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양 상선필 공소
1850년 경 최양업 신부가 경상도 지방 전교 중 설립한 공소
선필 신자촌은 간월 교우촌과 함께 언양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교우촌이며 상선필·중선필·하선필 등 자연 부락으로 나뉘어져 있다.
공소 설립 이전은 탑곡 공소 소속이었고, 경북 외남면과 경계를 이루며 고헌산 뒤편에 자리 잡고 있는 교우촌이다.
《벽위편》에 의하면 “1801년 주문모 신부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강이문(세례명 미상)이 언양으로 귀양감”이라고 나오는데 그 귀양지가 탑곡인 것으로 추측되므로
그 이후에 신자들이 살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강이문으로부터 전교를 받은 경주인 예씨(芮氏, 본명 미상)가 친족 5세대를 이끌고
이곳 선필로 옮겨 와서 1805년부터 예씨 일가의 교우촌을 형성하였다.
그래서 한때는 예씨네 골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 후 1815년 을해박해, 1839년 기해박해 때는 충청도와 경북 지방에서 피난 온 김씨,
이씨, 최씨 등이 예씨네 일가와 합세하여 큰 선필 교우촌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울주의 최 시몬 가정은 강원도로 피난을 갔다가 결혼 후 다시
고향 근처인 선필 교우촌으로 와서 대대로 한의원을 하면서 공소 회장을 맡아 봉사하고,
1891년에는 뒤테르트르(Dutertre, 姜良, 1866~1904, 레오)
신부를 3개월간 집에 모셨다.
한편 상선필의 공소는 원래 경주 내남면에 살던 경주 이씨가 치명을 당하자
그 후손들이 내와리의 탑곡으로 왔다가 다시 이곳 상선필에 들어 와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1850년 5월 주일 첨례를 봄으로써 공소가 처음 설립되었다고 한다.
처음의 공소 건물은 뒤테르트르 신부가 거처하던 집이었다.
이곳은 공소 설립 초기부터 많은 전교 신부들이 거쳐 갔다.
이미 공소 설립 이전인
1839년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1803~1839, 야고보) 신부가 1차와 2차로 전교를 하였고,
그후 1845~1849년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안토니오) 주교가
이곳 상선필에 들러 성사를 주었다.
그러다가 1850년경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경상도 지방으로 전교를 시작하면서
신자들이 모여들었고 실질적인 공소가 되었다. 1893년도 당시 상선필 공소의 회장은 최 시몬의 사위인 한광호 베르나르도였다.
그는 청주 한씨 집안으로 대대로 관직에 나아간 양반이었는데
그 선대 한용식 요셉 때부터
천주교를 믿고 몰락 양반으로서 계속 피난하며 다니다가 상선필로 들어온 집안이다.
자손들이 상선필(한광호 베르나르도), 하선필(광호의 큰 아들 한문필 베드로),
탑곡(광호의 조카 한경삼 시몬), 언양읍(광호의 둘째아들 한운필 타대오)으로 흩어져 살며
이주해 간 지역에서 교우촌을 이루었다.
초기 선조 신앙인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상선필 공소도
도시화의 물결 속에 휩쓸려 많은 교우들이 새 삶의 보금자리를 찾아 떠나 버리고
지금은 4세대 약 7명의 신자들이 옛날에 번창하였던
상선필 공소의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 뒤테르트르(Dutertre) 뒤테르트르(1866~1904) 신부는
1891년 한국에 들어와 이천 성당에서 사목 활동을 했다.
청일 전쟁과 동학 농민 운동을 겪으며 전교에 힘썼다.
강원도 이천과 원주에서 일어난 두 차례의 교안(敎案) 사건에 휘말려 곤경을 겪었다.
그 하나가 1900년 11월에 이천군 귀당(龜塘)에 사는 김순식과 김응섭 등이
성당을 파괴하고 뒤테르트르 신부를 폭행한 사건으로,
이른바 ‘뒤테르트르 신부 사건’이라고 하는 교안이다. 다른 하나의 교안은 1901년 원주에서 발생한 것으로,
뒤테르트르 신부가 강원도 관찰부에 함부로 들어가 관에 압력을 가했다는 오해를 받은 사건이다.
이러한 불행한 일들을 겪고도 계속해서 이천 성당의 사목을 담당하여 전교에 힘썼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공소 순방 중에 성홍열(또는 홍역)에 감염되어
1904년 3월 11일 평강(平康) 근처의 거릿말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 해는 그곳에서 멀지 않은 자치봉 언덕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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