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주일
제1독서 (요나 3,1-5.10)
제2독서 (1코린 7,29-31)
복음 (마르 1,14-20)
매력적인 교회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왔음을
감동적으로 보여주신 예수님처럼
밑바닥부터 쇄신하고
세상에 희망 주는 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
■ 매력적인 존재가 되기 위하여
여든을 훨씬 넘긴
요셉 어르신께서는
요즘 동년배 친구들로부터
미움과 지탄을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연세에 비해 너무 젊다는 것입니다.
몇몇 친구들은 이미 오래전 요르단 강을 건너갔습니다.
또 다른 친구들은 뒷방에서 골골하며 누워 있습니다.
하루 온종일 천장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나마 형편이 나은 친구들은 요양원에서
훨체어에 의지한 채, 먼 산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 어르신께서는
아직도 팔팔합니다.
당당히 두 발로 여기저기 휘젓고 다닙니다.
트레이드마크인 멋진 구식 자전거를 타고
장도 척척 봐 옵니다.
아직도 꼬질꼬질 하지 않고 깔끔합니다.
비록백발이지만 머리숱도 풍성,
허리도 꼿꼿, 유머감각도 보통이 아닙니다.
요셉 어르신께서 마을 광장 앞 카페에 등장하시면,
남녀노소 모두 반가운 나머지 박수를 치고 좋아합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온몸에 매력이 철철 넘쳐흐릅니다.
그런 소식을 전해들은
요양원 친구들은
“무슨 그 따위 인간이 다 있냐?
하느님께서는 왜 이다지도
불공평하시냐?”며 버럭 화를 냈습니다.
너무 신기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요셉 어르신께 여쭈었습니다.
“젊게 사시는 무슨 좋은 비결이라도 있나요?”
“물론 있지!” “좀 가르쳐 주실 수 있나요?”
“당연하지, 이리 따라오게!”
요셉 어르신께서는
당신 서재로 안내했습니다.
벽에 걸려 있는 액자를 가리켰습니다.
거기에는 당신이 직접
달필로 쓰신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제목은 ‘잘 늙기 위한 7가지 비결’이었습니다.
당신이여기저기서 전해들은 것들을
나름 종합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까칠하게 굴지 말기.
2. Stop and Go. 기도와 활동을 적절히 병행하기.
3. ‘여기 아파, 저기 아파’라는 말 입에담지 말기.
4. 시간도 많은데, 자주 씻고 자주 옷 갈아입기.
5. ‘라떼는 말이야’라는 말 절대 금지.
6. 최고의 얼굴 마사지, 환하게 웃기.
7. 틈나는 대로 유머 감각 발휘하기.
그러나 너무 오버하지는 말기.
공생활 초기,
힘차게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 땅 위에 하느님 나라가 도래했음을
온몸으로 보여 주신
예수님의 모습 역시 참으로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신선하면서도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분의 얼굴은 찬란한 광채로 눈부실 지경이었습니다.
그분께서 발산하시는 강렬한 빛에
매료된 사람들은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즉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회심과 사랑고백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그분의 흘러넘치는 매력에 홀딱 반한 사람들은
놀랍게도 목숨처럼 소중히 여겼던 모든 것을
미련 없이 내팽개치고, 그 자리에서 그분을 따라 나섰습니다.
■ 예수님의 매력 앞에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나선 제자들
2000년 전 갈릴래아 호숫가
한 작은 마을에서는 한바탕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마을의 미래를 책임질 청년들,
시몬과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이
갑자기 마을을 떠나 버린 것입니다.
한 가정의가장으로서 식솔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사람,
세세대대로 명맥이 이어져 온
가문을 이어가야 할 사람,
누군가에게는 희망이요, 든든한 보루 같은
젊은이들이 동시에 떠나 버렸으니,
마을 전체가 큰 혼란에 빠졌을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아버지
제베대오 같은 경우 얼마나 황당했겠는지,
즉시 그림이 그려집니다.
그날도 두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출항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지난번 조업 후 얽히고설킨 그물을 손질하고,
타고나갈 배도 청소하고, 요깃거리도 챙기고….
그런데 아버지 제베대오가 허리를 한번 크게 펴고 나서,
아들들이 일을 잘 하고 있나 하고 둘러보니,
깜짝 놀랄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물을 손질하는 도구를 내팽개친 두 아들은
아버지에게 간다 온다 말도 없이
예수라는 사람을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아버지 제베대오는
기가 막히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해서
큰 소리로 외쳤을 것입니다.
“어이, 아들들!
지금 너희들이 제 정신이냐?
일하다 말고 누굴 따라가는 거야?
지금 출항 5분 전인데! 당장 돌아온다 실시!”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두 아들은 마치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거침없이 예수님과 함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제베대오는 아마도그날 밤
단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스트레스로 인해 일주일 이상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웠을 것입니다.
부모를 비롯해서 아내와 자녀들,
생계 도구인 그물과 배마저 버리고
즉시 따라나선 첫 번째
제자단의 모습을 보면서 든 한 가지 생각입니다.
예수님에게서 풍기는 매력이 얼마나 큰 것이었으면,
그분의 인품과 말씀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으면,
그분께서 건네신 제안이 얼마나 황홀한 것이었으면,
순식간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분을 따라나설 수 있었을까?
“구원자 예수님의 얼굴에는
거역하기 어려운 거룩한
그 무엇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을
따라나서는 비상식적인 결정을
첫 제자들이 했을 리가 없습니다.
자신들의 아버지보다 나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사람을 따르고자
아버지를 버릴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실제로 첫 제자들은
영의 아버지를 따르고자 육의 아버지를 버렸습니다.
아니, 아버지를 버린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입니다.”(히에로니무스 교부)
우리 교회는 지금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팬데믹 시대와 더불어
꿈에도 예상치 않았던 위기이자
전환점 앞에 서 있습니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위기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회입니다.
다시 한 번 일어서라고,
다시 한 번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하라고,
그래서 철저하게도 쇄신되고 더욱 매력적인
교회로 거듭나라고 주신 은총의 기회입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서 묵상해 봅니다.
지상의 나그네를 환대하는 집이 교회가 아닐까요?
목말라하는 나그네에게 시원한 물 한 잔과
쉼터를 제공하는 곳이 교회가 아닐까요?
세상과의 전투에서 상처 입은 부상병들을
기꺼이 맞아들이는 야전병원이나
응급실이 교회가 아닐까요?
넘치는 매력을 바탕으로 날개가 부러진 사람들과
기가 꺾인 사람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가득 불어넣어 주는 에너지 충전소가 교회가 아닐까요?
-양승국 신부-
[한주간 전례]
2021년 1월 25일 (월) [백]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바오로 사도는
소아시아 킬리키아 지방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율법을
엄격히 준수하도록
교육받은 철저한 유다인이었다.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였으나,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예수님을 체험하고
극적으로 회심한 뒤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다.
교회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별도로 지내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으로 이루어진
그의 회심이 구원사적으로
중요한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바오로 사도는
많은 이방인의 눈을 뜨게 하여
그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세력에서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였다.
[복음묵상] 마르코 16,15-18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라는 말은
사람이 변화하기 얼마나 어려운지 알려 주는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변화를 보면,
우리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뿐 아니라
그의 온 삶에 주님께서
함께하셨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그는 유다교의 율법을
또래의 사람들보다 앞서 지켰고,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도
더 열심이었으며(갈라 1,13-14 참조),
하느님을 믿고 따르려는 열성으로
거짓되어 보이는 그리스도 교회를
없애버리려고 집집마다 들어가
남자든 여자든 끌어다가 감옥에 넘긴
(사도 8,3 참조)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자신이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
(1코린 15,9)임을 고백합니다.
그는 하느님을 믿고 따르고 있었지만
실제로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그
분의 진정한 뜻이
어떤 것인지 모르고 그저 열심히만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다마스쿠스에서 겪은 체험은
그를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도록 이끕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완고한 마음과
고정된 사고와 율법에서 벗어나
믿음과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게 됩니다.
다마스쿠스의 체험이 바오로에게는 탈출이며,
구원을 깨달은 시작입니다.
그의 말대로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은총 덕분입니다(1코린 15,10 참조).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율법 아래의 종살이를 하지 않으려 다짐하고,
하느님 나라로 향하는 순례 여정에서
주님의 은총에 기대어 삽니다.
하느님의 넘치는 자비는 모든 것을 용서하며,
모든 것을 변하게 합니다.
우리 또한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삶으로,
폐쇄된 종살이의 삶에서 하느님께 개방된
자유인의 삶으로 나아가도록
하느님께 은총을 청하며
그분의 자비에 모든 것을 맡깁시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1월 26일 (화)
[백]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티모테오 성인과
티토 성인은 바오로 사도의
제자며 선교 활동의 협력자였다.
티모테오는 에페소 교회를,
티토는 크레타 교회를 맡아 돌보았다.
바오로 사도의 ‘티모테오에게 보낸
첫째서간, 둘째서간’과
‘티토에게 보낸 서간’에는
성직자와 신자들이 지켜야 할
지침에 도움이 되는 권고가 많이 담겨 있다.
[복음묵상] 루카 10,1-9
그리스도인에게 신앙은 유산입니다.
이 유산은 그 어떤 물질적인 유산보다 값지고 가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보낸
서간인 오늘 독서에서,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에우니케에게 깃들어 있던
신앙의 유산인 믿음이
티모테오에게도 전수되었다고 확신합니다.
신앙은 다른 이에게서 전해 받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듣는 것에서 오기 때문입니다(로마 10,17 참조).
우리는 험난한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지위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정에서 신앙을 전수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고귀하고 큰 유산을 자녀에게 선물하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인은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가정에서 배웁니다.
가정은 가장 작은 신앙의 공동체며,
가장 중요한 교육의 공동체기도 합니다.
바오로는 티모테오 안에
‘진실한 믿음’이 있다고 말합니다.
진실한 믿음이란 ‘위선이 없는 믿음’,
‘진리의 정신 안에 있는 믿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티모테오가 이 믿음을
잘 간직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믿음은 티모테오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불태우게 합니다.
하느님의 은사란 티모테오가 받은
사목 직무를 뜻하기도 하지만,
이 직무를 위하여 자신의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신앙을
더욱 뜨겁게 하는 것은
세례를 하나의 자격증이나
천국으로 가는
통행증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교리와 신앙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특히 우리 가정 안에서 전수될 것이며,
이것은 가장 큰 선교며 우리의 의무고
우리 신앙을 지켜 나가는 일입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1월 27일 (수) [녹] 연중 제3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4,1-20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뿌려져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맺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독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을 통하여 우리를 완전하게 해 주셨다고 전합니다.
시나이산에서 맺어진 계약은
희생 제물의 피를 백성에게 뿌림으로써
효력이 생기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피로써
모든 죄악을 없애 주는
새로운 계약에 참여하게 됩니다.
돌판에 새겨진 계명이 아닌
예수님께서 몸소 우리에게 오시는
인격적인 계약으로,
이제 주님 사랑의 이중 계명을 지키고
예수님과 사랑의 친교를 맺으면서
우리는 그분의 은총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씨앗으로 상징되는
하느님의 말씀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직접 오신 말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체십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주님을 온전히 따르고
완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날마다 청하여,
사탄이 들어와 주님의 말씀을 앗아 가지 않게,
세상의 환난과 어려움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으로 말씀이 숨이 막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일이 생기지 않게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날마다
하루를 마치며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의식 성찰’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 시간에 우리는 마음의
가시덤불과 자갈을 걷어 내고,
하느님의 말씀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가꾸어야합니다.
또한 『매일미사』의 독서와 복음 말씀을 읽거나
핸드폰이나 다른 여러 방법으로 『성경』을 읽는다면,
우리에게 오시는 하느님의 말씀인
씨앗이 어떤 것인지 깨닫고,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당신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시편 119[118],105).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1월 28일 (목)
[백]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1225년 무렵 이탈리아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몬테카시노 수도원과
나폴리 대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성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대알베르토 성인의 제자가 되었다.
1245년부터 파리에서 공부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3년 뒤 독일 쾰른에서 사제품을 받고
그곳 신학교의 교수로 활동하였다.
그는 철학과 신학에 관한 훌륭한 저서를 많이 남겼는데,
특히 『신학 대전』은 그의 기념비적인 저술로 꼽힌다.
1274년에 선종하였으며, 1323년에 시성되었다.
[복음묵상] 마르코 4,21-25
히브리서에는
“확고한 믿음”과
“고백하는 희망을 굳게 간직”하는 것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믿음, 곧 신앙이 희망입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우리 신앙의 내용인 하느님 없이 사는 것은
계속 어두운 세계 안에 머물고
우울한 미래를 마주하는 것과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2항 참조) 같다고 하십니다.
오늘 독서인 히브리서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진 우리가
고백하는 희망을 간직하며 살아가고자
서로 도와주며 격려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혼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당신의 백성이 될 것을 약속하시고
우리 또한 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구원으로 초대하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가 우리에게 권고하듯이
서로격려하고 염려해 주어야 합니다.
믿음과 희망을 온전히 간직하려면
우리는 사랑과 선행을 실천해야 합니다.
혹시 다른 이들을 위한 애덕의 실천 없이
신앙생활을 통한
개인적인 구원만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를 구원하시고자
우리를 구원해 주셨으며,
또한 교회 안에서 당신 백성의
한 사람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서로 연결되고 일치를 이룹니다.
예수님께서 한 사람만을 위한
구원을 생각하지 않으시듯이
우리 또한 나만을 위한
예수님으로 차지하려 하지 말고,
다른 이들과 함께 주님 구원의
초대에 응답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애덕을 올바르게 실천하며
이웃에게 다가간다면 마치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오늘 복음 말씀처럼 우리의 올바른 신앙과
희망은 다른 이들을 환히 비추는 등불과 같고,
우리는 주님의 은총을
더욱 풍요롭게 받아 기쁘게 살아갈 것입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1월 29일 (금) [녹] 연중 제3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4,26-34
마르코 복음서의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 자체를 말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인간의 욕심과 욕망,
이기적인 삶으로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노력만으로 하느님 나라가
우리에게 온 것이라고 여겨서도 안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고,
겨자씨가 뿌려져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를 뻗듯 모든 민족들에게 퍼져 갑니다.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는
우리 모두 그 완성을 기다리듯이
그분의 나라를 위하여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저절로 자라나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시작은
비록 작고 보잘것없을지라도,
씨앗이 다 자란 뒤에는
그 어떤 나무와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느님 나라의 끝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말씀을 통하여 활동하는 하느님 나라의
거역할 수 없는 힘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세상에 뿌려진 씨앗인
하느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씨앗이
우리 안에 뿌려지고,
모든 민족들에게 뿌려져 자라납니다.
이 씨앗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곧 모든 민족들이 어떻게 변화되고
성장하는지, 우리는 모르는 신비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의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작용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려 줍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 나라를 믿고 희망하며,
애덕을 실천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입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1월 30일 (토) [녹] 연중 제3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4,35-41
오늘 독서에 나오는
“도성”은 공동체적 구원과 관련 있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에서
우리의 시선이 기쁨의 원천인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을 향하게 하려면
‘나’의 감옥에서 벗어나
‘우리’ 안에 일치되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14항 참조).
주님께서 마련하신 도성은 그리스도교의 구원이
개인주의적이지 않듯,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려 줍니다.
인류 일치의 파괴, 붕괴와 분열을 죄로 보던 교부들은
신자들이 공동체 안에 다시 모이는
일치의 재건을 구원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는 배 안에서,
제자들은 거센 돌풍이 일어
배에 물이 거의 가득 차게 되자
겁을 내고 우왕좌왕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자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평화롭게 만드시고,
믿음이 없는 제자들을 나무라십니다.
마르코 복음서에서 말하는 이 “믿음”은
예수님과 그분께서 행하시는
하느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을 가리킵니다.
‘나’의 감옥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있는 ‘우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여 구원을 깨닫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요동치는 바다와 같은
사탄의 유혹을 당신 말씀으로
무력하게 만드시기도 하셨고(마르 1,13 참조),
더러운 영을 꾸짖으시며
조용히 하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마르 1,25 참조).
우리는 일상에서 요동치는 바다와 같은
어려움을 만나면 주님께 살려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나 그러기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며,
이 믿음은 ‘나’만을 살리는 믿음이 아닌
‘우리’를 살리는 믿음을 전제로 해야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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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9 상황에서
정부의 방역방침에 따라
미사 참례인원이 변경되어
이번 주 부터 그래도 많은 인원이
미사를 보고 있습니다.
보다 빠른 방역 성과가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