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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0년 6월 14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Berardus 2020. 6. 13. 07:14

    [금주의 말씀 묵상]


    2020년 6월 14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제1독서(신명 8,2-3. 14ㄴ-16ㄱ) 제2독서(1코린 10,16-17) 복음(요한 6,51-58)
    기억과 감사, 친교를 실천하기 참된 양식이자 참된 음료 주시는 ‘성체성사’는 교회의 중심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하신 말씀처럼 성체성사 동참하며 하느님과 친교 나누고 닮아갈 수 있어 하느님 닮은 자녀의 모습으로 계명 실천하며 복음 전해야


      “너희는 맛보고 눈여겨보아라,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시편 34,9) 오래 전에 루르드 성지 한 가운데에 있는 천막 성당에서 성체 조배를 할 때 한 체험이 지금 떠오릅니다. 임종을 앞둔 어느 수녀님이 병원 침대에 실려 천막 안에 들어왔습니다. 제대 위에 모셔진 성체를 한참 바라보는 수녀님 얼굴이 일순간 환하게 빛났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 백성 안에서 경배하며 보낸 그분의 한 생애가 일순간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그 수녀님은 받은 모든 선물에 대해 감사와 경배를 드리는 듯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로 성체 단식을 한 후에 맞은 성체 성혈 대축일은 저에게 성체성사의 의미에 대해 깊이 성찰하도록 초대합니다. 오늘 복음은 제1독서와 제2독서의 빛에 비춰 성찰할 수 있습니다. 1. 하느님을 기억하고 감사하라 제1독서는 모세가 요르단강을 건너기 전에 모압 평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설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신명기 8장 1절에 제1독서 주제가 함축돼 있습니다. “너희는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모든 계명을 명심하여 실천하여라. 그러면 너희가 살 수 있고 번성할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경외에 바탕을 두고 그분 계명을 실천하며 사는 의로운 삶, 그 결과의 가시적인 표징인 하느님의 축복 받는 삶은 구약에서 말하는 지혜로운 인생의 핵심입니다. ‘너희’, ‘오늘’이라는 말은 모세의 이 가르침이 모세 시대 이스라엘인만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 21세기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임을 보여 줍니다. 이어서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광야에서 만나가 상징하는 하느님 섭리로, 주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던 시절, 광야 체험을 ‘기억하도록’, 종살이에서 이끌어주신 하느님을 “잊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께서 해 주신 일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 103,2) 하느님이 내 삶에서 일하신 것에 대한 기억에서 찬미가 흘러나옵니다. 구약에서 찬미는 감사라는 개념과 유사합니다. ‘성체성사’(eucharistia)는 그리스어 ‘감사’라는 말에서 유래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사는 그리스도인은 피조물에게 영감과 활기를 불어넣어 창조주를 향해 ‘감사’의 노래가 터져나오게 하는 사람입니다. 2. 그리스도의 몸과 친교와 일치를 나누라 성체성사는 초대 교회의 중심이었고(사도 2,42) 세상 끝 날까지 그러할 것입니다. 바오로는 갓 태어난 코린토 교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여러 곳에서 공동체의 성장을 바라는 사목자의 마음으로 성체성사의 의미에 대해 가르칩니다. 아마도 코린토라는 지역이 아프로디테 여신을 비롯해 고대 여러 동양 종교가 혼재하던 곳이라 신자들이 이교 예식을 매일 주변에서 목격하고 참여하기도 하면서 주님의 만찬을 이교 예식과 다를 바 없이 여기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먼저 바오로는 오늘 제1독서에서 성체성사의 필수적인 전제이자 결과인 그리스도와의 일치와 친교에 대해 가르칩니다. 성체성사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동참하는’ 것, 곧 그리스도와 친교를 나누는 것, 나아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로서 일치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또한 성체성사 전에 양심성찰을 하라고 권고하기도 합니다. 빵의 형상 안에 실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강조하면서 그것을 불신하는 사람에게는 무서운 결과가 닥쳐올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합니다. “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1코린 11,29) 3. 가서 복음을 실천하라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다른 복음서 저자들처럼 성체성사 제정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지만 성체성사의 신비를 명시적으로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의 빵이며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분이 주시는 빵은 물질적인 빵이 아니라 당신의 ‘살’(사륵스(sarx))입니다. 성경 용어에서 ‘살’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말씀이 사람(살)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요한 1,14) 예수님의 살은 은유가 아니라 실 제로 십자가 위에서 그분이 우리를 위해 주신 몸입니다. 예수님은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그분의 십자가를 암시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그분 몸을 주시고 그분 피를 쏟을 것입니다. 피와 물이 예수님 옆구리에서 흘러나올 때 그분 신부인 교회가 탄생합니다. 예수님은 또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분의 살, 참된 빵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시면서 그분을 닮아가는 사람은 하느님이 주시는 최상의 선물, 하느님과의 친교를 선물로 받습니다. 바오로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갈라 2,20)라고 한 고백은 요한이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라고 한 말과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을 닮은 모습, 그분 자녀의 모습으로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미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한스 스콧) 오늘도 미사에서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교회와 신자들은 예수님이 처음에 당신 몸을 선물로 주시면서 원하신 대로 세상에 생명을 전달할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특히 세상 안에 하느님을 모셔갈 수 있는 식별의 지혜를 청합니다. “식별은 인간의 모든 생각과 모든 사고를 검토합니다. 악한 모든 것과 하느님이 기뻐하지 않은 모든 것을 찾아내어 흩어버립니다. 그런 방식으로 인간을 보호합니다.”(요한 카시아노) 하느님이 없다면 이 세상의 문화와 정치, 과학, 경제, 사회는 신적 영감이 결여된 세계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 가서 복음을 실천하십시오.” 아멘! -임숙희(레지나) 엔아르케성경삶연구소 소장- ▲경기도 용문산자락 아침풍경 [한주간 전례] 2020년 6월 15(월) [녹]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5,38-42 어느 동네에 사이가 좋지 않은 이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중 한 사람이 마술 램프를 발견하였습니다. 그가 램프를 문지르자 그 안에서 요정이 나타났습니다. 요정은 그를 주인이라 부르며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주인님께서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세 가지 소원만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 그 소원이 이루어지면 주인님께서 가장 미워하는 사람은 그것의 두 배를 누리게 됩니다.” 램프의 주인은 요정에게 궁전만 한 집 한 채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정말 으리으리한 집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웃집에서 갑자기 집이 두 채가 생겼다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램프 주인은 요정에게 두 번째 소원을 빌었습니다. “나는 저놈과 더 이상 마주치고 싶지 않아. 외국으로 이민을 갈 수 있게 나에게 100억만 보내다오.” 요정은 이 소원도 들어주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웃집에는 200억이 생겼습니다. 배 아픈 주인은 마지막 소원을 빌었습니다. 그것은 불행히도 자기 한쪽 눈을 잃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원수 같은 이웃이 양쪽 눈을 잃게 하려고 그런 것입니다. 다소 유치한 예화일 수 있지만, 어쩌면 우리의 삶에서 이렇게 유치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미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상대방의 불행을 꿈꾸다가 자신마저 불행해져 버리는 어리석음에 빠지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고 가르치신 것은 아무리 불의를 저지르는 악인일지라도 그의 불행을 바라지 말고 그를 끝까지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대하라는 의미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6월 16일 (화) [녹]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5,43-48 어떤 사람이 가시가 잔뜩 나 있는 나뭇가지를 손에 꽉 쥐고 있으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 지금 손이 너무 아파.” 가시나무를 손에서 놓으면 그만일 텐데, 그 사람은 아프면 아플수록 더 힘을 주어 그 나뭇가지를 손에 꽉 쥡니다. 이 사람이 아픈 이유는 가시나무 때문일까요, 가시나무를 쥐고 있기 때문일까요? ‘네가 어떻게 나에게 그런 모진 말을 할 수 있지?’, ‘네가 내 돈을 그렇게 떼먹다니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살다 보면 이런 생각들에 사로잡혀 마음에 큰 멍이 생긴 것처럼 아픔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심지어 이런 마음의 병이 몸에도 영향을 주어 몸이 망가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상처가 되었던 그 사건은 이미 지난 일입니다. 또 우리에게 상처를 주었던 원수 같은 그 사람은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여 우리가 아픈 이유는 그 사람이나 그 사건 때문이 아니라, 그 기억을 붙잡고 있는 우리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견물생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물건을 보면 그것을 가지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좀 더 폭넓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원수의 모진 말에만 시선을 두면 아픈 마음이 생기고, 원수의 단점에만 시선을 두면 증오심이 생깁니다. 또 상처가 된 사건들만 바라보면 우울한 마음이 생기는 법입니다. 반면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건네주었던 격려를 떠올리면 용기가 생기고, 미운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의 장점에 시선을 두면 존경심이 생깁니다. 또 우리 삶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바라보면 마음속에 감사함이 넘쳐흐릅니다. 요컨대 원수를 사랑하려면 나의 시선을 달리해야 합니다. 가시나무를 당장 손에서 놓는다고 아픔이 곧바로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상처를 낫게 하는 첫걸음입니다. 그 첫발을 떼고 인내하십시오. 그러다 보면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길 것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6월 17일 (수) [녹]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6,1-6.16-18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이러한 일이 가능할까요? 어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를 수가 있을까요? 도벽이 있는 사람은 물건을 훔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자기도 모르는 새에’ 다른 사람의 것을 가져가 버리기 마련입니다. 어떤 행동이 반복되다 보면, 그것이 습관으로 이어져 특별히 의식하지 않고도 그 행동을 하게 되니,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는 좋은 행동을 하는 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날마다 미사에 참례하러 성당 가는 길에 묵주 기도를 바치는 사람은 집 대문을 나서면서 자연스럽게 묵주를 꺼내 듭니다. 주변을 깨끗이 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은 설거지할 그릇이 눈에 보이면 고무장갑에 손이 갑니다. 이외에도 어려운 이를 보면 도와주는 일, 슬픔에 잠겨 있는 이에게 위로를 건네는 일, 외로운 이들에게 찾아가는 일 등 오랫동안 몸에 배어서 왼손도 모르게 하는 오른손의 일이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런데 왼손도 모르게 오른손이 베푸는 자선이 존재한다면, 그러한 자선을 베푸는 이들을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실제 우리 사회에는 남모르게 자선을 베푸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코로나19 사태에 대구 어느 시장의 청년 상인들은 의료진에게 200인분의 도시락과 커피를 전달했다고 합니다. 어느 도시에서는 소외 계층이 따뜻하게 겨울을 날 수 있도록 9년째 선행을 이어 오는 익명의 기부 천사가 있다고 합니다. 산골짜기 은둔 장소에서 세상에서 가장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을 위하여 날마다 기도하는 봉쇄 수도자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예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처럼, 누군가를 위하여 사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려고 다짐하고 몸에 배도록 노력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6월 18일 (목) [녹]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6,7-15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주님의 기도’를 바칩니다. 기도 앞부분은 아버지 하느님과 관련된 청원이고, 뒷부분은 우리의 삶과 관련된 청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기도문에 나오는 청원이 모두 합하여 일곱 가지인 것은 우리에게 묵상할 점을 던져 줍니다. 숫자 7은 성경 안에서 충만함 또는 완전함을 상징합니다. 이는 우리가 주님께 바라는 모든 청원은 사실 주님의 기도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주님의 기도를 가르치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가 하느님께 바라는 것들을 주님의 기도에 비추어 되새겨 본다면, 그 바람이 합당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 하느님과 관련된 청원이 우리의 삶과 관련된 청원보다 앞서 있다는 점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살면서 먹고사는 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에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다는 점을 알려 주십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나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고,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 먹고사는 문제보다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성경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1-33ㄱ). 주님의 기도에 비추어 보며 정녕 우리가 바라는 것들이 얼마나 합당한지를 생각해 봅시다.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6월 19일 (금) [백]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은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날이다. 이 대축일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음 금요일에 지내는데, 예수 성심이 성체성사와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이다. 예수 성심에 대한 공경은 중세 때부터 시작하여 점차 퍼지면서 보편화되었다. 1856년 비오 9세 교황 때 교회의 전례력에 도입되었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권고에 따라, 1995년부터 해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에 ‘사제 성화의 날’을 지내고 있다. 이날은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의 직무를 더욱 훌륭히 수행하는 가운데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날이다. 또한 교회의 모든 사람이 사제직의 존귀함을 깨닫고 사제들의 성화를 위하여 기도와 희생을 바치는 날이기도 하다. [복음묵상] 마태오 11,25-30 신학교에서 사제가 되기를 꿈꾸는 학생들을 양성하면서 답답할 때가 가끔 있습니다. 그런데 수도원에서 양성을 담당하는 수녀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분들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또 자녀를 둔 부모들은 철없는 자식들 때문에 한숨을 쉬기도 합니다. 본디 가르치고 기르는 처지에서는 배우는 이들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법이겠지요. 그래서 학생들이 스스로 깨치고 성숙해질 때까지 좀 더 기다려 주려고 애를 씁니다. 열두 제자들과 함께 지내셨던 예수님께서도 크게 다르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그분께서도 제자들을 ‘철부지’라고 부르고 계시니 말입니다. 사실 복음서에는 제자들의 철없는 모습이 자주 나옵니다. 마귀를 쫓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믿음이 부족하여 악령에 시달리는 아이를 구하지 못합니다. 제자들 사이에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를 두고 논쟁을 하는가 하면, 야고보와 요한은 출세할 생각에 예수님께 영광의 자리 옆에 있게 해 달라고 청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런 철부지 제자들을 두고 오늘 예수님께서 보이신 모습은 놀랍습니다. 한탄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고 계시니 말입니다. 왜 그러실까요? 지혜롭다는 자들,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인간적인 지혜는 오히려 장애가 될 뿐입니다. 비록 철없고 부족하지만 연약한 모습 그대로 하느님 앞에 자신을 드러낼 때 그분의 권능이 그 사람 안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는 정녕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 (2코린 12,9)해야 할 철부지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6월 20일 (토) [백]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성모 성심에 대한 공경은 17세기 프랑스 노르망디 출신의 요한 외드 성인의 노력 등으로 점점 보편화되었다. 성모 성심에 대한 신심은 예수 성심을 공경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이 신심은 별도로 날을 잡아 기념하던 19세기 전까지는 예수 성심 미사에서 기억하는 형태로 전례 안에 들어왔다. 1942년 비오 12세 교황은 성모님의 파티마 발현 25주년을 맞아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께 세상을 봉헌하고, 이 기념일을 온 교회가 지내도록 하였다. 처음에는 8월 22일이었으나 1996년부터 예수 성심 대축일의 다음 날로 옮겨 지내고 있다. [복음묵상] 루카 2,41-51 사제품을 받고 나니 제 어머니의 귀가 세 배는 커지신 것 같고, 아버지의 시력도 두 배는 좋아지신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제가 본당에서 어떤 강론을 하였으며 요즘에는 무슨 일로 바쁜지,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았는지 속속들이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또 아들 신부에게 누가 될까 봐 행동과 말도 늘 조심하십니다. 한번은 수도자나 성직자들이 주로 바치는 성무일도를 어떻게 바치는지를 물어보기도 하셨습니다. 제가 부르심을 받아 사제가 된 것이지만 부모님도 덩달아 그 삶의 일부를 떠안고 계시는 듯합니다. 사제의 부모가 살아가야 하는 이러한 숙명과도 같은 삶을 생각해 보면, 왜 교회가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날 성모님을 기억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 역시 예수님의 구원 사업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시고 예수님의 길에 함께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이런 성모님의 생애를 상징적으로 잘 드러냅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잃어버리십니다. 성모님께서 세상 사람들의 길을 따라 걸으시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물러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들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을 찾아나서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만이 삶의 의미가 있다고 여기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서 머무르셔야 할 자리에 함께 머무시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마치 사제의 부모가 사제가 머물러야 할 하느님의 현존에 함께하듯이 말입니다. 성모님께서 그렇게 자식을 사랑하시어 자식을 바라보며 사셨기에 예수님의 길을 함께 걷게 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닮은 분이 되셨습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 맑은 공기가 그리워지는 때 입니다. 무더위의 기승과 아직도 은근히 퍼지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 가끔은 주위의 산에 올라 우거진 나무를 보며 진한 녹색으로 덮인 숲 사이를 거닐어 봅니다. 자천공소교우 모든님들 건강한 한 주 보내시길빕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