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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삼위일체는 ‘사랑의 신비’

Berardus 2020. 6. 4. 20:04

    [말씀 묵상] 삼위일체는 "사랑의 신비".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제1독서(탈출 34, 4ㄱㄷ-6. 8-9) 제2독서(2코린 13, 11-13) 복음(요한 3, 16-18)

    서로 다르면서 한 분이신 성삼위 삼위의 친교를 통한 사랑의 일치로 영원한 생명 누리도록 하는 것이 하느님 구원계획의 궁극적 목적.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한 분의 하느님을 믿고 고백하는 교회는 오늘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을 기립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초기교회 때부터 그리스도 신앙의 원천입니다. 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받은 우리는 이 신앙의 진리대로 성삼위께서 이루시는 친교와 사랑의 일치에 참여합니다. 우리는 기도의 시작과 끝에 성호경을 긋고, 삼위일체의 하느님께 영광송을 바치며 깊은 절을 합니다. 또한, 주일이나 대축일 미사 때 신앙 고백을 합니다. 사도신경이나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고 고백하는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신경(Credo)의 표현대로 전능하신 성부께서는 천지의 창조주이십니다. 성부와 한 본체이신 성자께서는 저희 구원을 위하여 동정 마리아께서 육신을 취하시고, 십자가 수난과 죽음에서 부활하시어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계시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다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부와 성자께서 발하시는 성령께서는 생명을 주십니다. 삼위일체의 교의는 주님 계시(마태 28,19)에 따라 초기교회 때 이미 세례와 신앙 고백, 설교와 가르침, 교회기도문에 반영된 신앙의 뿌리입니다. 교회사가 말해주듯이 2~3세기경에 신앙을 왜곡시킨 이단의 주장과 분열의 위기 속에 교부들의 호교론과 동·서방 교회가 함께한 공의회(니케아 325, 콘스탄티노플 381)에서 이 교의가 정립되었습니다. 삼위일체 대축일이 교회 전례력에 들어온 것은 요한 22세 교황(1334) 때입니다. ▲안토니오 데 페레다의 ‘삼위일체’ ‘삼위일체’란 말이 성경에 직접 언급된 적은 없으나 주님의 계시로 그 신비가 드러납니다. 구약 성경은 존재(Being, I Am) 자체이신 한 분의 하느님과 다른 위격들의 존재를 암시합니다, (창세 1,2.26; 탈출 3,14; 신명 6,4: 미카 5,2 등). 신약성경은 성자의 강생과 세례, 거룩한 변모, 고별담화, 부활, 복음 선포의 사명 등에서 삼위의 위격을 분명히 밝힙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본체(실체, Substance)와 위격(Persona)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설명합니다. 본체란 한 분이신 하느님의 신적 존재를 가리키며, 위격은 삼위 간에 서로 구별되는 지위입니다. 삼위의 관계는 친교로 사랑의 일치를 이룸에 있습니다. 오늘의 감사송은 위격은 서로 다르면서도 본성(신성)으로는 한 분이신 삼위일체의 신비를 노래합니다. 신앙의 베일에 가린 삼위일체의 신비를 깨달아보겠다고 성직자나 수도자에게 여러 번 청해 설명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한 성인 사제(St. Patrick)께서 삼위일체의 상징으로 아일랜드 국화인 애기괭이밥(클로버) 풀잎을 들고 “한 잎인가, 세 잎인가?”라는 질문을 한 뒤, 신자들이 “한 잎이며 세 잎이다”라는 대답을 할 때 “하느님도 그렇다” 하셨답니다. 모세가 시나이산에 올라 40일간 단식기도하는 동안 백성들은 제멋대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신으로 섬깁니다. 이를 목격한 모세는 하느님께서 쓰신 돌판을 깨트려버립니다. 제1독서는 모세의 중재기도와 새 돌판을 받는 장면입니다. 백성을 당신 소유로 삼으신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다(탈출 34,6).”라는 표현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 고백 (민수 14,18; 시편 103,8; 요나 4,2 등)입니다. 그렇습니다. 존재 자체이신 주님은 자비와 은총, 진리와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제2독서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2코린 13,13)라는 구문은 신약의 가장 분명한 삼위일체의 표현으로, 초기교회 때부터 원문 그대로 사용되어온 미사 전례의 인사말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품 안에서 성삼위의 친교와 형제애를 나누며 하느님의 내적 생명에 참여하는 성도입니다. 오늘 복음은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알고 삼위의 친교와 일치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하느님 구원계획의 궁극 목적을 밝힙니다. (가톨릭 교리 260). 그러므로 성자의 강생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성자의 파견목적은 세상의 심판이 아니라 구원에 있지만,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믿지 않는 자는 스스로 심판을 받았습니다(요한 3,18). “사랑의 신비인 삼위일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삼위일체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하고 일러주신 한 스승의 가르침을 회상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성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받은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본성인 사랑의 씨앗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사랑이 꽃을 피워 열매 맺기를 기다리십니다. 주님 사랑의 파트너인 우리가 주님과 하나 되는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을 때 그리스도의 향기가 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영감과 은총으로 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내적 생명을 이미 누리고 있습니다. 주님의 영원한 사랑의 파트너인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와 성사로 신심을 길러, 주님만을 섬기고 사람을 돕는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면, 세상은 변화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