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묵상]
2021년 2월 7(일)
[녹] 연중 제5주일
연중 제5주일
제1독서(욥 7,1-4,6-71)
제2독서(코린 9,16-19,22-23)
복음(마르 1,29-39) 모든 이에게 모든 것
마귀 들린 이들은 자유로운 삶을 상실하고 더러운 영에 소유돼
그들을 치유하는 예수님의 행위는 하느님 현존 드러내는 표징
기도와 복음 선포에 담긴 힘으로, 주님은 상처를 치유하시는 분
“나의 의무는 이 장면을 보고
감탄하거나 놀라는 것에 멈추지 않고,
이 의미가 무엇인지 더욱 명확히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로버트 프로스트)-
1월 둘째 주에
복음서를 주제로 화상 실시간 강의를 마치며
나눔을 했는데 한 학생이 “저는 복음서에 대한
설교를 너무 많이 들어
복음서는 싫증이 났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매일 ‘하느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습관적 경청이 아니라 싱싱하게 체험하며 살고 있을까요?
■ 복음의 맥락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
첫 날을 마무리하는 단락입니다.
마르코는 1장 39절에서 예수님의 선교 활동을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고
한마디로 요약합니다.
예수님에게 병자 치유, 특히 마귀 추방은
복음 선포와 별개가 아니라
거기에 수반되는 중요한 활동입니다.
예수님은 이 첫날 목표와 일정을
매일 한결같이 충실하게 살아갑니다.
제1독서 욥의 고통스런 기도는 병자 치유,
제2독서 사도바오로의 고백은 복음 선포의 관점에서
모두 복음서 본문을 묵상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 마귀, 마귀 들린 이
오늘 복음에
‘마귀’라는 용어가 네 번 나옵니다.
성경 번역본과 서적마다 용어가 달라
혼선을 가져오는데 천사와
케루빔이 다르듯이 사탄과 마귀도 다릅니다.
사탄(히브리어로 ‘사탄’,
그리스어로 ‘디아볼로’)은 마귀들의 두목에 해당합니다.
신약에서 마귀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다이모니온’인데 의미가 광범위한 ‘다이몬’에서 유래합니다.
다이몬은 고대 그리스 시대에 신과 인간 사이에 있는
중간 존재, 자연신, 또는 내면 안의 영적인 것,
양심의 목소리(소크라테스) 등 여러 가지로 해석했습니다.
요약하면
다이모니온의 원래 의미는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보통 인간의 체험을 넘어서는
초자연적인 체험, 인간의 행동, 현상을 가리킵니다.
구약성경에는 마귀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염소 귀신’처럼 마귀, 귀신이라는 말이 아주 가끔 나오는데
이스라엘 신앙이 아니라 이교 세계와 신화의 잔재입니다.
따라서 구약에는 마귀 축출에 대한
내용도 토빗기(3,8)를 제외하고는 나오지 않습니다.
구약과 달리 예수님 시대
전부터 후기 유다교에 많은 영의 존재를 믿은
메소포타미아 문화의 영향으로
마귀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꽃피게 됐습니다.
유명한 랍비 요하난(180~279)은
어느 갈릴리 도시에 남자 귀신 300명이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의학이 발전하지 않았던 시대에 열병, 간질,
심지어는 술주정도 마귀 소행으로 돌렸고
질병에 해당하는 마귀들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 초대교회도 동시대인들의 이런 믿음을 공유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귀 들린 이’는
‘더러운 영이 들린 이’와 같은 부류입니다.
마르코는 가끔 두 용어를
같은 의미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마르코의 맥락 안에서
두 용어를 굳이 구분하자면
‘더러운 영’은 평소에는 드러내지 않다가
구체적인 상황, 곧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하느님의 거룩한 영과 반대되는
더러운 영에 소유된 상태를 드러냅니다.
회당 안의 더러운 영 들린 이가
갑자기 복수형으로 “저희를 멸망시키러”
(마르 1,24) 왔느냐고 예수님께 대적합니다. 그
는 율법학자들처럼 예수님 가르침에 무감각하고
적대적으로 대항하게 만드는 가치시스템이나
이데올로기를 따르는 존재를 상징합니다.
마귀 들린 이는 그 상태가 항상 지속적이며
명확하게 눈에 보이고 삶의 자유를 상실한 사람입니다.
■ 마귀를 어떻게 쫓아내는가?
복잡하게 보이는 이런 용어 구분보다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어떻게 마귀를 쫓아냈는 가입니다.
‘쫓아내다’라는 동사는 마귀가 그 자리에
와 있다는 것을 알고 보내 버리다,
거부하다, 쫓아내다, 도망치게 하다는 뜻입니다.
이교 세계와 유다교 세계는 마귀들을 몰아낼 때
마술이나 주문, 다른 마법 의식으로 쫓아냈습니다.
탈무드에도 마귀들을 쫓아내는
다양한 ‘방법’(레시피)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은
그분의 권위 있는 말씀만으로
마귀를 쫓아내기에 충분합니다.
예수님 말씀과 관련된 여러 동사를 보십시오.
예수님은 마귀를 ‘꾸짖고’,
“조용히 하여라, 나가라”고 소리치고,
“다시 들어오지 말라”고 명령하며
마귀의 활동을 즉시 차단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귀와는
대화와 협상을 할 수 없습니다.
마귀가 예수님 말씀에 항복하거나
순종하는 것은 예수님이 하느님 아들로서
하느님의 주권을 가진 분, 메시아라는 표징입니다.
모세와 엘리야 같은 구약의 예언자들도
여러 가지 기적을 일으켰는데
이것은 그들의 말과 행위 안에
하느님이 현존한다는 표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치유 행위는
산발적인 어떤 개입에 국한되지 않고
예수님 사명의 핵심이며 그분 직무의 일상적 행사였습니다.
예수님은 마귀들에게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데
그들이 고통과 죽음을 겪어야하는 하느님 아들
메시아가 아니라 영광과 권력을 가진 다윗의 아들
메시아로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잘못된 지식이 널리 퍼지면
다른 사람을 감염시켜 예수님 사명이 더욱 힘들어집니다.
■ 기도, 마귀 축출의 원동력
특히 제 시선을 끄는 것은
예수님이 마귀를 몰아내고
‘새벽 아직 캄캄할 때’(마르 1,35)
기도하는 장면입니다.
하느님 아들 예수님도 여느 인간처럼
자신의 한계를 의식하고 그분 존재의 뿌리인
하느님아버지에게서 매일 양분을 얻지 않으면
마귀에 억눌린 사람들을 해방시킬 힘을
상실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내밀한 친교를 나누는 순간인
기도의 힘으로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을 변화시켰습니다.
예수님은 복음 선포자, 복음을 가르치는
사람에만 머물지 않고
복음 선포에 담긴 힘으로 진정한치유자,
‘모든 이에게 모든 것’(1코린 9,22)이 됐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으로 오늘도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 주십니다.(시편 147,3) 아멘!
-임숙희(레지나)-
▲한국천주교 중앙협의회 입구 성모자상
[한주간 전례]
2021년 2월 8일 (월) [녹] 연중 제5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6,53-56
하느님 말씀이 담긴 성경.
그 성경의 첫 시작을 우리는 오늘 만납니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나온 세상과 인류의 기원에 대한
수많은 이론과 비교하자면 조금은황당하고
비이성적으로 다가오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창조 이야기는 창세기의 저자가 세상이 창조되는
그 순간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기록하거나,
과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증명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신앙의 언어로
기록한 신앙 고백문입니다.
그리고 신앙 고백의 정점에는
‘창조’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창조’는 무에서 유를 이끌어 내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힘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구약 성경 전체에서
하느님께서만이 ‘창조하다.’라는 동사의 주어가 되십니다.
이러한 하느님께서
창조하시는 힘은 ‘말씀’으로 실현됩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자 그대로 되는 것이지요.
창조의 재료는 오로지 ‘말씀’뿐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말씀이 지닌 힘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첫 장면부터
하느님 창조의 힘과 그분 말씀의 힘이 드러납니다.
그렇게 창조하신 이 세상에 대하여
하느님 당신께서 보시니 좋으셨다고 평가하십니다.
창조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는 말씀이 창조한 ‘세상’과
세상을 창조한 ‘말씀’을 마주합니다.
말씀이 창조한 세상은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었습니다.
세상을 창조한 말씀은
우리를 좋은 세상으로 초대합니다.
오늘 화답송과 같이,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이루신 일을 기뻐하셨습니다.
보시니 좋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마주하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에게도 좋은 세상이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박형순 신부)-
2021년 2월 9일 (화)[녹] 연중 제5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7,1-13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조금은 따분하고 지루하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창조된 순서대로 피조물을 살펴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순서대로
빛, 물과 하늘, 땅과 식물들, 빛물체, 바다 생물과 새,
땅의 생물들과 사람을 창조하시고 마지막 날에
휴식하시며 복을 내리셨습니다.
가장 마지막에 창조된 피조물이 무엇인가요?
바로 인간입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이 가장 마지막에 창조되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인간이 가장 소중하므로 마지막에 창조된 것입니다.
창조의 순서는
인간을 위한 모든 공간이 마련되고
채워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삼라만상의 설계 작업이 마무리된 뒤에,
인간이 그 자리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지요.
인간의 소중함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모습”으로 창조하시는 장면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대로 창조하신 피조물은
사람이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인간 중심의 창조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다른 피조물은 모두
“제종류대로”(창세 1,11.12.21.24.25) 만드셨지만,
사람만은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복을 내리시고,
온갖 생물을 다스릴 권한도 부여하십니다.
하느님 창조 활동의 중심에 바로 사람이 있습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애정,
그 사랑의 이야기가 창조 이야기에 담겨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렇게 소중한 존재입니다.
나의 모습에, 이웃의 모습에 하느님의 모습이 함께 있습니다.
그 모습을 사랑하고 아끼는 것,
그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박형순 신부)-
2021년 2월 10일 (수) [백]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스콜라스티카 성녀는 480년 무렵
이탈리아 움브리아의 누르시아에서 태어났다.
성 베네딕토 아빠스의 누이동생인 스콜라스티카는
베네딕토 성인이 세운 여자 수도원의
첫 번째 수녀이자 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성녀는 베네딕토 성인과의 영적 담화를 통하여
수도 생활에 대한 많은 격려와 도움을 받았다.
[복음묵상] 마르코 7,14-23
오늘 독서에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우리가 ‘선악과’라고 알고 있는 나무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것처럼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으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맙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유일한 금지 명령을 어겼습니다.
선악과 이야기를 마주할 때마다,
우리는 의문이 생깁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인간이 그것을
먹을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셨을까?’ ‘
그 사실을 알고 계시면서도 선악과를 준비하신 것인가?’ ‘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좋으신 하느님이 아니시라,
인간을 악에 빠지게 만드시는 하느님이 아니신가?’
그러나 창세기의 저자는
우리가 의혹을 제기하기보다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옆에는
생명나무도 함께 있었지만,
아담과 하와는 그 나무를 바라보거나
그 나무에 손을 대지도 않았습니다.
선과 악을 아는 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닌
하느님의 영역이므로, 생명에 머물고자 한다면
생명나무를 선택하고
하느님의 명령을 따라야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러한 사실을 거부하고
자신의 길을 걸었기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생명나무”보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더 먹음직스럽고,
우리를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창세 3,6 참조).
모든 나무 열매가 다 우리의 것이지만,
단 하나의 나무만은 하느님의 것으로
남겨 드려야 함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양보는 우리를 생명으로 이끌어 주고,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경외심의 작은 표현이 될 것입니다.
-(박형순 신부)-
2021년 2월 11일 (목) [녹] 연중 제5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7,24-30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과 이방 여인의 만남에,
‘만약’이라는 가정을 해 봅니다.
만약 이 여인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지 못하였다면,
만약 예수님을 찾아가지 않았다면,
만약 자신의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예수님께 청하지 않았다면,
만약 예수님께 들은 모욕적인 말에 기분이 상하여서
예수님을 바로 떠났다면 어떠하였을까요.
네 번의 ‘만약’ 가운데 하나라도 이루어졌다면,
그녀는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한 번도 아닌,
네 번에 걸친 ‘만약’이라는 관문을
이 여인은 통과합니다.
네 번의 관문은 그것이 진행될수록
점점 견디기 어려워집니다.
적극적으로 찾아 듣지 않아도 소문은 들려옵니다.
철저하게 수동적인자세입니다.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갈 때부터
능동적인 행동이 됩니다.
얼마나 먼 거리를 걸어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인이 이방인 남자인 예수님을
찾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찾아간 곳에서 예수님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청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관문은 절정을 향하여 갑니다.
자신을 강아지에 비유하는 예수님의 모욕이 남았습니다.
점점 어려워지는 관문이었지만,
그 여자는 예수님에 대한 강한 믿음으로 이것을 통과합니다.
이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가 보여 준 것처럼,
예수님께 나아가는 우리의 길에도
‘만약’이라는 관문이 놓여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 앞에 놓인 관문을
이겨 낼 수 있을 만큼 견고한가요?
아니면 나의 귀찮음과 불편함 때문에,
또 나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드는 모욕감 때문에,
예수님을 향한 여정을 쉽게 포기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몇 개의 관문이 우리 앞에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 놓인 ‘만약’의 관문을 넘어서야만
우리는 예수님과 진실 된 만남을,
아울러 그분께서 선사하시는 구원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박형순 신부)-
2021년 2월 12일 (금) [백] 설
오늘은 음력 정월 초하룻날로,
조상을 기억하며 차례를 지내고
웃어른께 세배를 드리며 덕담을 나누는
우리 민족의 큰 명절인 설입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하며 잠깐 나타났다
사라져 버리는 한줄기 연기일 따름임을 잊지 말고,
주님의 충실한 종으로서 늘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합시다.
[복음묵상] 루카 12,35-40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한 해를 허락하셨습니다.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면서
새해의 첫날을 시작해 봅니다.
우리는 새해를 시작하면서 많은 계획을 세웁니다.
금연, 금주, 다이어트 등.
새롭게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면서 희망을 품고 이야기합니다.
비록 작심삼일로 그칠 수 있지만 그래도
그 결심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함께 응원합니다.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면서 우리는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고 서로 인사를 나눕니다.
복을 바라고, 또 복을 비는 행위는 우리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중요한 행위였습니다.
우리의 전통과 그들의 전통은 다르게 다가옵니다.
우선 이스라엘에서 복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복을 주지 않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복이 다른 사람에게
내릴 수 있도록 빌어 줄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설렘과 희망을 품고
축복 가득한 새해 벽두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복을 빌어 주고,
어떤 복을 바라고 있나요?
저마다 바라는 복의 모습은 모두 다를 것입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새해 첫날을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봉헌하면서,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축복’이 가득하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복을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축복을
내려 주시기를 청해보면 어떨까요?
새해 첫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면서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이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박형순 신부)-
2021년 2월 13일 (토) [녹] 연중 제5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8,1-10
예수님께서 빵으로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신 일은
오늘 복음에 앞서 이미 한 번
일어났던 일입니다(마르 6,30-44 참조).
그때는 사천 명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모여
장정만도 오천 명이었습니다.
또 한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오늘 복음보다 더 큰 기적처럼 여겨집니다.
그런데 그렇게 엄청난 기적을 이미 체험하였으면서도,
그때와 거의 유사한 오늘 복음의 상황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의 행동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마르코 복음사가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요?
이러한 의문은 제자들의 물음으로 풀립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자
제자들은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마르 6,37)라고 반문합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 반응은
첫 번째 기적 때와는 조금 다릅니다.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
첫 번째 질문에서 비용을 중요시하였다면,
두 번째 질문은 누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거저 주어지는 잔치며,
오늘 복음의 기적은 예수님께서만
하실 수 있으신 일임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두 기적이야기를 함께 읽는다면,
빵의 기적은 바로 예수님께서
거저 베푸시는 잔치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와 감사를 드리시고 쪼개어 나누어 주십니다.
이 장면을 우리는 미사 안에서 보고 듣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참여하는 미사가 바로
무상으로 주어지는 은총의 잔치요,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초대의 자리입니다.
돈을 낼 필요 없고,
누가 준비할 것인지를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마련해 주십니다.
단 우리가 예수님께 다가가야만 유효한 잔치가 될 것입니다.
-(박형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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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초에는 완연한
눈도 오고
바람도 세계 불고했지만
입춘이 지났습니다.
아무리 겨울이 용을 써도
따뜻한 봄이 더 힘이 쎈 듯합니다.
봄날과 함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Berard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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