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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0년 4월 26일 (일) [백] 부활 제3주일

Berardus 2020. 4. 25. 06:46

    [금주의 말씀 묵상]


    2020년 4월 26일 (일) [백] 부활 제3주일

    제1독서(사도 2,14.22ㄴ-33) 제2독서(1베드 1,17-21) 복음(루카 24,13-35)

    ‘부활절, 스무하루… 알렐루야!!!’

    엠마오로 떠나는 제자들 모습에서 공동체 무관심 드러나 발 빠르게 뒤쫓아서 성경말씀 풀어 설명해주신 예수님 ‘눈이 열려’ 주님 알아보고 예루살렘 공동체로 되돌아가 온 세상에 부활의 축복 널리 알리는 귀한 증인 돼야


      솔직히 이번 부활절만큼 우여곡절을 겪은 적이 있을까 싶습니다. 성전 문이 닫히고 미사참례마저 할 수 없는 낯선 일상을 살아야했으니까요. 홀로 부활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의 모습이 주님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을까 생각하면 먹먹할 따름입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아주 색다른 우리의 상황을 감안하시어 살피셨을 줄 압니다. 우리 마음에 더 다양하고 풍성한 묵상을 선물해 주셨다는 것을 압니다. 성전 문이 닫힌 그 때에도, 사제의 외로운 미사 안에서도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셨으니까요. 약속대로 온 세상에 당신의 부활을 선포하시며 힘과 용기를 선물해 주셨으니까요. 부디 이 글이 나갈 즈음엔 굴곡지고 매듭져 신음하던 세상이 완전히 치유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래서 아주 평범한, 그래서 더욱 소중한 우리의 매일을 되찾게 해주시기를 간곡히 청하며 이 글을 씁니다. 이 글이 나가는 부활 제3주일에는 우리 모두가 본당에서 신부님의 강론을 듣고 감격하여 감사드리는 은총을 허락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리며 이 글을 적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두어 주간 앞서서 원고를 넘겨야 한다는 게 곤란한 기분도 듭니다. 아마 이 글이 나갈 즈음이면 우리의 상황이 전혀 달라져 있을지 모르니까요. 아니 꼭 그리되기를 희망하며 소원하니까요. 오늘은 부활 제3주일, 부활을 맞고 스무하루 째가 되는 날입니다. 예전에 할머니께서는 출산한 집 대문에 삼칠일 동안 금줄을 치고 외부인 출입을 막는 이유를 설명해 주셨는데요. 서로가 조심조심…, 섣부른 축하 인사마저 삼가는 마음이라 하셨습니다. 선뜻 이해되지 않는 어려운 말씀이었지만 자라면서 그 의미가 마음에 담겼습니다. 이를테면 매사에 하늘의 뜻을 살펴 지내신 조상님들의 예의바른 지혜의 소산이었음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기쁘고 좋은 일에서도 섣부른 축하마저 조심조심히 받으려는 마음가짐이었다는 걸 깨달았던 겁니다. 오늘이 바로 부활절의 삼칠일 째 되는 날입니다. 이제 마음껏 부활을 기뻐하고 경축하며 신바람이 나서 동네방네 소문을 내며 즐거워해도 좋은 날인 셈입니다. 그리 생각하니 오늘 복음이 들려주는 이야기도 정겹기만 합니다. 연이어 들려오는 주님의 부활 소식에도 제자들의 마음이 깨어나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는 사실도 언짢지가 않습니다. 부활의 신비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여전히 어두웠던 제자들의 마음도 부활을 체험하지 못한 채 슬픔에 잠겨 늘어져있는 제자들의 모습까지도 덜떨어진 우리를 위해서 격려해주시는 주님의 다독임으로 읽힙니다. 사순시기 내내 우리도 그 때의 제자들처럼 칙칙한 분위기를 견디며 미사봉헌을 꼽아 고대하며 지냈습니다. 더러 예루살렘을 떠나기로 의견을 모았던 제자들처럼 뭔가 석연찮은 생각으로 마음이 혼란하기도 했습니다. 날이 밝기 무섭게 들려오는 코로나 19의 확산 소식에 몸도 마음도 움츠려 들기 일쑤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복음말씀에서 공동체를 떠나려는 이를 누군가가 나서서 강하게 말렸다거나 좀 더 기다리며 함께 기도하자고 권했다거나 서로를 위로하며 힘을 얻었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없다는 게 마음 쓰립니다. 이야말로 함께 있으나 일치하지 못했던 제자들의 썰렁한 분위기를 여실히 전해주니 말입니다. 오늘 두 제자가 떠나기로 결단했을 때에도 어느 누구도 붙잡지도 말리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고스란히 느끼게 해주니 말입니다. 한마디로 ‘갈 테면 가고’ ‘떠날 테면 떠나라’며 서로가 서로에게 방관자였다는 걸 알려주니 말입니다. 결국 제자공동체의 와해는 서로의 무관심이었음을 짚어주는 것이 아닐지요. 때문에 그 와중에도 발 빠르게 제자 두 사람을 뒤쫓으신 예수님이 고맙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무명인 제자를 위해서 정성을 쏟으셨다는 사실에 감격하게 됩니다. 그들이 믿음을 깨우치도록 성경말씀을 일일이 풀어 설명해주신 모습이야말로 복음 전파자의 태도임을 일깨워주신 것이라 싶습니다. 아울러 주님의 말씀으로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그들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예루살렘 공동체로 되돌아갔다는 점에 감동하게 됩니다. 그들을 돌아서도록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나에게서 들은 대로 아버지께서 약 속하신 분을 기다려라”(사도 1,4)는 주님의 당부를 기억했던 덕이었을 테니까요. 주님 부활의 가장 큰 은총은 이제 우리에게 성령이 선물되어진다는 진리입니다. 그 약속을 믿고 의지하고 살아가는 우리는 공동체를 떠나 엠마오로 향하려는 이들을 붙들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이미 엠마오에서 삶을 꾸려버린 이들에게도 오늘 주님처럼 살갑게 다가가 함께 하는 성의를 보여야 합니다.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은혜로운 이 주간, 주님의 부활을 한껏 찬미 드리는 빼어난 주님의 수제자의 삶을 다짐하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지 삼칠일 째인 오늘, 교 회 공동체에 부어주신 축복을 자랑하면 좋겠습니다. 먼저 우리 눈이 밝아지기를, 어떤 것보다 우선하여 우리 마음이 주님 사랑으로 차오르길 원하면 좋겠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교회의 평화와 선에 항구하는 덕을 갖춘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하여 우리 모두가 한층 아름다워진 삶으로 온 세상에 주님의 부활을 보고 만지고 확인시켜주는 귀한 증인이 되면 너무너무 좋겠습니다. 누구에게나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면 진짜로 고맙겠습니다(사도 2장 참조). 긴 시간, 홀로 본당을 지키며 정말 외로웠던 저희 사제들에게 굳건한 믿음으로 힘을 주신 세상의 모든 신자분들게 부활하신 주님의 축복이 흠뻑 쏟아주시길 기도드립니다. 덧붙여, 불 꺼진 성전을 찾아, 묵묵히 기도에 동참해 주신 월평본당 교우님들께도 깊은 감사를 전하고 싶군요. 우리 모두가 부활을 살아냄으로 천천히 조금씩 그러나 열심하고 꾸준하게 이웃을 감동시키는 참된 전교자로 거듭나게 해주시길, 삶의 구석구석을 살펴 축복하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청합니다. -장재봉 신부 (부산교구 월평본당 주임)- ▲전주 정동성당 성모자상. [한주간 전례] 2020년 4월 27일(월) [백] 부활 제3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요한 6,22-29 오늘 독서와 복음은 그 리 예쁠 것도 없는 일상의 나그네살이에 지친 우리에게 두 개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선 독서를 통하여 우리는 교회의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가 걸었던 길을 따라가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스테파노의 신앙 고백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게 하였습니다. 반면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빵을 많게 하신 표징을 보이신 뒤 곧바로 이어진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서 어떻게 당신께서 생명의 빵이신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쉴 새 없이 주어지는 일상의 소소한 일들과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그 일들의 좌절, 타인의 무시로 얻은 상처, 그리고 만족할 수 없는 자기 연민 속에서, 부활의 기쁨을 계속 간직하기에는 우리의 인내심이 턱없이 부족하기만 합니다. 바로 이때에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길이 남을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굳게 믿으며, 죽음 앞에서도 천사의 얼굴을 보인 스테파노의 믿음을 바라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기쁘게 살아가는 부활의 길을 묻는 제자들의 질문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무거운 멍에로 비틀거리며 삶의 문제를 되새기기보다는 미처 깨닫지 못한 삶의 축복을 헤아리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의 일을 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믿는 것입니다. 스테파노와 같은 믿음으로 삶의 문제에도 편안히 웃을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주신 생명의 빵 때문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 2020년 4월 28일 (화) [백] 부활 제3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요한 6,30-35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부활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우리에게 오늘 독서는 예수님의 극진한 사랑이 드러났던 성목요일의 주님 만찬과 성금요일의 수난 예식을 떠올리게 합니다.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함께하신 뒤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예수님이 아니라, 그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증언한 스테파노가 그 거룩한 사건의 기억을 되살려 주는 도우미가 되고 있습니다.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하여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는 백성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스테파노는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 분노가 일어나 결국 스테파노에게 돌을 던져 죽입니다. 그의 순교는 맹목적인 신념에서 비롯된 수동적인 자세도 아니요, 편협한 사고로부터 주어진 물리적 학대에 대한 체념도 아닙니다. 스테파노의 마음을 가득 채우신 성령께서는 오히려 주님을 향한 저들의 분노와 스테파노를 향한 비난을 뛰어넘어 열린 하늘로 그의 시선을 돌리시어 하느님의 오른쪽에 계신 예수님을 보게 하셨던 것입니다. 주님 안에 머물고 싶은 우리 삶뿐만 아니라 이웃과 함께하는 사회를 짓밟으려는 부당한 폭력은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성금요일의 부당한 폭력은 예수님께만 행하여졌던 것이 아니라 첫 교회 공동체의 스테파노에게도 행하여졌습니다. 지금도 주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이러한 악한 힘의 행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네 삶의 하루하루에 성금요일의 부당한 폭력이 허락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악의 힘을 끊어 버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주님께 청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 폭력을 이겨 내도록 주님께서 성금요일 전날 저녁인 성목요일에 성체성사를 세우셨음을 날마다 기억하고 기념해야 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2020년 4월 29일 (수) [백]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가타리나 성녀는 1347년 이탈리아의 중부 도시 시에나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자신의 앞날을 짐작할 수 있는 신비스러운 체험을 하였다. 그래서 완덕의 길을 걷고자 일찍이 소녀 시절 도미니코 제3회에 들어갔다. 그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지역들 간의 평화를 위하여 노력하는 가운데 특히 교황의 권리와 자유를 옹호하는 데 앞장섰다. 자신의 신비 체험을 모아 책으로 남긴 그는 1380년에 선종하였고, 1461년에 시성되었다.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는 가타리나 성녀는 1970년 교회 학자로 선포되었다. [복음묵상] 요한 6,35-40 “한편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사도행전의 저자 루카는 박해의 위기 상황에서도 땅끝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증언해야 하는 교회의 간절함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신자들은 첫 순교자 스테파노의 장사를 지내고 억누를 수 없는 슬픔에 빠져 크게 통곡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상황이 나아진 것도 아닙니다. 교회를 없애 버리려는 사울의 움직임이 대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기가 기회가 되어 박해를 피하여 흩어진 신자들은 생명의 말씀이신 주님을 이곳저곳에서 전하였고 뜻밖의 지역인 사마리아에서 큰 기쁨이 넘칩니다. 바빌론 유배에서 귀환한 뒤 유다인들은 북이스라엘 사람들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성전도 서로 다른 곳에 지어 예배도 함께 드리지 않던 사이였습니다. 예루살렘을 갈 때도 일부러 돌아서 갈 정도로 멀리하던 사마리아 땅에 생명의 말씀이 전하여집니다. 일곱 봉사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필리포스의 맹활약이 돋보입니다. 필리포스의 말에 사마리아인들은 귀를 기울여 한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입니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우리를 하나도 잃지 않으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복음으로 들으면서 부활의 기쁨을 계속 되새기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은 예수님을 보고 믿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없애려는 사울의 악한 움직임이 아니라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전하는 필리포스의 맹활약이, 부활을 체험하고 또 늘 희망하며 사는 우리의 말과 행동의 본보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2020년 4월 30일 (목) [백] 부활 제3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요한 6,44-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요한 복음서 6장의 전체 맥락 안에서 빵을 많게 하신 표징 뒤에 이어지는 오늘 복음 말씀은 단순히 성체성사에 대한 언급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명의 빵이라는 담화 안에서 그 표징을 통하여 드러난 예수님의 몸은, 구약 성경 탈출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의 의미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고찰이라고 하겠습니다. 사실 유다인들은 광야에서 하느님께 받은 만나의 신비로움을 하느님의 지혜를 담고 있는 은총의 선물인 율법의 상징이라 여겼습니다. 율법이야말로 하느님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자 하는 인간의 궁극적인 배고픔을 충족시켜 주는 참된 삶의 양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로 받아들인 이들은, 마지막 만찬을 통하여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제공되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신명 8,3 참조)을 율법을 통하여 배우고 믿었던 이들에게 생명의 빵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한 선택을 재촉합니다. 유다인들처럼 듣기 거북하다고 투덜거리며 떠날 것인지, 아니면 제자들처럼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받아들여 영원한 생명을 얻고 그 말씀을 전하는 이가 될 것인지, 이에 대한 깊은 성찰이 우리에게도 필요할지 모릅니다. 오늘 독서에서, 고통받는 주님의 종에 대한 이사야서 53장의 말씀을 반복하여 읽으며 그 뜻을 헤아리고자 노력하던 에티오피아 내시와 같은 자세로 늘 성경을 읽고, 또 그 뜻을 풀이해 준 필리포스처럼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이 부활의 시기를 보내며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2020년 5월 1일 (금) [백] 노동자 성 요셉 요셉 성인은 성모 마리아의 배필이며, 예수님의 양아버지다. 목수로 일한 성인은 오늘날 노동자의 수호자로 공경받고 있다. 1955년 비오 12세 교황은 해마다 5월 1일을 ‘노동자 성 요셉’의 기념일로 지내도록 선포하였다. [복음묵상] 마태오 13,54-58 초대 교회가 선교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던 것은 예수님에 대한 무지함도, 교회 공동체의 게으름도 아니었습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우리여야 해!’라는 자아도취적 선민의식이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주축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었고, 그리스도교가 유다주의를 기반으로 시작한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다인 중심, 유다 문화 중심은 더욱 보편적인 선교에 걸림돌이었습니다. ‘적어도 유다의 이런저런 전통은 지켜야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지.’라는 선민의식의 폐쇄성은 초대 교회가 성장하는 데에서 반드시 극복해야 할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사람들의 폐쇄성 때문에 존경은커녕 무시의 대상이 되어 버리십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보다는 예수님의 주변 것들에 관심이 많습니다. 부모가 누구며, 형제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집안이 어떤지 ……. 대개 사람들은 제 사상과 신념에 사로잡혀 있을 때, 본질을 보는 눈을 잃어버리지요.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이 믿기지 않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 또 질투나 열등감에 그것이 사라져 버렸으면 할 때, 사람들은 자신 안에 단단히 자리 잡은 나름의 논리로 눈앞의 것을 깎아내리거나 무시하기 마련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저 보기 싫은 것뿐입니다. 그들의 비좁은 마음에는, 저들보다 많은 지혜와 깊은 학식을 지니신 것처럼 보이며 갑자기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적어도 자신들보다 잘나서는 안 된다는 지독한 경쟁의식과 패배주의가 똬리를 틀고 앉아 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더 많이 알고 더 자세히 아는 데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그저 마음을 열고 마음의 빈자리를 만드는 일이 복음과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닌가 합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5월 2일 (토) [백]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295년 무렵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아타나시오 성인은 알렉산데르 대주교를 수행하여 니케아 공의회(325년)에 참석하였다. 또한 그는 328년 알렉산데르 대주교의 후계자로서 아리우스 이단과 투쟁하는 가운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성인은 특히 정통 신앙을 옹호하는 책을 많이 남겼으며, 안토니오 성인의 전기를 써서 서방 교회에 수도 생활을 알리기도 하였다. [복음묵상] 요한 6,60ㄴ-69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둘로 나뉩니다. 한쪽은 투덜거리며 예수님을 떠나갔고 다른 한쪽은 예수님께 믿음을 두고 그분과 함께 머뭅니다. 제자들이 갈라지는 결정적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 바로 당신이시라고, 그 빵을 어서 먹으라고 재촉하신 말씀입니다. 다른 이의 말을 잘 듣는 것은 때로는 힘들지만 때로는 위로가 될 때가 많습니다. 대개 힘든 경우는 상대의 말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내 마음이 닫혀 있기 때문이고, 위로가 될 때는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애절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결국 서로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지니는 일입니다. 빵이 먹고 싶은 사람들을 떠올려 봅니다. 배고파야 빵을 먹고, 배고픈 삶을 살아야 빵에 대한 간절함을 지니게 됩니다. 예수님을 떠나간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위로보다는 불편함으로 다가온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위로는 자신들의 배고픔을 채워 주지 못한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우리는 무엇에 배고파하는지 되돌아보았으면 합니다. 흔히 돈과 명예, 권력에 비판적인 것이 신앙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돈, 명예, 권력에 배고파하는 현실을 살아갑니다. 돈을 배고파하되 어떻게 쓸 것인가, 명예를 소중히 여기되 그 명예를 어떻게 도모할 것인가, 그리고 권력을 지향하되 그 권력을 더욱 올바로 힘 있게 사용하려면 어떤 삶을 추구할 것인가 되물어야 합니다. 신앙적 배고픔은 돈과 명예, 권력을 내려놓는 데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돈과 명예, 권력을 하느님 안에서, 이웃들과의 나눔 안에서 제대로 사용하면서 체험합니다. 나를 위한 배고픔을 ‘우리’를 위한 배고픔으로, 하나의 빵이라도 함께 먹는 만찬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들이 예수님 곁을 지키는 진정한 신앙인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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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일부 교구에서 미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비록 미사를 한다 해도 일정한 거리두기와 미사 참례시 생활수칙을 지켜야 꼭 지켜야 합니다. 하루 빨리 정상적인 미사참례가 이루지길 기도합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