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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1월 31(일) [녹] 연중 제4주일(해외원조주일)

Berardus 2021. 1. 30. 07:15

    [말씀 묵상] 2021년 1월 31(일) [녹] 연중 제4주일(해외원조주일)

    연중 제4주일 제1독서(신명 18,15-20) 제2독서(1코린 7,32-35) 복음(마르 1,21ㄴ-28)

    생명과 사랑의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 목소리에 찬미와 감사를 재물·권력·명예 유혹 물리치고 기도로 진정한 평화 얻게 되길


      1월 마지막 주일은 해외 원조 주일입니다. 한국교회는 가난한 나라들을 한 가족으로 여겨 자비의 손길을 폅니다. 연중 제4주일인 오늘의 복음은 신앙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침의 중심이며, 영을 지배하는 힘을 가진 스승이심을 현시합니다. 기도와 성사로 우리는 영혼의 생명이신 주님과 친교를 이루기로 굳게 다짐합니다. 모세는 하느님께서 자신과 같은 참 예언자를 세우시니 백성들은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선포합니다(제1독서). 예언자는 사랑이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해낸 해방자이고, 시나이산에서 계시하신 십계명의 중개자입니다. 주님께서는 마음이 무딘 백성들이 분명히 기억하라고 계명을 돌판에 새겨주십니다. 십계명은 인간의 마음을 사랑의 덕으로 양육하는 생명의 길입니다. 악령이나 악습에 젖은 사람의 역겨운 짓과 자기중심의 우상숭배는 주님과 친교를 가로막습니다. 백성들은 늘 하느님을 경외하기에 중개자가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약 시대에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을 전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을 예고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온유하게 가집니다(화답송, 시편 95). 광야에서 목마른 백성들이 모세와 시비하며 주님의 현존을 시험하자, 모세는 지팡이로 구원의 바위를 쳐 샘솟는 물을 마시게 합니다. 주님 목장의 양 떼인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립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삶에 걱정이 없기를 바랍니다(제2독서).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피조물 가운데 가정은 참 아름답습니다. 혼인은 하느님 모습으로 인간을 남녀로 창조하신 사랑의 친교이기 때문입니다. 죽음보다 강한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혼인 생활은 소유와 갈등과 불신으로 빚어지는 고통을 견뎌야 하고, 때로는 파탄에 이릅니다. 미혼자는 주님의 일을 걱정하지만, 혼인한 사람은 어떻게 하면 배우자를 기쁘게 해 줄 수 있을까 하고 세상일을 걱정하여 마음이 갈라집니다. 우리가 세례와 혼인 성사에서 서약한 대로 살면, 교회와 한 몸이되어 주님만을 섬기고 형제애로 삽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은 메시아의 비밀을 현시합니다. 안식일에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행복의 스승이신 예수님의 가르침과 치유의 은총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율법학자와 달리 새롭고 권위 있으며, 더러운 영도말씀에 복종하기에 모두가 “이게 어찌 된 일이냐?”고 놀랍니다. 회당에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괴력으로 소리를 지릅니다. “나자렛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마르 1,24)?” 더러운 영은 거룩하신 하느님께 저항하는 악마입니다. 악마는 예수님이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시고, 자기 힘을 꺾는 분이심을 알기에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고 경계합니다. 주님께서는 꾸짖으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25).” 더러운 영은 주님의 명령에 복종합니다. 악마는 존재할까요? 스마트 시대인 오늘날에도 존재합니다. 악의 유혹에 걸려 넘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보니, 악마는 신화와 전설, 헛된 공상과 관념의 존재가 아니라 더러운 영임을 깨닫습니다, ‘거짓말쟁이’인 악마는 호의적으로 유혹하고, 때론 악의적으로, 때론 변덕스럽게 개입하여 주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영혼의 구원을 가로막습니다. 악의 기원은 유 혹을 받은 인간이 자유를 남용한 원죄입니다(창세 3장). 성경, 교리서, 역대 교황님들의 교서는 악마의 힘이 아무리 강해도 전능하신 주님께 굴복함을 선포합니다.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는 이들은 거룩한 도성에 들어가고, 악의 유혹에 빠진 이들은 절망입니다(묵시 22장). 교회는 ‘주님의 기도’로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간청하고, 악령이 들린 징후를 식별하며, 성령의 힘으로 ‘구마기도’를 통해 악마를 물리칩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단식하시며, 악마의 유혹을 세 차례 받으셨습니다 (마태 4,1-11; 마르 1,12-13; 루카 4,1-13). 나약한 인간은 누구나 빠지기 쉬운 재물과 권력과 명예의 유혹입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며,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고, 그분만을 섬겨야 한다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으로 물리치십니다. “주님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을 밝히는 빛이옵니다(시편 119,105).” 오늘 “조용히 하여라.” 하신 말씀을 마음에 간직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도록 시간을 내어드리고 침묵 속에 경청하며 주님과 친교로 내면의 정화와 마음의 평화를 얻습니다. 악의 유혹에 맞서는 길은 영혼의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바라고 사랑함에 있습니다.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는 내면을 아름답게 가꾸는 겸손입니다. 진리의 성령께서는 우리가 말씀 안에 현존 하시는 주님과 사랑의 일치를 이루도록 새 생기를 불어 넣어주십니다.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마르 9,23).” 아멘. -김창선(가톨릭 영성독서 지도사)- 21-01-05.jpg [한주간 전례] 2021년 2월 1일 (월) [녹] 연중 제4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5,1-20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을 향한 두 가지 상반된 태도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라고 외치는 모습과 예수님께 떠나 달라고 청하며 거부하는 모습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을 향하여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외치는 이가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군대’라는 이름을 가진 ‘더러운 영’이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모였던 사람들은 예수님께 자신들의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 청을 드립니다. ‘군대’라는 악령은 무덤에서 살면서 족쇄와 쇠사슬도 무력하게 만드는 엄청난 힘을 지녔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사람들은 그 ‘군대’를 몰아낸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에 거부감을 표시합니다. 마르코복음사가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왜 떠나 달라는 청을 드렸는지 명확하게 밝혀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마귀 들렸던 이와 돼지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 예수님께 떠나 주십사고 청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그 이유의 중심에는 이천 마리의 돼지 떼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게라사인들에게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예수님의 신원보다, 그분께서 행하신 기적보다, 돼지 이천 마리가 더 중요하였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보다 더 큰 피해를 당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들은 자신들을 향하여 다가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을 거부합니다. 우리는 어떤 태도로 예수님을 마주하고 있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희생하시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봅니까? 혹시 우리 마음에도 돼지 떼가 있어 그분의 다가오심을 거부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이 질문에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박형순 신부)- 2021년 2월 2일 (화) [백] 주님 봉헌 축일 교회는 성탄 다음 40일째 되는 날, 곧 2월 2일을 주님 성탄과 주님 공현을 마감하는 주님 봉헌 축일로 지낸다. 이 축일은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례를 치르시고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한다. 예루살렘에서는 386년부터 이 축일을 지냈으며, 450년에는 초 봉헌 행렬이 여기에 덧붙여졌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날을 ‘축성 생활의 날’로 제정하여, 주님께 자신을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날로 삼았다. 이에 따라 교회는 해마다 맞이하는 이 축성 생활의 날에 수도 성소를 위하여 특별히 기도하고, 축성 생활을 올바로 이해하도록 권고한다. 한편 한국 교회는 ‘Vita Consecrata’를 ‘축성 생활’로 옮기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봉헌 생활의 날’을 ‘축성 생활의 날’로 바꾸었다. (주교회의 상임위원회 2019년 12월 2일). [복음묵상] 루카 2,22-40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모세의 율법에 따라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주님 봉헌 축일에는 참으로 놀라운 구세주 강생의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이신 분께서 사람이 되신 것으로 모자라, 사람의 도움으로 하느님께 봉헌되십니다. 아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지만, 사람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갓난아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스스로 봉헌하신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손길을 통하여 하느님께 봉헌되셨던 것입니다. 정결례가 끝난 뒤에 장면이 전환됩니다.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시메온 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예수님을 두 팔에 받아 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맞이한 시메온은 ‘시메온의 노래’를 부르면서 구세주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을 보았음에 감사 기도를 올립니다. 주님 봉헌 축일에 우리는 이렇게 두 개의 손길과 마주합니다. 하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으신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 아버지께 인도하는 손길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맞이하고 품에 안는 두 팔입니다. 우리는 주님 봉헌 축일을 기념하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의 도움과 손길을 요구하고 계심을 기억하고, 동시에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우리의 두 팔로 따뜻하게 안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미사 안에서 주님께서는 성체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면서 우리의 손길과 도움을 청하십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을 우리의 두 손과 따뜻한 마음으로 안아 드려야 하는 순간입니다. 아울러 오늘은 주님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 자신의 삶을 봉헌하는 수도자들을 위한 ‘축성 생활의 날’입니다.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며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드리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기도 중에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박형순 신부)- 2021년 2월 3일 (수) [녹] 연중 제4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6,1-6 마르코 복음서는 그 장엄한 시작을 다음과 같이 들려줍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 마르코 복음사가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예수님의 참된 신원은 “하느님의 아드님”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각기 다른 시각이 언급됩니다.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 이것은 나자렛 사람들의 시각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기는 하지만, 그들의 이러한 시각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태도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상반된 두 관점,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과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의 긴장이 오늘 복음에서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눈에 예수님께서는 그저 마리아의 아들이고 목수였을 뿐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는 다른 지역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마르 1,22 참조), 예수님을 훌륭한 분으로 인정합니다(마르 7,37 참조).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하는 시각이 매우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위하여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위하여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많은 기적을 행하시지만, 반대로 목수로만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기적을 일으키실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떠한 분으로 바라보고 있나요? 하느님의 아드님? 아니면, 나자렛 출신 목수? 그분을 향한 우리의 태도가 우리를 향한 그분의 행위를 결정합니다. -(박형순 신부)- 2021년 2월 4일 (목) [녹] 연중 제4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6,7-13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십니다. 열두 제자의 기원은 이스라엘 백성의 열두 지파에서 출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열두 지파’와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열둘이라는 숫자로 구약과 신약을 이어주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통하여 약속하신 것은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땅’이 그들에게 주어진 유산이요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선포하신 것은 ‘땅’이 아닌,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입니다. 바쁜 일상을 살아가고 촌각을 다투면서 치열한 삶의 현장을 살아 내는 우리입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은 아직도 먼 미래의 이야기, 현실감 없는 이야기, 성당에 나와야 가끔 듣는 이야기로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의 상황을 이해하고 계신 듯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영원한 생명’을 말씀하시지 않고, 우리가 차근차근 영원한 생명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그 첫걸음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그리고 그 말씀은 제자들을 통하여 다시금 선포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땅’, ‘돈’, ‘명예’, ‘성공’을 약속하셨다면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지금 이 자리에서 열렬히 따랐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땅보다 더 소중한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다는 사실을. 일상에서, 우리의 지상 순례의 여정에서, 영원한 생명은 아직은 너무 먼 이야기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 시작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선포하고 교회가 계승한 ‘회개’에 있음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내가아닌 하느님께 향하게 해 보면 어떨까요? -(박형순 신부)- 2021년 2월 5일 (금) [홍]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아가타 성녀는 이탈리아 남부의 시칠리아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신심이 깊었던 그녀는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고자 평생 동정으로 살았다. 아가타는 철저하게 동정을 지키려다 지방 관리의청혼을 거절하여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데키우스 황제 박해 기간(249-251년)에 순교한 아가타 성녀에 대한 공경은 초대 교회 때부터 널리 전파되었다. [복음묵상] 마르코 6,14-29 구약의 구원 역사를 마무리하며, 신약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인물이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자들의 시대는 요한까지다.”(루카 16,16)라고 확인해 주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바로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헤로데라는 권력자의 부당함을 지적하였는데 그것이 빌미가 되어 참수를 당합니다. 이는 구약의 이사야 예언자의 삶과 비슷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곧게 내라는 이사야의 선포를 수용합니다(마르 1,2-4 참조). 그 옛날 이사야가 외친 것처럼,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칩니다. 이사야와 세례자 요한은 삶의 마지막 모습도 닮았습니다. 이사야는므나쎄 임금의 폭정을 거슬러 하느님 말씀을 전하다가 참수를 당하였고, 세례자 요한도 헤로데 임금에게 참수를 당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삶과 외침은 참예언자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세례자 요한이나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목숨을 걸고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를 선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러기에는 우리가 너무나 약한 사람입니다. 공정과 정의를 추구하면서 살아가기에 고려해야 하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생계에 대한 걱정, 돌보아야 하는 가족들, 이외에도 많은 것들이 얽히고설켜서 우리의 발목을 잡습니다. 이렇게 약한 우리에게 세례자 요한의 모습은 멀리 떨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예언자적 삶을 살아갈 수 없을지라도 우리에게 들려오는 예언자적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 어떨까요? 그 음성과 그 외침에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나를 변화시켜 봅시다. 나만을 위하고 나만을 향하였던 마음을 주님께 돌리는 것, 그것이 바로 세례자 요한이 외치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회개’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박형순 신부)- 2021년 2월 6일 (토) [홍]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바오로 미키 성인은 1564년 무렵 일본 오사카 인근의 도쿠시마에서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예수회 소속의 대학을 졸업한 뒤 수사가 된 그는 열정적으로 복음을 선포하여 대단한 결실을 거두었다. 그러나 바오로 미키 수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박해 때 25명의 동료들과 함께 붙잡혀 1597년 나가사키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다. 1862년 그를 비롯한 동료 순교자들이 시성되었다. [복음묵상] 마르코 6,30-34 예수님께서 군중을 바라보시는 눈, 그 시선을 느껴 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언가 바라고 갈망하는 눈빛을 예수님께 보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눈과 군중의 눈이 만납니다. 그 만남 속에서 참된 목자, 착한 목자를 기다리는 그들의 마음이 예수님께 전해집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는 오늘 화답송에서도 강조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라고 다윗 임금은 노래합니다. 다윗은 이 노래에서, 주님께서 목자로 자신에게 행하시는 모든 것이 은총과 자애로 다가옴을 아름답게 읊어 냅니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또 어떤 상황에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이렇게 우리에게 위안이 되는 말씀을 마주하게 됩니다. 좋은 말씀, 위로의 말씀, 힘이 되는 말씀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 러나 우리의 구체적 일상에서 주님의 말씀을 마주하였을 때, 항상 일치되는 신앙을 체험하고 있는지 조심스레 물어봅니다. 주님께서 나를 푸른 풀밭에 쉬게 하시는가? 잔잔하고 고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는가? 이 질문에 우리는 “예!”라고확신하기보다, 말씀과 삶 사이의 거리를 마주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느끼는 거리는 우리 신앙의 자존감을 떨어뜨려, 스스로를 신앙심이 부족한 사람으로 여기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마주하셨던 군중, “주님은 나의 목자”라고 고백한 다윗 임금. 주님을 향한 갈망을 지닌 공통점을 가진 이들은 우리의 눈과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가 중요함을 알려 줍니다. 우리의 일상은, 우리의 삶의 자리는 어둠의 깊은 골짜기를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과 마음이 주님을 향할 수 있다면 깊은 골짜기는 두려움의 자리가 아니라 구원의 자리로 변화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참된 의미입니다. 나의 눈과 마음이 향하고 있는 곳은 어디인가요? 당신께서 목자이심을 알려 주시는 그분께 우리의 방향을 정해 봅시다. -(박형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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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초에는 완연한 봄기운이 물씬 풍겼다면 주 후반에는 다시 강추위가 기승입니다. 이렇듯 우리의 삶이 변화가 많음을 새삼 느끼며 하루하루에 충실하고자 노력해 봅시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