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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0년 3월 22일 (일) [자] 사순 제4주일

Berardus 2020. 3. 22. 06:34

    [금주의 말씀 묵상]

    2020년 3월 22일 (일) [자] 사순 제4주일.

    제1독서(1사무 16,1ㄱㄹㅁㅂ.6-7.10-13ㄴ ) 제2독서(에페 5,8-14) 복음(요한 9,1-41)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파견된 이’ 예수님에 대한 순종으로 치유된 눈먼 사람 박해 속에도 체험에 대한 확신으로 ‘예언자’라고 고백 어둠에서 빛으로 구해낸 분의 이름을 ‘예수’라고 증언 진정한 신앙은 자신이 체험한 하느님을 굳게 믿는 것



      빛이 없으면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어둠의 골짜기를 지나가며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 부활을 향해 순례 중입니다. 화답송 시편에서 하느님은 두려워하는 시인을 위로하시고 희망을 불어넣으십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서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시편 23,1-2) ■ 복음의 맥락 요한복음 9장 이야기 배경은 유다 축제 초막절입니다.(7-8장) 초막절은 이집트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을 안내자로 삼아 가나안으로 행진한 것을 기념합니다. 이 시기에 많은 등불이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과 이스라엘 가정을 밝힙니다. 사람들은 환한 등불을 보면서 주님이 빛이자 안내자로서 광야를 통과하게 해 주신 것을 기억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가르치며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라고 말씀하십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지금 이 자리에, 교회와 성사 안에 이미 ‘세상의 빛’으로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 나는 세상의 빛이다 예수님은 성전 밖을 ‘지나가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십니다. 이름 없이 ‘그 사람’으로 자주 소개되는데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이 눈먼 이가 먼저 예수님 시선을 받고 그분이 세상의 빛으로서 ‘하느님의 일’을 하게 하는 귀한 도구로 선택됩니다. 성경에서 하느님이 인간의 눈으로 적합하게 보이지 않는 이, 작은 이를 선택하신다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제1독서에 나오는 다윗의 부르심 이야기도 선택에 대한 구약 신학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 복음과 연결됩니다. 예수님이 눈먼 이를 치유한 방식이 흥미롭습니다.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눈먼 이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령합니다. ‘침’은 유동적이면서도 내밀한 것으로 예수님의 침은 높은 곳에서 태어나게 하는 성령을 가리킵니다. 진흙을 개는 행위는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 창조를 연상시키는데(창세 2,7) 여기에서는 새 인간창조와 연결됩니다. 이 행위가 눈을 뜨게 하고 보게 한다는 것이 본문에서 반복되는데 바리사이들에게는 안식일을 위반한 죄지만 눈먼 이와 예수님에게는 안식일의 궁극적 목적, 곧 새로운 창조입니다. 왜 요한이 실로암의 뜻을 히브리어로 ‘파견된 이’라고 번역할까요? 눈먼 이가 치유된 것은 실로암 물 때문이 아니라 ‘파견된 이’, 곧 예수님 말씀을 경청하고 순종했기 때문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요한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가리키는 중요한 칭호는 아버지가 파견하신 아들입니다. 예수님 생애 전체는 그분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 말씀을 경청하고 아버지께 순종하는 아들의 삶이었습니다. 눈을 뜨게 된 사람은 환상과 상상, 막연한 두려움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제 자기 눈으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판단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을 어둠에서 빛으로 구해낸 분의 이름을 ‘예수님’(‘주님이 구원하신다’)이라고 부릅니다. ■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 이웃과 지인들이 바리사이들에게 그 사람을 데려갑니다. 바리사이들은 질문합니다. “그가 당신 눈을 뜨게 해주었는데,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요한 9,17) 눈먼 이로 태어나 율법을 읽을 수도 없고 생존을 위해 길바닥에서 구걸하며 평생 살아 온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자기 ‘체험’, 일어난 사실 뿐입니다. 박해하는 바리사이들이 한 질문은 역설적으로 그에게 ‘나를 치유한 분이 정말 나에게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어둠과 위기의 순간에 예수님에 대한 지식과 사랑이 서서히 깊어집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확신도 자랍니다. 그 사람은 마침내 ‘예언자’라고 대답합니다. 바리사이들이 생각하듯 안식일을 어긴 죄인이 아니라 예언자, 하느님을 대신해서 말하고 행동하는 분, 하느님 말씀의 참된 의미를 전달하는 분임을 증언합니다. 그는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에페 5,8)으로서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을 빛으로 데려가는 여정을 걷게 될 것입니다. 유다 지도자들은 그가 보게 됐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기 시작합니다.(요한 9,18) 그들의 태도는 우리 모두가 겪는 유혹을 직시하게 합니다. “우리 각자는 자기 시야의 한계를 세상의 경계와 혼동합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 1788-1865) 명확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부정하는 자세는 조롱, 완고함, 무관심, 자기 확신에 대한 맹신, 때로는 오만한 침묵으로 이어집니다. 이 모든 것의 뿌리는 자신을 우상으로 삼는 ‘자기 경배’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부모를 불러서라도 예수님이 죄인이라는 자기들 생각을 입증하고 싶지만 실패하자 그 사람을 다시 불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시오. 우리는 그자가 죄인임을 알고 있소”라고 윽박지릅니다. 예수님이 죄인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그들의 권위가 무너질까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참으로 모순입니다. 율법에 무지한 사람에게 하느님의 영광을 강요하는 그들이야말로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요한 5,44)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위선적인 태도는 이 한 마디에 요약됩니다. “당신들은 듣지 않는 사람들이군요!” ■ 주님, 저는 믿습니다 자기 체험과 판단에 바탕을 두고 예수님을 용기 있게 증언한 사람은 그 대가로 회당에서 쫓겨나고 박해당하는 스승의 여정을 그대로 따르는 제자가 됩니다. 그는 예수님을 다시 만나 “주님, 저는 믿습니다” (요한 9,38)라고 고백하고 경배합니다. 그 사람의 단계적인 신앙 여정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입니다. 신앙이란? 자신이 체험한 분, 자신이 말하고 있는 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 이야기는 우리에게 진정한 신앙이란 무엇인지 가르치는 표징입니다. 주님, 오늘 이 시간에도 제 영을 눈멀게 하는 온갖 종류의 어둠과 유혹에서 저를 해방시켜 주십시오. 오늘 저에게도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라고 명령하십시오. 아멘. -임숙희(레지나) 엔아르케성경삶연구소 소장- [한주간 전례] 2020년 3월 23일(월) [자] 사순 제4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요한 4,43-54 요한 복음에서 갈릴래아 카나는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표징을 일으키신 곳입니다. 그리고 오늘 두 번째로 그곳에서 표징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고 그곳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그리고 다시 사마리아를 거쳐 카나로 돌아오십니다. 거기에 있던 왕실 관리는 예수님께 아들을 고쳐 달라고 청합니다. 왕실의 관리는 이방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은 왕실 관리만이 아니라 당시 예수님의 주위에 있던 이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지금 우리를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표징은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왕실 관리의 아들을 고쳐 주신 뒤 그와 온 집안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전합니다. 이렇듯 그들은 표징을 통하여 예수님을 알게 되고 그분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표징과 이적만이 중요하지 않고, 오히려 그 외의 것을 통해서 믿음을 가진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초자연적인 사건을 통해서만 믿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께서 드러내시는 하느님에 대한 계시를 통하여 믿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사건에, 쉽게 일어나지 않는 일들에 관심을 둡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의미 있고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의 삶을 통하여 보여 주신 사건에 집중하고 믿는 것입니다. 그 안에 우리를 위한 생명이 담겨 있습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3월 24일 (화) [자] 사순 제4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요한 5,1-16 복음서는 자주 예수님과 유다교 지도자들 사이의 갈등을 묘사합니다. 기존에 있었던 관습들과 대치되는 예수님의 행동은 갈등을 불러일으킵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당시 율법 조항은 육백여 개에 이르렀고 그 가운데 상당수가 안식일에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안식일에도 병자를 치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 전에 이미 앓고 있었던 질병은 제외됩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이 아닌 날에도 고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요한 복음은 예수님께서 벳자타 못에서 병자를 치유하신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날은 안식일입니다.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율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셨다고 비난하고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이 일을 계기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과 지속적으로 갈등을 겪으십니다. 그리고 그 갈등은 점점 커지고 결국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받으십니다. 지금도 아픈 사람들은 병에서 벗어날 수 있는 모든 것에 막연한 희망을 둡니다. 비록 그것이 비과학적이라 하여도 절박한 심정이 먼저입니다. 당시의 병자들에게 벳자타 못에 들어가는 것은 이런 절박함 가운데 오는 희망이었습니다. 이제 그 희망은 예수님께 옮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기대하였던 전통적인 관습이 아닌, 말씀을 통하여 병자를 치유하시는 분으로 표현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막연한 희망이 아닌 확실한 희망을 주시는 분이시며, 실제로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선사하시는 분이십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3월 25일 (수) [백]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은 말 그대로 주님의 탄생 예고를 기념하는 날이다. 예전에는 ‘성모 영보 대축일’이라고 하였는데, ‘영보’(領報)란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천사에게서 들었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도 여느 사람처럼 성모님의 모태에서 아홉 달을 계셨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 대축일의 날짜는 주님 성탄 대축일에서 아홉 달을 역산한 것이다. [복음묵상] 루카 1,26-38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선포는 메시아의 탄생을 나타내는, 예수님의 탄생을 가리키는 유명한 예언입니다. 이제 이 예언은 나자렛에 사는 한 처녀, 마리아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고는 예언의 성취이자 구원을 향한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입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천사의 인사말은 예수님 탄생의 의미를 잘 드러냅니다. 기쁨의 실현이자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사건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힘이 되는 약속은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예언자들을 파견하거나 그들이 전쟁에 나설 때에도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 강한 힘이었습니다. 이제 천사는 마리아를 통하여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알려 주고 그 기쁨을 전합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마리아의 협력을 통하여 이루십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마리아의 응답은 개인의 응답일 뿐만 아니라 믿음을 간직한 공동체의 희망을 담은 표현입니다. 마리아와 함께 모든 믿는 이들은 하느님께 부름을 받은 셈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말씀이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에 합당한 응답은 우리의 신앙과 삶을 통하여 표현되어야 합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3월 26일 (목) [자] 사순 제4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요한 5,31-47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벳자타 못에서 병자를 치유한 뒤에 벌어지는 논쟁의 일부로, 마치 법정에서 예수님과 유다인들이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유다인들은 율법에 따라 잘잘못을 가릴 때에 두 명 이상의 증언이 있어야 효력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유효하지 못하다.” 마치 예수님의 변호처럼 보이는 이 내용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을 담고 있습니다. 증언의 주된 내용은 진리를 드러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업적입니다.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활동은 그 자체로 하느님의 증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을 행하십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나는 모든 일은 하느님께서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아드님을 보내셨다는 증언인 셈입니다. 요한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되는 하느님의 뜻을 진리로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이미 성경에 담겨 있습니다. 이런 주장에서 가장 큰 바탕이 되는 것은 ‘파견’ 곧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유다인들은 파견되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에 의하여 이 세상에 파견되시고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 모든 일을 하시지만 그들은 그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당신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고 호소하십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3월 27일 (금) [자] 사순 제4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요한 7,1-2.10.25-30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유다인들의 갈등이 점점 커져 가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이미 사람들에게는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소문을 들어 알고 계셨지만 아직 그분의 때가 되지 않았다고 복음은 말합니다. 특히 요한 복음은 이런 과정 곧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들과의 논쟁을 길게 전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예수님과 유다인들의 대화를 통하여 예수님의 신원을 드러냅니다. 그리하여 요한 복음을 읽다 보면 마치 독자에게 말하는 것 같은 내용을 자주 발견합니다. 오늘 대화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오셨는지’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기원을 나타냅니다. 요한 복음에서, 하느님에게서 파견되시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표현은 ‘위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신’,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입니다. 그렇기에 그분께서 어디에서 오셨는지 안다거나 모른다는 표현은 장소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원과 기원을 나타냅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일을 마치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다시 위로, 하늘로, 하느님께 돌아가십니다. 예루살렘 주민들과의 대화는 단순한 대화가 아니라 독자를 향한 호소이자 선택과 결단을 요구하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읽으면서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동의하는지,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하는지 말입니다. 이런 대화를 통하여 우리는 조금 더 예수님을 알아 갑니다. 비록 때로는 그 말씀이 불편하게 느껴지더라도 그 안에서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3월 28일 (토) [자] 사순 제4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요한 7,40-53 “그 예언자”는 일반적인 예언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 복음에서 표현되는 ‘예언자’는 일반적인 의미의 예언자이지만 ‘그 예언자’는 당시 사람들에게 이미 정해져 있는 한 명의 예언자입니다. “나는 그들을 위하여 그들의 동족 가운데에서 너와 같은 예언자 하나를 일으켜, 나의 말을 그의 입에 담아 줄 것이다”(신명 18,18).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예고하신 이 예언자를 복음은 ‘그 예언자’로 표현합니다. 종말의 때에 하느님께서 백성을 위하여 보내실 예언자라는 의미입니다. “메시아”는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께 가장 많이 적용하는 용어로, 유다인들의 기다림을 표현합니다. 일찍이 다윗의 후손으로 영원한 왕좌에서 백성들을 통치할 메시아 곧 그리스도는 다윗의 도시인 베들레헴에서 나올 것이라는 예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미카 5,1 참조). 그 예언자와 메시아는 장차 오게 될 구원자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요한 복음은 사람들의 반응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바로 그 예언자이시며 메시아이시라는 것을 에둘러 표현합니다. 군중과 성전 경비병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애써 그것을 부정합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율법을 어기는 사람으로 몰아 심판하고자 하지만 군중이 이미 예수님을 구원자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통하여 요한 복음은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자렛 출신으로 알고 있지만 우리는 이미 그분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또 나에게 예수님께서는 어떤 분이신가요? -(허규 베네딕토 신부)- **************************************

      입춘은 말 그대로 "봄이 들어서다", "봄이 시작된다" 는 말로서 입춘(立春)은 24 절기의 시작이기도 하지요. 입춘(立春)이 봄이 들어서는 시작이라면 춘분(春分)은 완연한 봄의 시작이지요. 태양이 남쪽에서 북쪽을 향하여 적도를 통과하는 점을 춘분점이라 하여 밤낮의 길이가 같아지는 것 이지요. 그래서 이제부터는 밤보다는 낮 길이가 점점 길어지기 시작 하지요. 이때쯤이면 약동하는 만물에 물이 오르고 온 산야는 희망으로 꿈틀대지요 그런데 이 활기찬 새봄을 알리는 첫번째 전령사로 우리는 매화나 산수유꽃으로 알고 있는데 이 보다 먼저 엄동설한(嚴冬雪寒)을 이겨내고 쌓인 눈을 뚫고 나와 가느다란 줄기에 샛노란 꽃잎을 피우는 복수초(福壽草) 가 있어요, 이 복수초가 우리꽃 중에서 가장 먼저 새봄을 알리는 전령사 이지요. 남부지방에서는 2월부터 피기 시작하여 4월까지 꽃을 볼 수 있는데 바라만 보아도 마음이 밝아질 만큼 예쁜 꽃이지요. 지금 한참 어려운 시기이지만 이 모든 것이 풀리리라는 희망의 새싹을 키워봅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