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말씀 묵상] 2020년 2월 16일 (日) [녹] 연중 제6주일.
제1독서(집회 15,15-20)
제2독서(1코린 2,6-10)
복음(마태 5,17-37)
더 나은 의로움
오늘 복음은
‘하느님께서 금하신 것을 피하는 것,
명하신 것을 따르는 것,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 중
무엇이 가장 가치 있는
신앙생활인가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하느님께서 금하신 것을
피하는 것에 대해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전문가로 보인다.
우선 그들은 율법을 613개의
조항으로 분류해 날마다 암기했다.
일주일에 이틀씩이나 금식하며 기도했고,
십일조도 정확하게 바쳤다.
안식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철저히 지키는 열심을 보였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율법을 철저히 지키며
사는 자신들은 언제나 하느님께 인정을 받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에 나가 기도드릴 때에도
자신들의 열심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종교적 공로 리스트’를 펼쳐내는 자신감을 보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런 모습을 반어적으로 책망하셨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태 5,20)
당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모든 율법을
문자로 해석해 이해하기에 급급했다.
‘살인하지 마라’는 계명은
단지 살인하지 않으면
그 계명을 지킨 것으로 생각했다.
왜 살인을 해서는 안 되는지,
하느님께서 생명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모든 계명 안에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포함되어 있고,
그 자체가 복음적 메시지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모든 계명과 율법은
단지 문자적인 측면으로만 해석되거나
외형적인 실천의 모습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신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지키되
먼저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을 먼저
실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마태 23,23)
이들이 겉으로 볼 때는 세밀하게
계명을 지킨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마태 23,5)”으로
하느님께서 원하는 진정한
율법의 정신에서 벗어난 위선적인 사람들이라는 말씀이다.
사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면 의롭게 된다고 믿었다.
율법을 통해 의로움을 드러냈고 그것을 자랑했다.
이에 바오로 사도는
“나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벤야민 지파 출신이고,
히브리 사람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입니다.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고,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필리 3,5-6)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을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 3,7-8)라고 고백하며
자신이 가진 의로움은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어진 것이며,
그 믿음으로 하느님께로부터 난 의로움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더 나은 의로움’이란
바리사이들이 결코 깨닫지 못했던
하느님의 구원 방식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만 얻을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열심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기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외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신 구원론적 사실을 믿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늘 보여주었던 ‘열심’뿐만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를 믿고
그분이 드러내신 사랑을 우리가 행하고
그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예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이 없으면 율법도,
우리의 열심도 결코 빛을 발할 수 없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임상만 신부(서울대교구 상도동본당 주임)-
▲서울대교구 사제서품식, 잠실체육관,20.2.7
[한주간 전례]
2020년 2월 17일(월) [녹] 연중 제6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8,11-13
예수님께서
일곱 개의 빵으로 사천 명을 배 불리신
그 자리에 바리사이들이 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광야와 같은 그곳에서 군중이
굶주림에서 벗어나는 장면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광야에 있을 때 만나로
굶주림을 채우던 것을 연상시킵니다.
그럼에도 바리사이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신다는 사실이 보이지 않습니다.
누가 보아도 하늘에서 온 표징이었음에도 그것을 보고도,
그것에 관해서 듣고도
표징이라 여기지 않으니 참으로 이상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 삶 속에서도 이런 일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는지 난 잘 모르겠다.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으면 좋겠다.’
‘내 배우자가 가족들을 아끼는지 잘 모르겠다.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으면 좋겠다.’
이렇듯 우리도 살아가면서 가족들과
주위에 있는 이들에게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지 표현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정녕 내 부모가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보지 못하였습니까?
나의 배우자가 가족을 아끼고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표징이 정말 없었습니까?
어쩌면 우리도 바리사이들처럼,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 채 편견과
선입견의 틀 속에 갇힌 것은 아닌지요?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2월 18일 (화) [녹] 연중 제6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8,14-21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밖에 없었다.”
이 구절을 그리스어 원문에
더욱 가깝게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자들이 빵들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배 안에 제자들과 함께 있는 빵은 한 개뿐이었다.’
이를 중심으로 이 구절을 살펴보면,
‘빵들’과 ‘빵 한 개’가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먹을 음식인
빵들을 챙기지 않았는데,
어째서 배 안에 빵 한 개가 남아 있던 것일까요?
도대체 그 빵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마르코 복음사가가 이 빵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빵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음식이 아닙니다.
먹는 빵이었다면 제자들이
“빵이 없다.”라고 말하지 않고
‘빵이 한 개밖에 없다.’ 하고 서로 수군거렸을 것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있는
그 빵 한 개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을 두고
빵이라고 표현함으로써
그분께서 바로 누룩 없는 빵
곧 파스카 음식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온전하게 믿어
그분을 누룩 없는 빵으로
받아들이라고 일러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도
‘누룩’ 때문에 걱정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걱정과
제자들의 걱정은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악한 영향력이 미칠까 걱정하시지만,
제자들은 지금 먹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걱정합니다.
같은 말 속에서도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다릅니다.
하나의 걱정이 영적인 것이라면,
다른 걱정은 육적인 것입니다.
하나의 걱정이 구원과 관련된 것이라면,
다른 걱정은 의식주와 관련된 것입니다.
과연 이 두 가지의 걱정에서
우리는 무엇에 주안점을 두어야 하겠습니까?
육적인 것에 마음을 써서
우리 안에 계신 빵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2월 19일 (수) [녹] 연중 제6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8,22-26
우리 몸에 이상이 있으면
엑스레이(X-ray)나 엠아르아이(MRI),
또는 시티(CT) 촬영을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제가 들은 바로는
촬영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촬영된 사진을
잘 판독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합니다.
실력이 좋은 의사는 그 사진을 제대로 판독하지만,
그렇지 않은 의사는 사진을 보고도
올바른 진단을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신앙인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똑같은 현실 앞에서 어떤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방황하지만,
다른 어떤 사람은 그 현실에
충분히 만족하며 행복할 줄 압니다.
곧 영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영적 시력을
회복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를 데리고
벳사이다에서 떨어진 외딴곳으로 가십니다.
왜 외딴곳으로 가셔야만 하였을까요?
벳사이다는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는 고을이기 때문입니다(마태 11,21 참조).
영적으로 눈먼 이들이 가득한 곳에서
벗어나는 것이 회복의 첫걸음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손을 얹어 주십니다.
여느 때처럼 사람의
가장 약한 곳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그런데 당장 낫지는 않았습니다.
눈먼 이에게 사람이 보이기는 하지만
하나의 식물처럼 보였습니다.
아직 사람을 볼 만한
영적인 눈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욱더 특별한 방법으로 치유하십니다.
곧 눈을 뜨게 해 주시려고,
두 눈에 손을 얹어 눈을 가리십니다.
빛을 주시려고, 어둠의 그림자를 드리워 주십니다.
참세상을 보려면 어둠 속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으시어
우리가 살고 있는 터전에서 나와,
당신의 거룩한 곳으로 데리고 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눈을 가리신 다음 물으십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2월 20일 (목) 연중 제6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8,27-33
우연한 기회로
신학교 동기 신부들에게
설문 조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가장 보람된 순간,
가장 공허한 순간,
사제가 되어서 좋은 점과
어려운 점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흥미로웠습니다.
자기 자신이 사제라는 사실을 느끼고
이에 대한 보람과 기쁨을 느끼는 것도
성사나 말씀 선포와 연관된 것이고,
어려움이나 공허함을 느끼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성사나 말씀 선포와 연관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한 가지 사건 안에
행복과 고통이 공존하고 있음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언젠가 국제적인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이
텔레비전에서 강의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회
사 생활이 어떠냐고 물으면 “아주 좋아요.
저는 즐겁게 일해요.”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되물었답니다.
“힘들지 않은가 보지?”
그러나 사실
이와 같은 되물음은 잘못된 것입니다.
즐거운 것이 곧 힘들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힘들어도 그 안에 즐거움이 충분히 있을 수 있고,
즐거움 안에도 힘든 부분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한마디로 고통 안에 기쁨이 있고,
기쁨 안에 고통이 있는 것이 우리 삶의 이치입니다.
그림자 없는 빛, 밤이 없는 낮,
오르막이 없는 내리막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가
“사탄”이라고 꾸중을 들은 이유는
이러한 삶의 이치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광의 그리스도는 고백하지만
고난 받으시는 그리스도는
받아들이지 않는 그의 생각은 삶의 이치에도,
하느님의 뜻에도, 구원의 신비에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가오는 고난과 역경을 피하려고만 하고
오직 평화와 기쁨만을 추구하려는 것은 아닌지요?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2월 21일 (금) [녹] 연중 제6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8,34―9.1
한 나그네가
눈보라를 헤치며 산을 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산길에 쓰러져
동사 직전에 있는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나그네는 쓰러진 사람을 도와주기에는
자신의 처지조차
감당할 수 없다 여기고서는 그냥 지나쳤습니다.
잠시 뒤 다른 나그네가 그 길을 걷다가
쓰러진 그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나그네는 ‘내가 이 사람을
구하지 않으면 죽겠구나.’ 하는 생각에 그를 업었습니다.
매서운 추위에도 나그네는 그를 업고
땀을 뻘뻘 흘리며 힘겹게 산을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가던 중에 그는 길가에
한 사람이 얼어 죽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자기보다 앞서간 그 나그네였습니다.
자기 처지만 생각하며 먼저 간 나그네는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죽었지만,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리려고
그를 업고 간 사람은 죽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쓰러진 사람을 업고 걸었기에
추운 날씨 속에서도 땀을 흘렸고,
이 때문에 두 사람이 체온을 주고받아 둘 다 살아남았습니다.
‘혼자서는 따
뜻할 수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자기도 따뜻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의미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흔히 십자가라는 단어가 나오면 ‘
고통’이라는 말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는
단순히 ‘고통’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기 잘못으로 말미암은 고통,
자신을 위하여 겪게 되는 고통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사랑을 나누고,
그 안에서 겪게 되는 고통이 십자가입니다.
그러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때,
다른 이도 살리고 우리 자신도 살 수 있습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2월 22일 (토) [백]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시어
당신의 지상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본디 고대 로마에서 2월 22일은
가족 가운데 죽은 이를 기억하는 날이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이를 기억하는 관습에 따라
4세기 무렵부터는 이날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무덤을 참배하였다.
이것이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의 기원이다.
그러나 6월 29일이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를 함께 기념하는 새로운 축일로 정해지면서,
2월 22일은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최고 목자로 공경하는 축일로 남게 되었다.
[복음묵상] 마태오 16,13-19
적은 수의 사람들과
미사를 드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많지 않아 강론 대신에
각자 나눔을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날 복음 말씀은 ‘밭 속에 묻힌 보물’의
비유(마태 13,33 참조)였습니다.
저는 이 복음 말씀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러분에게 보물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아내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가족이라고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음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나의 보물이 ‘예수님’이라고
말한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날 미사에 초대받은 개신교 신자였습니다.
신학생 때
선배 신부들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예전에 비하여 본당 주일 학교가 활성화되지 않아,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끌어모을 수 있을지
젊은 신부들이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고민 끝에 아이들의 문화를 성당에 도입하였습니다.
노래방 기계도 가져다 놓고, 댄스 교실도 운영하고,
운동도 마음껏 할 수 있게 하면
아이들이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처음 1년, 2년은
뜨거운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추풍낙엽처럼
아이들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러한 경험을 한 선배 신부들이
제게 들려준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주일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전해 주어야 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다.
그것이 기초가 되지 않는 한,
그 어떤 화려하고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도입하여도
잠깐은 반짝할 수는 있지만 머지않아 한계에 봉착한다.”
바오로 사도는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입니다.”
(필리 1,21)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
무엇을 모퉁잇돌로 삼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삶의 기초로 삼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도 같습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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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사제 서품식이 지난주에 있었습니다.
주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다짐과 소망 등이
미리 녹화된 동영상을 통하여 화면에 보여 졌습니다.
이 예식을 통하여 하느님과 함께 하고자 하시는
새로운 사제들에게 환호와 애잔함이 겹치는 시간이었습니다.
주님~! 새 사제에게 주님의 용기와 지혜를 주시어
사제생활동안 주님의 양을 잘 돌보게 이끌어 주소서,
아멘
-Berard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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