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9. 15. 일요일 (연중 제24주일)
복음: 루카 15,1-32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와 용서
오늘 전례의 주제는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신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의 세 개의 비유는
하느님의 ‘자비’가 드러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특히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에서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탕자의 비유’보다는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라고 하겠다.
복음 루카 15,1-32: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
복음에서도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예수님의 구체적인 자비의 행위로부터
가르침을 이끌어내며 찬미하고 있다.
예수님의 구체적인 자비의 행위는
당시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 된 행위였다.
즉 예수께서는 죄인들이라 하는 사람들을
‘친구’로 맞아들이시고
그들과 ‘음식을 나누시기까지’ 하신다.
이것을 두고
예수님을 비난하였을 때
예수께서는 이 아름다운
비유를 말씀하셨던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구원의 근거를
어떤 전례행위나 법적 실천
또는 단순한 도덕적 실천에 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실천적 행동으로써
하느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들으려’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받아들이신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는 실질적인 태도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죄인은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일 줄 모르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지
그분을 식사에 초대하는 세리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짜 죄인들은
바로 그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구원이 제시되고 있다.
비유에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태도가 단죄되면서
동시에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에게 베푸시는 용서와 사랑을
거절하지 말라고 호소하시는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세 개의 비유는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에서
하느님의 마음이 인간의 잘못과
배반에 비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것을
드러내면서 절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비유는
사순 제4주일에 보았기 때문에
앞의 두 비유에 관심을 집중하도록 하자.
‘잃어버린 양’의 비유는
죄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를 나타내고 있다.
하느님의 자비는 ‘의로운 사람들’보다
죄인들에게 더 크게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가는 목자의 모습은
구약에서 당신의 백성에게 지극한 관심을 보이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표현한다(에제 34,1-31; 예레 23,1-6 참조).
여기서 잃어버린 양을 되찾은
‘기쁨’의 의미가 강하다.
단지 목자의 기쁨만이 아니라
친구들과 이웃의 기쁨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커진 기쁨이 애타게 찾으려 할 때에 생긴
모든 걱정과 불안을 잊게 한다.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왔을 때에 보면,
형이 화를 내고 우울해 하는 대신에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32절) 하신다.
즉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에 대한”(7절) 기쁨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에 대한 기쁨이
더 크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 때문에 충격을 받아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굳어지게 한 역설적인 말씀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알아듣기 힘들었던 하느님의 논리이다.
이 기쁨의 논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보다 큰’ 사랑에 의해서,
그리고 멀리 있는 사람을 가까이 함에 있어서
극복해야할 ‘보다 큰’ 사랑에 의해서 성취되는 기쁨이다.
여기서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들’이란 있을 수 없으며,
이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거짓된 의(義)를 빗대어하신 말씀이다.
이 기쁨의 의미는
두 번째 비유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가난한 여자가 조금씩
돈을 모아 은전 열 닢을 마련하였다.
은전 한 닢은 농부의
하루 품팔이에 해당하는 돈이다.
때문에 그 중 하나를 잃어버렸을 때에는
마음이 아프고 그것을 되찾았을 때에는
얼마나 기쁨이 클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한낮에 등불을 켠다는 것은 창문이 없고
출입문은 낮아서 빛이 전혀 들지 않는
가난한 집을 연상케 한다.
등불까지도 그 여자의 기쁨을 더더욱 들뜨게 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선포하신 내용(마르 1,15)을 ‘복음’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바로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소식이기 때문이다.
이 ‘복음’이라는 말은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와 관심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것이다.
복음의 내용이 이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가 교회라고 하는 집안에
사랑과 용서를 선포함으로써만이 아니라
‘죄를 짓고’ 문을 두드리는
모든 형제들을 기꺼이 맞아들임으로써,
그 기쁨을
널리 퍼뜨리는데 헌신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보다 멀리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할지라도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놀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직 기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공간은 비록 죄를 지었지만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1절) 애를 쓰는 사람은
누구나 다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커지기 때문이다.
항상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실천하는 삶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항상 하느님께 되돌아가는 회개하는 삶이 중요하다.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주님께 은총을 청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 조욱현 신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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