 “신앙의 신비여!”라고 말하는 순간은

얼마나 오묘하고 신비스러운 시간입니까?

사제가 “신앙의 신비여!”라고 말할 때,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신비하고 거룩하며

기쁨으로 가득 찬 부르심에 동참하기로 다짐하며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라고 응답합니다.

이 응답에는 십자가와 부활로 길이 영광받으시는 주님을 찬미하며,

우리가 이 신비로운 ‘때’의 증인으로 살겠다는 다짐이 들어 있습니다.

단 한 번의 희생으로 우리의 죄를 씻으신(히브 7,27 참조)

주님을 따라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가겠다는 다짐입니다.

우리는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으로

매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미사에 참례하기도, 성체를 모시기도 어려운 시기입니다.

그렇기에 죽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성체를 모시는 것이

소원이었던 순교자들의 신앙심을 배우게 됩니다.

여러 어려움으로 성체를 모시기 어렵더라도 우리의 삶에서

사랑을 실천하기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체를 모실 수 있는 미사에 참여할 수 있는 시간을

적극적으로 찾아, 신앙의 신비에 참여하도록 노력합시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5월 19일 (수) [백] 부활 제7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요한 17,11ㄷ-19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고

성부께 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기쁨을 충만히 누린 이들로 이 세상은 변화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 것처럼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느님께 속한 사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회칙 「복음의 기쁨」에서

‘세상의 소비주의와 자기만족의 탐욕스러운 마음과

가벼운 쾌락에 대한 무절제한 추구,

무뎌진 양심은 우리에게 세상의 만족만을 찾게 하고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기쁨을 더 이상

느낄 수 없게 한다.’(2항 참조)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것만 찾으려는 마음을 지닌다면

더 이상 충만한 기쁨의 삶을 살지 못하고

성령 안에서 사는 삶도 살 수 없습니다.

충만한 주님의 기쁨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오고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언제나 새로운 기쁨을 누립니다.

이 기쁨은 주님께서 누구에게나 주시는 기쁨으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 얻어집니다.

주님과 인격적 만남을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 모르겠다면,

기도의 깊은 기쁨 속에서 주님을 체험하기 어렵다면,

먼저 내 주변의 이웃이나 가까운 가족과 지인에게

나눔을 통하여 다가가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친히 이르신”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라고 전합니다.

주님과 인격적으로 만나 누구도 빼앗아가지 못하는 충만한 기쁨으로 살아갑시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웃에게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5월 20일 (목) [백] 부활 제7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요한 17,20-26

오늘 미사의 화답송에서 시편 저자는

“하느님, 저를 지켜 주소서.

당신께 피신하나이다.”라며 애절하게 기도합니다.

이는 우리가 언제나 어디서나 주님께 바치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갖은 핑계와 불만으로 투덜대며 주님을 외면하고,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흔들릴 때도 있지만

하느님의 인도 없이 우리의 인생은 무의미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어려움에 닥칠 때 피신할 곳은 결국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대단한 가문의 자손이며,

뛰어난 학식과 능력을 가진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힘들고 어려운 삶,

때로는 매 맞고 비난받는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옥에 갇히지만 그 누구보다 행복하고

기쁨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갑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에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1항)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지금까지

자신이 살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삽니다.

때로는 우리의 삶이

의롭고 거대하다고 느끼지만

예수님 앞에 서면 한없이 이기적이고

세상적이며 불행한 삶임을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주님과 하나 되지 않으면 우리는

착각과 자기 합리화에 빠져 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

당신 안에 하나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이 일치의 삶은 우리를 변화하게 하고,

기쁨으로 가득 찬 삶으로 이끕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5월 21일 (금) [백]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요한 21,15-19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주님께서 ‘베드로를 특별한 부활의

증인으로 삼으신 것은 그 위에 교회가 세워지는 반석이 되라는

사명에 대한 확증’이며,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는 주님의 파견 사명으로

베드로는 교회를 형성하는 토대’가 되었다고 하십니다(『나자렛 예수』 1권 참조).

사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사제품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양들을 돌보시고자

“나의 양을 사랑하겠느냐?”라고 묻지 않으시고,

오히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는 점입니다.

사목의 대상을 사랑하는 데 필요한 것은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

‘주님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분과의 연결이 없다면,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양을 돌보되

“삯꾼”(요한 10,12)에 지나지 않으며 “착한 목자”(요한 10,11)는 될 수 없습니다.

사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라는 사실은

사목자뿐 아니라 교우들에게도 해당합니다.

성당에 다니는 이유가 ‘주님을 믿으려고’라고 말하면서,

주님보다는 성직자나 수도자 또는 신자들을 보고

쉽게 낙담하거나 슬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로는 베드로처럼 주님을 따르다가도 뒤돌아 섰다가 회개하며

다시 주님께 돌아오기를 반복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어보셨듯이 우리에게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할까요?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주님을, 주님만을 사랑하고 바라보는 것도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5월 22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요한 21,20-25

주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 베드로와 안드레아

그리고 요한과 야고보를 제자로 부르시자,

그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나섭니다(마태 4,18-22 참조).

오늘 복음에서는 이처럼 모든 것을 지체없이 버렸던

베드로의 모습이 조금 낯설게 느껴집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의 앞날이 궁금했는지

아니면 자신과 비교하고 싶었는지

베드로는 그 제자의 미래에 관하여 여쭙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을 처음 따라 나설 때 가졌던 단순함과

성실함으로 자신의 사명에 충실하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거나 남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저마다의 탈렌트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경쟁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뒤처질까봐

두려워하고, 끊임없이 비교하며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고유한 탈렌트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다 보면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만 하다가 길을 잃게 됩니다.

비교는 그만 멈추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연연하지 말고,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처럼 그분 곁에서 나에게 주신 은총과

사랑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지 되돌아보고 감사해야 합니다.

생존 경쟁이 일상화된 현대의 삶에서

남과 비교하여 고통스러워하며 불안하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나는 누구인가?’ 늘 성찰하며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저마다의 소명에 따라 기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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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님들!!

점차 무더워 지는 날씨입니다.
아침, 저녁으로는 제법 쌀쌀하더니만 갑짝스럽게 한 여름입니다.
더운 날의 마스크는 여러모로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그래도 너와 나, 우리를 위하여 참아야겠습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