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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2월 28(일) [자] 사순 제2주일

Berardus 2021. 2. 28. 07:50

    [금주의 말씀 묵상]

    2021년 2월 28(일)
    [자] 사순 제2주일

    제1독서(창세 22,1-2,9ㄱ.10-13.15-18) 제2독서(로마 8,31ㄴ-34) 복음(마르 9,2-10)
    높은 산 구름 속 희망의 빛이다 거룩한 변모로 현존 드러내시고 고난 겪으며 부활 이르신 주님 사랑과 생명의 은총 충만하고 절망 속에서도 희망 잃지 않길

        오늘은 사순 제2주일입니다. 우리는 기도와 성사 중에 높은 산을 한 걸음씩 오르며 찌든 현실을 잊고, 산정에서 마음을 새롭게 합니다. 모리야 산에서 아브라함이 번제물로 바치는 제사는 ‘하느님의 걸작’입니다. 스승님의 인도로 높은 산에 오른 제자들은 주님의 본 모습을 드러낸 빛의 신비 속에 천상행복을 미리 맛봅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경외심을 시험하십니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모리야 산에서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창세 22,2) 그는 주님의 말씀대로 아들을 데리고 산을 오릅니다. 제단을 쌓아 장작을 얹은 뒤 묶인 아들을 죽이려 할 때, 주님의 천사가 아이에게 손대지 말라고 합니다. 바로 그때 덤불에 뿔이 걸린 숫양 한 마리가 있어 끌어다 아들 대신 번제물로 바칩니다.(제1독서)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사랑하는 외아들을 바치는 순종의 미덕을 보인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번제물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다는 아버지를 따라 땀을 흘리며 장작을 지고 높은 산을 오른 이사악도 순순히 따릅니다. 모리야 산의 사건이 십자가 수난의 예표라면,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희생제물이 되십니다. 사도 바오로는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힘을 밝힙니다,(제2독서)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를 위해 외아들을 십자가에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삼으심은 사랑의 절정입니다.(요한 3,16)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로마 8,31)?”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의롭게 해주시며, 그리스도와 함께하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르치신 엿새 뒤(마태 17,1),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십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변한 그 자리에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나타나 주님과 대화를 나누십니다. 우리를 성덕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대표적인 현존 사건입니다. 모세와 엘레야의 주님 현존 이야기와 공통된 요소들은 높은 산, 증인, 표징과 체험의 공유입니다. 높은 산은 무대입니다.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탈출 19장)는 짙은 구름이 덮은 시나이산에서 십계명을 받습니다. 예언자를 대표하는 엘리야(1열왕 19장)는 호렙산에서 주님의 부드러운 음성을 듣습니다. 높은 산은 일상생활에서 물러나 기도하고, 주님 사랑을 체험하며, 영적 깨달음을 얻는 좋은 피정 장소입니다. 사도들은 장엄한 사건의 증인들입니다. 높은 산 정상으로 인도되어 가까이서 주님의 거룩한 변모와 함께 나타난 엘리야와 모세와의 대화 장면을 두려움 속에 체험합니다. 그들은 분주한 일상의 삶을 떠나 주님현존에 마음을 빼앗겨 오래 머물고 싶어 합니다. 주님 현존의 표징은 거룩한 변모입니다. 산 정상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빛나고 옷도 새하얀 광채입니다. 영광스럽게 보인 주님의 모습은 빛의 신비입니다. 얼떨결에 베드로는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마르 9,5)라고 말합니다. 유다인들은 축제 때 초막을 세워 어린이들과 주님 현존의 기쁨을 나눕니다. 율법과 예언을 완성하신 주님의 증인으로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를 보는 순간 초막을 세우고 싶어 합니다. 이때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더니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마르 9,7) 하는 소리가 납니다. 성경에 언급된 구름은 보통 구름이 아닙니다. 주님 현존으로 빛나는 영광의 무대입니다. (마태 17,5; 탈출 19,16; 1열왕 8,10) 제자들은 삼위일체이신 주님의 현존 속에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봅니다. 산을 오르면 하산합니다. 사도들은 주님 가까이서 높은 산 구름 속 빛의 신비를 체험하고 내려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본 것을 부활 때까지 침묵을 지키라고 분부하십니다. 예수님 변모의 모습, 성자의 말을 들으라는 성부의 목소리, 성령의 현존인 구름의 형상은 주님 예고대로 십자가의 고난을 겪고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천상행복의 표징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삶으로 초대된 증인들입니다. 지금은 침묵 속에 회개와 기도와 희생으로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사순 시기입니다. 회개는 인간의 추하고 헛된 마음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전향시킵니다. 기도는 주님 말씀을 듣고 사랑받는 존재의 삶으로 초대입니다. 자기희생으로 헌신하고 봉사하는 삶이 진실한 사랑입니다. 인간을 거룩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는 생명의 빛이십니다. 일상의 삶에서 주님 사랑과 생명의 은총을 충만히 받는 가장 좋은 길은 기도와 성사 생활입니다. 감사 제사인 미사에서 생명의 양식인 성체를 모신우리는 그리스도와 한마음입니다. 부활의 영광 속에 주님을 마주 뵙는 영원한 생명은 삶의 궁극 목적입니다. 진리와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을 믿고 바라며, ‘사심 없는 사랑’의 실천이 우리의 소명이기에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지혜의 등불인 말씀을 되새기고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천주교인으로 살아가는 기쁨에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김창선(요한 세례자)- 21-02-04.jpg ▲경기도 천진암 입구

         [한주간 전례] 2021년 3월 1일 (월) [자] 사순 제2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루카 6,36-38 아버지가 자식들보다 다른 이들에게 한없이 자비롭다면 그 자녀들의 마음은 어떨까요? 어쩌면 아버지가 원망스러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제 자식들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더 너그럽기 때문입니다. 자식들의 어려움보다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에 더 관심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자식들의 잘못은 그대로 넘어간 일이 없지만, 다른 사람의 잘못은 어떤 일이든 용서해 주기 때문입니다. 자식인 내가 가져야 할 몫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기에 나의 몫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존경과 칭송을 받지만, 나에게만은 정말 매정한 아버지입니다. 자식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자식이 부모가 되고, 자녀를 낳아 사랑하는 법을 조금씩 알아 간다면 조금이나마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충분히 너그러웠고 누구보다도 자식들을 많이 용서해 주었습니다. 넘치도록 많은 것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지만, 더 이상 줄 것이 없어 아쉬워하였습니다. 그 자녀들도 아버지처럼 살아가면서 비로소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이 때로는 우리를 실망스럽게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기도와 청은 잘 들어주시는 것 같은데 내 기도와 청에는 묵묵부답이신 것 같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들에게는 은총과 복을 넉넉히 주시지만, 나에게만은 고통과 아픔만을 주신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려면 먼저 우리가 하느님께 용서받은 일들을, 하느님께 넘치도록 받은 것들을, 그리고 내가 얼마나 나약하고 옹졸한 사람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자비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받은 사랑과 용서를 되새기고, 그분께 감사해야 합니다. 먼저 감사함을 찾으십시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3월 2일 (화) [자] 사순 제1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23,1-12 사제로서 저는 강단과 제대에 올라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 자신은 내가 말한 그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언제나 저를 일깨웁니다. 좋은 말로 희생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지, 나눔은 좋은 것이라며 나눔의 실천을 강조하지만, 그 나눔과 자선의 결과물 속에서 나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고 있지는 않은지 저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보면 언제나 부끄럽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모습이 바로 저 자신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가식과 오만을 비판하고 험담합니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무엇을 하고 있냐며 따져 묻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그렇게 비판하고 지적하기 전에 우리 자신을 먼저 바라보아야 합니다. 당신은 얼마나 부끄러워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자신의 가식과 거짓에 얼마나 분노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오만과 독선을 얼마나 인정하고 있습니까? 먼저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말로만 하는 우리의 가식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행동하지 않은 것을 비판하고 지적하는 우리의 오만을 부끄러워해야합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 행동하고 있는 것처럼 자랑하는 우리의 위선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그 부끄러움들이 한 번 더 행동할 수 있는 힘을 줄 것입니다. 조금은 아깝고 두려운 마음이 들지라도 나누고 사랑하고 내어놓는 삶을 살아갈 용기를 줄 것입니다. 스스로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도 용서할 수도 없습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3월 3일 (수) [자] 사순 제2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20,17-28 ‘동행’이라는 말을 들으면 왠지 모르게 든든합니다. 낯선 거리를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 걸으면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먼 길을 떠날 때에도 누군가와 함께라면 외롭지 않고 힘이 되어 든든합니다. 또한 같은 목표를 가지고 같은 공간에서 함께 일하며 동행합니다. 가족들과 함께, 직장에서, 교회에서, 공동체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동행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같은 길을 가고 있을 뿐 동행하지는 않습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목표를 가지고 일하지만, 저마다 생각이 다르고 가치가 다르며 목표를 이루려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함께 사랑한다고 하지만, 사랑을 나누는 방식이 다르고 사랑의 표현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같은 길을 가고 있지만, 동행하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같은 길을 갔습니다. 오랜 시간 함께 지냈고 하느님 나라와 복음을 같이 선포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치와 삶을 오랫동안 보아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동행하는 듯 보였던 제자들의 생각과 가치는 예수님과 달랐습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도, 다른 제자들도 자신들의 욕심과 출세만을 위하여 예수님과 함께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수난과 십자가를 여러 번 이야기하셨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꿈과 가치만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과 같이 걸었지만, 동행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동행하고 싶습니다. 혼자 걷기보다 함께 걷고 싶어 합니다. 특히 예수님과 함께,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동행 하고 싶습니다. 그 동행을 위하여 자신의 가치와 생각을 강요하기보다 먼저 동행하는 이들의 생각과 꿈을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그래서 내가 앞장서 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걸어갈 수 있도록 조금씩 천천히 자신의 것을 내어놓으면서 걸어가면 좋겠습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3월 4일 (목) [자] 사순 제2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루카 16,19-31 같은 것을 바라보면서도 같은 것을 보지 않습니다. 같은 상황을 겪으면서도 같은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나름대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바라보며 선택하고 결정합니다. 자신의 관심사에 집중하느라 주위를 둘러보지도 못하며 자신의 이익에만 몰두합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있으며 무엇에 관심이 있습니까? 어떤 가치로, 어떤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의 집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있었습니다. 부자는 자신의 집 앞에서 언제나 먹을 것을 구걸하며 너무나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라자로를 보았지만, 그런 라자로에게 눈길조차 두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은 자신의 호화로운 생활과 즐거움뿐입니다. 부자는 죽어서도 다른 것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자신의 목마름과 고통, 그리고 자신의 가족들에게만 관심을 둡니다. 주위를 둘러보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관심이 없으며, 다른 이들과 함께 아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의 집 앞을 지나가셨다면 무엇을 보셨을까요? 당연히 라자로를 보시며 가엾은 마음이 드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병을 고쳐 주셨거나, 아니면 먹을 것을 주셨거나, 그것도 아니면 함께 이야기라도 나누셨을 것입니다. 당장 무엇을 하실 수는 없으셨더라도 그의 아픔과 고통에 함께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시선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하느님의 나라로 만들어 가려면 예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의 것만을 채우고자 하는 시선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시선으로 주위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3월 5일 (금) [자] 사순 제2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21,33-43.45-46 무엇을 먹을까 하여 냉장고를 열었습니다. 물 몇 병과 음료수, 그리고 여러 그릇에 담긴 밑반찬과 김치가 있습니다. 허기져서 그런지 먹을 것이 없다는 생각에 짜증이 확 밀려옵니다. 그런데 냉장고 속에있는 것은 본디 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혼자 지내는 사제를 위하여 정성스럽게 만들어 주고, 나누어 준 소중한 사랑입니다. 오랜 시간 나의 냉장고에 나의 공간에 있었다고 하여 그것이 나의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나 봅니다. 처음부터 나의 것이라는 것이 있을까요? 사람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말처럼 본디부터 나의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랫동안 내가 가지고 있었고 사용하였기에 나의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삽니다. 그래서 감사해하지도 나누지도 못합니다. 나누고 비우기는커녕 다른 사람의 것들을 빼앗으려 발버둥 치며 살아갑니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자 누군가를 시기하고 질투하면서 험담하고 짓밟고 죽이며살아갑니다. 본디부터 내 것이 아니었는데도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포도밭은 주인의 것이지 소작인의 것이 아닙니다. 포도밭의 소출 또한 소작인들의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입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아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주인을 무시하고 종들을 박해하고 주인의 아들을 죽입니다. 첫 악행을 저지르고 그들이 부끄러워하였다면 살인이라는 더 큰 악행은 저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였기에 감사해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까? 가진 것이 없다고 불평하며, 다른 이보다 덜 가졌다고 시기하며 악행을 저지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감사하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3월 6일 (토) [자] 사순 제2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루카 15,1-3.11ㄴ-32 부모님은 어쩌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어릴 적 학교에서 사고치고 걱정을 한가득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부모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부모님의 생각과 다른 결정을 하여실망시켰을 때에도 부모님은 그런 저를 지켜봐 주셨습니다. 어쩌면 무엇을 하든 어떤 선택을 하든 부모님은 늘 그러하듯 묵묵히 저를 바라봐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부모님은 자식을 기다려 주십니다. 자식을 믿고 사랑하는 마음을 그렇게 표현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도 아들을 그렇게 기다려 줍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재산을 요구하는 작은아들에게 아무런 꾸중이나 충고도 하지 않고, 떠나가는 아들을 바라봅니다. 떠나간 아들을 걱정하며 마음속으로 잘 지내기를 바라며 기다립니다. 그 기다림의 끝, 아들이 거지꼴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면서도 아버지는 괘씸한 마음이 아닌 가엾은 마음으로 달려가 안아 줍니다. 더욱이 아버지는 큰아들도 기다려 줍니다. 큰아들은 아우와 달리 아버지를 섬기며 순종하고 최선을 다하였음에도 자기 몫으로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아 서운해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큰아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약속합니다. 서운해 하고 화를 내는 큰아들을 이해합니다. 아버지와 두 아들의 차이는 기다림입니다. 순종과 불순종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가, 있지 않은가에 대한 문제가 아닙니다. 아들들은 기다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이익과 생각에만 집중하여 아버지의 생각과 마음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고, 고민하지도 않고, 기다려 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언제나 기다립니다. 자비로움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나와 맞지 않고 내가 이해할 수도 없지만, 조금만 기다려 보는 지혜를 가질 때 우리는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처럼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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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차 봄날의 따스함 기대가 커지고 아직까지 추운 느낌이 있지만 옷차림에서 부터 가벼워지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건강에 조심해야 할 듯합니다. 코로나 백신 접종이 시작되어 보다 자유로운 만남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