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말씀 묵상]
2020년 6월 21일 (일)
[녹] 연중 제12주일 제1독서 (예레 20,10-13)
제2독서 (로마 5,12-15)
복음 (마태 10,26-33)
선교로써 천국 잔치를 선물합시다
교회는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고 살아내는 곳으로서
하느님께는 모두가 소중하다는 진리 세상에 전해야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신 교회의 마음은 주님과 같아야
주님께서 원하시는 교회 모습은 기쁨의 잔치가 벌어지는 것
어느새 유월도 막바지,
달라붙는 더위에 선풍기를 켰습니다.
그러다 지난 봄,
길에서 본 현수막 문구가 떠올랐습니다.
“몸은 멀어져도 마음은 가까이 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한 가장 큰 피해는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서 찬란한 봄을 앗아간 것이라 싶었습니다.
막막했고 기막힌 상황을 겪어야 했던 세상이 안타까웠습니다.
하지만 이내 이런 생각이
참으로 짧고 어리석은 것임을 깨달았지요.
그 때, 주님께서는 여전히 나무눈을 틔워 새싹을 돋워주셨고
고운 봄꽃들로 세상을 치장해주셨으니 말입니다.
늘 그러하듯 약속에 충실하신 주님의 은혜는
언제나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흥건하여
이 세상이 유지되도록 열심히 일하고 계시니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저 그런 주일로 여겨지던
연중 시기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물론 대축일의 의미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진중하고 깊으며
그 은혜 또한 으뜸일 터이지만 대축일이 아닌 연중 주일이라 해서
땅의 감사와 찬미가 줄어들 수는 없다는 걸 깨달았달까요?
그저 그런 우리의 매일에 온 힘을 쏟아 꾸려주고 계신
주님의 수고에 온 마음으로 화답해드리는 게 마땅하다는 걸 느꼈달까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오늘,
예수님께서 꿈꾸시는
교회의 모습을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교회를 세우신 예수님께서 정말로
양보할 수 없는 것으로 꼽으실 일들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과연 우리가 빚어내고 있는 교회 모습이
주님 보시기에 어떠할지 살피고 싶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복장 터지고
열 받는 상황을 숱하게 만나게 되는데요.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하는 신약에서는
그런 감정이 더 북받칩니다.
시도 때도 없이 이어지는 그들의 수군거림,
소위 존경받던 종교인들마저 오직 주님의 말씀에
시비를 걸려고 모략을 펼치기 일쑤이니 그렇지요.
그 때문일까요? 오늘 말씀은 주님께서 오직
제자들만 있는 자리에서
들려주셨다는 사실이 마음에 듭니다.
적어도 불필요한 감정싸움은 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요.
오늘 복음말씀의 요지는 분명합니다.
하느님께 우리 모두는 너무나 소중한 존재라는 것,
이 사실을 아직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진리를 전하라는 것이 전부입니다.
솔직히 이러한 주님의 뜻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없을 줄 압니다.
우리는 모두 교회이신 주님의 뜻을
분명히 파악하고 살아가니까요.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로 선택된 사실마저
전혀 자랑할 것 없는 하느님의 은혜에
따른 것임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니까요.
이리 살피니 죄인과 세리들과 몸소
‘함께’ 하심으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하신
예수님과 한참 동떨어진 것을 깨닫게 됩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우리의 생각과 말이
정말 예수님을 닮아있는지…, 고민됩니다.
주님께서 원하신 교회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 것과 잘라내야 할 것을 꼽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는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쓸데없는 벽을 부수기 위함이었습니다.
인간이 만든 조직에 갇혀 신음하는
당신의 나라를 풀어 해방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복음을 살기 위해서 고민합니다.
더더욱 사제는 예수님께서 계획하신
교회의 모습을 갖추려 고심합니다.
주님의 ‘교회’가 주님의 교회다울 수 있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숙고하며 지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계획을 밀어 놓은 채
교회의 ‘운영’에만 마음이 쏠렸던 적이 허다합니다.
주님의 뜻은 뒷전에 두고 눈에 보이는 것만
정리 정돈하느라 열을 냈던 셈입니다.
이야말로 주님께서 선물하신 천국의 기쁨을
치워버리는 못된 짓이니, 마음이 얼얼합니다.
교회는 하느님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며
예수님을 배우는 곳은 더욱 아닌데 말입니다.
오롯이 사랑밖에 모르는 하느님의 마음을 전하고
그 사랑을 살아내는 곳이 되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어쩌면 무수한 계획에 함몰하여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향기’를 지워버리고
‘사람 냄새’만 풍겨댔던 것이라 싶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가로막은 채 사랑도 온유도 희생도
봉사도 입으로 가르치려고만 들었던 것입니다.
절로 가슴을 내리쳤습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을 머릿돌로 삼아
세상에 없던 새로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희생을 통해서
몸소 세상의 교회가 되셨습니다.
교회의 주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고백하는 교회이기에
교회의 마음은 주님과 동일해야 옳습니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잃은 양의 비유,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
그리고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세상을 사랑하시고
죄인을 귀하게 여기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누누이 알려주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은
언제나 ‘잔치’가 벌어지는
기쁜 곳이 되어야한다는 말씀이라 듣습니다.
나아가 교회인 우리의 삶도
늘 천국을 맛보는 기쁨으로 채우라는 당부라 믿습니다.
당신의 교회인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당신의 심정을 온전히 살아낼 때에
천국에서는 기쁨의 잔치가 벌어진다는 고백이라 새깁니다.
연중 제12주일입니다.
대축일이 아니라서 그저 그런 주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간을 완전하게 하시려,
최선을 다해서 우주를 꾸리고 계십니다.
그 은혜로 우리는 숨 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해주신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으니
이제 지난 시간에 마음을
묶어두는 어리석음을 털어냅시다.
아직 오지도 않은 내일을 계획한답시고
오늘을 팽개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합시다.
주님을 닮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한 마음이 제일 소중합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감사드리는 것으로
예수님처럼 하늘에 기쁨을 선물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메시지를 “지붕 위에서 선포”함으로
하늘에 기쁨의 잔치를 선물해드리는 저와 여러분이기를 소원합니다.
-장재봉 신부-
▲전주 완주군소재 되재성당
[한주간 전례]
2020년 6월 22(월) [녹]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7,1-5
신학생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이 있습니다.
‘형제는 나의 거울이다.’
하루를 살면서 거울을 몇 번이나 볼까요?
아침에 일어나서 한 번,
외출하기 전에 한 번,
중요한 사람을 만나러 갈 때 한 번 등
시도 때도 없이 보는 것이 거울입니다.
만일 이 세상에 거울이 없다면 어떨까요?
자기가 더러운지 그렇지 않은지,
깔끔하게 옷을 잘 입었는지
아무 맵시 없게 옷을 입었는지
가늠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자기 외모에 대해서 누군가가
세심하게 알려 주거나 관리해 주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내 옆에 있는 형제는 또 하나의 거울입니다.
형제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 형제 안에 담겨 있는
‘나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듯이,
형제의 단점과 잘못된 점을 볼 때마다
그 형제의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과 처지를 헤아리며
‘나’에게도 그러한 면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실제로 신학생 때
공동생활을 하면서
‘형제는 나의 거울이다.’라는 말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모이다 보니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고,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행동을 하는 형제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거울로 삼으려고 노력하다 보니
‘나는 너와 달라.’라는 생각보다
‘나와 너는 크게 다르지 않아.’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들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거울이 없으면
외모를 가꾸기가 어렵듯이
형제와 더불어 살지 않으면
자신의 내면을 가꿀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마음에 들든
그렇지 않든 우리와 함께하는 형제들은
하느님께서 우리가 내적으로 정화되고
성장하도록 보내 주신 고귀한 선물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6월 23일 (화) [녹]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7,6.12-14
10년 전쯤에
칠레에서 광산이 무너진 일이 있었습니다.
33명의 광부가 지하 700미터에 있는
약 15평의 대피소에 갇혔는데,
남은 식량은 열 명이
이틀 먹으면 없어질 분량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69일 만에
33명의 광부가 모두 무사히 빠져나왔습니다.
살아난 광부들은
이 기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저마다 자기 나름대로
살아 보려고 시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면서
마지막으로 기댄 것은 서로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자기만 배고픈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배고프고,
자기만 두려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두렵고,
자기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고통스럽다는 의식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하여 연장자는 연륜으로,
유머가 있는 사람들은 웃음으로 서로를 격려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33명 모두가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이 세상은 어쩌면 15평 남짓의
대피소와 같은지도 모릅니다.
저마다 어려움과 두려움과 걱정 속에서 살아갑니다.
또 모두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지녔습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나’만 살아 보겠다며
자신에게만 시선을 둔다면, 그
것은 다른 사람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죽이는 행위가 되고 맙니다.
‘내’가 어렵고, 두렵고, 걱정되는 만큼
다른 사람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 사람을 대하는 것,
그것이 모두를 살리는 길입니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이 좁고,
그 길이 비좁은 이유는 많은 사람이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길은
타인을 향하여 마음을 건네는 길입니다.
그런 길이야말로 거룩하고 진주처럼 고귀합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6월 24일 (수) [백]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세례자 요한은
사제였던 즈카르야와 성모님의
친척인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났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마태 11,11).
예수님의 이 말씀처럼, 세례자 요한은
주님에 앞서서 그분의 길을 닦은,
구약과 신약을 이어 주는 위대한 예언자이다.
그는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라고
고백하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 임금의
비윤리적 생활을 책망하다가
헤로데의 아내의 간계로 순교하였다.
그는 ‘말씀’이신 주님의 길을 준비한 ‘광야의 소리’였다.
[복음묵상] 루카 1,57-66.80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아기의 이름을 즈카르야가 아니라 요한이라고 짓습니다.
아이의 이름을 즈카르야라고 부른다면
당시 관례를 따르는 것입니다.
반면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부른다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즈카르야의 이름으로 산다는 것은
아버지처럼 사제가 되어
명망을 얻고 존경받으며
안정된 삶을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반면 요한의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예언자가 되어 명망과 존경보다는 박해를 받고,
기득권의 삶보다는 광야에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엘리사벳과 즈카르야는 이 두 가지
갈림길에서 주님의 뜻을 따르고 있습니다.
배 한 척이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바다를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선장이 갑판 위에서 보니
어떤 불빛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장은 확성기에 대고 외쳤습니다.
“여보시오. 남쪽으로 10도를 회전하시오.”
그러자 저쪽에서 즉각 반응이 왔습니다.
“그 배가 북쪽으로 10도를 회전하시오.”
선장이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외쳤습니다.
“이 배는 거대한 함정이란 말이요.
그쪽이 움직이시오.” 그러자 상대편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쪽이 움직여야만 하오. 이곳은 섬이고 나는 등대지기요!”
섬은 움직일 수 없습니다.
배가 움직여야만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도 그러합니다.
우리의 뜻대로 하느님께서 움직이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에 맞게 우리가 움직여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하느님께서 움직여 주시기만을 바라고 있지는 않은지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움직인 즈카르야는
혀가 풀려 찬양의 노래를 부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순종할 때
우리 삶 또한 찬양이 될 것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6월 25일 (목) [백]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 남북통일 기원 미사
민족 분단의 아픔을 안고 사는 한국 교회는,
1965년부터 해마다 6월 25일에 가까운 주일을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로 정하였다.
1992년에는 그 명칭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바꾸었고,
2005년부터 이날을 6월 25일이나 그 전 주일에 지내다가,
2017년부터는 6월 25일에 거행하기로 하였다.
한국 교회는 남북한의 진정한 평화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며 노력하고 있다.
[복음묵상] 마태오 18,19ㄴ-22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들에게
가장 바라시는 것 가운데
하나가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는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을 두고
좋지 않다 여기신 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공동체를
이루며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마음을 모아”라는 표현은
그리스 말 ‘심포네오’를 번역한 것입니다.
‘심포네오’라는 단어에서 ‘교향곡’을 뜻하는
영어 ‘심포니’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따라서 마음을 모아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은
하나의 멋진 교향곡을 연주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향곡이란 저마다 다른 악기들이
서로 다른 음을 연주하면서
하나의 곡을 탄생시키는 것입니다.
공동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고유한 모습을 간직하면서도
그것이 불협화음이 아닌 조화와
어울림의 소리를 내는 것이 공동체입니다.
성공적인 교향곡을
연주하려면 두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지휘자입니다.
지휘자가 없는 교향악단은 없으며,
단원들이 지휘자의 손길을 얼마나
잘 따라가느냐에 따라
훌륭한 음악이 만들어집니다.
둘째는 단원들이 서로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자기 소리만 멋지게 내는 것은
합주가 아니라 독주일 뿐입니다.
다른 악기의 소리에 맞추어
소리의 크기를 조절하거나 박자를 맞추어야 합니다.
다른 단원들의 소리를 듣지 않는다면
아름다운 곡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마음을 모아
하느님께 청한다.’라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탁월한 지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끄심에 따라 기도하고,
함께하는 이들의 마음을 읽으며 청해야 합니다.
그러한 기도야말로 정말 멋진 교향곡처럼 아름다울 것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6월 26일 (금) [녹]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8,1-4
오늘 복음에서
나병 환자와 예수님의 대화가 인상적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과연 예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은 왜
여전히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일까요?
왜 우리 삶은 아쉽고 부족한 것이 많을까요?
그분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다 채워 주실 텐데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소원을
예수님께서 들어주시느냐,
그렇지 않으시냐는
사실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분과 우리의 관계가
가까워지느냐, 그렇지 않으냐입니다.
단순히 소원을
들어주는 것만으로 우리가 만족한다면,
그분께서는 그냥 기도를 들어주는 기계나
부적에 지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이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당신과 가까워지고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어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단순히 소원을 들어주시는 것에
우리는 만족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분께서는 만족하지 못하십니다.
부모와 자녀들만 보아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부모가 자녀에게 생일 선물을 주고,
용돈을 주는 것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녀 가 그런 부모님의 마음을 모른 채
선물이나 용돈에만 관심을 둔다면,
그 자녀는 아직 부모님의 마음을
모르는 철없는 자식일 것입니다.
어느 책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단순히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시라,
우리의 소원을 정화시켜 주시는 분이시다.”
그렇습니다. 소원을 빌고
그에 대한 응답을 바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소원을 들어주시는 바로 그분과의 관계에 더 충실합시다.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6월 27일 (토 [녹]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8,5-17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어떤 면을 보고 그를 칭찬하셨을까요? 백
인대장이 예수님께 건넨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여기서 “상관 밑에 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직역하면 ‘권위 아래에 있는 사람’입니다.
백인대장은 로마 황제의 권위 아래에 있는 사람이었기에
군사들은 백인대장의 말에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명령은 곧 로마 황제의
권위를 받아서 내리는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병마에게 명령을 내리신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권위를 받아서 내리시는 것이기에
병마까지도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컨대 백인대장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권위 아래에 계신 분’으로 고백하였기에
칭찬을 받은 것입니다.
정녕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권위 아래에 계셨기에,
그분의 가르침에는 권위가 있었고,
마귀들도 그분 말씀에 복종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하느님의 권위 아래에 있다는 말에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철저히
순종하셨다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순종하지 않았다면 하느님의
권위 위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권위
아래에 머무르기를 바라셨기에
만나는 병자마다 기꺼이 그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사실 병자들을 고칠수록
유다인 지도자들에게 증오를 사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분께서는 온갖 위험을 감수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시는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고,
그 결과 증오에 가득 찬 지도자들에 의하여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치시게 됩니다.
이사야의 말대로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시면서
하느님의 권위 아래에서 순종하신 것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
요즘은 모든 것이
코로나19에 뭍여 다른 것은
생각할 여유가 없는 듯합니다.
거리에는 대부분
마스크로 착용하고 있으며
건물입구나 엘리베이트에서는
마스크착용하지 않으면
들어오거나 탈 수 없다는 문구가 부착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작은 일상의 기쁨을 찾을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겠습니다.
-Berardu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