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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9. 11. 수요일 (연중 제23주 수요일) / 송영진(모세) 신부님 강론

Berardus 2019. 9. 11. 04:26


2019. 9. 11. 수요일
(연중 제23주 수요일)
복음: 루카 6,20-26
<참 행복 선언, 불행 선언>


▲Annunciation
MURILLO, Bartolome Esteban 1660-65.Oil on canvas, 125 x 103 cm
Museo del Prado, Madrid



    루카복음과 마태오복음에 있는 ‘참 행복 선언’은, 단순한 ‘행복론’이 아니라 (행복해지는 방법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구원받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이고, 충실한 신앙인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참 행복 선언’에서 말하는 ‘행복’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 ‘행복’이 아니라, ‘하느님의 축복’을 뜻하는 말입니다. 즉 구원받은 사람들이 누리게 되는 ‘복된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참 행복 선언’은 세속에서 말하는 ‘행복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루카 6,20-.”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루카 6,24-.” 여기서 ‘가난한 사람들’은, 재물을 섬기지 않고 ‘하느님만’ 섬기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루카 16,13- ‘부유한 사람들’은 재물에서 위로를 받는 사람들이고, 하느님에게서 받는 위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부자들에 대한 예수님 말씀들이 많지만, 그 가운데에서 ‘낙타와 바늘귀’에 관한 말씀이 가장 유명합니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 -루카 18,24-25-.” 이 말씀의 뜻은 “부자는 부자인 채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입니다. 죽는 순간까지 재물을 움켜쥐고서 그것을 놓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자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재물에 대한 집착과 소유욕을 버리기만 한다면...) (재물에 관한 예수님 말씀들이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또 어떤 식으로든 반박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마음이 재물 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불편하게 느끼지는 않더라도 예수님 말씀들을 완전하게 실천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고, 또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재물과 가까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재물을 완전히 포기하면 살아갈 수도 없고, 신앙생활을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재물에 관한 예수님 말씀들은 ‘탁상공론’인 것만 같다.” 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정말로 예수님은 실천할 수도 없는 일들을 실천하라고 강요하시는 분일까? 예수님을 그런 분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신앙인이 되어서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 아닌가?)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루카 6,21ㄱ-.”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루카 6,25ㄱ-.”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먹이는 기적을 행하셨을 때. -루카 9,12-17- 만일에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에서 누구라도, “나는 지금 배가 불러서 빵을 먹지 않겠다.” 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의 빵을 거절한 사람이 있었다면? 그 사람은 ‘기적의 빵’을 못 먹었을 것입니다. (안 주셔서 못 먹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안 먹어서 못 먹은 것입니다.) ‘성체’도 마찬가지인데, 안 먹겠다고 하면 억지로 성체를 먹이지는 않습니다. 능동적으로 받아먹으려고 하는 사람만이 성체를 받아먹게 됩니다. (혹시라도 마음속으로 먹기 싫다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고 성체를 받아먹었다면? 그것은 성체모독죄를 짓는 일입니다.) ‘굶주림’과 ‘배부름’으로 표현되어 있긴 하지만, 예수님 말씀은 단순히 ‘먹는 일’에 관한 말씀만은 아니고, 은총을 받는 일 전반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은총은 받기를 갈망하는 사람이 받게 됩니다. 만일에 세속적인 어떤 것 때문에 배가 부른 상태여서 은총을 갈망하지 않는다면, 또는 은총에 대해서 아예 관심이 없다면, 그것은 은총을 받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자기가 거부해서 못 받게 됩니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루카 6,21ㄴ- .” “불행하여라, 지 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루카 6,25ㄴ-.” ‘지금 웃는 사람들’은 세속의 쾌락에 빠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는 사람들’은 ‘회개하는 사람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자기 죄에 대해서 슬퍼하면서 진실하게 회개하는 사람들은,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평화와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속의 쾌락에 빠져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나중에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루카 6,22-23-.”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루카 6,26-.” 이 말씀에서 사도행전에 있는 헤로데의 일이 바로 연상됩니다. “정해진 날에 헤로데는 화려한 임금 복장을 하고 연단에 앉아 그들에게 연설을 하였다. 그때에 군중이 ‘저것은 신의 목소리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다.’ 하고 외쳤다. 그러자 즉시 주님의 천사가 헤로데를 내리쳤다. 그가 그 영광을 하느님께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벌레들에게 먹혀 숨을 거두었다. -사도 12,21-23-.” 세속의 찬사에 취해서 하느님을 잊어버리는 것은 독약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거짓 예언자라는 점 때문에도 멸망을 향해서 가는 자들이지만, 세속의 헛된 명예만 추구한다는 점 때문에도 멸망을 향해서 가는 자들입니다. 충실한 신앙인들은 박해와 고난을 겪어도 굴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려고 노력하고, 그래서 하늘에서 상을 받게 됩니다. 물론 지금 겪는 미움, 추방, 모욕, 중상 등이 기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나중에 하느님의 상을 받게 된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 일들을 기쁨으로 견디어낼 수 있습니다. -사도 5,41- -송영진(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