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감각이 탁월하신 원로 신부님께서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젊은 형제들에게
훈화 말씀을 하실 때였습니다.
“우리 살레시안들은 사순 시기에 더 잘 먹어야 합니다.”
저는 그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이단을 선포하시면 안 되는데….
대체 어떤 말씀을 하시려나?’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신부님께서는 참으로 감동적인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여러분들, 부디 잘 먹고 나서,
잘 먹은 만큼 더 많이 청소년들을 사랑해 주시기 바랍니다.
더 자주 청소년들 사이에서 현존하고,
더 많이 참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살레시안으로서 참된 단식입니다.”
유머감각이 보통이 아닌
인도의 한 본당 주임신부님께서도
사순 시기를 맞이하는 본당 신자들에게
한 가지 소중한 지침을 주셨는데,
강론을 듣고 있던 교우들이 깜짝 놀랐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번 사순 시기 동안 맥주를 많이 마십시다.”
(Take lots of BEER during Lent.)
당혹해하는 신자들을 향해 주임신부님께서는
환한 미소를 보내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이셨습니다.
“BEER=Bible(성경),
Empathy(공감),
Eucharist(성체성사),
Reconciliation(화해)”
“이번 사순 시기 동안
보다 자주 성경을 펼쳐 보십시오.
성경 안에 길이 있습니다.
성경 안에 답이 있습니다.
이번 사순 시기 동안 공감의 명수가 되십시오.
우리가 이웃의 고통과 슬픔에 깊이 공감할 때,
바로 거기 숨어 계시는 하느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번 사순 시기 동안 더 자주 성체성사로 나아가십시오.
성체성사는 우리가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이번 사순시기 동안 틈만 나면 화해하십시오.
하느님과 화해하고
이웃과 화해하고 자신과도 화해하십시오.
참된 화해가 이뤄진 바로 그 자리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질 것입니다.
■ 광야 체험
언젠가 성지순례 때 잠시나마
광야 이곳저곳을 걸어 다닌 적이 있습니다.
즉시 다가온 느낌은 황량함이요 삭막함이었습니다.
광야 한가운데 서서 아무리 둘러봐도
제대로 된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머무를 곳도 쉬어 갈 곳도 없는 불모지,
뱀과 전갈만이 위협하는 고통과 죽음의 땅이 광야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시시각각으로 기후가 변하는 곳,
때로 뜨거운 태양의 열기나
무지막지한 광풍으로 정신이 혼미해지는 곳,
우리의 미성숙, 거짓 신앙, 값싼 신앙,
유아기적 신앙이 낱낱이 드러나는 곳,
한마디로 고통스러운 장소가 광야입니다.
모든 것이 결핍된 장소,
우리 각자의 맨얼굴과 인간적 한계를
명확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장소,
생각과 마음이 단순화되는 장소,
하느님께 더욱 절박하게 매달리는 장소가 광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때로는 고통의 장소,
때로는 은총의 장소인 광야를
40년 동안 걸어가면서 자신들의 신앙 안에서
그릇된 요소들을 정화시켜 나갔습니다.
우상숭배에서 유일신이신 하느님께로 돌아섰습니다.
형식적인 신앙, 위선적인 신앙에서
진실하고 견고한 신앙으로 변모시켜 나갔습니다.
그래서 결국 약속의 땅에 입국하기에
합당한 신앙공동체로 거듭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가끔씩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일수록
더 자주 광야로 몰아넣으십니다.
우리가 원치도 않는 쓰디쓴 광야를 체험케 하시는데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순시기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중차대한 과제 중에 하나가 ‘광야’에 대한 의미부여 작업입니다.
이번 사순 시기 동안
우리는 본격적인 공생활 시작 전
예수님의 40일을 눈여겨봐야겠습니다.
성령의 인도로 그분께서는 유다 광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장 40일 동안이나
유다 광야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와 단둘이 머물면서
그분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사명의 본질이
무엇인지 간절히 찾으셨습니다.
그냥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온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혼신의 힘을 다해 기도하셨습니다.
그 결과 마침내 그분께서는 정답을 찾으셨고,
기쁘고 당당한 모습으로 세상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깊은 광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광야로 들어가기 위해 굳이 비싼 돈 들여,
텔아비브나 두바이행 비행기
표를 구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대신 우리 내면속 깊숙한 곳을
향한 여행을 시작해야겠습니다.
우리 안에 내적 광야, 텅빈 공간,
마음의 여유를 마련해야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나 단둘만 들어올 수 있지,
그 누구도 침해하지 못하는 나만의 감실,
내안의 성전 하나를 건설해야겠습니다.
이번 사순 시기,
우리 손에서 놓으면 죽을 것 같은 것이
무엇인지 한번 곰곰이 헤아려보면 좋겠습니다. 사
실 손에서 놓으면 죽을 것 같았는데,
놓아보니 꼭 그렇지도 않더군요.
우리 시대 또 다른 하느님이 되신 스마트폰, SNS,
신용카드, 술, 담배, 깊이 빠져버린 취미활동…
과감히 우리 손에서 한 번 내려놓고,
하느님 아버지와 나 단 둘만 머물 수 있는
내 안의 성전으로 자주 들어가 보면 좋겠습니다.
침실 문만 열면
바로 건너편이 경당인데….
너무 게을러서, 좀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뵙지 못한 지난날을 크게 뉘우칩니다.
주님과 나 단 둘이 머물기 위한
아주 좋은 교회 전통이자 지름길인 성체조배를 통해
나 자신 있는 그대로의 맨 얼굴을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한없이 자비롭고 관대하신
하느님 아버지께 보다 자주 문안 인사를 올려야겠습니다.
“매일 죽을 것처럼 산다면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날마다 일어나면서 저녁때까지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저녁에 잘 때면 아침까지
깨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우리 생명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우리 목숨은 하루하루 주님 손길에 맡겨져 있습니다.
물고기가 마른 땅에 머물러 있으면 죽듯이
수도자들이 세상에 오래 머물게 되면 정신이 해이해집니다.
그러니 우리 수도자들은 물고기가 바다로 돌아가듯이
끊임없이 사막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안토니오 교부)-
-양승국 신부-
[한주간 전례]
2021년 2월 22일 (월) [녹] [백]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시어
당신의 지상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본디 고대 로마에서 2월 22일은
가족 가운데 죽은 이를 기억하는 날이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이를 기억하는
관습에 따라 4세기 무렵부터 이날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무덤을 참배하였다.
이것이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의 기원이다.
그러나 6월 29일이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를 함께 기념하는
새로운 축일로 정해지면서,
2월 22일은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최고 목자로 공경하는 축일로 남게 되었다.
[복음묵상] 마태오 16,13-19
먹고사는 문제로
고민하며 살아가는 우리와
오늘 기념하는 성 베드로 사도좌와는
제법 큰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우리 삶의 자리와 베드로 사도좌와의 거리는
물리적인 거리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과도 그렇게 가깝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님이나,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주교님들과
성직자들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있을지 몰라도,
스스로 주일만 간신히 지킨다고 생각하는
신자들에게는 이축일이 큰 의미로 와 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심은
교황님과 주교님들을 비롯한 성직자,
수도자들의 신앙심에 한참 못 미치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 온전히 삶을 투신하면서
살기에는 생각할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우리의 일상다반사가
예수님보다 더 크고 중요하게
다가올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부족한 신앙인이라고 자책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로 그런 신앙인이기에,
부족해 보이는 신앙인이기에
오늘의 축일이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는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자신을 단 한 번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한 적 없으셨던 예수님 앞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을 반석 삼아 예수님께서는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럼 베드로 사도는
위대한 인물이었을까요?
우리는 그가 그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어부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지닌 예수님을 향한
믿음은 한결같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물 위를 걷다가도
풍랑을 바라보고 두려워서 물에 빠지고,
두려움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그가 위대해서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인공이십니다.
우리의 신앙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실을 체험한 예수님의 첫 제자가 베드로이기에,
오늘 성 베드로 사도좌축일은
우리와 깊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임을 기억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박형순 신부)-
2021년 2월 23일 (화) [자] 사순 제1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6,7-15
어린 시절에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주일 미사에 참례하면,
미사가 참으로 재미없고,
지루하고 따분하기만 하였습니다.
그런 저에게 유일하게 기쁘던 시간이 있었는데,
바로 주님의 기도를 봉헌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유일하게 아는 기도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호경도 제대로 긋지 못하고,
다른 기도문은 물론이고
신자들이 응답하는 부분의 기도는
제대로 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어떤 연유인지 주님의기도만은
누구보다 큰 소리로 외워서 바칠 수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계시던 부모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봉헌할 때가 되면
늘 제게 주님의 기도를
외우는 시간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가위풍당당하게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
부모님께서는 매우 기쁘게 웃으시며
그 모습을 바라보셨던 기억이 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는 빈말의 되풀이가 아니며,
말을 많이 해야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빈말의 되풀이가 아니요 기도의 핵심이 담긴 기도,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에 담긴 신학적 의미를
하나하나 되새기면서 기도할 수 있다면
참 좋은 일일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시고 …….”
그런데 막상 주님의 기도를 봉헌하다 보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고 시작한 기도는
어느새 “악에서 구하소서.” 하고 끝이 나고 말지요.
주님께서 직접 제자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 주신 기도가
형식적인 기도가 되는 듯한 기분이 드는 순간입니다.
그래도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바친
어린이의 기도를 웃으면서 기쁘게 쳐다보던
부모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하느님 앞에 어린이요 자녀인 우리가 기도를 바치면,
부모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웃으시면서 우리를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아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의탁하는 마음으로 “아빠, 아버지”께
우리의 기도로 웃음을 드려 보면 어떨까요?
-(박형순 신부)-
2021년 2월 24일 (수) [자] 사순 제1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루카 11,29-32
구약 성경에는 많은 예언자들이 등장합니다.
그 가운데 자신의 이름으로 예언서를 가지고 있는
예언자는 모두 열다섯 명입니다(히브리어 성경 기준으로,
우리 성경의 애가, 바룩서, 다니엘서는 제외됩니다).
그런데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였지만,
사람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단 한 명의 예외가 있었으니,
바로오늘 독서에 등장하는 요나 예언자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 민족인 니네베 사람들을 향하여
하느님 심판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요나가 큰 도시 니네베에서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하자
니네베사람들은 임금부터 모든 백성이,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자루 옷을 걸치고 회개의 길을 걷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고
예고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의 회개가 하느님의 마음을 돌리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요나보다 더 큰 이”라고 소개하십니다.
그런데도 군중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그럼 이제 주님의 자기소개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물어봅시다.
예수님을 요나보다 더 크신 분으로 생각하나요?
“예!”라는 대답은 쉽게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럼 질문을 바꾸어 봅니다. 성체를 모시면서 예수님을,
요나보다 솔로몬보다 위대하신 분을 만나고 있나요?
이 질문에 우리가 “예!”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미사는 은총이 가득한 시간 그 자체가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성인보다,
성경의 인물보다 위대하시고 거룩하신 분이시며
그분께서 바로 미사 안에서,
그리고 일상 안에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박형순 신부)-
2021년 2월 25일 (목) [자] 사순 제1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7,7-12
성경 말씀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청하는 것을 다 들어주십니다.
시편의 기도자는 “제가 부르짖던 날 제게 응답하시고,
저를 당당하게 만드시어 제 영혼에 힘이 솟았습니다.”
(시편 138[137],3)라고 고백하고,
오늘 독서와 복음도
청원을 들어주시는 하느님을 이야기합니다.
청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말씀을 따라 우리는 하느님께
우리의 청원을 아룁니다. 그
렇게 우리가 청원을 드리면
하느님께서 항상 들어주셨나요?
물론, 하느님께서 우리의 청원을 들어주십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나의 청원을 들어주신 기억보다,
들어주시지 않으셨던 기억이 더 많지 않은가요?
청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체험으로
우리의 청원을 하느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신다고 판단하게 되고,
결국에는 우리 신앙의 자존감을 우리 스스로 낮추게 됩니다.
‘내가 아직 부족한 신앙인이라서’
또는 ‘하느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시지 않아.’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또 내가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에게 돌을 달라고,
뱀을 달라고 청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돌과 뱀을 주겠습니까?
우리는 돌과 뱀이 아닌
빵과 생선을 주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도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좋은 것’,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돌을 달라고 청한다고
무조건 돌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돌을 달라고 청하여도
빵을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이제 다시 묻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무엇을 청하였던가요?
내가 바라는 것, 좋아하는 것이었습니까?
아니면 나에게 필요한 것이었습니까?
이 질문과 함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좋은 것도 함께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박형순 신부)-
2021년 2월 26일 (금) [자] 사순 제1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태오5,20ㄴ-26
세상에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에는
그러한 의로운 사람들보다 악인들이 잘 보이고,
또 악인들이 저지른 악행을 더 많이 접하게 됩니다.
그러는 가운데 ‘하느님께서는 어디에 계신가?’
‘하느님께서는 왜
악인들의 악행을 가만히 두고 보시는가?’
‘하느님께서 계시기는 한 것인가?’와 같은
많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이러한 의문과 질문에 대한 답을
오늘 독서 말씀인 에제키엘 예언서가 우리에게 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죽음이 아닌 구원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에 이르는 길은 바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회개’ 또는 ‘회심’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현재를, 오늘을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은 현실감 없는
이야기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지상 여정이 우리 삶의 전부가 아니라,
지상 여정을 마친 뒤에도 지속되는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믿고 고백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완성된 삶을 향하여 우리는 지금 걸어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는
영원한 생명에 올바르게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회의 시간입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악인과
그들의 악행이 만연하는 세상 때문에
하느님을 불신할 수 있습니다.
의인보다 악인이 더 성공하는 모습에
우리는 하느님의 정의가 사라짐을 슬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의 시간은 바로
하느님께서 하느님을 벗어난 사람들에게
다시 돌아올 수 있는 회개의 기회를
주신 시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 삶의 방향이 악이 아닌
하느님을 향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노력을 특별히 기울이는 시간이 사순 시기입니다.
악이 아닌 하느님을 향하여 돌아가려는 우리의 움직임,
그것이 바로 우리를 은총으로,
구원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박형순 신부)-
2021년 2월 27일 (토) [자] 사순 제1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5,43-48
주님의 규정과 법규를 따르고
실천하면 하느님께 복을 받습니다.
이것은 신명기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상선벌악의 가르침은,
구약 시대에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
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유효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막상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살겠노라고
결심하고 살아가려면 많은 희생이 요구되지요.
나만 바보가 되는 것 같은 모습에 억울하기도 합니다.
그뿐만이 아니지요. 주님의 계명에 충실하게 사는 사람보다,
악을 일삼는 사람들이
떵떵거리며 사는 모습에 화가 나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가 이 세상에서 드러나기가 어려워 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알려 주십니다.
이 세상은 바로 하느님의 자비가 넘치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느님 나라가 자비가
넘치는 세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반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악인과 선인을
동등하게 대우해 주십니다.
악인과 선인에게 똑같이 당신의 햇빛을 비추어 주시고,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 모두에게 비를 내려 주십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하느님의 심판으로 가득하고
하느님의 자비가 없는 곳이라면,
하느님께서는 선인에게만 해를 비추어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가 실현되지 못하는 모습에
우리는 속상한 마음을 품어 왔습니다.
그러나 공정과 정의는 우리가 훗날
맞이하게 될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지금은 공정과 정의보다 하느님의 자비가 더 큰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비가 가득한 세상에서
완전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의 심판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길입니다.
그 길은 지금 이곳에서 주님의 계명과 가르침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면서 시작됩니다.
그 길이 지금 우리의 눈에는 부당하고,
억울하게 보일지라도 말입니다.
-(박형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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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작년에는 재의 예식도 하지 못하였지만
그래도 올해는 머리에 재를 올렸습니다.
몸과 마음을 다하여
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