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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1월3(일) [백] 주님 공현 대축일

Berardus 2021. 1. 2. 02:28

    [금주의 말씀 묵상]

    2021년 1월 3(일)

    제1독서(이사 60,1-6) 제2독서(에페 3,2.3ㄴ.5-6) 복음(마태 2,1-12)
    빛나는 별과 동행하는 은총의 길 어둠 밝히는 구원과 생명의 빛 새로 뜬 별을 따라온 동방박사들 주님 향한 믿음의 순례길 택한 것 성령 도움으로 진리를 깨닫고 친교와 형제애로 신앙 삶 살기를

        주님 공현 대축일에 성탄의 기쁨이 새롭습니다. 동방박사(Magi)들이 별의 인도로 베들레헴을 찾아와 아기 예수님께 경배 드리고 예물을 바침으로 강생의 신비가 모든 민족에게 드러납니다. 구원의 문은 열려있습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새해에는 사랑이신 임마누엘 주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기로 다짐합니다. 우리 위에 별빛이 비칩니다. 이사야 예언자(제1독서)는 거룩한 도성에 은총의 빛이 충만함을 선포합니다. 예루살렘아,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이사 60,1).” 구원의 빛을 향한 세상 사람들의 순례는 보편적입니다. 모든 민족이 기쁜 소식을 들으면 주님께서 이끄시는 행복한 삶의 길로 향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제2독서)는 계시를 통해 주님의 신비를 알고 이방인들에게 사도직 사명을 수행합니다. 지금은 성령을 통해 사랑의 신비가 드러납니다. 다른 민족들도 복음을 통하여 약속의 공동상속자가 되고, 그리스도 가족의 한 몸으로 공동수혜자가 됩니다. 모든 신자가 성령 안에서 친교와 사랑의 일치를 이룹니다. 오늘 복음에 동방박사들은 주님의 별을 보고 베들레헴을 찾아와 성모 마리아와 함께 계신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고 예물을 바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참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성탄은 모든 민족에게 드러내신 구원의 은총입니다. 이스라엘은 거부하지만 다른 민족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시초입니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 솟는다’라는 신탁((민수 24,17)처럼 새로 뜬 별을 보는 것은 주님의 탄생으로 사랑의 여정이 시작되는 믿음입니다. ‘거룩한 도성’인 예루살렘에 동방박사들이 찾아온 때는 헤로데왕 시대(기원전 37-4년)입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께 경배 드리러 왔다는 말에 헤로데와 온 예루살렘은 깜짝 놀랍니다. 별이 앞서가다 아기 예수님 계신 곳에 멈춘 곳은 예루살렘 남쪽 10km 정도 떨어진 베들레헴입니다. 다윗의 출생지인 베들레헴은 일명 ‘빵의 성전’으로 불립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베들레헴 첫 크리스마스 때 강생의 신비를 묵상할 수 있게 그레치오 성당에 구유를 처음 설치(1223)했지요.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에 우리는 구유에서 이민족의 첫 방문객인 동방박사들을 봅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사람이 되신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고 연약한 우리의 인성에 사랑이신 주님의 신성을 함양합니다. 별빛을 따라 순례한 동방박사들의 여정은 방랑의 길이 아닙니다. 그들이 자유의지로 선택한 여행목표는 분명합니다. 영혼의 생명이신 주님을 향한 믿음의 순례길입니다. 빛나는 별을 보고 팔레스타인 산악지대에있는 예루살렘을 찾아옵니다. 일기가 불순하거나 구름이 짙을 때는 잠시 쉬어 생기를 돋우고, 장애물을 만나면 좁은 길을 택했겠지요. 우리의 삶의 길도 나 중심이 아닌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 중심 이어야합니다. 주님께 땅에 엎드려 경배한 동방박사들은 값진 예물(황금, 유향, 몰약)을 드립니다. 영성독서회에서 성서에 ‘가장 아름다운 노래’인 아가를 묵상한 바 있습니다. 사랑의 상징물 중에 순금과 향유와 몰약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순금은 왕이신 주님께 대한 사랑의 표지이고, 향료는 주님 사랑을 갈망하는 영혼의 향기이며, 몰약은 죽음을 이기는 사랑의 힘입니다. 아가는 사랑의 빛, 그리스도의 향기, 사랑의 일치를 찬미합니다. 사랑의 신비를 드러내신 주님께 우리는 무슨 예물을 드려야 할까요? 아가는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불길임을 노래합니다. 아가가 인간의 사랑 이야기라면 어찌 정경으로 채택되었겠습니까? 창조의 신성과 주님의 지혜는 물론 조건 없는 사랑은 영원합니다. “먹어라, 벗들아. 마셔라, 사랑에 취하여라(아가 5,1).” 우리는 미사성제에서 사랑이신 주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고,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모시고,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빛이십니다. 빛 속을 걷는 우리는 세상 속에서도 하늘나라의 삶을 맛보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살아갑니다. 빛나는 별과 함께하는 길은 성령님의 도움으로 진리를 깨닫고 친교와 형제애로 살아가는 신앙의 여정입니다. 지난날 잦은 해외여행과 산행을 한 경험에 따르면 순례길의 배낭은 가벼울수록 좋습니다. 무거운 짐을 가볍게 하려면 많은 것을 포기하거나 나누고, 낡은 습관은 털어버리며, 마음을 무겁게 한 사람과 화해하고, 풀리지 않는 매듭은 성모님께 의탁합니다. 코로나 19 감염 위기로 가난한 이들이 큰 고통과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길은 자신을 버린 가난한 마음으로 따르는 사랑의 길입니다. 동방에서 출발해 ‘빵의 성전’인 예루살렘을 향한 동방박사의 순례길을 인도한 별은 참빛 이십니다. 이 별은 이 땅에 어둠을 밝히는 구원의 빛이고, 하느님을 아는 신앙의 여정을 밝히는 ‘생명의 빛’이십니다. 새해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인 동시에 ‘성 요셉의 해’입니다. 주님의 현존을 믿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갈망하며, ‘세상의 빛’이신 주님을 따라 그리스도인답게 사랑의 삶을 살게 해 주소서. 아멘. -김창선(요한 세례자)- 21-01-01.jpg [한주간 전례] 2021년 1월 4일 (월)[백]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4,12-17.23-25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예수님께서는 가장 보잘것없는 땅, 거칠고 척박한 땅으로 가십니다. 즈불룬과 납탈리,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지역은 이스라엘에서 소외된 이들의 자리이며, 가난과 고통의 땅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목동들과 동방 박사들에게 당신을 보여 주셨듯이, 이제 가장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에게 당신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그 리고 회개와 하늘나라를 선포하시며,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고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사랑의 이중 계명은 당신 삶으로 온전히 드러나는 덕목입니다. 죄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화해하고, 내 주변의 이웃을 돕는 것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만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닙니다. 이 행동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 배워 그분을 따르는 방법입니다. 오늘 독서인 요한 1서의 저자는 주님의 계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사랑한다면 우리는 이미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 분께서는 우리 안에 머무르실 것입니다. 사랑과 반대되는 삶에서 벗어나고자 회개하여 복음을 믿고, 이웃을 사랑하며 ‘이미’ 와 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늘나라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신앙인들의 행복입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1월 5일 (화) [백]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6,34-44 오늘 독서에서 요한 1서 저자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고, 이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난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고통스러운 과거의 삶에 대하여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 하고 고백합니다. 과거의 슬프고 아픈 경험과 기억은, 당시 숨을 쉬고 걸어 다니고 잠을 자는 일상을 살았어도 온전한 자신의 삶이 아니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둠 속의 참빛 같은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다른 이들과 사랑을 주고받아 고통과 아픔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 공현은 이렇게 우리를 살게 해 줍니다.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구체적인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 줍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빛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머무시는 모습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억지로 사람들과 당신을 분리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억지로 떼어 내려는 쪽은 믿음이 약하고, 사랑이 모자란 우리입니다. 하느님께서 광야에서 허기진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 주셨듯이, 예수님께서는 가여워하시는 마음으로 당신에게 다가온 이들의 배고픔을 아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허기진 사람들의 배를 빵과 물고기로 채워 주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당신백성을 살게 해 줍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일회성 사건이 아닌 우리를 향한 주님 사랑의 표현법이고, 매 순간 우리의 삶에서 당신을 드러내 보이시는 또 다른 공현이며, 당신 백성에 대한 위로입니다. 어려움에 있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랑의 표현 안에서 우리를 가련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만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랑과 자비에 굶주려 있습니다. 고통과 아픔과 오해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질투와 분노에 차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닮아 가진 것을 나누어 다른 이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1월 6일 (수) [백]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수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6,45-52 우리가 임마누엘 하느님으로 오신 주님을 잊고 사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의 연약한 마음 때문이 아닐까요? 마음이 연약한 것은 오늘 독서에서 말하는 ‘사랑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은 까닭입니다. 그리고 사랑하지 않는 삶은 우리가 예수님을 떠나 세상에 빠져 살게 합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체험하고도 예수님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제자들은 호수 위에서 또 다른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굶주림’이라는 현실적인어려움에 놓인 이들에게 희망으로 풍족하게 채워 주신 주님을 제자들은 그새 잊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유령으로 착각한 제자들은 비명을 지릅니다. 제자들은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평범하지 않은 행동을 자신들의 지식만으로 판단하여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두려움으로 불안해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현존을 통하여 제자들의 마음에도, 그 리고 그들이 타고 있는 배에도 평화를 선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 문을 걸어 잠그고 있던 집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뵌 제자들은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두려움과 죄책감을 떨쳐 냅니다. 우리의 주님,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의 현존은 또다시 우리에게 용기를 줍니다. 삶의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의 주님이 되십니다. 우리 현실이 얼마나 힘들고 어렵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 곁을 떠나 현실의 여정을 걸어간다면, 곧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길은 두려움과 불안함뿐임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을 깊이 깨달아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청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가장 큰 용기이며, 사랑의 행동입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1월 7일 (목) [백]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 [복음묵상] 루카 4,14-22ㄱ 예수님의 말씀 선포는 그 자체로 ‘이미’ 와 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를 보여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하고 선포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의 인격과 긴밀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나라는 그분의 고유한 사명이고, 그 나라의 백성들은 그분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따라야 합니다. 오늘 독서인 요한 1서의 저자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별개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시어 모든 이에게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이 선포에 따르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하나이기에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려면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이중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힘겹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고, 이 믿음은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얻게 된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1월 8일 (금) [백] 주님 공현 대축일 후 금요일 [복음묵상] 루카 5,12-16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나병 환자의 청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미시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오늘 복음은 절박한 상황에 놓인 이의 요청을 주님께서 들어주시는 장면입니다. 절박한 심정의 사람은 무엇이든 적당히 하거나 대충대충 넘기지 않으며, 간절함을 담아 진실 되게 요청합니다. 그래서 그 마음이 그대로 다른 이에게 전달됩니다. 오늘 복음의 치유 이야기뿐 아니라 치유를 바라는 많은 이들의 절박함을 네 권의 복음서는 담백하게 전합니다. 그들에게는 다시는 오지 않을 유일한 기회이기에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체면을 차릴 생각도 없이 길가에서 소리 높여 주님께 외치기도 하고(마르 10,46-48 참조), 많은 군중 속에서도 주님을 찾아 그분의 옷에 손을 대기도 하며(마르 5,21-34 참조), 믿음이 없음을 고백하며 염치없이 악령에 시달리는 자신의 아이를 낫게 해 달라고 청하기도 합니다(마르 9,14-29 참조). 이렇게 간절함과 절박함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곧 진정성을 가지고 기도하라는 뜻이며, 이성이나 논리를 앞세우는 우리의 생각이 아닌,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인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어놓고 의탁하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으로 쉽게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믿는 우리에게 불가능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1월 9일 (토) [백]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복음묵상] 요한 3,22-30 충만한 기쁨이란 무엇일까요? 인간적인 보람과 만족감이 아닌,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충만한 기쁨이 무엇인지 세례자 요한은 오늘 복음에서 알려 줍니다. 전에는 자신을 따라다녔지만 지금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동향을 제자들에게서 전해들은 세례자 요한은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고 경쟁하는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을 통하여 자신은 충만한 기쁨을 느낀다고만 말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기쁨은 오랜 시간 끝에 드디어 혼인 잔치의 신부인 당신 백성을 만나러 오시는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기쁨이고,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듣고 더 크게 기뻐하는 신랑친구의 기쁨입니다.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목격한 것은 세례자 요한에게 그 무엇보다 큰 기쁨입니다. 구세사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을 통하여 우리가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을 목격한 세례자 요한은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길을 준비한 세례자 요한이 보람을 느낄 만도 하지만, 그는 보람이 아닌 충만한 기쁨을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 마지막 구절에 그 이유가 나타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하느님의 뜻대로 응답하고 실천한 세례자 요한의 겸손한 답변입니다. 우리는 가끔 어떤 일을 마치고, 그 일에 보람을 느끼고 만족하려고만 하지는 않습니까? 그 일이 하느님의 일이었음에도 세례자 요한과 같은 기쁨을 찾기보다, 누가 쉽게 공을 빼앗아 가면 허탈해하고 낙담하는, 보람만을 찾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독서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우리는 참되신 분 안에 있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모든 일은 세례자 요한과 같이 기쁨과 희망의 삶일 수 있습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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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이 시작되었습니다. 모두가 어려웠던 지난해를 돌아보면서 힘들었던 것을 이겨낸 마음과 새해에도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각오로 힘차게 출발합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