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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0년 12월 20(일) [자] 대림 제4주일

Berardus 2020. 12. 19. 06:04

    [금주의 말씀 묵상]

    2020년 12월 20(일)
    [자] 대림 제4주일

    제1독서(2사무 7,1-5.8ㄷ-12.14ㄱ.16) 제2독서(로마 16,25-27) 복음(로마 16,25-27)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신앙의 모범이자 창조주의 어머니 성령의 힘은 창조와 생명의 근원 옛 계약 속 강생의 신비 기리며 성모 공경 기도 바치고 묵상하길

        대림 촛불을 모두 밝히고 기쁜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 제4주일입니다. 옛 계약에 숨겨져 있는 주님 강생의 신비가 드러납니다. 동정 마리아는 ‘성령의 힘’으로 구세주의 탄생과 하느님 나라의 시작에 중심인물입니다.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새롭게 하고 믿음 안에서 주님 말씀을 경청하고 받아들여 저희에게 이루어지기를 갈망합니다. 사제, 판관, 예언자인 사무엘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하나로 통일한 왕정제도를 이룹니다. 자애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양치기하던 다윗을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으로 세우십니다. 주 님께서는 나탄의 예언을 통해 다윗 가문의 후손을 영원한 주님 나라와 왕좌에 세워 구원하실 계획을 밝히십니다. 주님과 메시아와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입니다(제1독서). 하느님께서 오랜 세월 감추어두신 신비는 예언서의 글과 사도 바오로의 복음 선포로 밝혀집니다(제2독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주님(마태 5,17)은 모든 민족을 믿음과 순종으로 이끄십니다. 성령께서는 내적인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와 일치를 이루어 영원토록 하느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께서 가브리엘 천사를 나자렛 시골 마을에 소박한 처녀 마리아 방에 보내시어 강생의 신비를 알립니다. 주님의 총애를 받은 마리아의 모태에서 성령의 힘으로 신성이 충만한 성자가 인성을 취합니다. 이 소식에 놀란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에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천사의 설명을 듣고 부르심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응답합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 지기를바랍니다(Fiat, 루카 1,38).” 천사는 마리아에게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는 축하 인사를 건넵니다. 다윗의 후손인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의 잉태는 둘만의 문제가 아니라 양가가 깜짝 놀랄 가족 사건이기에 몹시 놀라 곰곰이 생각합니다. 천사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으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마리아를 안심시킵니다. 이제 잉태하여 낳을 아드님은 영원한 하느님의 나라를 다스릴 다윗의왕좌인 메시아임을 밝힙니다. 성자의 모태로 삼으려고 선택받은 마리아는 원죄로부터 보호되었습니다. 참된 빛이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함께 계십니다. 교황 비오 9세께서는 이 신앙의 진리 (창세 3,15; 루카 1,28)를 교의로 선포(1854.12.8.)하십니다. 기적의 메달(1830, 파리)과 루르드에 성모 발현(1858)도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입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루카 1,34)라는 마리아의 질문에, 천사는 성령의 힘이 작용하여 순결과 정결을 지킨 마리아의 수태를 예고합니다. 꿈에 주님의 천사를 만난 요셉은 성령의 힘으로 마리아가 잉태한 아들은 임마누엘 주님(마태 1,23; 이사 7,14)임을 알고 양부가 되어 성가정을 이룹니다. 천사는 한 처음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음 (루카 1,37)”을 상기시킵니다. 하느님의 영이 심연의 물 위를 감도는 형상 (창세 1,2)에서 보듯이 성령의 힘은 하느님의 창조와 생명의 근원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의 친척으로 아이를 못 낳고 나이든 엘리사벳이 주님의 자비를 입어 세례자 요한을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음을 알립니다. 아인 카렘을 방문한 마리아에게 엘리사벳은 태중에 충만한 성령의 힘을 입어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에 아기도 복되십니다.”라고 축하 인사를 합니다. 마리아는 기쁜 마음으로 구세주 하느님의 은총에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마리아의 노래’를 부릅니다(루카 1,39 이하). ‘은총이 가득한’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시며, 모태는 신성과 인성을 겸비한 성자의 성전입니다. 자신을 비우고 종의 모습을 취한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강생의 신비에 봉헌한 ‘창조주의 어머니’(창세 3,20)십니다. 성모 마리아는 임마누엘 주님과 함께하신 신앙의 모범이십니다. 성령의 힘으로 태어나는 하느님의 자녀는 인간적인 혈통, 육욕, 남자의 욕망에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요한 1,13). 아담의 후손인 인류는 원죄에 물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우리 안에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우리의 삶이 하느님께 ‘예’가 되게 하소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님 말씀을 믿고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는 기도를 바칩니다. ‘주님의 기도’로 아버지의 영광과 우리의 소망을 청합니다. ‘성모송’으로 찬미와 중재를 원하고, ‘묵주기도’로 마리아와 함께 복음전체의 요약인 성자의 탄생과 복음 선포, 주님 수난과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신비를 묵상합니다. 하루에 세 번 ‘삼종기도’로 강생의 신비를 기립니다. 말씀 안에 계시는 ‘천주의 성모님’에 대한 신심 없이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신 구세주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어머니’, ‘은총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요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을 사랑합니다. 삼위일체의 삶으로 친교와 일치를 이루는 기도에 ‘아멘’으로 응답합니다. -김창선(요한 세례자)-

        [한주간 전례] 2020년 12월 21일 (월) [자] [복음묵상] 루카 1,39-45 오늘 독서와 복음은 기다림과 기쁨에 관한 것입니다. “솔로몬의 가장 아름다운 노래”(아가 1,1)인 아가는 일종의 ‘사랑 노래 모음집’입니다. 그 가운데 오늘 독서는 구혼 시절을 회상하는 여인의 노래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두 연인은 만남을 기대하며 서로를 부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남자를 모르는 처녀로서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하신 마리아와, 그에 앞서 아이를 낳을 수 없었지만 같은 분의 힘으로 세례자 요한을 가진 엘리사벳이 인사를 나눕니다. 그 만남의 기쁨은 엘리사벳의 태 안의 아기가 뛰노는 즐거움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간절히 기다리던 만남이 이루어져 얻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그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이라면 그 기쁨은 더욱 크다는 것을 화답송의 시편이 잘 보여 줍니다. “의인들아, 주님안에서 환호하여라. 주님께 새로운 노래를 불러라. 주님은 우리 도움, 우리 방패. 우리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네. 그분 안에서 우리 마음 기뻐하고, 거룩하신 그 이름 우리가 신뢰하네.” 주님 성탄을 앞둔 대림 시기의 막바지에서 구세주께서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사랑의 기쁨을 노래한 아가의 표현처럼 구세주께서는 노루나 사슴처럼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십니다. 이처럼 사랑은 사람들이 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것을 이루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아기의 잉태와 두 어머니의 만남이 그렇습니다. 따라서 구세주께서 오시는 것을 그 무엇도 방해할 수 없습니다. 주님사랑은 행동을 촉진하는 힘입니다. 주님 성탄을 앞둔 우리 또한 어떤 역경 속에서도 오시는 분을 기쁘게 맞이하려면 힘차게 뛰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2020년 12월 22일 (화) [자] [복음묵상] 루카 1,46-56 오늘 독서와 복음은 하느님의 선물이 가져다준 기쁨과 놀라운 믿음을 지닌 여인들의 찬미가를 들려줍니다. 우선 루카 복음서는 엘 리사벳을 만난 마리아가 부른 ‘마리아의 노래’를 전합니다. 이 노래는 성령으로 가득 찬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여인들 가운데에 가장 복되시며”(1,42) “주님의 어머니”(1,43)라고 기쁘게 칭한 데에 대한 마리아의 답이었습니다. 게다가 엘리사벳은 하느님의 선물을 조건 없이 받아들인 마리아의 믿음을 선언하며 마리아의 찬미를 유도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1,45) 자신이 ‘주님의 어머니’가 됨을 기리는 마리아의 말은 엘리사벳에 대한 답례를 넘어 하느님께 바치는 찬미가였습니다. 사실 이 노래는 상황과 주제 그리고 작성법의 세 가지 측면에서 ‘한나의 노래’(1사무 2,1-10 참조)와 비슷합니다. 오늘 독서는 이 찬미가를 부르기 직전, 한나가 주님께 기도하여 얻은 아들 사무엘을 약속대로 주님께 바치려 엘리 사제를 찾아가 예배를 드린 장면입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하느님께서 마리아에게 베푸신 수직적인 자비와, 비천한 이들과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 속에 이루어지는 주님의 수평적인 자비를 찬양하며, 마지막 구절에서 하느님의 구원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권능으로 동정녀가 지극히 거룩하신 분의 아들을 잉태하게 하시지만 그것은 세상의 구원을 위한 보편적인 사건으로서의 의미를 지녔던 것입니다. 간절한 기다림 속 회개의 시간인 대림 시기의 막바지에 ‘마리아의 노래’를 다시 불러 봅니다. 우리가 더욱 겸손해지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2020년 12월 23일 (수) [자] [복음묵상] 루카 1,57-66 구약 성경의 마지막 권인 말라키서는 대예언서에서 소예언서에 이르는 예언서 전체를 수렴합니다. 특히 “나의 사자”라는 뜻인 말라키 예언자와 예수님께서 활동하시기 전에 주님의 길을 준비하던 세례자 요한이 연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말라키서의 메시아 관련 내용에 감명을 받고, 말라키가 기다렸고 또 지금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아가 바로 나자렛의 예수님이심을 알게 됩니다. 오늘 독서의 첫 구절을 읽어 봅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말라키의 예언은 세례자 요한에 의하여 이루어집니다. 주님 성탄이 되면 가려질 조연이지만 그는 분명 대림 시기의 주인공입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 말라키는 갑자기 도래할 주님의 날을 준비하라고 권고합니다. 아직 구원의 때는 이르지 않았으나 언젠가 주님의 날이 오면, 인간의 죄는 종식되고 의인들이 구원되는 시대가 오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예언은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경고인 셈입니다. 따라서 주님 성탄을 곧 앞두고, 오늘 복음 속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부부의 이웃들이 메시아의 선구자로 주님의 사자요 주님께서 앞서 보내신 엘리야인 세례자 요한에게 지녔던 두려움을 생각합니다.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지금을 사는 우리도 두려운 마음으로 이 질문을 되새겨야겠습니다. 이 아기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고자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요한 3,1-18 참조). 성인이 된 세례자 요한에게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묻는 유다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처럼 무지해서는 안 됩니다(요한 1,19-28 참조).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2020년 12월 24일 (목) [자] [복음묵상] 루카 1,67-79 주님 성탄 전날인 12월 24일의 독서와 복음은 대림 시기를 마무리하면서 곧 시작할 새로운 기쁨의 때를 준비하기에 꼭 맞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우선 오늘 독서는 하느님께서 나탄 예언자를 통하여 다윗 임금에게 전하신 약속입니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임금인 사울의 죽음으로 끝맺으며 한 시대가 종결되었음을 보여 주는 사무엘기 상권과 달리 하권에서는 다윗의 왕권에 그 초점을 둡니다. 특별히 오늘 독서인 7장은 다윗에게 영원한 왕권이 약속되고, 이약속이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기에 사무엘기의 절정이고,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약속된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님을 맞이하는 길을 닦으려 앞서 온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아들의 탄생을 지켜보며 하느님께 찬미를 드립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 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 그분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즈카르야 처럼 하느님의 크신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고픈 마음이 오늘 화답송 시편에도 담겨 있습니다. “주님의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 나는 내가 뽑은 이와 계약을 맺고, 나의 종 다윗에게 맹세하였노라. ‘영원토록 네 후손을 굳건히 하고, 대대로 이어 갈 네 왕좌를 세우노라.’ 영원토록 그에게 내 자애를 베풀리니, 그와 맺은 내 계약 변함이 없으리라.” 그렇다면 오늘 밤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별’은 의심의 여지없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심은 물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 확실합니다. 오늘 하루는 떠오르는 별, 영원한 빛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날입니다. “주님, 어서 오소서!”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2020년 12월 25일 (금) [백] 주님 성탄 대축일 [복음묵상] 요한 1,1-18 주님 성탄 대축일 낮 미사의 복음 말씀은 요한 복음서의 머리글입니다. 장엄한 별, 천사들의 천상 찬미가, 가난하고 겸손한 목자 그리고 구유 안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을 선포하는 지난밤이나 오늘 새벽복음과 달리 오늘 복음은 ‘말씀의 육화’, 곧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사실 요한복음서의 머리글은 시적 구절들과 담화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시적 구절이 한 처음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을 노래한다면 담화 부분은 사람이 되시어 오신 말씀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 성탄 대축일 낮 미사에 요한 복음서의 머리글을 묵상하는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동화 같은 예수님의 탄생을 좀 더 깊게 성찰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그저 환상으로만 남지 않기를 선포하면서,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분께서 죄 말고는 모든 것에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음을 마음속 깊이 새기라고 초대합니다. 성숙한 눈으로 강생의 신비를 깨달으려면 연약한 사람의 살을 취하신 말씀을 바라보는 “은총에 은총”이 필요합니다. 로마 제국 치하에서 여러 정치적, 종교적 신념으로 분열된 이스라엘 사회에 예수님께서는 연약한 아기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뚜렷한 자기 주관에 고집까지 더해진 사람들과 함께하시고자 상처받기 쉬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이십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더 고집스럽고 더 확고한 정치적, 종교적 신념 속에 살아갑니다. 게다가 성탄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기보다는 이를 상업적으로 이용하기에만 바빠 보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신비를 바라보고 깨달을 “은총에 은총”이 더욱 간절한 때입니다. 성탄의 신비를 노래한 요한 복음사가의 시를 다시 한 번 읊어 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2020년 12월 26일 (토) [홍]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스테파노 성인은 초대 교회의 사도들이 뽑은 부제이다. 식탁 봉사를 위한 일곱 봉사자 가운데 하나로 뽑힌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식량을 나누어 주는 일뿐 아니라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진리를 증언하는 일도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또한 유다인들과 벌인 논쟁에서도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사도 6,8)는 지혜로운 언변으로 그 누구도 대항하지 못하게 하였다. 유다인들은 스테파노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음을 알고 그가 하느님을 모독하였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 결국 그는 돌에 맞아 순교함으로써 교회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 ……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59-60). [복음묵상] 마태오 10,17-22 동화 같은 주님 성탄의 환희를 만끽하기도 전에 오늘 독서에서 스테파노는 소송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주님의 지상 탄일 다음 날에 순교를 기념하는 것이 합당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찌하였든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분을 증언하고자 처음 순교한 성인의 천상 탄일을 축하하는 것은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한 파견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스테파노 또한 회당에서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세상을 구원하신 예수님을 증언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스테파노의 증언에는 지혜와 성령이 드러나 그 누구도 대항하지 못하였습니다. 마침내 스테파노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끝까지 견디어 구원을 받았음’을 사도행전의 저자 루카는 스테파노의 입을 통하여 자세히 전해 주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루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을 스테파노의 순교 직전의 마지막 발언과 연결합니다.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대조법을 즐겨 사용하는 루카의 문학적 성향도 드러나지만 그보다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늘에 계신 하느님과 그 오른편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스테파노의 자연스러운 기도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도 주님 성탄의 환희 속에서 스테파노처럼 아름다운 삼위일체의 천상 환시를 바라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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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의 성탄입니다. 완전한 미사가 진행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맞이하는 특별한 성탄에 이런 성탄도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훗날을 위하여 지금 기쁜 성탄을 보냅시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