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선한 힘에 고요히 감싸여
그 놀라운 평화를 누리며 나 그대들과 함께 걸어가네.
나 그대들과 한 해를 여네.”(디트리히 본회퍼)
새해를 맞으며 하
느님이 주는 선한 힘이 우리 각자의 삶과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로 고통 받는
인류의 미래를 지켜 주시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세례 축일입니다.
세례는 자기인생의 모든 것이
흘러나오는 강의 기원, 수원지와 같습니다.
예수님의 세례 장면을 보고 들으면서
자신이 받은 세례의 의미가 무엇인지
더 깊이 이해하고 그 은총을 삶에서 살아 내기를 청합니다.
■ 복음의 맥락
복음은 마르코가 전하는
예수님 세례 이야기입니다.
세 복음서
(마태 3,13-17; 루카 3,15-16.21-22; 마르 1,7-11)가
예수님의 세례 장면을 조금씩 다르게 묘사합니다.
예수님은 세례를받으려고 갈릴래아에서
요르단으로 요한을 직접 찾아갑니다.(마태 3,13)
인간 구원을 위해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찾아가는 예수님 모습이 세례에서부터 드러납니다.
그런데 “온 백성이 세례를 받은뒤에”(루카 3,21)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십니다.
문득 미국인들이
코로나19 백신을 맞기 위해 밤샘을 하고
노숙도 하면서 줄서 기다린다는 뉴스 장면이 떠오릅니다.
이제 코로나19 백신은 우리 시대의 구원자가 된 듯합니다.
온 세상이 예수님보다 백신이오기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오랜 시간 동안 긴 줄 안에서 기다리는
형제와 자매들 가운데에서
예수님도 겸손하게 당신 차례를 기다립니다.
예수님이 줄 안에 들어가 선다는 것은
그 사람들의 삶에 기꺼이 동참해 경청하고,
공감하고 기도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이
예수님은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내려오고 하늘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성령과 하느님 목소리가 예수님의 정체성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모든 업적은 예수님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힘과,
아버지와 누리는 친교에서 흘러나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당신은 하나라고 할 정도로
깊은 친교 안에서 그분의 생애 전체,
공생활, 수난, 죽음, 부활을 삽니다.
정말하느님 속에 닻을 내리지 않고서는
복음서의 예수라는 인물은 그저 희미한
그림자와 같고 비현실적이며 도무지 설명되지 않습니다.
기도를 강조하는 루카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기도할 때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이 장면을 기록해 준 루카에게 깊이고마움을 느낍니다.
우리가 기도 중에 체험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세상에서 재는 잣대와
주변의 기대에서 나오는 소리에 따라
본인의 정체성을 찾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들에는
하느님의 숨으로 창조된 인간으로서
우리의 잠재력을 성장시키는 생각보다
체념과부정적인 생각이
담겨 있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우리의 참된 정체성은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감춰져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목소리에 흔들리지 않고
우리를 성장시키는 참된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기도 안에서 하느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듣는 것이 우리 삶을 형성합니다.
우리가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분 말씀을 경청할 때 하느님은 정말 우리를
염려하는 아버지로서 우리 삶 안에 개입하십니다.
고요한 가운데 우리가 자주 잊어버리고 있는
우리의 참된 정체성을 알려주십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나의 아들, 딸,
내 마음에 드는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말하는 이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질 때,
나아가 더 이상 들리지 않을 때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 온갖 유혹이 다가올 것입니다.
■ 정체성에서 소명으로
예수님의 세례는
사랑 받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의 정체성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명,
나아가 세례 받은 우리 사명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지만
그 사랑은 우리 삶에서 책임을 갖고 응답해야 하는 사랑입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의 종은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고
인간을 온갖 악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주님의 영을 받습니다.
특히 이 종이 지닌 겸손한 태도에서 예수님 모습,
우리 모습이 보입니다.
작은 선의의 불씨도 꺼버리지 않는 온유함,
부러진 갈대도 꺾지 않는 공감능력과 섬세함,
소명에 따르는 시련과 고통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용기.
베드로는 이방인
코르넬리우스의 세례를 준비하는 설교에서
예수님이 하느님으로부터 성령과
힘을 받은 후에 하신 일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사도 10,38)
■ 세례, 성령 안의 삶
세례는 그리스도교
입문 의식에만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인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사도 바오로의 세례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서 6장에서 바오로는 세례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기 위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
그리스도 운명을 내 운명으로 여기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새로운 삶의 특징을
‘성령 안의 삶’으로 소개합니다.
이제 세례의 여정을 이끌어 가는 것은 성령입니다.
성령이 하는 역할은 그리스도를 닮아 가도록
우리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체험과 분리해
성령 체험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체험이 먼저고 성령 체험이 이어집니다.
성령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삶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로마 8,14)
성령이 주는 선한 능력 안에서 세상의 고통에 잠기면서
하느님께 협력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임숙희(레지나)-
[한주간 전례]
2021년 1월 11일 (월) [녹] 연중 제1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1,14-20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이천 년 전에
한 번 있었던 사건이 아닌
바로 지금 우리에게도 선포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갈릴래아호숫가에서
물고기를 잡던 어부들에게 당신을 따라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또한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그들의 생계 수단인 그물과
배를 버리고 마지막에는
그들의 아버지까지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제자들이 버린 것은 자신의 생계 수단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미지의 삶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졌기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질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하는 삶 또한 내려놓았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소유의 삶이 아니라
존재의 삶을 살고자 합니다.
소유욕에 따른 소비보다
존재로 나타나는 나눔의 삶,
하느님 나라의 복음의 삶을 삽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영성가 들과
기도하는 이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초대받은 삶입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모든 두려움, 걱정,
인간적인 나약함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기준으로 하는
복음의 삶을 살아 제자들처럼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1월 12일 (화) [녹] 연중 제1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1,21ㄴ-28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오늘 독서가 전하고 있듯 우리는
하느님께서 “천사들보다 잠깐 낮추셨다가,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신”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 안에 살지만
자주 하느님의 뜻을 잊고 정반대로 살아가면서
주님께 구원을 청하기도 합니다.
더러운 영이 심어 놓은 많은 것들 속에서
우리는 고통스러워하고 두려워하며 어둠 속으로 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예수님께서는 권위 있는 말씀과 행동으로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이를 구원하시며,
당신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십니다.
더러운 영은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떨어지게 하며,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삶과 멀어지게 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의 신원에 관하여 이렇게 외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사실 이 외침은 더러운 영이
주님께 한 신앙 고백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마태 16,16)라고 신앙 고백을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고백하였고,
더러운 영은 하느님을 알아보았지만
두려움 속에서 예수님의 신원을 외칩니다.
더러운 영은 우리 인간을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막고,
멀어지게 합니다.
하느님을 믿기보다 세상의 많은 물질과
자기 자신을 믿게 만듭니다.
악은 끊임없이 우리를 재촉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기보다 세상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만들어 그분에게서 도망치게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살기를 희망하며
하느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으로 대하지 않고,
모든 것을 주님께 내어드리며
그분을 사랑 가득한 분으로 여깁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1월 13일 (수) [녹] 연중 제1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1,29-39
예수님께서
시몬의 장모가 앓던 열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코로나19로 많은 이들이 악수를 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만졌던 물건을 다시 만지기를 거립니다.
손을 통하여 바이러스가 옮겨 다닌다는 것을 알고,
나와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고자
손 소독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 이전 시대에 우리는 악수로 인사하며,
서로의 어려움을 손으로 보듬고 위로해 주었지만,
이제 어떤 때는 다른 사람이
악수를 청하면 불안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코로나19로 잃어버린 것은
서로의 손을 물리적으로 잡는 것뿐만 아니라,
서로를 돕고 배려하던 마음의 손도 놓아 버려
세상이 더욱 각박해진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다 보니 만나서 하던 많은 반가움의 행동들이 그리워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고
열병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우리의 손은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어려운 시대에도 손을 내밀어
이웃을 도울 수 있고 두 손 모아 기도하며
주님의 손을 잡을 수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도움을 주고,
우리의 두 손으로 남모르게 이웃을 돕는 행동은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두려움과 공포,
불신과 의심의 열을 가시게 하여,
하루빨리 건강한 사회를 되찾게 해 줄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른 이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우리의 도움과 기도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우리 가운데 실행하는 일이며,
주님의 손을 잡고 신앙인으로 올바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1월 14일 (목) [녹] 연중 제1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1,40-45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를 치유하십니다.
이스라엘에서 나병을 비롯한 악성 피부병에 걸린 이들은
사제로부터 부정한 이로 선언되었고,
다시 건강해져 사제로부터 건강한 이로 판명된 뒤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치유되었음을 인정받을 때까지
사람들과 함께 살지 못하고 동네 밖에서 따로 살아야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은 스스로 “부정한 사람이오.”
(레위 13,45)라고 외쳐
다른 사람들과 격리된 사람임을 표시해야 하였습니다.
그들은 환자가 아니라 죄인으로 여겨졌기에
육체적 고통만큼 심리적인 소외가
그들을 힘들게 하였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치유를 청하는 나병 환자의 처지가
무척이나 절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감각이 마비되고 살이 썩어 문드러지는 육체적 고통보다
사람들에게 눈총 받고 소외당하는 것이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랑으로
“깨끗하게 되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병든 몸과 닫힌 마음을 치유해 주십니다.
우리 또한 지나간 시간들 가운데
상처로 썩어 문드러지고 떨어져 나간,
말하지 못하고 숨기고 있던 아픈 마음이 있다면
주님께 내보이며, 간절히 청해야 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 8,2).
주님께서는 당신 손을 내미시어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우리의 상처받은 마음을 보듬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 정성을 다하여 오늘 예물 기도처럼 기도합시다.
“주님, 주님의 백성이 드리는 이 제물을 기꺼이 받으시고,
저희를 거룩하게 하시어, 저희가 간절히 바라는 것을 이루어 주소서.”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1월 15일 (금) [녹] 연중 제1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2,1-12
오늘 복음에서
중풍 병자 한 사람을 치유하려고
네 사람이 예수님께서 계신 집의 지붕까지 뚫고
병자를 들것에 달아 주님께 내려 보냅니다.
중풍 병자를 들것에 달아 내린 사람들이
그 중풍 병자의 친척인지,
친구인지 아니면 이웃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병자가
지붕의 구멍으로 주님께 도달하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의 정성과 도움 덕분에 그 중풍 병자는
주님께 치유 받고, 죄의 용서도 받습니다.
이렇게 때로는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도움으로 큰일을 해 나가기도 하고,
어려움에서 벗어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공동체 안에서 사랑을 나누며 살게 하십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죄와 병으로 중풍 병자처럼 누워 있습니까?
아니면 율법 학자들처럼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부정적으로 보고 나의 주관으로 판단하며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듯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마태 25,40)
이라는 말씀을 실천하며
애덕으로 누군가를 구원으로 이끌어
자신 또한 구원의 길로 들어서고 있습니까?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1월 16일 (토) [녹] 연중 제1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2,13-17
오늘 독서인 히브리서의 특징은
‘말씀하시는 하느님’ 또는
‘하느님 말씀’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특히 초대 교회의 어떤 기록보다도 구
약 성경의 내용을 많이 인용하면서,
창조 때부터 지속되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한
구원의 업적을 전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이러한 하느님의 말씀이 믿음을 통하여
어떻게 교회 안에서 전해지며,
그 말씀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은 참으로
삶을 변화시킬 힘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십니다.
곧 하느님의 말씀은 입에는 꿀같이 달고
위로가 되는 달콤함을 주지만,
우리 마음에 불안을 안겨 주는 칼이기도 하여
깊은 곳을 꿰찌르고 영혼의 깊숙한 곳에서
어둠을 밝히는 빛을 가져옵니다.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의 말씀에 꿰찔림으로써 정화됩니다.
곧 말씀인 칼이 처음에는 상처를 주지만
하느님의 사랑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모든 것을 베어 내어 다시 하느님께 향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레위에게
“나를 따라라.” 하시는 예수님의 부르심은
레위를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를 빛으로 부르시며 당신 말씀의 칼로써
회개의 삶으로 이끄시어 당신의 사랑과
일치하게 하시려는 초대입니다.
우리도 매번 “나를 따라라.”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나의 삶이 그리스도를 통한
사랑의 삶으로 변화되어야 하겠습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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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시기를 지나
연중시기에 접어듭니다.
아직도 코로나19의 전염력은
줄어들지 않은 가운데
모두가 일상에서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루 빨리 모두가
안정적인 일상생활이
영위할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