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죄송한 마음이 그득합니다.
매일, 미사를 봉헌하는 일마저
사제와 수도자의 ‘특권’처럼 메김 된 듯하니까요.
신자 없는 성전에서 숨죽이듯 미사를 봉헌하며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지 가늠되니 더욱 그렇지요.
때문에 진심으로 세상 대표자의 자긍심을 지니고
“마음을 찢어” 온 세상을 봉헌하는 심정으로
미사에 최선을 다하려 합니다.
그럼에도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주보성인으로 모신 저희 본당이
이 축복을 도대체 소문낼 수 없다는
안타까움은 여전하네요.
온 세계가 신부님의 삶을
기리며 추앙하는 경사로운 해,
본당을 방문하는 순례객을 위해서
신부님 유해를 제대 중앙으로 옮겨 모신
저희의 정성이 구겨진 기분이니까요.
그래서 더 오늘 교회가 바치는
기도문에 마음을 모아봅니다.
“이 시대에 하느님의 평화를 주소서”
부디 이 세상에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님 사랑으로 복되시길,
주님 은혜로 영육이 강건하여 희망을 살게 해주시길,
비록 매일 미사를 봉헌하지 못할지라도
계속 기도하시는 많은 분과 오로지 주님께 의탁하여
하루하루를 감사로 채워 지내는 마음
마음에 축복에 축복을 더해주시길, 소원합니다.
이런저런 감성에 젖은
모자란 사제의 마음이
오늘 독서말씀을 읽으며 더 부끄러워졌는데요.
성전에서 곤히 잠자던 어린 사무엘이
주님의 음성에 화들짝 깨어나
세 번씩이나 냅다 엘리 제사장께 달려가는
모습에 비해서 어른 사제의 꼴이 참 못났다 싶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아마포 에폿을 두르고”
“주님 앞에서 자라났다”는
성경의 기록마저 매정타 여기기도 했으니까요.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의 삶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몰랐을 어린 사무엘은
그저 엄마와 헤어져야 하는 사실만으로 슬펐을 겁니다.
수없이 엄마를 생각하며 눈물지었을 겁니다.
밤마다 울고 또 울면서 내일은 꼭,
엄마가 다시 데리러 오기만을 손꼽아 고대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어린 사무엘의 감정에 무심하고 냉정합니다.
그리고 그 까닭을 오늘 독서가
생략한 부분에서 일깨움 받게 합니다.
솔직히 엘리 제사장은
지혜를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님의 길을 알려주고
가르치며 제사장 직무를 수행했던 인물입니다.
사무엘에게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는
탁월한 현답을 가르친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 아들들이
“백성과 관련된 사제들의 규정도 무시”(2,13)하는
행동을 했을 때 “내 아들아 안 된다!”며
몇 마디 건넨 것이 고작입니다.
아마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을
애지중지하는 마음을 털어낼 수 없어서,
하고 싶은 것은 다 해주고 싶은 아비심정을
끝내 잘라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겠지요.
하지만 자식에게 쩔쩔매는 아비를
하느님께서는 크게 책망하십니다.
자녀의 신앙을 올바로 가르치지 않은 죄는
“제물이나 예물로는 영원히
속죄 받지 못하리라”고 단언하십니다.
자식을 오냐오냐 키운 결과가 이렇게 혹독하다니,
심하다 싶은데요. 이런 상황이 지금 이 시대,
우리 부모님들에게도 예외일 수가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집니다.
제아무리 홀로 열심한 믿음을 살아낸다 해도
자녀의 신앙교육에 소홀하다면
믿음의 대열에서 추락할 것이란 무서운 경고이니까요.
엘리 제사장의 죄악은 “자기 아들들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을 책망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당장, 자녀들에게
그분을 알려주며 일깨우는지,
하느님 보시기에 제대로 된 신앙교육을
하고 있는지 점검해야겠습니다.
내 자녀가 그분을 모르고
그분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걸 느끼면서도
‘그만하면 됐다’고방임하는 일,
“세례 받았으니 됐다”며 영적 어린이로
방치하는 것은 모두 직무유기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자녀들이 세상의 것에만 영민하도록 가르친다면
“그분의 총애”를 잃게 하는
지름길임을 깊이 새겨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버이들에게 자녀를 맡기시며
그분을 제대로 알고 깨닫도록 이끌어줄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아울러 “나보다 네 자식들을 소중하게 여긴 것”(2,30)이
죄임을 분명히 알려주셨습니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민족의 스승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힘은 아버지 엘카나와
어머니 한나의 철두철미했던 봉헌 덕이라 믿습니다.
스물다섯 살 짧은 삶으로
온 세상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계신
성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의 삶도
아버지 성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슬라의 단호한 사랑과
맹렬한 기도가 빚어낸 열매라 확신합니다.
이제 모든 그리스도인
부모님께서 자녀를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써
모든 면에서 그분 마음에 들고
온갖 선행으로 열매를 맺으며
하느님을 아는 지식으로”(콜로 1,10) 키우는 일이
얼마나 대단하고 소중하며 귀한 소명인지를
깊이 새겨 살아가시길 원합니다.
새해, 성 김대건 안드레아의 전구로
그리스도인의 모든 자녀에게
그분을 ‘알게’ 되는 은혜가 있기를 빕니다.
“희망의 근원이신 하느님,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가 고대하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바라며
세상의 유혹을 거슬러 용기를 내고
자비의 삶을 살아 저희가 다른 이들과 화해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도와주며
희년의 기쁨을 살게 하소서.” 아멘.
-장재봉 신부-
[한주간 전례]
2021년 1월 18일 (월) [녹] 연중 제2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2,18-22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무엇인가 쇄신하려 할 때
자주 인용하는 성경 구절입니다.
꼭 어떤 일을 새로 시작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늘 새로워지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새로운 변화를 위하여 필요한 것은
옛것을 버리기만 하는 어리석음이 아닙니다.
옛것을 알아 새롭게 하려는 용기와 희망이 필요합니다.
또한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에
두려움이 있다면 어쩌면
새롭게 살용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낡고 초라하며,
고집스러운 생각과 편견 등이
드러날까 봐 두려워하는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2019년 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강론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올바르게 사고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실수할 수도 있고 때로는 일을
망쳐버리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우리 존재 자체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용기를 가지고 우리의 모습을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이기적인 자기애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새로운 삶, 곧 당신의 삶에 초대해 주셨고,
우리의 그 어떤 모습도 한결같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1월 19일 (화) [녹] 연중 제2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2,23-28
마르코 복음서에서
‘사람의 아들’은 분명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확언하시며,
모든 제도와 율법 위에
당신의 권위가 있다는 사실을 선포하십니다.
이 말씀은 분명 앞에 나온
마르코 복음서 2장 10절의
‘사람의 아들이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진다는 것’과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 때 받은 은총의 수혜자로
자유로이 살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올바른 의미로
어려운 상황에서 위축된 사람들을 회복된 삶,
구원된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안식일은 선과 생명에 도움을 주고,
예수님과 함께하는 거룩한 날로,
이런 개념은 모든 안식일의 규정이나 법규를 넘어섭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어떤 때 기도를 많이 할까요?
그리고 어떤 때에 기도하여야
하느님께서 잘 들어주실까요?
주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청하기만 하면
들어주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언제 기도를 하여야
주님께서 잘 들어주신다고 생각하나요?
사실 매일매일 기도 가운데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응답하고 계십니다.
때때로 우리가 너무 규범적이고,
율법과 같은 법규 준수에 머물러 있거나,
바리사이들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따지고
자신의 생각대로만 분석하려고 하여
올바로 듣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과
율법을 보호하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모든 것 위에 계신
최고 권위시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들이 세상에서 가진 권위만을 주장하게 됩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말씀은 잘 짜여진
그물 같은 바리사이들의 세상에
하나의 도전이었을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로 주님을 받아들이지 말고,
그분께서 말씀하신 사랑과 기도 안에서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여
우리의 삶이구원으로 초대된 삶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1월 20일 (수) [녹] 연중 제2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3,1-6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마르 2,28)라고 하신 예수님께서,
권위 있는 말씀으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시는 치유 기적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병에서 치유된 삶을
살게 하시려는 예수님의 행동과,
당신을 노리고 있는 적대자들의
행동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쳐 주시고
선한 일을 하심으로써 안식일에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 주십니다.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생명이 위협받을 경우에만
안식일 법규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원칙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행동과 말씀으로
선행에까지 이 원칙을 확장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가 오그라든 사람만이 아니라,
영혼이 오그라든 사람도 불쌍히 여기십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치유를 받았지만,
그것을 지켜보면서 반대하는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고집과 탐욕으로 마음이 오그라들어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의 손으로
받지 못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는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처럼,
자신의 의견만을 고집하고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생각으로
사는 우리도 치유가필요한 이들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세상의 많은 것들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판단하고 단죄하며, 욕심을 부려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이 되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자비며, 그분께서 주시는
치유의 은총을 청하는 겸손한 기도입니다.
우리는 이제 ‘소유의 삶’으로 살려는 마음보다,
모든 것을 내어놓으신 우리의 구세주를 본받아
다른 형제들을 위하여 내어놓고
용서하는 ‘존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1월 21일 (목) [홍]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아녜스 성녀는 3세기 후반
또는 4세기 초반 로마의 유명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신심이 깊었던 그는
열네 살 무렵의 어린 나이에 순교하였다.
청혼을 거절한 데 앙심을 품은 자가 고발하여
신자임이 드러났으나 끝까지 자신의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유약한 나이에
성녀가 보여 준 위대한 신앙의 힘’을 높이 칭송하였다.
교회는 아녜스 성녀를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증언하고자 정결을 지킨 순교자로 기억하고 있다.
성녀는 한 마리 양을 안고 있는 모습으로 자주 표현되고 있다.
[복음묵상] 마르코 3,7-12
체칠리아, 아가타, 루치아 성녀와 함께
초세기 4대 동정 순교자 가운데 한사람인
아녜스 성녀는 어린 나이에도 자신의 연약함 속에서
온전히 그리스도께 용감히 나아가
불굴의 의지와 용기로 복음을 증언하였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어두움과 악에 얼마나 잘 대항합니까?
세상의 악과 마주할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합니까?
우리의 믿음과 형제애를 실천하여
하느님과 참된 친교를 나누어야 함을
알려 주는 요한 1서 저자는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1요한 5,5)라고 질문합니다.
그리고 곧 “예수님께서
하느님의아들이시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답합니다.
세상의 악과 마주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 있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요한 1서의 저자는 하느님을 사랑하여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이 계명은 힘겹지 않고,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모두가
세상을 이긴다.’라고 전합니다.
아녜스 성녀는 자신을 위협하고
고문하고 죽이는 박해자들을 세상의 힘으로
이길 수는 없었지만,
용기 있는 신앙으로 세상을 이겼습니다.
오늘날 신앙의 증거로
목숨을 요구하는 곳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서 피 흘림 없이
신앙을 증언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합니다.
작은 불편이나 불이익을 참고 견디며,
세상의 악에 순응하지 않고,
신앙인으로서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 용기를 내어 살아야 합니다.
오늘 미사의 화답송은
우리가 이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가르칩니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이 외침은 우리가 바치는 희생과 봉사와
애덕의 실천으로 세상을 이기게 할 것입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1월 22일 (금) [녹] 연중 제2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3,13-19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두셨던 열두 사람을 뽑아
당신의 제자로 세우십니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깊은 친교를 나눕니다.
열두 제자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고,
인간적인 면에서 본다면 똑똑하지도 않고,
이른바 ‘스펙’이 좋아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들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신앙을 성숙시켜 나아갔습니다.
제자들은 때로는
성격이 급하고 또 어리석으며,
어떤 때는 현세의 권력과
이익에 눈이 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친교를 통하여
죄의 회개와 용서 그리고 사랑을 배웁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는 큰 죄를 지은 베드로가
우리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그는 자신이 나약한 사람임을 알고 회개하여,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자신의 고향을 떠나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합니다.
주님께 선택받는다는 것은
어떤 합당한 자격과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닮아 사랑이 가득한 마음,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사랑의 실천과
회개와 뉘우침 그리고 용서하려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현실적 삶의 풍요로움과
마음의 평화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려고
더욱 노력함으로써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복음의 기쁨에 넘쳐 살아가는 신자들은,
미사 전례 때 참회를 통하여
자신의 잘못에 대한용서를 청하고
다른 이들의 잘못을 용서하며,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를 통하여
매번 파견되는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가 된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은총이고 감사기에, 미사의 마지막에 하는 응답으로
이렇게 우리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1월 23일 (토) [녹] 연중 제2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3,20-21
“주님, 저희 마음을 열어 주시어,
당신 아드님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오늘 복음 환호송은 우리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들을 수 없으며,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주님을 향한 마음이 없고,
주님께서 그 마음을 열어 주시지 않으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친척들처럼
‘가짜 뉴스’인 소문에만 집중하여 편협하게
그것을 믿고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하여
붙잡으려 나서는 태도를 보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2018년 홍보 주일 담화에서
가짜 뉴스는 거짓되고
매혹적인 주장을 앞세워
유쾌하고 위험한 유혹으로
인간의 마음을 파고들어 불안, 멸시, 분노,
좌절과 같은 즉각적 감정을 자극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직해 보이는 가짜 뉴스로
조작된 허위 정보가 바이러스처럼
순식간에 퍼져 나가 얼마나 많은
피해를 주는지 알고 있습니다.
올바른 식별력과 판단력으로 진리를 가려내려면
우리는 예수님 말씀을 마음에 단단히 새겨야 합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가짜는 참된 자유를 줄 수 없습니다.
가짜가 주는 열망은 불신을 낳고,
고립과 분열을 가져옵니다.
진리이신 예수님께 마음을 열고
그분을 믿으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한 분이시며
삼위이신 하느님과 친교를 이룰 때
우리는 진리를 체험하고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 생각이 옳다는 마음을 버리고
하느님 뜻을 따르는 신앙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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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초의 한파에다 갑작스러운 눈으로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지만
교통이 마비되는 일도 발생하였습니다.
모든 현상에는 양면이 있음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주간이었습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