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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0년 12월 6 (일) [자] 대림 제2주일

Berardus 2020. 12. 5. 08:24

    [금주의 말씀 묵상]

    2020년 12월 6 (일)
    
    [자] 대림 제2주일

    제1독서 (이사 40,1-5.9-11) 제2독서 (2베드 3,8-14) 복음 (마르 1,1-8)
    매일 기다렸습니다, 아기 예수님! 세상에는 아름다운 표현이 많습니다. 저는 그중에 기다림이라는 단어를 아끼는데요. 무언가를 기다리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에 담긴 행복의 향기가 너무 좋은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대림시기는 애틋하고 복됩니다. 귀한 만남을 기다리는 참 행복한 때이지요.

        지난해, 성전의 구유를 치울 때였습니다. 교우분들이 아기 예수님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그 정경을 카메라에 저장하는 모습이 예전과 다르게 느껴지더군요. 퍼뜩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어디서나 그분을 기다리는 존재여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고였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의 기다림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는 묘수를 찾고 싶었습니다. 혹여 구유가 차려진 그 시기에만 주님의 오심을 기억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분이계시다면 이런 사목적 잘못은 다시 없으니 말입니다. 만약에 만에 한 분이라도 그런 생각을 갖고 계시다면 ‘이야말로 큰일이다’라는 노파심이 일었던 겁니다. 그러다 아기예수님을 기다리는 마음을 일 년 내내 간직할 수 있는 묘안이 떠올랐는데요. 곧장 교우분들께 제안을 드렸지요. 이제부터는 아기예수님을 기다리는 마음을 내내 간수하기 위해서 구유예물을 매일 혹은매 주일마다 모아보자고요. 2020년 성탄에는 일 년 동안 모은 정성 어린 예물을 아기예수님께 선물해드리자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계획이 너무나 좋고 좋았던 저는 그날부터 당장 실천에 들어갔는데요. 이제한 해가 다가오니 예물주머니가 제법 두둑해졌습니다. 스스로 기특해서 오늘 아침에도 ’쓰담쓰담‘ 셀프칭찬을 날렸더랬습니다. 솔직히 얼마나 많은 분들이 그 약속을 기억하고 계신지 모릅니다. 과연 몇 분이나 그 약속을 실천하고 계신지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저처럼 잊지 않고 매일,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마음을 간직하신 분들이 꼭 계시리라 믿습니다. 어쩌면 올해 우리 본당의 구유예물이 전국 최고치를 경신할 것만 같아, 으쓱한 마음도 생깁니다. 그런데 오늘 마르코가 전하는 복음의 첫 구절에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아마도 복음서의 제목이었으리라 짐작되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선명한 문구가 심상치 않게 다가왔는데요. 무엇보다 “보라”라는 강한 명령어로 복음서를 열고 있다는 점이 그랬습니다. 사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베드로 사도가 들려주는 예수님의 공생활 이야기를 듣고 정리한 인물로 알려져 있지요. 이를테면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 공생활에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했던 베드로 사도의 증언이며 고백인 셈인데, 그 첫 어휘가 “보라”입니다. 왜 무엇 때문에 베드로 사도는 복음의 시작으로 이 단어를 선택했을까요?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전하고 알리기 위한 서두를 허투루 골랐을 리가 만무하니 말입니다. 수도 없이 앞에 놓은 이야기와 뒤를 이을 사연을 재편집하며 고심했을 것이 분명하니 말입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고민한 끝에 ‘예수님을 보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고 결론을 내렸을 테니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의 권유에 따라 하느님의 어린 양을 “보며”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삶이 온통 구세주를 기다리는 것에 바쳐졌다는 사실을 상기합니다. 또한 평생을 메시아를 기다리는 일에만 집중하여 살았던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로부터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라고 칭찬을 들었던 사실을 되새깁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복음의 메시지는 오롯한 마음으로 당신을 기다리는 순수한 믿음의 자세를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기뻐하신다는 고백으로 들어도 무방하리라 싶습니다. 우리도 세례자 요한처럼 굳센 믿음으로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만으로 주님께 칭찬을 들을 것입니다. 설사 우리의 생각이 한참 모자라고, 우리의 믿음이 약간씩 흔들거리고, 우리의 회개가 반나절에 그친다 해도 우리와의 만남을 기다리시는 주님 사랑은 끝이 없다는 걸 확신하게 됩니다. 크신 하느님 앞에 작은 자신의 존재를 깨닫고 고백하는 것만으로 주님께 ‘큰 사람’이 될 수 있다니요? 아, 진정으로 주님의 뜻을 따르는 복음생활은 이토록 단순하고 쉽다는 뜻이라 새겨봅니다. 물론 예수님을 ‘보라’는 사도의 권고에 오롯이 따라 살기 위해서는 ‘보지 말아야 할 것’에 예민해져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순결한 시선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보지 않아야 하는 것들에 단호해져야할 것입니다. 보아야 할 것과 보지 말아야 할 것을 구별하는 지혜만이 주님을 뵙는 밝은 영안을 갖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은 인권 주일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세상의 이웃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라’고 선포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진리의 협력자가 되는 것” (3요한 8)임을 선명히 알려주는 것이라 믿습니다. 대림, 예수님께서 우리와의 만남을 우리보다 더 손꼽아 기다리시는 때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땅으로 보내심에 감사드리는 마음이 우리 몸과 영과 혼에 가득차오르기를 기도드립니다. -장재봉 신부- [한주간 전례] 2020년 12월 7일 (월) [백]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암브로시오 성인은 340년 무렵 로마인 가문에서 태어나 트레비리 (지금의 독일 트리어)에서 자랐다. 일찍부터 법학을 공부한 그는 변호사로 활동하였고, 로마에서 공직 생활도 하였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주교가 된 암브로시오는 아리우스 이단에 맞서 정통 그리스도교를 옹호하였다. 그는 특히 전례와 성직의 개혁을 꾸준히 실행하는 한편, 황제의 간섭을 물리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암브로시오 주교의 훌륭한 성품과 탁월한 강론은 마니교의 이단에 깊이 빠져 있던 아우구스티노 성인을 교회로 이끌었다. 397년에 세상을 떠난 그는, 예로니모 성인과 아우구스티노 성인, 그레고리오 성인과 함께 서방 교회의 4대 ‘교회 학자’로 칭송받고 있다. [복음묵상] 루카 5,17-26 겨울에 비가 내리고 여름에는 건조한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으로 이스라엘 집들은 지붕이 평편하였습니다. 그리고 집 밖으로 난 계단을 통하여 지붕으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한낮의 열기를 피하여 잠시 휴식을 취하거나 농작물을 펼쳐 놓고 말리기도 하였습니다. 옥상과 같은 역할을 하는 이 지붕은 삼나무나 향백나무로 만든 긴 막대기를 대들보처럼 걸쳐 놓고 그 위에 짚을 깐 다음 마지막에 진흙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겨울비가 내리기 전에 돌로 만든 굴림대를 이용하여 진흙을 단단하게 다졌습니다. 이런 지붕은 마르코 복음서 2장의 중풍 병자 치유 이야기에서처럼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낼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같은 장면을 전하는 오늘 복음에서, 이방인 루카 복음사가는 이스라엘의 기후와 토양은 물론 집 구조가 낯설었기에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복음사가들은 중풍병자를 도우려 한 이들이 예수님께 병자를 데려가려고 얼마나 노력하였고 그 마음이 얼마나 절실하였는지 말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처럼 눈먼 이들의 눈을 여시고, 귀먹은 이들의 귀를 여시며, 다리저는 이를 사슴처럼 뛰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의 혀가 환성을 터뜨리게 하시는 분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십니다. 예수님을 만나 뵙기 위하여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는” 일은 중요합니다. 기다림의 시간인 지금, 주님을 만나고자 얼마나 열성적으로 노력하고 있는지 이웃과 함께 되돌아봅시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2020년 12월 8일 (화) [백]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성모 마리아께서는 잉태되신 순간부터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다는 믿음은 초대 교회 때 생겨났다. 여러 차례의 성모님 발현으로 이러한 믿음은 더욱 깊어졌다. 1854년 비오 9세 교황은 ‘성모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다. 우리나라는 이미 1838년 교황청에 서한을 보내 조선교구의 수호자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로 정해 줄 것을 청하였고,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이러한 요청을 허락하였다. [복음묵상] 루카 1,26-38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셨다는 것은, 마리아께서 세상에 존재하시는 순간부터 죄에 물들지 않는 특전을 지니셨다는 뜻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이시며 임금이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열 달 동안 품고 계실 분이시기 때문에, 탄생은 물론이고 잉태되실 때에도 원죄에 물들지 않으신 깨끗한 몸이셨다고 우리는 고백합니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이를 깨우쳐 줍니다. 제1독서는 사람이 뱀의 유혹에 빠져 원죄를 지었다고 알려 주며, 복음은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구세주 잉태 소식을 전함으로써 인류에게 구원의 자비가 주어졌다는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그리고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구원 계획을 펼치시려고 천지 창조 이전에 미리 우리를 뽑으셨다는 말씀으로 이 모든 것을 찬미합니다. 히브리어에서 ‘자비’와 ‘모태’를 뜻하는 단어는 어원이 같습니다. 곧 구약 성경에서는 배 속의 아이를 품듯이 하느님께서 죄 많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행위를 ‘자비’라고 여깁니다. 따라서 오늘 제1독서 마지막에 ‘하와를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게 하였다.’라는 것과, 복음에서 성모 마리아께서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의 어머니가 되신다고 한 것은 하느님의 자비가필요한 우리에게 참으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해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에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강론 마지막에 남기신 기도를 바치고 싶습니다. “우리의 온 삶이 하느님께 ‘예.’가 되게 하소서!”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2020년 12월 9일 (수) [자] 대림 제2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1,28-30 이사야 예언서는 유배 전, 유배 중, 유배 뒤의 세 시기를 거치며 쓰여 졌기에 각 시기 예언의 특징을 모두 보여 줍니다. 오늘 독서는 유배 중의 것으로 제2부 위로의 책에 해당하는 부분이며(40―55장참조), 복역 기간이 끝나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을 ‘별들을 창조하심은 물론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으로 ‘그 하나하나의 이름을 부르시고 막강한 능력과 권능이 크신’ 분으로 부릅니다. 계속 이어지는 표현들은 우리에게 희망과 믿음을 더욱 불어넣습니다.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시는” 주님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은 ‘새 힘을 얻어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감은 물론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할 줄 모르게’ 된다고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상일에 지쳐 버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나에게 배워라. ……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고, 우리가 그분을 대신하여 행동하게 하는 힘을 줍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하느님의사랑에 대한 희망과 믿음이 그 바탕에 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연말이라 바쁘고 대림 시기라 마음을 다잡아야 하는 요즈음, 오늘 독서와 복음은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나 피로 회복제가 되는 듯합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2020년 12월 10일 (목) 대림 제2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1,11-15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약속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서와 마태오 복음서는 믿음과 희망으로 우리를 부릅니다. 이는 영국의 시인 T. S. 엘리엇의 시 ‘황무지’를 연상하게 합니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 뒤, 시인은 잔혹한 전쟁의 폐해를 시에 담았습니다. “가련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이 물을 찾지만, 물이 없어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탄다.”라고 하는 독서와, 복음에서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하신 예수님의 탄식과도 맞아떨어집니다. 그러나 엘리엇 시인은 ‘황무지’를 쓰며 고대의 성배 전설을 참조합니다. 늙고 병든 왕의 나라에 재앙이 일어납니다. 왕은 재앙을 물리칠 지혜롭고 힘센 젊은이를 찾습니다. 마침내 한 젊은이가 성배를 가지고 나타나 재앙을 물리치고 새 나라를 건설합니다. 시인은 현대 사회의 재앙을 황무지에 비유하면서도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듯 새로운 구세주가 나타나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도 불의와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에게 희망을 제시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 나는 벌거숭이산들 위에 강물이, 골짜기들 가운데에 샘물이 솟아나게 하리라. 광야를 못으로, 메마른 땅을 수원지로 만들리라.” 화답송의 시편도 ‘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는 분’ 이라고 희망을 노래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말씀하시며 우리의 주의를 환기하십니다. 올해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황무지’ 같았습니다. 고난을 극복할 희망을 주시는 분께서 곧 오신다는 것을 이 대림 시기에 다시 한번 명심합시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2020년 12월 11일 (금) [자] 대림 제2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1,16-19 기다리다 보면 오는 것도 있고 가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서두르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습니다. 신앙생활에서는 기다림이 더 의미 있고, 이 기다림을 통하여 구원의 문에 더욱 가까이 다가설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긴 세월을 기다려 아들을 얻었고, 욕심 많던 야곱도 오랜 시간을 기다린 뒤 형과 화해하여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다 거짓 교사들의 출현에 현혹된 신자들에게 베드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8-9).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기다림의 보상을 잘 알고 있습니다. 기다림은 희망을 전제로 하고, 이 희망은 바로 대림 시기의 중심 주제입니다. 기다림을 통한 성취는 오늘 독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주님의 길로 돌아간다면 그들의 평화가 강물처럼, 그들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릴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기다려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 그들에게 무엇이 궁극적인선인지를 가르쳐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만 하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지금이야말로 기다림의 지혜를 청해야 할 때입니다. 이 지혜를 오늘 화답송시편은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주님, 당신을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이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2020년 12월 12일 (토) [자] 대림 제2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7,10-13 집회서의 저자 ‘시라의 아들 예수’는 불타는 전차를 타고 하늘로 오른 구약의 위대한 엘리야 예언자를 기억합니다. 북이스라엘 출신 엘리야는 아합 치세에 등장하여 삶의 대부분을 아합과 투쟁하며 ‘바알우상’ 타파에 헌신하였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뜻대로 가뭄을 선포하지만 사렙타 마을의 과부에게는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하고 심지어 그의 죽은 아들을 부활시키는 기적을 행합니다. (1열왕 17장 참조). 또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던 850명의 예언자들과 카르멜산에서 대결하여 바알 우상의 어리석음을 백성들 앞에서 폭로하며 이스라엘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죽지 않고 제자엘리사가 바라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갑니다(2열왕 2,11 참조). 이와 같은 엘리야의 활약을 잘 알고 있던 이스라엘은 이 위대한 예언자를 아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드린 질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당신은 정해진 때를 대비하여,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것을 진정시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되어 있다.”라는 집회서의 가르침처럼 다시 올 엘리야의 임무가 ‘자비’와 ‘화해’였으니 누가 그를 환영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엘리야가 참으로 마지막 날 전에 먼저 와야 하고, 이미 와 있다고 답하십니다. 물론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모든 것을 바로잡을 세례자 요한도 알아보지 못하여 제멋대로 다룬 이들이, 자비와 화해의 임무를 수행하실 사람의 아들도 그렇게 제멋대로 다룰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오늘 화답송 시편이 대림 시기 동안 하느님 약속의 실현을 기다리는 우리의 희망을 대변하는 듯합니다. “이스라엘의 목자시여, 귀를 기울이소서. 광채와 함께 나타나소서. 당신 권능을 떨치시어, 저희를 도우러 오소서.”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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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림 제2주일입니다. 대림초에 진보라, 연보라색상의 초에 불이 밝혀집니다. 다시 오시는 아기예수님을 기다리며 이번 주간도 건강한 한 주간 되시길 기도합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