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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0년 12월 13(일) [자] 대림 제3주일

Berardus 2020. 12. 12. 07:29

    [금주의 말씀 묵상]

    2020년 12월 13(일)
    [자] 대림 제3주일

    제1독서(이사 61,1-2ㄱ.10-11) 제2독서(1테살 5,16-24) 복음(요한 1,6-8.19-28)
    가까이 오셨다! 구원자이시며 또한 빛이신 주님 오시기에 큰 기쁨 넘치고 모든 일에 감사하며 그 분을 기다리는 시간은 은총과 같은 것 하느님 말씀 통한 창조, 소리를 통해 큰 변화 일으키는 동력 어두운 땅 밝혀주시는 주님 사랑의 신비 마주하는 성탄 되길

        이념과 원칙을 주입식으로 교육하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개혁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체제와 낡은 통념, 시대적 착오를 전복시키는 힘은 사랑과 그로 인한 자발적 증언에서부터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이러한 힘을 혁명이라고 부르고 신앙의 영역에서는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가장 정치적인 힘이며 사회적 영향력인 동시에 외부적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그 사랑이 ‘마음이 부서진이들을 싸매주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는 것’(제1독서 참조)일 때, 그 사랑은 어떤 역량보다 강력하게 새로운 사회 질서를 세우게 됩니다. 대림 제3주의 전례본문들은 이러한 기쁨과 희망으로 오시는 구원의 빛을 기다리며 환호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분의 오심으로 캄캄하고 숨 막히던 공간은 이제 밝은 빛 속에 날아다닐 듯 가볍게 호흡하고 생동하는 기쁨의시대로 변하게 됩니다. ■ 복음의 맥락 대림 제3주는 ‘기쁨의 주일’이라고도 합니다. 기쁨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사제의 제의도 자색이 아닌 장미색(분홍)으로 대체되고, 제대 주변도 화려하게 꾸며집니다. 전례 중에 선포되는 본문들도 ‘기쁨’이라는 주제로 관통되어 있습니다. 입당송부터 “기뻐하여라. 거듭 말하니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여라. 주님이 가까이 오셨다.”라는 환호가 울려 퍼지고, 제1독서도 ‘메시아의 사명’을 언급하면서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한다”고 환호합니다. 화답송은 “내 영혼이 내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네”라는 성모님의 노래가 불려지고 제2독서 역시 기쁨을 품고 사는 것이 곧 하느님의 뜻임을 선언합니다. 이러한 기쁨은 구원자이신 분의 오심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빛이신 분이 오시기에 그토록 기쁠 수 있는 것입니다. ■ 기쁜 소식 요한복음서는 그리스도를 ‘빛’으로, 세례자 요한을 ‘그 빛에 대한 증언자’로 소개합니다.(요한 1,6-8) 대림 시기가 시작되면서 켜지기 시작한 대림초는 ‘빛’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데, 초를 하나씩 밝힘으로써 주님의 도착이 거의 임박했음을 알려줍니다. 특별히 요한은 사람들이 자신을 ‘빛’으로 착각할까봐 스스로의 신원을 “서슴지 않고”(20절) 고백합니다.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당신은누구요?’하고 물었을 때 그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이어 엘리야도, 예언자도 아니라고 하면서 분명한 선을 긋습니다.(19-22절) 자신은 그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소리”(23절)라고 하는데 이때 ‘소리’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포네’이며, 특별히 ‘외치다’라는 그리스어 동사 ‘보아오’와 함께 사용됨으로써 어떠한 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공표하기 위해 크게 지르는 소리를 의미합니다. 그 런데 이 ‘소리’에 대한 내용은, 바로 전에 언급된 부분(1,1-5)과 함께 읽을 때에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1,1-3) 요한복음서의 시작이기도 한 이 부분은 ‘말씀’에 대한 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요한은 ‘소리’이지만 그리스도는 ‘말씀’이심을 명백히 선언하는 데에 초점을 맞춥니다. ‘말씀’에 해당되는 그리스어는 ‘로고스’이며, 이 단어는 우선적으로 어떤 것에 대한 ‘말’을 의미하지만 ‘사건’, ‘일’이라는 뜻까지 포함합니다. 그 ‘말’은 언제나 ‘사건’과 ‘일’을 구체적 결과로 가져옴을, 즉 ‘말씀’은 어떤 일이나 사건을 발생시켜 삶의 중요한 변화를 만들어내고 창조하는 기능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단순히 ‘소리’만이 아니라 그 소리를 통해 실현되는 사건이고 변화를 일으키는 살아있는 동력이며 창조적인 일입니다. 말씀을 통한 창조는 지금 우리들 안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사건이기에 요한은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26절)라고 선언합니다. “말씀”이신 분은 당신 자신을 통해 주변을 진정으로 존재하게 하시고 변화를 통한 새로운 창조에로 초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런 창조주이신 ‘말씀’을 “내 뒤에 오시는 분”(27절)으로, 그리고 자신은 그 말씀을 선포하는 ‘소리’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 하느님의 영이 주는 기쁨 복음에서 요한이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규정하면서 인용한 본문은 이사야 예언서인데 제1독서는 이사야 예언서의 한 부분으로 되어있습니다. 새롭게 ‘기름 부어’ 축성한 메시아를 소개하는 본문으로서, 그 특성은 그 위에 “하느님의 영”이 내렸다는 것입니다.(이사 61,1) 즉 기름 부음을 받은 메시아가 하는 모든 일은 ‘성령’이 그에게 내려 이루어짐을 먼저 선언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와 함께함으로써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2절)하게 됩니다. 하느님의영이 함께할 때 이러한 위대한 해방이 가능한 것이고 그럴 때 누구도 두렵지 않고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강력한 하느님의 통치가 구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1테살 5,16-18)라고 권고합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선물로 깨달을 때 우리는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게 되고 이러한 감사는, 또 다른 기쁨의 은총으로 우리 안에 간직되며, 그래서 그분의 오심을 기다리는 시간은 당연히 기쁘고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외치는 ‘소리’만 울려 퍼지던 광야는, 진정한 생명의 창조적 힘을 가진 ‘말씀’이 오심으로써, 아름다움과 풍요가 가득한 곳으로 변하게 됩니다. 사랑이 발생하고 그 사랑을 가져다주는 존재가 다가오면 주변이, 어제와 똑같던 그 주변이 급속도로 달라 보이듯이, 광야는 풍요와 빛의 땅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둠과 불안, 치욕과 분노를 전복시키는 힘은 복음이신 ‘말씀’의 오심으로만 가능한 사건입니다. 거의 일 년간 우리 삶의 언저리를 위협하며 전방위적으로 지구촌 전체를 고통과 결핍, 불행과 무력감으로 밀어 넣은 이 사태 속에서 우리 존재와 마음을 가득 채우는 빛, 그 사랑의 신비를, 견고한 행복한 활짝 핀 웃음으로 마주하는 성탄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김혜윤 수녀- [한주간 전례] 2020년 12월 14일 (월) [백]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1542년 스페인 아빌라의 폰티베로스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극심한 가난을 체험한 그는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하여 수도 생활을 하다가 사제가 되었다. 이후 요한은 ‘아빌라의성녀’로 잘 알려진 예수의 데레사 성녀와 함께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을 추진하는 가운데 영성 생활의 스승 역할을 하였다. 1591년 세상을 떠난 그는 1726년에 시성되었고, 1926년에는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교회의 위대한 신비가인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가르멜의 산길』, 『영혼의 어두운 밤』, 『영혼의 노래』 등은 영성 신학의 고전으로 널리 인정받고있다. [복음묵상] 마태오 21,23-27 발라암 예언자가 모압 임금 발락의 거듭된 청에 못 이겨 모압으로 길을 나서자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그의 길을 막으십니다. 그래서 발라암은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을 발락의 뜻대로 저주하기 보다는 하느님의 뜻대로 축복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볼 수 있듯 발라암이 하느님께 받은 네 번째 신탁은 메시아 탄생의 환시입니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 발라암은 다른 예언자들 못지않게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그의 삶은 주님을 향하지 않았습니다. 발라암의 권유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프오르에서 우상 숭배에 빠졌고, 발락과 헤어진 뒤 미디안족과 함께 머물면서 이스라엘이 다시 우상 숭배에 빠졌기 때문입니다(민수 31,16 참조). 신약 성경에서 발라암이 돈 때문에 이스라엘을 위험에 빠뜨린 부정적인 인물로 소개되는 데에는 바로 이런 까닭이 있습니다. (2베드 2,15; 유다 11; 묵시 2,14 참조).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자 기꺼이 스스로를 내놓은 이들은 하느님을 대신하여 자신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난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드러내었습니다. 발라암도 하느님의 힘이 그의 모든 능력을 지배하였던 것이지, 그가 뛰어나서 하느님의 힘을 드러낸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성전 정화 사건 직후 예수님의 권한에 시비를 거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권한이 하늘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의 것인지를 물으십니다. 자신의 안녕만을 위하여 돈과 권력을 따른다면 구원의 별도 볼 수 없고 정화의 세례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자 자신을 기꺼이 버리는 가난한 마음만이 구원의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2020년 12월 15일 (화) [자] 대림 제3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21,28-32 스바니야는 히브리말로 ‘주님께서 피난시켜 주신다.’라는 뜻입니다. 스바니야 예언자는 예레미야 예언자와 같은 시대의 인물로서 성전 주위에 머물며 심판을 예고하고, 동시에 열심히 살려는 이들을 격려하였습니다. 그의 예언은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와 민족들에 대한 심판, 복구의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단 세 장뿐인 스바니야 예언서의 마지막 장 전반부를 대림 시기의 한가운데인 오늘 묵상하게 됩니다. 오늘 독서에서 스바니야는 이방 민족들의 회개와 흩어진 백성의 귀환을 언급한 뒤, 남은 이들의 신앙자세를 ‘가난한 자’라고 강조합니다. 여기서 가난함이란 물질적으로, 사회적으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음을 말하기도 하지만 영성적으로 ‘마음이 가난함’을(마태 5,3 참조) 뜻하기도 합니다. 하느님 앞에 가난한 사람의 삶의 자세가 과연 무엇인지는 오늘 복음 속 예수님의 ‘두 아들의 비유’에서 알 수 있습니다.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는 아버지의 명에 싫다고 답하였지만 마음을 바꾸어 밭에 가서일하는 맏아들과, 가겠다고 답하였지만 실제로는 일하지 않는 다른 아들의 태도에서 무엇이 중요한지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그렇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한다.’ 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실 분을 기다리는 이때에 가난한 자로 산다는 것은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순종을 뜻하는 라틴어는 ‘집중해서 잘 듣는다.’라는 표현에서 나왔습니다.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자신의 생각을 접는 기도와 함께, 그분 뜻대로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가난한 자로 사는 길이라 하겠습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2020년 12월 16일 (수) [자] 대림 제3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루카 7,18ㄴ-23 “하늘을 창조하신 분, 그 분께서는 하느님이시다. 땅을 빚으시고 땅을 만드신 분, 그분께서 그것을 굳게 세우셨다. 그분께서는 그것을 혼돈으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살 수 있는 곳으로 빚어 만드셨다. 내가주님이다. 다른 이가 없다.” 일상에서 창조주 하느님의 존재에 대하여 민감해지는 때가 있다면, 바로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 시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유일하신 창조주 하느님을 언급합니다. 하느님께서 한 처음부터 계셨던 말씀을 우리의 구원자로 우리 가운데 보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요한 1,1-18 참조).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을 통하여 예수님께 여쭙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라고 답하십니다. 한처음 하느님께서는 당신 모습과 비슷하게 사람을 흙으로 빚어 만드셨고 이제는 직접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십니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가 구원자이심을 알아본 목자들처럼, 또 하늘의 별을 보고 찾아와 아기 예수님께 경배 드린 동방 박사들처럼, 우리도 일상에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가난과 아픔 속에 소외된 이웃들과 함께하시고자 오시는 구원자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성령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자] 2020년 12월 17일 (목) [복음묵상] 마태오 1,1-17 대림 시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 성탄 대축일을 준비하는 때” (「전례주년에 관한 일반 규범」, 39항)이고, 다시 오실 구세주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회개의 시기’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대림 시기의 두 가지 의미를 드러내고자 대림 제1주일부터 12월 16일까지를 ‘세상 끝 날에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시기’로, 그리고 12월 17일부터 24일까지를 ‘주님 탄생을 기다리는 시기’로 나누어 전례를 거행합니다. 오늘은 대림 시기 둘째 부분의 첫날입니다. 오늘 복음 속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통하여 그분 안에서 하느님의 모든 약속이 지켜졌음을 다시금 깨달으면서, 화답송의 시편처럼 “정의와 큰 평화가, 그의 시대에 꽃피게 하소서.”라고 응답해 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복음서 1―2장에서 유다인의 전통적 주석 방법을 사용하여, 구약 성경에서 하느님께서 이행하신 모든 약속을 예수님 탄생 이야기로 드러냅니다. 특히 창세기 원역사(1―11장 참조)의 ‘하늘과 땅의 족보’(2,5 참조)와 ‘아담의 족보’(5,1 참조)가 가지는 하느님 축복의 효과를 염두에 두면서 예수님의 족보를 창조와 인간 역사의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태오는 하느님께서 지난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고(이사 51,1-2 참조), 다윗 임금에게서 펼쳐 보이셨으며(이사 9,6 참조), 예수님 안에서 성취하신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보여 줍니다. 마태오는 구약 성경 속 네 명의 여인을 족보에 삽입하면서 그 가운데에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결정적인 역할을 하신 분으로 자리매김 시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들의 명단을 세 부분으로 나누고, 각각 십사 대로 압축하여 기록하면서 다윗과 그 후손의 지속성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약속이 이루어졌음에 감사하며, 화답송을 다시 한 번 노래합니다. “정의와 평화가, 그의 시대에 꽃피게 하소서.”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자] 2020년 12월 18일 (금) [복음묵상] 마태오 1,18-24 마태오 복음사가가 이방인 지역에 흩어져 살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복음서를 쓴 목적은 예수님과 이스라엘의 역사를 연결하는 데 있었습니다. 약속된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그분께서 어떻게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시는지를 보여 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마태오는 복음서의 시작인 족보(1,1-17 참조)에서부터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1,1)이라 부릅니다. 메시아께서 다윗 가문에서 나실 것이라 굳게 믿으며 기다려 온 유다인에게 이것은 매우 중요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마태오는 구약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하여 완성되었음을 강조하고자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마태오로서는 “다윗의 자손”과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라는 구절만으로 예수님과 이스라엘 역사를 연결 짓기에는 부족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오는 더욱 명확하게 핵심을 드러내고자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천사가 요셉에게 전한 메시아 탄생 예고가 그것입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예언이 성취되었음과 함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분께서 이 세상에 어떻게 오셨는가를 밝힌 마태오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응답이 필요하였고, 하느님 뜻에 순종할 본보기로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제시 됩니다. 그가 ‘다윗의 자손이요 의로운 사람’이여서나 아내 마리아의 일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배려심도 있었겠지만, 처녀가 혼인 전에 아이를 가진 현실의 엄청난 두려움 속에서도 믿음으로 꿈의 계시에 귀 기울이고 하느님의 섭리에 내맡기는 요셉의 순종이야말로 마태오가 간절히 전하고 싶었던 바입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자] 2020년 12월 19일 (토) [복음묵상] 루카 1,5-25 오늘 독서는 ‘삼손’의 출생에 대한 신비로운 이야기입니다. 아이가 없던 마노아와 그의 아내는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아들 삼손을 얻습니다. 그러나 오늘 독서에는 하느님의 사람이 아내에게 전한 약속을 마노아가 어떻게 의심하다가 믿게 되었는지에 대한 부분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판관 13,8-23 참조). 아내의 임신을 알게 된 마노아는 주님께 다시 기도드리며 하느님의 사람을 다시 보내 주시기를 청합니다. 다시 온 그분이 주님의 천사인지도 모른 채 마노아는 그분의 이름을 묻습니다. 그러나 천사는 이름 대신 “그것은 신비한 것”(13,18)이라는 답을 주었고, 그제야 마노아는 “‘신비한 일을 하시는 분’ 주님께”(13,19) 제사를 바칩니다. 제단의 불길이 하늘로 타오르는 것을 보고서야 하느님을 믿게 된 마노아와 그의 아내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오늘 복음 속 즈카르야의 의심과 연결됩니다. 의롭고 흠 없이 살아온 즈카르야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마노아 부부처럼 아이를 가지지 못하였고 나이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즈카르야가 사제로서 성전에서 분향하려는 순간, 천사가 엘리사벳의 잉태 사실과 아이의 소명을 계시합니다. 그러나 즈카르야는 자신이 늙었고 아내 엘리사벳도 나이가 많다는 현실적인 이유로 천사의 말을 의심합니다. 결 국 그 의심의 대가로 즈카르야는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제사 때 하늘로 올라가던 불길을 보고 믿게 된 마노아와 달리, 즈카르야는 혀가 굳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비한 일을 하시는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사람은 잠잠히 있어야 한다는 것을 주님 탄생을 앞두고 배웁니다. 하느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마음에 새기며 조건 없이 따른다면 참된 행복이 주어집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카 1,45)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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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림 제3주일입니다. 이번 주부터 수도권 지역에서는 미사 참례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스갯소리로 올해는 예수님이 죽지도 못하고 부활도 못하였으며 게다가 탄생도 하지 못하는 한 해라고 합니다. 사람의 일은 한치 앞을 보지 못하는 것임을 새삼 깨닫게 합니다. 요즘 코로나19가 극성입니다. 모두 건강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