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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0년 9월 6일 (일) [녹] 연중 제23주일

Berardus 2020. 9. 5. 06:44

    [금주의 말씀 묵상]

    2020년 6월 6일(일)
    (녹) 연중 제23주일

    제1독서 (에제 33,7-9) 제2독서 (로마 13,8-10) 복음 (마태 18,15-20)
    ‘용서’와 ‘교정’의 차이 공동체 삶과 불일치 하는 행실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공적으로 단죄하기보다 형제적 사랑으로 타일러야 사랑에 바탕을 둔 교정은 스스로 공동체로 돌아오게 해 하느님 뜻에 따른 형제적 교정에 대한 교회 책임 막중

        “아, 사람들로 붐비던 도성이 외로이 앉아 있다.”(애가 1,1) 코로나 제2차 대유행 시작이라는 뉴스를 들으면서 걱정스런 마음으로 연중 제23주일 말씀을 묵상합니다. 불가피하게 공동체와도 거리를 둔 시기에 모든 말씀의 주제가 공동체의 형제애적 교정이라 감사드립니다. 실천하기 쉽지 않은 주제입니다. 약 40년 전, 1982년 독일 성경학자 게르하르트 로핑크는 그의 저서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에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초대 교회에서 상호 충고가 교회 공동체 건설의 토대이자 신자 생활의 중요한 요소였는데 “오늘날 공동체에서 무슨 형제적 충고라고 할 만한 것이 아직도 이뤄지고 있기는 한가? 그렇지 못하다면 그 까닭은 무엇인가? 그 까닭은 하느님 앞에서 서로 소속된, 서로 책임 있는, 공통된 구원과 불행의 역사를 가진 공동체라는 의식이 아예 사라지고 말았기 때문은 아닐까?” ■ 복음의 맥락 오늘 복음은 마태오의 다섯 설교에서 네 번째 ‘공동체 설교’(마태 18,1-35)에 해당합니다. 마태오는 이 본문에서 위기에 빠진 형제들을 되찾는 규칙을 제공합니다. 당시 로마 제국은 부와 권력을 중시했고 작은 이들, 약한 이들에게는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율법 준수를 강조하는 회당에서도 그럴 여건과 능력이 없던 작은 이들은 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마태오는 공동체 신자들 일부가 당시 이런 사회의 기준을 공동체 안으로 들여오면서 작은 이들을 환대하고 격려하던 예수님에 대한 기억을 상실할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을 봤습니다. 지혜롭고 식별 있는 사목자, 교회 조직과 활동에 관심을 가졌던 마태오는 공동체 설교 한가운데에서 교회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사목적 방법으로 예수님이 가르치는 ‘형제애적 교정’과 ‘공동체기도’를 소개합니다.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은 악한 사람에게 말하지 않으면 죽음을 대가로 치를 것이라고 선포하는데 이는 복음 묵상에 빛을 비춰 줍니다. “네 형제가 너희에게 죄를 지으면?” 어떻게 할까요? 외면할까요? 소외시킬까요? 뒷담화를 하며 비난만 할까요? 여기서 ‘죄’는 한 사람에 대한 개인적인 모욕이 아니라 공동체 삶과 일치하지 않는 행실을 한 경우입니다. 모욕은 용서하지만 죄는 교정해야 합니다. 용서할 상황과 교정할 상황을 섬세하게 식별하는 것이 형제적 교정의 첫 단계입니다. 잘못한 형제(이하 자매도 포함되는 개념으로 사용)를 그냥 용서하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화해한다면 정말 그 형제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과거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죄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하는 심각한 죄와 관련된 것 같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런 죄들을 성령을 거스르는 행위, 육의 행실이라고 규정합니다.(갈라 5,19-21) 먼저 누가 공동체 삶과 일치하지 않은 행실을 한다면 그를 공동체 앞에서 공적으로 단죄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 싶은 유혹이 크겠지만 먼저 단 둘이 만나 그가 한 행동의 동기를 알아봐야 합니다. 이 순간은 그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돼야 할 모습을 보는 사랑의 시선을 품은 만남입니다. 마음속에 미움, 복수, 분노를 품고 만난다면 타이름은 분노의 투사가 되고 오히려 그 형제, 자매를 영영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단계의 사랑에 이르려면 인내와 기도 안에서 성령이 주시는 힘과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런 사랑에 바탕을 두고 주님의 자비와 온유함에 힘입어서 형제애적 교정을 실천한 본보기는 사도 바오로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로마 13,8) 이런 교정은 화해와 다릅니다. 관계가 악화되거나 멀어질 수도 있지만 주님의 자비 안에서 한 교정은 언젠가 그 형제가 스스로 공동체에 돌아오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온 마음을 다해 노력했는데도 결과를 얻지 못하면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고 가르치십니다. 이것은 재판에서 두세 사람을 증인으로 채택하는 규칙(신명 19,15)을 떠올리게 하는데, 마태오 공동체가 유다교 공동체와 많은 차이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교회에 알려서도 듣지 않는다면 이민족이나 세리처럼 대하라고 합니다. 공동체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대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외나 판단이 아니라 가슴이 아프지만 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극단적인 처방입니다. 그는 공동체에서 분리돼 자신을 동반하고 염려했던 공동체의 선익이 얼마나 큰 것인지,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제대로 볼 것입니다. 여기에서 마태오는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맡긴 매고 푸는 권한을 교회에까지 확장시킵니다. (마태 18,18-20) 교회는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가는 착한 목자의 표징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잃어버린 형제와 자매의 회개와 귀향의 은총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합니다. 또한 교회는 기도 안에서 인간적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 뜻에 따른 형제적 교정에 대한 자신의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끼게 되고, 시대와 문화 안에서 예수님의 형제애적 교정을 실천하는 식별력과 용기, 힘도 얻을 것입니다. ■ 잃어버린 양이자 착한 목자 세상 안에서 살면서 유혹이 얼마나 강한지,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체험하는 우리는 예수님이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목장으로 데려오는 일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압니다. 우리 자신이 예수님의 잃어버린 양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우리가 오늘날 길을 잃어버리고 오류에 빠진 형제와 자매에게 착한 목자가 돼 줄 수도 있습니다. ■ 하느님의 힘과 우리의 노력으로! 다시는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코로나19 시기에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이 우울, 고독, 질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경제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마태오 공동체에서 실천했던 것처럼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고 형제, 자매의 삶과 죽음의 선택이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책임 의식을 갖는 신자들과 세상의 고통을 품에 안는 교회 공동체의 형제애와 중재 기도는 오늘날 세상이 교회에 기대하는 연대와 희망, 세상을 비추는 빛의 표지가 될 것입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정녕 나는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리라.” (이사 43,19) -임숙희(레지나)- [한주간 전례] 2020년 9월 7일 (월) [녹]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루카 6,6-11 손을 움켜쥐었다 다시 펼쳐 봅니다. 몇 번이고 움켜쥐고 펼쳐 보고, 그러다 잠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손등을 찬찬히 살펴봅니다. “고생했다, 고생했다 ……. 지금껏 살아온 것만으로도 참 고생했다.”라며 스스로를 토닥여 봅니다. 얼마나 많이 쥐려고 애를 태웠을까요. 얼마나 내려놓으려 참고 또 참았을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더 이상 숨지 마라, 더 이상 기죽지 마라, 그리고 더 이상 너를 다그치지 마라. 그리고 또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얼마나 우리 자신을 인생의 중심에 선보인 적이 있을까 싶어요. 누구 의 아빠,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들 또는 딸로서 인생의 대부분을 그냥 그렇게 흘려보내고, 정작 무엇인가 움켜쥐었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한 허망한 손 하나만 남은 것은 아닐까요. 안식일에 합당한 일은 제 이름과 모습을 잃어버린 채 살아온 삶에 대한 보상입니다. 그 일은 우리 각자가 먼저 해 나가야 할 일이기도 하지요. ‘손을 뻗어야 하는 일’, 적어도 그 일을 먼저 하여야만 예수님께서 우리 삶 곳곳에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없애려 모여드는 이들은 여전히 손을 꼭 움켜쥡니다.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우기듯 손가락 마디마디에 힘을 줍니다. 그렇게 그들은 스스로를 잃어 갑니다. 무엇을 쥐고 있는지, 도대체 왜 쥐고 있는지 모른 채 그들은 하느님을 고백하며 하느님을 죽일 것입니다. 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며 말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9월 8일 (화)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성경에 동정 마리아의 탄생에 대한 내용은 없다. 그러나 초대 교회 때부터 성모 신심이 계속되면서 동방 교회에서 먼저 이 축일을 지내기 시작하였다. 로마 교회에서는 7세기 무렵부터 이 축일을 지내 오고 있는데, 예루살렘에 세워진 ‘마리아 성당’의 봉헌일(9월 8일)을 동정 마리아의 탄생 축일로 정한 것이다. [복음묵상] 마태오 1,1-16.18-23 대개 족보는 그 집안의 근본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기능을 합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아브라함과 다윗으로 이어지는 화려한 집안을 드러내는 듯하나, 동시에 이스라엘 역사와 사회 속에서 용인되기 어려운 다섯 여인(타마르, 라합, 룻, 밧세바, 마리아)을 등장시킴으로써 꽤 복잡하고 심오한 의미를 담아냅니다. 마태오 복음을 가리켜 ‘교회의 복음’이라고들 합니다. ‘교회’라는 용어를 유일하게 사용하는 복음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복합체’로서의 교회 공동체를 강조하기 때문이지요. 교회는 특정 기준에 부합하는 이들만의 고결한 모임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에 생채기를 낼지언정 함께하고자 하는 이들이 사랑으로 하나 된 공동체입니다. 그런 이유로 이스라엘 역사 속에 세상 기준으로는 어둡고 불결하다고 여긴 여인들이 족보에 등장한 것이지요. 더욱이 예수님마저 ‘처녀’의 몸을 통하여 탄생하셨다고 기술하고 있는 대목은 보란 듯 우리의 관습과 전통, 그리고 상식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혼인도 하지 않은 딸이 나가서 아이를 배어 들어오는 상황을 맞는 어머니의 마음은 어떨까요. 어쩌면 복음은 우리의 마음을 찢어 놓고 갈라 놓아 아픔마저 느끼지 못하게 하는 처절한 호소를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제아무리 법과 질서를 지키고 윤리적으로 흠이 없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초대와 호소는 얼마간 제 삶을 흔들어 놓고 뒤집어 놓는 데서 시작합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런 혼란 속에서 당신의 믿음을 지켜 내신 분이십니다. 그분에 대한 기억과 존경은 삶의 익숙함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신앙의 가장 위험한 요소는 ‘이만하면 되었다.’라는 안도감 속에 기생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늘 새로운 도전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9월 9일 (수) [녹]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루카 6,20-26 루카 복음에 나타나는 행복 선언은 마태오의 것과 달리 네 개로 요약되고, 네 개의 불행 선언이 곁들여집니다. 행복과 불행을 대립시켜 서로의 의미를 더욱 강하게 묘사하는 문학적 형식은 루카 복음의 전형적인 서술 방법이기도 하지요. 행복에 대한 수많은 담론 가운데 프랑스 리옹 국립 대학의 교수인 미셸 포쉐의 담론이 제게는 가장 깊은 울림을 줍니다. 그는 행복을 ‘회개’(또는 개종)의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회개’라는 말마디의 본디 뜻은 뉘우치고 돌아서는 것을 가리키는데, 반목하고 갈라진 것을 서로 이어 주는 것이 회개이고 개종이겠지요. 루카 복음에서 줄곧 강조하는 것도 바로 회개입니다. 사회적 통념으로 내쳐진 이들에게 굳이 더 가까이 다가가시는 예수님을 자주 묘사하고 그런 예수님을 못 마땅해 하는 이들, 곧 제 잇속을 챙기며 사회적 책임에 무감각한 이들을 고발하는 것이 루카 복음입니다. 오늘 복음을 다시 찬찬히 읽어 보기를 권합니다. 행복은 배고픈 이들에게 주어지고 불행은 이미 배부른 이들을 향하여 있습니다. 행복하려면 부족함을 되새기고 간직해야 합니다. 행복은 충족된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아쉬워서 무엇인가를 찾아 나서는 데서 가능합니다. 다만 그 아쉬움을 자신의 노력 부족이나 능력의 한계라는 순전히 개인적 책임으로 묻지 않고 서로에 대한 책임과 친교로 메꾸어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과 교회가 다른 것은, 행복을 어떻게 추구하느냐는 것입니다. 행복은 서로를 향한 회개여야 합니다. 행복은 개인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의 화해와 사랑의 열매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9월 10일 (목) [녹]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루카 6,27-38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어렵다고, 그래서 예수님 말씀을 실천하려면 상당한 노력과 깊은 신앙심이 있어야 한다고들 말하겠지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원수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우리는 복음 말씀의 실천이 어렵다고 합니다. 성급히 단정 지어 말하자면, 원수는 바로 우리 자신이 아닐까 합니다. 다른 이가 내뱉는 몇 마디로 원수라 규정하고, 이웃의 불편한 행동 몇 가지로 ‘웬수’를 만들어 버리는 우리의 옹졸함이 상상의 원수를 매일같이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막바지에서 원수를 사랑하는 이유를 이렇게 정리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원수를 사랑하겠다는 결기는, 우리가 때로는 타인을 너무나 차갑게 심판한다는 것을 전제하는데, 이를 기억해야 합니다. 서로 뜻이 다른 것을 두고 ‘틀렸다’ 말하고, 비판이라는 미명 아래 비난을 일삼고서, 그럼에도 나는 용서하고 사랑한다고 낯 뜨거운 언행을 밥 먹듯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우리가 원수마저 사랑하는 것은, 우리 존재의 목적과 이유를 위한 것이지 타인의 잘잘못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롭게 되는 것, 나의 용서로 나의 삶이 사랑으로 풍요로워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사랑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에게 애당초 원수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겠지요. 원수는 내 마음이 만든 우상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9월 11일 (금) [녹]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루카 6,39-42 초대 교회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설렘과 동시에 재림에 대한 갖가지 해석으로 몸살을 앓았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시간은 대개 두 가지 삶의 자세로 나뉘었습니다. 먼저, 제대로 살아야 예수님께서 얼른 오신다는 생각을 가지고 누구보다 잘 살고자 애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와 달리, 기다려도 예수님께서 안 오시니 신앙생활이 점점 나태해지고 세상 유혹에 쉽게 흔들리고 제 삶에 대한 각성 없이 흘러가듯 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심각한 문제는 나태하고 게으른 이들이 아니라, 더 열심히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있었습니다. 열심한 만큼 자신들의 엄격한 잣대로 나태하고 게으른 이들을 비난하기에 이르렀고, 그 비난은 공동체의 친교를 더욱 어렵게 만들어 버린 것이지요. 남의 눈의 티(본디 그리스 말은 ‘잔가지’를 가리킵니다.)를 빼내겠다는 호기가, 자잘한 잘못을 확대 해석하여 형제와 이웃을 마치 악마를 보듯 함부로 대하는 무기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잘못에 대한 훈계나 비난이 아닙니다.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함부로 대하는 ‘예의 없음’이나, 보수의 이름으로 인습이나 관행을 무작정 옹호하는 ‘어리석음’을 찬찬히 되짚어 보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우리는 형제고, 형제여야 합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아집이 우 리 눈을 멀게 하고 자꾸만 어두운 구덩이에 빠져들게 합니다. 우리 모두는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서로에 대한 인정 없이 제 목소리의 정당성만을 외치는 이의 ‘정의로움’은 참 애처롭고 서글픈 것이지요. 그냥 말없이 보듬어 줄 수 있는 따뜻한 손, 그것이 그렇게 어려울까요.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9월 12일 (토) [녹] 연중 제23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루카 6,43-49 무와 열매의 인과 관계는 배움이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당위를 환기합니다. 누구인가 그러더군요. 머리에서 발까지가 가장 긴 여행이라고요. ‘생각이 실제 움직임으로 곧장 이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가도 가만히 다시 생각해 보니, 무작정 실천하는 경솔함도 함께 고민해 보아야겠다 싶습니다. 나무가 열매를 맺고 배움이 실천으로 이어지는 것을, 모든 것이 가시적 성과를 내야 한다고 바꾸어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설익은 생각들이 부지런한 행동으로 이어질 때, 공동체는 온갖 구설수에 휘말리고 소모적 논쟁으로 몸살을 앓고는 합니다. 어쩌면 생각을 단단히 다지고 공고히 하는 숙성의 시간이 공동체에게는 필요할지 모를 일입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세상에 앞장서 저 멀리 ‘장밋빛 인생’을 제안하는 힐링 센터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이 치고 나가며 흩어 놓은 수많은 아픔과 슬픔을 사유하고 보듬는, 그래서 비가 온 뒤 적셔진 대지가 더욱 단단히 굳어지듯, 세상의 어설픔과 경솔함으로 갈라진 틈을 단단히 메꾸어 나가는 일이 그 리스도교 공동체의 일이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반석’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이해하는 데 꽤 멋진 비유입니다. 우리의 행실로 맺은 열매는 반석처럼 굳건해야 하고, 우리의 생각을 드러내는 실천은 우리 삶처럼 단단해야 합니다. 이리저리 쓸려 다니고 흔들릴 바에야 세상의 논리에 내맡기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오히려 솔직한 모습이겠지요. 지난 시간을 다시 반추해 봅니다. 그리고 작은 것 하나라도 제대로 굳건히 다시 세워 보아야겠습니다. 잘하려 들기보다는 똑바로 할 수 있도록 지금의 생각부터 차근차근 다듬어 보아야겠습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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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풍이 연이어서 온다는 소식입니다. 코로나19의 기세도 계속 이어지고, 여러 가지 사회적인 혼란까지 겹쳐 몸과 마음이 힘든 한주간 이였습니다. 시련이 있음은 우리에게 이겨 낼 힘도 주어진다고 합니다. 이번 한주간도 주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길 기도드립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