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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3월 7(일) [자] 사순 제3주일

Berardus 2021. 3. 6. 07:38

202137() [] 사순 제3주일

 

1독서(탈출 20,1-17)

2독서(1코린 1,22-25)

복음(요한 2,13-25)

 

일상, 그대의 성전

 

고위층이 특권으로 막대한 이득을 얻는 장소로 변질된 성전

하느님 거룩함을 훼손하는 세태에 강하게 채찍질 하신 예수님

인간 욕망으로 신앙의 본질 잃는 이들에 대한 정당한 분노는

하느님의 것과 인간의 것을 면밀히 식별하며 살고 있다는 표징

 

매일의 삶이 바로 그대의 성전이며 신앙이니라.

거기에 들어갈 때는 그대의 모든 것을 가지고 들어가라.”(칼릴 지브란)

 

지난주 친구가 비대면 성서통독을 함께하면 좋겠다고

제안해서 통독 목적을 요약하는 이름을 지어 밴드를 만들라고 했습니다.

몇 시간 후 고심 끝에 아버지 말씀 매일 듣기라는 이름이 탄생했는데

저는 순간 우와!”라는 감탄과 함께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15세기 토마스 아 갬피스는 영적 고전 그리스도를 본받아

첫머리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철저하게 이해하려면

그리스도의 생애처럼 자신의 삶을 영위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서에서 우리는 특히 예수님이

아버지 말씀을 매일 어떻게 듣는지 본받을 수 있습니다.

 

유다인들의 파스카, 성전에서

 

요한은 성전 정화 이야기 처음과 끝에서

파스카에 대해 언급하며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라는

틀 안에 이 사건을 배치합니다.

노을이 질 때면 성전 대리석이 황금빛으로 반짝여

사람들을 황홀하게 했다는 성전,

파스카 시기에는 10만여 명의 순례자가 몰려들고

18000마리 양을 제물로 바친 성전의 임박한 멸망과

그분 몸을 통한 성전 재건을 이야기합니다.

 

기원후 70년 로마 제국의 제2성전 파괴는

요한복음서 저술에 깊은 영향을 미친 역사적 기준점에 해당합니다.

유다인의 민족적, 종교적 정체성의 중심인 성전은

예수님과 요한복음서의 유다인곧 종교 권위층과

상호 관계의 배경 역할을 합니다.

특히 표징의 책1-12장에

새로운 메시아 공동체의 삶과 예배가

본래 의미를 상실한 성전을 대체할 것임을

시사하는 내용이 자주 등장합니다.(요한 1,14; 1,29.39 )

 

성전 예배에 대한 반대는

요한복음서의 근본 개념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매여 있던 하느님 현존은

지금부터는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그분을 믿는 사람들 안에서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성전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두 개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장사꾼을 몰아낸 성전

히에로’(요한 2,14)

넓은 이교도의 앞뜰을 가리키는데

성소와 지성소가 있는 성전 자체인

나오스’(요한 2,19; 21)와는 다릅니다.

 

이 뜰은 성전에서

비유다인에게 허용된

유일한 장소로 성전과 관련된

대규모 시장 영업이 번창했습니다.

신약시대에 성전은 거룩한 하느님의 집,

기도하는 집이라기보다 특권층이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얻는 장소로 변질됐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꾼과 소와 양을 내쫓은 것은

제물로 바칠 짐승 가격을 매기는 권한과

상점에서 점포세를 받아 부를 축적하던 대사제와

성전 고위층의 큰 사업 이권과 특권을 위협하는 일이었고

그분은 제거해야 할 위험인물이 됐습니다.

 

사랑하고 분노하라

 

예수님이 성전에서 채찍을 휘두르며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만드는 것을

중단하라고 분노하는 모습에서 세 가지를 질문해 봅니다.

 

첫째 매일 나는 무엇에 분노하는가?”

심리학자들은 누가 화를 내면 왜 화가 났니?”가 아니라

네가 원하는 것이 뭐니?”가 더욱 적절한 질문이라고 말합니다.

분노는 그 사람이 사랑하는 것,

마음깊이 원하는 것,

그 사람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손상당할 때 보이는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 집

거룩함이 훼손될 때 예의바르게 침묵하지 않고

온유한 어린 양에서 아모스서의 분노하는

하느님처럼 무섭게 포효하는 사자로 변합니다.

분노하는 것은 나쁜 것이며 교육학적으로,

정신의학적으로 좋지 않다고들 가르치지만

예수님도 분노했다는 것에서 저는 큰 위로를 받습니다.

 

1965년에 김수영 시인은

당시 정치와 사회 불의에 대항하지 못하는

지식인의 허위의식과 무능력을 성찰하는 시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에서

나는 왜 작은 것에 분개하는가?”라고 질문합니다.

나는 온통 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간다고 생각하며

나와 내 가족, 내 공동체의 이득을 토대로

작은 것에 분노하지는 않는지?

공동 가정인 어머니 지구를 해치는 일과

하느님 나라 선포에 무관심하지는 않는지?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

충실함과 일관된 자세도 본받아야 하지만

그분의 거룩한 분노도 우리가 따라야 할

예수님의 본성이며 하느님께 청해야 할 귀한 선물입니다.

내가 분노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살아 있고

원하는 것을 알고 있으며, 하느님의 것과 인간의 것 사이에서

섬세하게 식별하면서 살고 있다는 표징입니다.

 

둘째 매일 나는 아버지 집에 거처하는가?”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처음으로 한 말씀은

열두 살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성모님에게 한 말씀,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루카 2,49, 자구적으로는 내 아버지의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대 유다인들에게

12살은 성년에 해당하는데

그 이후 30살까지

예수님이 어떻게 살았는지 기록은 없지만

이 첫 말씀에서 예수님이 보낸

침묵의 기간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24시간 성전에 머물 수는 없지만

가정에서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서,

목수로서 일터에서 아버지의 말씀,

특히 십계명 가운데 첫 계명인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지키며(1독서)

그분 뜻을 찾으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아버지와 일치하는 아들 예수님 모습은

요한복음서 나머지에서 여러 차례 반복됩니다.

 

셋째 매일 내 마음이 장사하는 집은 아닌가?”

성전 정화 이야기는 인간의 욕망과

하느님의 갈망의 상징적인 만남을 의미합니다.

매일 현실 안에 이 두 가지 힘, 두 개의 성전,

두 개의 세계가 만나서 투쟁합니다.

예수님은 단호하게 옛 성전은

새 성전으로 대체돼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보이지 않으며 아주 작은 코로나19 균이

우리 몸을 순식간에 허물어 버리듯

마음도 사소한 선택으로 상처받고 아플 수 있습니다.

매일 아버지 말씀을 듣는 것은 온갖 잘못된 선택과

악이라는 질병에서 우리를 예방하는 백신입니다.

주님, 당신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화답송) 아멘!

 

 

 

[한주간 전례]

 

202138() [] 사순 제3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루카 4,24-30

 

같은 학교에서 십 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공부하고 생활한 친구들이 있습니다.

젊음의 열정을 함께 불태웠고

서로의 꿈을 응원해 주던 친구들입니다.

시간이 흘러 지금은 각자의 자리에서 생활합니다.

화려한대도시에서 바쁘게 생활하는 친구도 있고,

한적하고 조용하지만 인심 좋고

가족 같은 공동체에서 생활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친구도 있고,

기관에서 좀 더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그 친구들과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저마다 삶의 자리에 대한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그들의 삶이 부러울까요?

그냥 너무 행복해서 투정하는 소리 같이 들립니다.

나는 왜 여기에 있을까?

내가 그들보다 못난 것이 무엇일까?’

왠지 모를 자괴감이 듭니다.

내 자리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늘어납니다.

나를 이곳에 보낸 사람이 원망스럽습니다.

 

누군가와 비교하기 시작하면

불평과 불만, 원망과 짜증이 늘어납니다.

그래서 시기와 질투라는 악의 씨앗이

마음 한가운데 자리를 잡습니다.

그 악의 씨앗은 우리의 눈과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아무것도 볼 수 없도록

주위 사람들의 고마움을 가려 버립니다.

내가 받아 누리고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것을 잊게 만들어 버립니다.

 

오늘 복음의 나자렛 사람들 마음에도

악마의 씨앗이 자리를 잡고 싹을 틔웁니다.

예수님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삶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늘어났고,

그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이제 그들은 악마에게 마음을 빼앗겨 예수님뿐 아니라

자신들까지도 죽음의 벼랑 끝으로 내몰아 버립니다.

어둠이 그들을 뒤덮어 버립니다.

 

악은 어둠처럼 조용히 찾아옵니다.

그 세력은 빠르게 마음을 잠식해 갑니다.

어둠을 없애는 방법은 빛을 밝히는 것뿐입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그리스도의 삶과 가치를 고민하고 묵상할 때

우리는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시기심 때문에 악에게 마음의 자리를 내어 주지 마십시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39() [] 사순 제3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8,21-35

 

강의 시간에

이런 질문을 던졌던 기억이 납니다.

본당에서 가장 작은이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범위를

조금 좁혀서 다시 질문해 보았습니다.

본당 신부와 신자 가운데 누가 더 작은이일까요?”

강의를 듣는 신자들은 자신들이 더 작은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저의 생각은 다릅니다.

사제가 신자들보다 작은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자들이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야 하는 사람이 사제입니다.

자신보다 신자를 더 많이 생각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현실은 다를 수 있지만,

사제는 어떤 이들의 말처럼 갑이 아니라 을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약자이며

가장 작은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덜 가졌고, 더 고생하고 있으며,

더 아프고 더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은 자신만을 향하게 합니다.

그런 마음가짐은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사라지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종들과 셈을 하는 임금은

자신보다 강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임금은 종들을 모두 약자라고 생각하기에

잘못을 하거나 주인의 명령을 어기더라도

가엾은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그런데 빚을 탕감 받은 종은

자신에게 빚진 동료를 약자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더 큰 빚을 지고 있고,

임금에게 고초를 겪었기에 자신을 약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빚진 동료를 괘씸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배은망덕한 채무자로만 생각합니다.

그에게 용서와 자비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자신이 받은 상처와 아픔, 힘겨운 인내와 고통만 있을 뿐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하고 싶다면

누가 가장 작은이인지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직 용서할 마음이 없다면 받은 것들을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310() [] 사순 제3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5,17-19

 

고해소에 앉아서 누군가의

고백을 들을 때면 저 자신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평소에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한 일들을

죄라고 생각하여 깊이 성찰하고

용서를 청하기 때문입니다.

고해 사제로서 그런 이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자격이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듭니다.

그래서 참 많이 부끄럽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 시대에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이유는

율법대로 살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위선자라고 꾸짖으십니다(마태 23,1-36 참조).

율법에 적힌 규정들을 정확히 지킬 뿐

그들의 마음과 생각에는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율법을 지키면서는 살아갑니다.

자신들이 가진 삶의 의향과 의도와는 별개로

하느님의 법에 충실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노력이라도 하고 있을까요?

예수님께 위선자라는 말이라도 들어 볼 정도로

하느님의 법에 따라 살아가고 있나요?

자신의 편의에 따라 하느님의 법과

기준의 범위를 넓혔다 좁혔다 하지는 않는가요?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라고 말하며

자신을 합리화하고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있지는 않나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주신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우리 스스로 그 율법을 폐지하며 살아가지 않았으면 합니다.

최소한 위선자라고 불리는 그 사람들만큼이라도

하느님의 법 을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그 노력에 못 미치는 자신을 보며 부끄러워하고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갔으면 합니다.

그래야만 한 번이라도 더

하느님의 법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311() [] 사순 제3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루카 11,14-23

 

신앙인은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삶이 틀리지 않았음을,

그분의 삶의 방향이 우리를 구원과 행복으로

이끌어 주심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주위의 모든 것,

곧 사람과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와 사회,

인간관계에서 벌어지는 상황들, 환경과 인간의 관계,

환경의 변화 등에서 하느님의 손길과

은총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기보다 의심합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바라보며 어떤 악의와

안 좋은 의도가 있는지 의심합니다.

공동체를 위하여 무엇을 한다고 이야기할 때에도

그 선의와 의향을 의심하면서

그 뒤에 도사리는 꼼수를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의 호의와 친절도

의심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우리입니다.

 

군중 가운데 몇몇 사람은

예수님의 선한 행위도 그 놀라운 기적도

믿으려 하지 않고 왜곡하여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왜 예수님의 선한 의지를 왜곡할까요?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해서라기보다는

예수님의 마음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입장과 이익에만 관심을 가지고

자신에게 없는 능력과 힘을 질투하여서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어쩌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과 인기를

예수님께서 빼앗아 가실 것만 같은 불안감과 두려움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몇몇 사람은 표징을 요구합니다.

다시 말하여 예수님께서 왜 자신에게

그런 선한 의지를 표현하지 않으시고

다른 사람에게만 기적을 행하시는지에 대한 불만과 불평입니다.

사람들이 선한 의지와 행위를 왜곡하고 믿지 못하는 이유는

오로지 자신의 삶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믿음이 사라지는 사회 문화가 조금은 안타깝습니다.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한 번쯤은 서로에 대한

신뢰로 시작해 보는 것도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우리의 삶이라 생각해 봅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312() [] 사순 제3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12,28ㄱㄷ-34

 

사랑이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처럼 정답을 알 수 없는 질문도 없을 것입니다.

또한 이 질문처럼 모든 대답이 정답인 질문도 없을 것입니다.

각자 가진 사랑에 대한정의와 방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사랑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사랑법은

목숨을 다하는 사랑법입니다.

희생하는 사랑법입니다.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모든 것을 내어놓고 싶은 사랑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온전히 모든 것을 내어놓을 수 없습니다.

때로는 어려움과 걱정 때문에,

지켜야 하고 함께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렇게 모든 것을 다 내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내어놓고 희생하는 사랑법이란

맡기고 수용하는 사랑법일 것입니다.

없음의 두려움을, 빼앗김의 아픔을 바라보지 않고

하느님께 내어놓은 것을 다시 희망과

믿음으로 채워 나가는 사랑법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사랑법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자신을

어떻게 사랑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면서도

왜곡된 방식으로 사랑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법만 옳다며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사랑법 만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너를 사랑하는데

그 사랑을 몰라준다며 서운해 하기도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려면

먼저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그 방법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사랑법이 옳은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방법만이 옳다는 교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사랑하려면 상대의 사랑법을 알고

그 사랑법으로 표현하며 다가가야 합니다.

더 많이 사랑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313() [] 사순 제3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루카 18,9-14

 

내비게이션에서 길을 잘못 들어섰다고 하며

유턴하라는 말이 계속하여 들려옵니다.

자주 다녔던 길이고,

이 시간이면 내비게이션이 가라는 방향은

차가 막혀 더 늦을 것 같아

이를 무시하고 자신의 길로 들어섭니다.

그러나 선택한 길도 이내 주차장처럼 막힙니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르지 않은 것을 괜히 후회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선택은 언제나 똑같습니다.

자신의 잘못과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면

쉽게 그 선택을 바꾸지 않습니다.

지금 잘 살고 있다고, 자신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느끼지 못하면

지금의 인생 방향도 되돌리지 않습니다.

지금의 선택에서 방향을 바꾸어 유턴하는 것을

우리는 회개라고 합니다.

세상의 가치로 삶을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어떤 기회에 자신의 삶이 잘못되고 있음을 깨닫고

하느님의 가치로, 예수님의 신념으로 방향을 돌리는 것,

그래서 그 가치가 구원으로 이끄는 힘임을 믿는 것,

그것이 우리의 회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강도들이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

세리와 같이 살고 있지 않다고 자신하며

자신의 삶이 최선이라 자부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언제나 옳은 판단과 행동만을 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런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부터가 오만이고 교만일 따름입니다.

 

하느님과 눈을 맞추고

예수님을 따르는 방향을 자신의 목표로 삼는

회개의 시작은 먼저 자신의 나약함을 알고

오만과 교만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리는 이제 회개를 시작합니다.

자신을 낮추고 잘못을 인정합니다.

유턴을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매 순간

하느님을 바라보며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회개의 출발선에 서려면 자신의 나약함과

죄스러움을 바라보는 것이

선행되어야 함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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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입니다.

경칩을 지난 후 제법 봄기운이 물씬 풍깁니다.

점차 따뜻해지는 날씨와 더불어 마음도 풀립니다.

코로나19 로 자유롭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유를 가져봅니다.

 

_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