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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3월 28(일) [홍] 주님 수난 성지 주일

Berardus 2021. 3. 28. 14:55

[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3월 28(일)

[홍]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제1독서(이사 50,4-7)

제2독서(필리 2,6-11)

복음(마르 14,1-15,47)

 

십자가는 성덕의 길입니다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 갖은

모욕과 박해도 이겨내고 주님께 온전히 자신을 봉헌하며

인간 구원 위해 십자가를 지셨네.

 

성지를 손에 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하느님의 아드님’,

우리 주님을 찬미합니다. “호산나, 호산나!”

오늘부터 시작되는 성주간 전례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맑은 정신으로 동참하는

빛의 자녀에게 파스카신비를 선사합니다.

 

이사야 예언자(기원전 8세기)는

‘민족들의 빛’인 ‘주님의 종’을 노래합니다.

초대교회와 그리스도 전승에 따르면

그 셋째 노래(제1독서)는 하느님의 소명을 다하는 충실한 종이고,

주님을 신뢰하여 모든 모욕과 박해를 이겨내는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초대교회 공동체들이

그리스도의 신비를 노래한 시편을 전합니다.(제2독서)

하느님과 같은 분이시면서도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십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님이심을 고백하며,

성부께 영광을 드립니다.

 

오늘의 전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을 기념합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오시는 길에 겉옷과 잎이 많은 나뭇가지를 깔며 환대합니다.

어린이들도 손에 올리브나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높은 데서 호산나!” 찬가를 부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마르코 복음 14~15장)는 종교 지도자들의 음모로 시작됩니다.

주님의 몸에 바르는 향유, 최후의 만찬, 겟세마니에서 고독한 기도,

유다의 배반과 베드로의 부인, 예수님의 체포와 심문,

주님의 침묵, 죽음 앞에 바친 기도가 주요 사건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조금 떨어진 베타니아에서

마리아(요한 12,3)는 수난이 임박한 주님의 몸에 나르드 향유를 바릅니다.

성유축성 미사로 그리스도의 향기가 세상에 풍깁니다.

 

성목요일,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과 파스카 음식을 나눕니다.

양고기가 아닌 빵과 포도주를 들고 감사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누는 ‘최후의 만찬’입니다. 친히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신 희생 제사는 재림 때까지 기억하는 감사 제사입니다.

 

마음이 괴로운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로 가시어

제자들에게 ‘깨어 있어라’ 당부하고,

땅에 엎드려 ‘피땀을 흘리시며’(루카 22,44) 기도하십니다.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전능하신 성부께

수난의잔을 거두어 달라고 청하십니다.

아버지의 뜻을 받들며 자신을 봉헌하는 기도입니다.

“깨어 있으라!”는 당부의 말씀에도 제자들은 졸고 있습니다.

 

스승을 배신한 유다의 입맞춤에

칼과 몽둥이를 든 무리가 예수님을 체포합니다.

제자들은 스승을 버리고 달아나고,

으뜸 제자인 베드로도 새벽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그리스도는 고독한인간의 죽음을 맞습니다.

 

대사제의 심문과정에

수많은 거짓 증언에도 예수님은 침묵하십니다.

“당신이 메시아요?” 질문에만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것이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사형선고를 내릴 권한이 없는 수석 사제들은 최고 회의와 의논 끝에

주님을 결박하여 빌라도에게 넘깁니다.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빌라도의 질문에, 예수님은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라고 대답하신 뒤 계속 침묵하십니다.

‘호산나!’ 노래를 부른 군중들은 성금요일에 변덕을 부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외쳐댑니다.

빌라도는 군중을 만족시키려고 채찍질과 십자가형을 내려 넘겨줍니다.

군사들은 주님께 가시관을 씌워 골고타(해골 터)로 갑니다.

 

공생활 초기부터 종교지도자들과 갈등을 겪으시면서도

반격의 거장이시던 예수님께서

좌우에 못 박힌 자들처럼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그들의 냉소적인 태도와 굴욕과 조롱을 끝까지 인내하시고,

거짓 증언과 빌라도의 물음에도 끝까지 침묵하십니다.

 

성금요일 오후 3시,

십자가상 주님은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마르 15,34)”

큰 소리로 부르짖으시고 숨을 거두십니다<무릎을 꿇고 잠깐 묵상함>.

완전한 자기 비움(kenosis)으로 바치는 마지막 기도입니다.

 

침묵하시는 하느님은 듣고 계시고, 비극은 전환됩니다.

성전 휘장이 두 갈래로 찢어져 사람이 지은 성전이 아닌

‘주님의 식탁’인 새 성전이 세워짐을 알립니다.

백인대장은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합니다.

마르코 복음의 시작(1,1)에 나오는

‘하느님의 아드님’을 이방인이 증언함은 주님 수난의 첫 결실입니다.

 

적의 없는 주님의 십자가 희생 제사는 성부께 영광이 되고,

교회에는 친교와 사랑의 일치를 이루는 성사의 은총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

(마태 16,24; 마르 8, 34: 루카 9,23)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주님께 부끄러운 내면을 정화하고,

기도와 성사로 신심을 길러 온유와 겸손으로

사랑하는 삶이 기쁨이요 구원의 희망입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아멘.

 

-김창선(요한 세례자)-

[한주간 전례]

 

2021년 3월 29일 (월) [자] 성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요한 12,1-11

 

오랫동안 알던 분의 건강이 많이 좋지 않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하느님 곁으로 가실 시간이 가까워졌다는 소식도 함께 말입니다.

급한 마음으로 차를 몰아 병원에 도착하여 그분을 보았습니다.

활달하고 활기찼던 모습은 사라진 채, 야위고 안쓰러운 모습이었습니다.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는 그분께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손잡고 함께 기도하고

생의 마지막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도록

이마와 손에 기름을 발라 주는 것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고는 일주일 뒤에 부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분의 안식을 위하여,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죽음을 준비하십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을 기념하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

‘순명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베타니아’에 있는

라자로와 마르타, 마리아의 집에서 열린 잔치에 참여하십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아 드리는 일은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다가올 두려움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유다 이스카리옷은 오직 자신의 돈주머니에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향하여 한 발짝 더 내딛으실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여러분은 어떤 역할을 맡으시겠습니까?

마리아입니까? 아니면 유다 이스카리옷입니까?

죽음의 길을 함께 걸어간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 길을 걷는 것 자체도 어렵겠지만 그 길의 끝이

헤어짐이라는 사실은 우리를 더 아프고 힘들게 합니다.

이제 마리아처럼 우리도 그 길을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죽음을 향하여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발걸음에 우리도 한 발짝 더 다가가기를 기도합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3월 30일 (화) [자] 성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요한 13,21ㄴ-33.36-38

 

인생에서 아픈 상처로 남아 있는

기억 가운데 한 부분은 누군가에게 배신당한 기억일 것입니다.

자신의 성공과 이익을 위하여 나의 사랑을 이용한 연인,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며 걸어갔지만

위기의 순간에 등을 돌리고 떠나 버린 동료,

온갖 좋은 말로 나에게 다가와서 믿고 의지하였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나에 대하여 거짓을 말하는 이중적 태도를 가진 친구.

우리 삶에서 배신과 배반의 경험은 큰 상처로 남아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기가 두려워지기도 합니다.

 

믿음을 저버리는 배신은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서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더 큰 사랑을 찾아 떠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어쩌면 지금의 사랑에 실망하고 좌절하였기에,

아니면 자신의 사랑이 그보다는 더 크기에

다른 사랑으로 이동하는 것이 배신일 것입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믿으셨고 사랑하셨고 동행하신 제자들입니다.

물론 제자들도 예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고,

놀라운 일들과 기적을 목격하면서 그 사랑과 기대를 키웠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 명은 다른 사랑을 찾아 나섭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보다 주머니에 들어오는 돈과

입으로 들어오는 넉넉한 빵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돈과 빵에 대한사랑으로 변해 갑니다.

베드로는 아직까지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대한 그 사랑이

베드로 자신의 목숨에 대한 사랑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사랑은 이동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제자들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모든 것을 내어놓으시고 돌아가시는 순간에도 그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구원자’라고 고백하면서도 배반을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위기가 닥쳐오면 더 사랑할 것을 찾아

주님의 사랑에서 돌아서려고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을 한 번 더 바라보며 돌아설 준비를 멈추었으면 합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3월 31일 (수) [자] 성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26,14-25

 

저는 교회의 사람입니다.

가톨릭 사제로 서품을 받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삶을 살겠다고 서약하였습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쉽게 이해하도록 강의하고

그 복음 말씀에 젖어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 의문이 듭니다.

‘나는 잘하고 있는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

나의 욕심을 채우려고 하느님과 또 그분의 말씀을 이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를 더 드러내고 유명해지고자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는 않은가?

지금 나의 앞에 하느님께서 계시기는 한가?

아니면 하느님 앞에서 내가 너무 나대고 있지는 않은가?’

이런 고민과 질문은 나태하고 오만하였던 저의정신을 맑게 만들어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언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그 예언이 저에게는 미래의 일이 아닌 이미 행한 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팔아’ 자신의 것을 채웠던 사람은 유다가 아니라 저였습니다.

그러나 유다처럼 이야기합니다. “저는 아니겠지요?”

그런 저에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어쩌면 복음을 묵상하며 쓰고 있는 이 글도

예수님을 팔아 내 배를 채우려고 하는 배반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나의 일을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우리는 정화될 수 있습니다.

“저는 아니겠지요?”라는 스스로에 대한 관대함을 버릴 때,

핑계를 내려놓고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라는

예수님의 대답을 되새길 때 우리의 실수는 줄어들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누구의 일을 하고 있습니까?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4월 1일 (목) [백] 주님만찬 성목요일

 

오늘 주교는

자기 교구의 사제들과 함께 공동으로 집전하며

성유를 축성 축복하는 이 미사 동안

사제들의 서약 갱신과 함께 사제들의 일치 결합을 표현한다.

그리고 교구 내의 사목자들은 성유를 받아가 일 년 동안

성사(세례, 견진, 병자, 성품)를 집전할 때 사용한다.

이로써 성사 집전에서 교구 전체의 연대성이 드러난다.

 

[복음묵상] 루카 4,16-21

 

2001년 공소에서 본당으로

갓 승격된 작은 시골 성당에 부임하여 일하게 되었습니다.

이듬해 파스카 성야 미사에 많은 신자가 찾아와 교실 한 칸보다

작은 성당은 발 디딜 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린이들은 제단으로 올라와

제대 주변에 앉게 하고 예식을 시작하였습니다.

 

봉헌 행렬이 시작되면서

그 많은 신자가 움직이기 시작하니,

마룻바닥이 꿀렁거리며 파스카 초가 넘어져

한 어린아이 머리 위로 떨어졌습니다.

‘딱’ 소리와 함께 그 두꺼운 초가 완전히 두 동강이 나고,

동시에 ‘엉엉’하는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다행히 아이 이마에 커다란 혹 하나만 생기고 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공동체는 성당을 빨리 짓기로 하고

성당 건축을 위한 원칙을 세웠습니다.

 

그 원칙은 ‘전례를 중심으로 하는 성당 짓기’였습니다.

전례 중심의 성당을 짓고자 성당 안에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대만 보이게 하고,

제의 방은 제대 맞은편에 두어 입당과 퇴장을 확실히 하였습니다.

이는 저 스스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늘 기억하려는 뜻이었습니다.

 

첫째, 미사를 집전하고자 신자들 사이를 지나

제단에 오를 때마다 목자로서 양들과 함께 그리스도께,

하느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제대를 중심으로 말씀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듣고, 성체를 모심으로써

그 사랑을 온몸으로 체험하려 함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사가 끝난 뒤,

다시 신자들 가운데로 들어감으로써 몸으로 체험한 그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고자 섬김과 돌봄,

그리고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2021년 4월 2일 (금) [홍] 주님 수난 성금요일 - 주님 수난 예식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는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는

오랜 전통에 따라 성찬 전례를 거행하지 않고,

말씀 전례와 십자가 경배, 영성체로 이어지는 주님 수난 예식을 거행한다.

본디 이날의 전례는말씀 전례가 중심을 이루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십자가 경배와 영성체 예식이 들어와

오늘날과 같은 전례를 거행하고 있다.

오늘은 금육과 단식을 함께 지킨다.

 

[복음묵상] 요한 18,1―19,42

 

“다 이루어졌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신”(요한 13,1)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이르시기까지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세례자 요한이 말한 바와 같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를 염소에게 짊어지워 광야로 내보내거나,

양을 제물로 바치면 자기들의 죄가 없어진다고 생각하였고,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많은 이의 죄를 메고 가는

‘고통 받는 주님의종’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을 봅니다.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어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속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섬기러 오셨고,

또 많은 이의 몸값으로 당신 목숨을 바치러 오셨습니다(마르 10,45 참조).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은

“인류의 결정적인 속량을 완성하는 파스카의 희생 제사이며,

동시에 인간을 하느님과 화해시키고 일치시키는

새로운 계약의 희생 제사”(『가톨릭 교회 교리서』, 613항)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습니다(마르 15,38 참조).

이 성전 휘장이 ‘찢어지다’라는 단어는 예수님의 세례 장면에서

하늘이 ‘열렸다’와 같은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 위로 올라오시자,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마르 1,11) 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그분께 하늘이 열립니다(마르 1,10 참조).

 

지금까지 하느님의 얼굴은 하늘과 휘장으로 가려져 있었는데,

다만 상징적으로 일 년에 한 번 대사제가

그분 앞에 들어서 희미하게 그분을 알 수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열리고 성전휘장이 찢어졌다는 말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몸소 휘장을 걷어 내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분 안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랑하시는 분으로 당신 자신을 보여주십니다.

하느님께 이르는 통로가 자유로워 졌습니다”

(베네딕토 16세, 『나자렛 예수 2』, 265면).

 

-(서철 바오로 신부)-

 

2021년 4월 3일 (토) [백] 파스카 성야

 

파스카 성야의 모든 예식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거룩한 밤을 기념하여

교회 전례에서 가장 성대하게 거행한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셨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신 날을 기념한다.

따라서 교회는 장엄한 전례로, 죽음을 이기시고

참된 승리와 해방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맞이한다.

 

[복음묵상] 마르코 16,1-7

 

오늘 우리가 거행하는 파스카 성야 예식은

네 부분으로 이루어집니다.

먼저 우리는 제1부에 성야의 장엄한 시작인 빛의 예식을 행합니다.

빛의 예식에서 우리는 이 거룩한 밤에 불을 축복하여 파스카초를 밝힙니다.

이 촛불은 어둠을 이긴 빛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고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 생명으로 인도한 불기둥이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나타냅니다.

성대한 제2부 말씀 전례는 7개의 독서와 서간

그리고 복음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거룩한 밤이 바로

빛이 창조된 밤이자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간 밤이고,

그리스도께서 암흑의 세상에 파견되시어 죄와 죽음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밤이라는 것을 알려 주며,

구원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여 줍니다.

제3부 세례 전례와 제4부 성찬 전례를 통하여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몸소 체험하고, 그 새 생명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을

큰 소리로 환호하며 기쁨의 노래를 부릅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 신앙 진리의 정수입니다.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이를 중심 진리로 믿고 실천했으며,

성전이 근본 진리로 전승하였고, 신약 성경의 기록으로 확립되어

십자가와 함께 파스카 신비의 핵심 부분으로 가르쳐 온 신앙 진리입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638항).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셨다는 증언에서 시작됩니다.

안식일 다음 날 새벽, 아직 어두울 때

마리아 막달레나, 아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예수님을 찾아 무덤에 갔을 때,

하얗고 긴 겉옷을 입은 젊은이,

곧 천사가 말합니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이제 여인들은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되살아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전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우리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그들의 후손인 우리에게 실현시켜 주셨습니다”(사도 13,32-33).

예수님께서 되살아나셨습니다.

당신의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시고 믿는 모든 이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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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간입니다.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온 마음으로 준비한 사순시기

모든 상황이 정상화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기쁜 맘으로 주님 부활을 맞이합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