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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0년 11월 29 (일) [자] 대림 제1주일

Berardus 2020. 11. 28. 07:53

    [금주의 말씀 묵상]

    2020년 11월 29 (일)
    [백] 온 누리의 임금이신
    [자] 대림 제1주일

    제1독서 (이사 63,16ㄹ-17.19ㄷㄹ;64,2ㄴ-7) 제2독서 (1코린 1,3-9) 복음 (마르 13,33-37)
    너 어디에서 깨어 있느냐? 하느님 섭리에 따르면서 말씀 경청하고 실천하는 자세야말로 깨어 있기를 명령하신 주님에 대한 끝없는 믿음 표현하는 것 경외심 잊은 채 잠드는 것은 은총과 은사 저버리는 행위 대림을 맞으며 인내와 노력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해야

        “주 만군의 하느님,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시편 80,20) 새벽에 깨어나니 때 아닌 폭우가 쏟아지고 회오리바람 소리마저 들립니다. 무서워라! 블루베리 농사를 지으면서 기후에 민감해졌습니다. 올해 이상기후와 생태계 파괴로 밭에 송충이 떼가 몰려들어 큰 고난을 겪었습니다. 내년 빈곤 국가 식량위기와 기근 소식도 들립니다. 요즘 주변만이 아니라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정말 걱정됩니다. 미래를 가늠할 수 없는 역사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예수님 지혜를 청합니다. ■ 복음의 맥락 본문은 마르코가 전하는 예수님 종말 설교(마르 13,5-37) 마지막 단락입니다. “깨어 있으라”는 37절 말씀이 예수님 설교 전체를 요약합니다. 이것은 수난 전에 예수님이 모든 이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서 고별사(13-17)와 마찬가지로 마르코에 따른 예수님 영적 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아버지 집을 향해 떠나는 예수님이 남아 있는 제자들 나아가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분이 다시 올 때까지 어떤 태도로 기다려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그리스도 재림을 앞두고 희망을 유지하며 현재 임무에 충실하라고 합니다. 전례력으로 새해 시작과 성탄 준비 여정에 적절한 초대말씀입니다. ■ 깨어 있어라 복음은 “깨어 있어라”에 대해 두 가지를 가르칩니다. 첫째, 왜 깨어 있어야 하는가?(마르 13,33)를 소개합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마지막 때만이 아니라 모든 시간, 모든 기회와 상황,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는 현장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동체가 종말이 언제인지 조바심을 내지 않고 하느님의 때와 섭리에 의탁하며 매순간 그분 말씀을 경청하고 실천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깨어 있는 자세 자체가 이미 깨 어 있으라고 명령한 분에 대한 신뢰, 오고 계신분에 대한 믿음을 표현합니다. 사실 주님은 항상 살아 계신 분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살아 있는 자다.”(묵시 1,17-18) 둘째, 깨어 있는 방식에 대해 가르칩니다. 모든 믿는 이는 일상에서 자기 삶을 충실하게 살면서 주님을 기다립니다. 나아가 ‘주인의 집’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습니다. 신약에서 ‘집’(오이코스)은 건물, 가정, 나아가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가리키는 이미지입니다. 집주인이 종에게 자기 권한(힘)을 주면서 집을 맡기고 떠난다는 것은 마르코 시대에 예수님 승천으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집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우리 모두는 저마다 모습과 방식은 다르지만 동등하게 그분 집의 종입니다. 종의 역할은 주인이 부재할 때 자기 일에 몰두하지 않고 주인의 집을 돌보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특히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명령합니다. 문지기는 집주인과 집의 다른 종들에게 모두 책임이 있습니다. 주인이 오면 문을 열어주고 약탈자나 강도한테서 주인집을 보호하며, 다른 종들에게는 주인 도착을 알려 주인을 합당하게 맞도록 준비시킵니다. 신약에서 그리스도 신자들은 성령의 성전이라고 불리니 우리는 자기 마음과 삶을 잘 지켜야 하는 문지기 소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 굳어진 마음과 잠드는 것 우리가 성실한 문지기가 되는 것을 막는 위험은 항상 존재합니다. 첫째, 제1독서에서 말한 대로 ‘굳어진 마음’입니다. “주님, 어찌하여 저희를 당신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저희 마음이 굳어져 당신을 경외할 줄 모르게 만드십니까?”(이사 63,17) 세월이 흐르면서 부르심의 첫 순간을 잊어버리고 시스템 안에서 체념하고 포기하며 마음은 돌처럼 굳어져 갑니다. 굳어진 마음은 예수님 신비와 진리에 마음을 여는 대신에 내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다시 평가하거나 새로운 통찰력을 받아들일 필요도 없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둘째 위험은 잠드는 것입니다. 수난 전에 예수님 입에서 “깨어 있으라”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마르코복음서 전체에서 예수님은 계속 제자들에게 눈을 뜨고 있으라고 가르쳤지만 제자들은 예수님 수난 현장에서도 깊이 잠들어 버립니다. 잠든다는 것은 주변과의 접촉을 서서히 상실하는 것,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는 외부 자극에 무감각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의식이 서서히 잠들게 하는 유혹은 도처에 많습니다. 거짓 뉴스와 정보, 과대광고, 행복과 번영, 성 공을 약속하는 세상적 가치. 잠든다는 것은 자기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풍족하다고 여기면서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은 존재인지 깨닫지 못합니다.(묵시 3,17) 또 잠든다는 것은 자기 은사와 은총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제2독서에서 코린토 공동체가 처음에 얼마나 은총과 은사가 충만한 공동체인지,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바치는 공동체인지를 보여 줍니다. 그 러나 코린토 전서 뒷내용은 개인이나 집단이 은사의 기원과 목적을 잊어버려 공동체 안에 파당과 분열이 형성된 것에 대해 바오로가 어떻게 신자들을 가르치는지를 보여 줍니다. 은사는 장식이나 자랑이 아니라 임무이자 책임입니다. ■ 대림 시기에 깨어 있기 깨어 있다는 것은 인내와 노력, 수고가 필요한 훈련입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그림자 같은 가난한 사람들, 그들의 말, 침묵과 무언의 질문에 깨어 있습니다. 이들은 세상에 대해서도 깨어 있습니다. 우리공동 가정인 지구, 특히 하느님의 나약한 창조물, 물과 공기에 깨어 있습니다. 또 자기 마음과 살아가는 현실의 작은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에 섬세하게 깨어 있습니다. 이렇게 깨어 있는 자세로 주님을 맞는 문지기는 행복합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임희숙(레지나)- [한주간 전례] 2020년 11월 30일 (월) [홍]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안드레아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베드로 사도의 동생이다. 갈릴래아의 벳사이다에서 태어난 그는 형과 함께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였다(마태 4,18 참조). 안드레아 사도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으나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형 베드로를 예수님께 이끌었다(요한 1,40-42 참조). 그리스 북부 지방에서 복음을 전파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복음묵상] 마태오 4,18-22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공관 복음은 공통적으로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첫 제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모두 갈릴래아 호수에서 일하던 어부였습니다. 고기를 잡던 어부는 이제 사람을 낚는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이와 함께 복음서는 그들이 지체 없이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들은 “나를 따라오너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곧바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첫 제자들의 모습은 말씀에 대한 응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제자들의 모습에서 오늘 독서의 표현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제자들의 응답은 믿음의 행위이고 그들의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행동으로 응답한 제자들도 아직 확고한 믿음을 지니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만 오해하기도 하고 가르침과 상반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은 예수님의 말씀에 한 번 응답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자주 그 말씀을 듣고 되새기며 그에 응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서 제자들의 믿음이 깊어지는 것처럼 우리도 꾸준히 그 말씀을 듣고 말씀에 응답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참된 신앙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12월 1일 (화) [자] 대림 제1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루카 10,21-24 예로부터 성군은 두 가지 중요한 직무를 수행해야 하였습니다. 첫째는 자기 백성을 원수들에게서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둘째는 백성을 정의롭게, 억눌리고 가난한 이들이 행복하고 만족할 수 있도록 공정하게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불충한 임금들 때문에 남북으로 갈라져 각각 아시리아와 바빌론에게 패망합니다. 이러한 시대적 환경에서 새로운 희망이 떠오릅니다. 특별히 구약의위대한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다윗 임금에게 내렸던 축복을 새로운 표현으로 언급합니다. 바로 ‘메시아사상’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는 메시아의 출현을 생생하게 표현하고자 나무의 표상을 사용합니다. 사실 햇순과 그루터기는 드문 표현인데, 아시리아와 페니키아 말로 ‘왕홀’을 뜻합니다. 새싹이라는 용어도 다윗의 아버지인 ‘이사이’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하여 그 나라의 왕권을 완성할 후손을 가리킵니다. 지혜와 슬기와 경륜은 다스림의 필수 요소이자 임금의 기본 자질로, 무엇보다 지혜는 하느님의 영에 결부됩니다. 용맹은 백성을 보호하는 평화의 군왕을 상기시키며, 지식과 주님을 경외함은 하느님에 대한 앎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대림 시기에 하느님 나라를 평화와 번영으로 이끄실 분을 기다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언자와 유다의 임금들이 간절히 원하였으나 그들에게는 감추셨던 최고의 특권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된 철부지라 면악하고 패덕하게 행동하기보다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을 가득 채울 주님에 대한 앎으로 응답해야 마땅하고 옳은 일일 것입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2020년 12월 2일 (수) [자] 대림 제1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5,29-37 ‘주님의 기도’는 기도하는 법을 알려 달라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이 기도를 바칠 때 먼저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청합니다 (루카 11장 참조). 그렇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대림 시기 동안 하느님 나라가 오기를 청하며 동시에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를 기다립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가 기대하는 미래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려 줍니다. 우선 이사야 예언자는 산 위에 마련된 기름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베푸시는 성대한 잔치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준비하신다고 선포합니다. 이사야는 그 나라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성대한 잔치가 열릴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물론 이 비범한 잔치를 베푸시는 분께서는 ‘만물의 주님’이시며 잔치는 ‘모든 민족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이 잔치에서 하느님께서는 마침내 죽음을 영원히 없애시고 당신 백성의 눈물을 닦아 내시어 구원을 이루실 분으로 제시되십니다. 이사야가 묘사한 하느님 나라에는 은총과 기쁨이 충만합니다. 다만 우리가 그 성대한 잔치에 앉기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하느님 나라의 성대한 잔치에 초대받았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에 희망을 간직하고 있지만, 이에 합당한 우리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이 이를 잘 설명합니다. 갈릴래아 호수로 가신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자리를 잡으십니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다리 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 못하는 이들을 데려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시고,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빵 일곱 개와 약간의 물고기로 굶주린 백성을 모두 배불리 먹이십니다. 하느님 나라가 오기를 청하며 예수님을 기다리는 일은, 주님과 함께 치유하고 용서하며 섬기는 일에 동참함으로써 완성됩니다. 우리 주변에 어려운 이웃들을 주님 앞에 데려오고 가진 것이 부족하더라도 함께 나누는 것이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해야 할 일입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2020년 12월 3일 (목) [백]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로마 보편 전례력에 따라 2018년부터 기념일로 변경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은 1506년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 하비에르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랑스 파리에서 공부하다가 만난 이냐시오 성인의 영향으로 수도 서원을 하였다. 1537년에 사제가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예수회의 첫 번째 회원으로 자선 사업에 헌신하였고, 인도와 일본에서 열정적인 선교로 많은 이를 교회로 이끌었다. 중국 선교를 위하여 중국으로 향하던 프란치스코하비에르는 1552년 12월 중국 땅이 바라보이는 상촨섬에서 선종하였다. 1662년에 시성된 그는 흔 히 바오로 사도에 버금가는 위대한 선교사로 불린다. 수많은 위험과 역경을 딛고 먼 거리를 다니며 선교에 헌신하였기 때문이다. 1927년 비오 11세 교황은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을 아기 예수의 데레사(소화 데레사) 성녀와 함께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하였다. [복음묵상] 마태오 7,21.24-27 ‘이사야의 묵시록’(24―27장 참조)으로 불리는 오늘 독서의 신탁은 온 세상을 대상으로 합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어 황폐하게 하시겠지만, 당신 왕권을 보존하시고 시온산에서 구원을 내리신다는 것이 주된 내용입니다. “우리에게는 견고한 성읍이 있네. 그분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려고, 성벽과 보루를 세우셨네.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가게, 너희는 성문을 열어라. 한결같은 심성을 지닌 그들에게, 당신께서 평화를, 평화를 베푸시니, 그들이 당신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날에 하느님의 정의가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하는 노래로서, 주님 백성의 앞날을 대비하시는 하느님의 이끄심으로 찾게 될 안녕과 보호를 기념하며, 신실한 예루살렘과 개혁된 유다를 마음속에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사야 예언자는 “영원한 반석”이신 주님을 길이길이 신뢰하라고 강조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살아야 할 삶의 대원칙인 ‘산상 설교’를 마무리하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실천을 강조하십니다. 끊임없는 선택의 기로에서 분명한 태도로 삶의 방식을 선택해야 하는 신앙인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가 되어야 합니다. 위로와 희망의 노래 속에서, 이사야 예언자와 시편 저자가 강조하는 주님께 대한 굳은 신뢰가 오히려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이유가여기에 있습니다. 모래처럼 쉽게 무너질 사람이나 제후들이 아니라 굳건한 반석이신 하느님을 마음과 목숨과 생각을 다하여 오롯이 신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2020년 12월 4일 (금) [자] 대림 제1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9,27-31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이사 1,1)는 하느님께서 불어넣어 주신 영감으로 현실을 보고, 하느님께서 명하신 대로 그 현실을 말하는 예언자였습니다. 어제 독서의 묵시록 부분(이사 24―27장)에 이어, 이사야 예언서 28―33장은 불행 선언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신탁입니다. 비록 “불행하여라.”(28,1)라는 저주로 시작되지만 구원에 관한 약속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런 가운데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는 하느님의 구원에 관한 약속을 세 단계로 묘사합니다. 먼저 레바논의 분명한 변화를 언급한 뒤, 사람의 시각과 청각에서도 변화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마지막 단계에서이사야는 악의 종말을 선언합니다. 이처럼 이사야가 이미 그날이 올 것이라고 말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서 당신께서 지니신 변화의 힘을 사람들이 과연 신뢰하는지를 확인하고자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자비를 베풀어 달라’ 하고 외친 눈먼 두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부르며 메시아이심을 고백한 눈먼 이들은 “예, 주님!”이라고 응답합니다. 그렇습니다. 치유의 기적에 꼭 필요한 것은 하느님과 그분의 힘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성탄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이 대림 시기에 “임마누엘”(마태 1,23)께 드릴 찬미는 눈먼 두 사람의 신앙 고백을 넘어 화답송의 시편과 같아야 합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2020년 12월 5일 (토) [자] 대림 제1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9,35─10,1.6-8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우리에게, 대림 시기 동안 굳건한 믿음과 함께 간직해야 할 덕목의 하나로 ‘희망’을 제시합니다. 그 희망은 정거장에서 다음에 올 버스를 막연히 기다리는 소극적 태도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구체적인 관계 안에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도록, 그분께서 바라시는 대로 준비하는 적극적인 자세의 희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기에 앞서 당신의 직무를 몸소 보여 주십니다.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치유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시는 결정적인 동기는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군중을 가여워 하는 마음이라고 강조하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복음 선포는 물론 병자를 치유하는 권한까지 주시면서 두 가지를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일꾼들을 청하고,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의 구절로 예수님의 이 지침을 이해하면 대림 시기를 지내는 적극적인 희망의 열쇠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른길이니 이리로 가거라.” 그렇습니다. 오실 분을 믿고 기다리는 적극적인 희망은 우리도 큰 사랑을 받았음을 깨닫게 하고, 이를 통하여 조건 없는 사랑을 베푸는 실천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성탄의 신비입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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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 한해는 코로나19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대림시기는 시작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불구하고 다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기쁜 마음으로 준비합니다. 성당의 미사도 어려운 상황으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모두들 건강 조심하시고, 대림을 맞으며 인내와 노력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합시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