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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3월 21(일) [자] 사순 제5주일

Berardus 2021. 3. 20. 06:24

2021년 3월 21(일)

[자] 사순 제5주일



사순 제5주일

제1독서(예레 31,31-34)

제2독서(히브 5,7-9)

복음(요한 12,20-33)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을 빼는 시기, 사순

주님 영광의 길에 참여하기 위해 수난과 죽음은 필수적인 것
이단에서 말하는, 희생과 헌신 없는 성공이란 있을 수 없어
내 작은 죽음을 통해 조금이나마 하느님 뜻이 이뤄짐을 알아야


제가 사목하고 있는 피정센터는

아주 한적한 바닷가에 위치해 있습니다.

정 붙여 살아가다 보니 주변의 것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겨울은 그야말로 황량함 그 자체였습니다.

매서운 추위와 강풍, 폭설과 길고도 지루한 밤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봄이 다가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상황은 반전됩니다.

잠잠하던 어촌이 역동적인 활력으로 가득 찹니다.

지천으로 피어오르는 꽃들이 눈을 즐겁게 합니다.

참숭어나 도다리, 우럭이며 놀래미가 다시 돌아와 낚시꾼들을 유혹합니다.

아직 낚시하기엔 이른 계절이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까운 갯바위로 나갔습니다.

아니라 다를까 역시나였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잔챙이 한 마리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아닌가 보다.’ 하고,

낚싯대를 접으려는 순간, 아주 미세한 입질이 왔습니다.

잽싸게 챔질을 해서 끌어올렸습니다.

잡혀 올라온 녀석은? 복어 중에서도 제일 졸병인

새끼 손가락만한 졸복이었습니다.

꽉 물고 있는 바늘을 조심스럽게 빼내서,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는데,

녀석의 행동이 정말이지 웃겼습니다.

잔뜩 몸을 부풀려 엄청 빵빵해진 것입니다.

나름 저보고 위협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 무서운 고기니 건들지 마라’는 표현 같았습니다.

그런 녀석의 모습에 무섭기는커녕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다시는 오지 마라’며 저 멀리 던져 줬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하느님 눈에 복어 새끼나 나나

별반 다를 바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별것도 아니면서 틈만 나면 자신을 있는 대로 부풀리는 모습,

든 것도 없으면서 잔뜩 스스로를 과대포장하는 모습,

회칠한 무덤처럼 속은 심하게 부패했으면서도

겉만 번지르르하게 닦고 있는 모습이

어찌 그리 꼭 빼닮았는지요.

사순 시기가 깊어 가고 있습니다.

남아 있는 기간 동안 작은 목표를 세워 실천해 봐야겠습니다.

뻣뻣해진 목이나 어깨에 힘을 빼는 작업,

과대포장을 벗겨낸 후,

있는 그대로의 내 부끄러운 실체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작업,

나는 꽃이요 주인공이 아니라 잎이요

조연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작업.

■ 영광의 길에 참여하기 위해 수난과 죽음은 필수입니다!

유다인들의 대축제이자

큰 명절이었던 과월절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3년여에 걸친 공적 활동을 마무리 짓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수난-죽음-영광의 때’가 이르렀음을 아신

예수님의 머릿속은 백 가지 생각이 교차되며,

무척이나 산란했을 것입니다.

오래 전부터 당신만을 위해 기획되고 준비된,

끔찍하고 처절한 수난과 죽음의 독무대 위로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마음이 괴로웠을까요?

그러나 아버지께서 맡겨 주신 세상과

인류의 구원이라는 큰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단 한 발자국도 회피하거나 물러설 수 없는 길이라는 것을

또한 잘 알고 있으셨으니,

얼마나 마음이 심란했을까요?

뿐만 아니라 아직도 갈 길이 먼 제자단과

당신의 사랑하는 양떼를 남겨 두고 떠나셔야 한다는 생각에,

얼마나 걱정이 앞섰을까요?

참으로 두렵고 착잡한 마음을 달랠 길 없었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애써 부정적인 감정들을 떨치십니다.

호의적이지 않은 모든 상황들을 모두 아버지께 맡겨 드리며,

군중들을 위한 마지막 강연을 펼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12,24-25)

이제 지상에서의 과제를 120% 완수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앞에 남아 있는 마지막 관문인 수난과 죽음의 길을 떠나시면서,

우리에게 남기시는 말씀의 핵심 키워드는 ‘밀알 하나’였습니다.

내어놓음이나 희생, 변화나 쇄신, 결국 죽음을 거부하는 밀알은

언제까지나 그저 한 알 밀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기꺼이 자아를 포기하고 길을 떠날 때,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의 성장과 변화,

열매와 발전을 희망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이비 교주들이나

이단자들이 크게 강조하는 바가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고통을 건너뛰는 행복입니다.

희생이나 헌신 없는 성공입니다.

말도 안 되는 기적의 연출입니다.

십자가 길 대신 꽃길 보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영광의 길에 참여하기 위해

수난과 죽음은 필수라고 강조하십니다.

두렵고 떨렸지만 점점 다가오는 죽음을 용감하게 수용하십니다.

내적인 갈등이 커질 때마다 아버지를 생각하고,

아버지께 의탁하며,

언젠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드러날

아버지의 영광을 꿈꾸며,

얼마 남아 있지 않은 당신의 여정을 힘차게 걸어가십니다.

제자인 우리들 역시,

스승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열심히 따라 걸어가야겠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한 배에 승선한 운명 공동체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운명은 곧 우리들의 운명입니다.

우리도 두려움을 떨치고 그분께서 선택하신 수난과 죽음의 길,

그러나 영광의 길을 기꺼이 선택해야겠습니다.

죽음은 오늘 제자들인

우리에게 다양한 형태로 다가옵니다.

고통이 극심할 때, 포기하고 싶어질 때는 ‘죽을 각오’로,

더 열심히 이 세상을 살아가야겠습니다.

미운 감정이 폭발할 때는 순교자의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고 용서해야겠습니다.

예수님 한 분의 희생과 죽음으로

온 세상과 인류에게 구원이 다가왔듯이,

오늘 내 작은 희생과 헌신, 작은 죽음을 통해 작게나마

아버지의 뜻이 이뤄짐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오늘 이 작은 나의 희생과 봉사,

작은 죽음이 절대로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스승님의 십자가 길에 깊이 동참하는

사랑의 길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닌다.

‘죽어야만 산다’는 이 역설(逆說)의 진리 앞에

오늘도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수긍하지만,

구체적인 현실 앞에 서게 되면,

심한 갈등과 방황을 거듭하게 됩니다.

스승님께서는 당신의 온 생애, 삶과 죽음을 통해서

그 역설의 진리를 명백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관건은 ‘오늘 우리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이웃을 향한 적개심과 분노,

복수심과 미워하는 마음에서 죽어야겠습니다.

틈만 나면 얼굴을 내미는 교만함과 우월감으로부터 죽어야겠습니다.

주님이나 공동체가 아니라 나를 돋보이게 하고

빛나게 하려는 교만함에서 죽어야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매일 겪게 되는 우울감이나 무기력함,

게으름과 나태함에서 죽어야겠습니다.

-양승국 신부 -

 

▲꽃피울 준비하는 꽃잔디

 

 


[한주간 전례]

2021년 3월 22일 (월) [자] 사순 제5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요한 8,1-11

사순 시기를 마무리하면서

어려운 숙제를 하는 기분으로 고해소 앞에 섭니다.

마음속에 가득한 미움과 증오가 왠지

스스로를 더 초라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을 외면하고 예수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던 때가 생각나 가슴이 저려 옵니다.

머리 속에서는 용서할 수 없고,

용서하고 싶지도 않은 사람들이 떠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용서하라는 그 말씀이 더욱 무겁게 가슴을 짓눌러 옵니다.

큰 죄를 지은 여자가 유다인들 앞에 있습니다.

용서 받지 못할, 용서해서도 안 되는 죄를 지은 여자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여자를 용서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들에게 용서를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그들이 용서하게끔 기다려 주십니다.

용서를 위하여 먼저 자신을 바라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자신의 모습을 둘러볼 시간을 주십니다.

다른 사람이 저지른 아흔아홉 개의 죄만 바라본다면

용서의 마음은 결코 생기지 않습니다.

눈을 돌려 자신이 지은 작은 죄 하나라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용서는 시작됩니다.

그 누구도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자신은 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교만과

오만의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용서의 시작은 다른 이들이 지은 큰 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작은 죄를 바라보면서 시작됩니다.

또한 용서는 무관심이 아닙니다.

용서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내 마음의 평화만을 위하여,

나 한 사람의 구원과 깨끗함만을 위하여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를 청하지 않는 자에게,

자신이 어떤 잘못을 하였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무관심일 뿐입니다.

그들이 잘못하였다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불의한 마음에 하느님의 정의를 새겨 주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가 잘못을 깨달았을 때 용서는 이루어집니다.

우리 모두가 죄인임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우리 앞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3월 23일 (화) [자] 사순 제5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요한 8,21-30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잊지 말자고

다짐하였던 어떤 분의 이름을 들었습니다.

지금은 보고 싶을 때 찾아가도 볼 수는 없지만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그분과 함께하였던 추억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분의 목소리, 함께 나누었던 대화, 호탕한 웃음소리,

호기심 어린 눈빛. 우연히 듣게 된 그 이름 때문에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추억을 다시 꺼내어 봅니다.

이름은 단순히 어떤 사람의 명칭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드러내고,

그 이름으로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찾아와 여쭙니다.

“당신이 누구요?” 예수님께서는 그 질문에

‘나는 나자렛 사람 예수요.’라고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임을.” 이 대답은 유다인들에게 익숙한 이름입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느님을 만나 들었던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 ‘있는 나, 야훼’라는

하느님의 이름을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또한 그 이름을 깨닫는 사건은

오늘 독서의 ‘불 뱀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불 뱀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물어 죽였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자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시켜

기둥에 구리 뱀을 달아 그것을 쳐다보면

불 뱀에 물린 자들이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이야기하십니다.

당신과 아버지 하느님께서 하나이심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이름을 듣고 누군가는 하느님과의 추억과 관계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예수님!’

이 이름을 듣고 어떤 추억을 떠올립니까?

그분께서 보여 주신 삶의 이야기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예수님이라는 이름을 듣고 우리는 그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설레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만약 삶의 무게에 짓눌려 그 이름을 잊고 살았다면

부끄럽고 죄스러운 마음으로 다시 불러 보았으면 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최종훈 토마스 신부) -


2021년 3월 24일 (수) [자] 사순 제5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요한 8,31-42

여러 지역을 돌아다녀야 하는

소임을 맡아서 차를 타고 이동할 때가 많습니다.

하루는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잠시 다른 생각에 잠겨

고속도로 진입로를 지나쳤습니다.

차를 돌려 다시 고속도로 진입로를 찾으려고 하였지만

차를 돌릴 만한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시간도 넉넉하였기에 급하게 차를 돌리지 않고,

더 오래 걸리는 국도를 이용하여 목적지를 향하여 달렸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는 매 순간 선택해야 합니다.

언제나 갈림길에서 어느 한 곳을 선택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한 선택에 정답은 없습니다.

누구도 강요하거나 요구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정답이라 생각하는 쪽을 택하고,

그 선택에는 언제나 책임과 의무가 뒤따릅니다.

우리는 그런 선택, 곧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행하는 것을 ‘자유’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고 싶다고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하려는 일을 행하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자유라며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자신만을 생각하며 선택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선택은 자유가 아닌 방종일 뿐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자유는 하고 싶은 대로

행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왜 하고 싶은지에 대한 이유를 찾는 것이라고들 합니다.

다시 말하여 진정한 자유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진리, 곧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무르며 세상에 대한 예수님의 신념과 가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시선과 기준을 알고 깨닫는다면

우리는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선택의 이유가 된다면,

우리는 어떤 것을 선택하고 무슨 행동을 하여도

참으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선택, 곧 예수님을 박해하고 심판하고 죽이는 이유는

성경 말씀이나 하느님의 가치와 기준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이익과 명예에만 그 이유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선택과 행동은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살아가며 선택의 순간마다

우리도 예수님의 이유와 시선으로,

그분의 가치와 기준으로 주위를 보면 무엇을 하든

어떻게 행동하든 우리의 삶은 옳을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선택은 언제나 사랑일 것입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3월 25일 (목) [백]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은

말 그대로 주님의 탄생 예고를 기념하는 날이다.
예전에는 ‘성모 영보 대축일’이라고 하였는데,

‘영보’(領報)란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천사에게서 들었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도 여느 사람처럼 성모님의 모태에서

아홉 달을 계셨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 대축일의 날짜는

주님 성탄 대축일에서 아홉 달을 역산한 것이다.

[복음묵상] 루카 1,26-38

세상에는 지금도 삶과 죽음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어딘가에서는 사고로, 전쟁으로, 무관심으로,

미움과 욕심으로 사람들이 죽어 나갑니다.

그런데 또 어딘가에서는 사랑으로, 믿음으로, 위로와 배려로,

희생으로 또 다른 생명을 얻어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각자의

삶에도 삶과 죽음이 연결되어 있고,

또 우리 곁에 삶과 죽음이 가까이 있음을 알아 갑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시기심과 질투로, 이기심과 욕심으로

누군가를 짓밟고 죽이며 살아가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하고 배려하며 위로하고 안아 주면서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 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저마다 행동으로 삶과 죽음을 반복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보내는 사순 시기,

유다인들의 시기와 욕심으로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와 술수가 난무하는 이 사순 시기에 생명의 탄생을,

새로운 구원의 삶을 가져다주는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는 대축일을 지냅니다.

그런데 그 새로운 생명의 탄생 예고에도

우리네 하루처럼 삶과 죽음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천사의 알림은

젊은 약혼녀의 죽음을 뜻합니다.

천사를 보고 죽음의 두려움을 체험한 마리아는

모든 것을 거부할 수 있었습니다.

더 편하고 더 안정적인 삶을 살고자 마리아는

아무런 응답도 행동도 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마리아가 천사의 말을 거부하였다면

그 마음은 예수님을 시기하여 음모를 꾸미고

군중을 선동하였던 유다인과 별반 다르지 않은 마음일 것입니다.

자신만 살려고 누군가를 죽이려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한마디로 자신을 희생하고 내어놓음으로써 모든 사람을 살리게 됩니다.

우리의 선택과 결정으로 누군가를 죽이는 길을 갈 수도 있고,

아니면 희생과 죽음으로 다른 사람을 살리는 길을 갈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죽이는 것, 두렵지만 믿고 내어놓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살아가는 우리의 선택이 되어야 합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3월 26일 (금) [자] 사순 제5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요한 10,31-42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기도,

미워하기도 합니다.

그 가운데 후자의 경우가 더 많다고 느낍니다.

나에게 상처를 주어서 미워하기도 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아 가서 미워하기도 합니다.

나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에 미워하기도 하고,

나를 이해해 주지 않기에 미워합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누군가를 미워하기 시작하면

그 마음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기도 가운데 수천 번 미워하지 말자고 되뇌어 보지만,

그 결심과 결단은 미워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순간 무너지고 맙니다.

그 사람이 어떤 좋은 일을 하더라도,

아무리 착하고 선한 행동을 하더라도

우리의 그 미워하는 마음 때문에 선한 행동이

우리에게는 나쁜 의도를 가진, 선을 가장한 악한 행동으로 보입니다.

우리의 그 맹목성은 그렇게 우리를 미움의 구렁텅이로 빠뜨립니다.

오늘 복음의 유다인들도

미움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은 미움과 증오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신

좋은 일들을 나쁜 일들로 여깁니다.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누리는 것들을 빼앗으신다고 느낀 순간

예수님께 쏠렸던 군중의 인기와 환호는 이제 마움과 분노로 바뀝니다.

사람들을 위로하고 약자들을 보호하며 고통을 함께 겪으셨던

예수님의 그 선한 일들은 그들에게는 자신의 것을

빼앗아 가려는 나쁜 의도를 가진 일들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또한 유다인들은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가지신 예수님을 미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믿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아들딸이라 이야기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유다인들에게 매력적인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고 친근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좋은 이야기라 하더라도 이미 자신들의 생각과는

다르기에 예수님을 반대하고 싫어하며 미워합니다.

우리도 미움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거리며 좋은 일을 나쁜 일로,

좋은 생각을 나쁜 생각으로 판단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더욱 미워하고 반대하며 더욱 격렬하게 갈라섭니다.

우리는 유다인들과 같이 어리석게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나와 생각이 다르고, 나에게 상처를 주고,

나의 것을 빼앗아 갔더라도 나보다는 우리를 생각하고,

마음이 아니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미움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맹목적이고 어리석은 시선에서 벗어나,

용서하고 받아들이며 사랑합시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3월 27일 (토) [자] 사순 제5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요한 11,45-56

세상을 보고 있자면, 분노가 솟구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에만 몰두하여

정의와 공정이라는 필수적 가치를 팽개쳐 버립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숨기려 거짓으로 일관합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쳤던 사회는 조금도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자 작은 희생은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여기며 사람들을 선동합니다.

이천 년 전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많은 표징과 사랑은 보지 않은 채,

자신들의 이익과 권력에만 몰두하며 희생양을 찾고 있습니다.

그것도 자신들이 가진 권력과 힘으로,

교묘한 술책과 모함으로 사람들을 선동하여

아무런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오늘 복음 내용은

사순 시기의 마지막을 보내는 우리를 분노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순 시기를 지내 온

우리 자신에게는 분노하지 않습니다.

나에게만은 관대합니다.

하느님의 가치와 사랑을 외면할 때도 많았습니다.

누군가의 아픔과 고통에 함께해 주지도 못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은 아주 샅샅이 살피면서도

이기심으로 말미암은 나의 행동은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방종하였고 게을렀습니다.

잘못을 숨기고 실수를 그럴듯하게 포장하며,

다른 이들을 탓하면서 핑계를 대었습니다.

복음을 읽으며

분노하였고 세상을 보며 분노하였으니,

이제 스스로를 보며 분노하기 바랍니다.

그래서 결국 더 나은 나로, 더 나은 사회로,

더 나은 신앙으로 거듭나기를 기도해 봅니다.

그리하여 참으로 기쁜 부활을 맞이했으면 합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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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내음이 물씬 풍기는 요즘입니다.
그래도 새벽녁이나 저녁 나절에는 옷깃을 여미게 합니다.
봄날과 더불어 진행되는 사순시기
주님의 부활과 함께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모든 것이 정상화 되길 기도합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