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교구 / 수류 성당
수류 성당은 전동 성당과 함께
1889년에 설립된 유서 깊은 본당으로 1895년 9월까지
모악산 깊은 골짜기의 배재마을에 자리 잡았다가
그해 10월 수류에 부지를 매입해 평야지대로 나왔습니다.
동학혁명이 막 끝난 뒤라 성당이 들어서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주민들은 떠나고,
각처의 신자들이 이주해와 주민 모두가 신자인 교우촌을 이뤘습니다.
수류는 지금도
교우촌 명맥을 유지해 마을 주민 대부분이 신자이며,
성소의 못자리로서 많은 사제를 배출했습니다.
1907년 건립한 목조 성당이
1950년 인민군에 의해 전소되고
50여 명의 신자들이 순교하는 아픔을 겪은 후,
1959년 신자들이 손수 벽돌을 만들어 현재의 성당을 지었습니다.
1980년대 이후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면서 수류 성당은 노령화됐지만
이제는 젊은이들이 찾아오는 곳으로 탈바꿈하고 있습니다
2000년을 전후해 조성한 야영장과 수영장을 중심으로
주일학교를 비롯한 청소년들의 여름 수련장으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특히 2003년 개봉된 영화 ‘보리울의 여름’ 촬영지로 알려진 후
수류를 찾는 외부인도 부쩍 늘었습니다.
2009년 전라북도 김제시의
모악산 권역 종합개발 지역에 포함돼 야영장과 수영장,
교육관 등을 새롭게 보수한 수류 성당은
산촌생태마을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2010년 7월
수류청소년야영장 내에 산촌체험관을 건립해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산촌체험관의 건립으로 수류청소년야영장은 수영장과
숙박시설을 갖춘 청소년 수련시설로 거듭났고
숙박 문제로 순례에 어려움을 겪던 ‘아름다운 순례길’
이용자들에게도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수류 성당
전주교구 소속 본당. 전북 김제시 금산면 화율리 223 소재.
1889년 봄에 배재[梨峴]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1895년 10월 초 성당을 이전하면서 본당 이름을 수류 본당으로 바꾸었다.
주보는 성모 성탄.
배재 본당 시기 수류 본당은
1889년 베르모렐(J. Vermorel, 張若瑟) 신부가
완주군 구이면 안덕리(安德里)에 설립하였던 배재 본당이 그 모태로,
이곳 배재에 공소가 설립된 것은 1882년 가을
리우빌(A. Liouville, 柳達榮) 신부에 의해서였다.
그 후 베르모렐 신부가 고산 빼재(完州郡 雲洲面 九梯里, 일명 秀峙)에 거주하면서
1888년 가을부터 1889년 1월까지
전라도 남쪽 지방의 공소 판공을 치렀다.
한편 베르모렐 신부는 이곳 배재가
자신이 담당하는 공소들의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어
사목에 편리할 뿐만 아니라 외교인들과의 문제도 없어
본당을 설립하기에 편리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베르모렐 신부는 1889년 봄에
금구(金構) 배재 공소에 거처를 정하게 되었고,
배재 공소는 곧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그 해에
56명을 영세시킨 데 이어 안수룰(수류) 공소를 설립하였다.
▲성모자상
1893년 4월에는 조조 신부가 후임으로 본당에 부임하였으나,
이듬해 있었던 갑오 농민 전쟁으로 인해
7월 27일 성환(成歡)에서 청나라 패잔병들에게 체포되어
공주에서 마부 정보록(바오로)과 함께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한동안 보두네 신부와 비에모 신부가
배재 본당을 임시로 맡아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1895년 5월
3대 주임으로 부임한
라크루(M. Lacrouts, 具瑪瑟) 신부는
본당 발전을 위해서 굳이 이곳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같은 해 10월 초, 면 소재지가 위치한 수류로 성당을 이전하였다.
수류 이전과 본당 초기 현황
새 성당 소재지를 물색하던 라크루 신부는
이영삼 진사의 수류 재실(齋室)을 매입한 뒤
안채를 사제관으로, 행랑채는 임시 성당으로 개조하였으며,
1897년 9월에는 남교우청과 여교우청에
각각 십자가의 길 14처를 설치하였다.
이처럼 수류에 성당이 마련되자,
그 동안 제대로 미사에 참례하지 못했던 각처의 신자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옴으로써 수류는 이제
완전한 교우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라크루 신부에 이어
1900년 5월 4대 주임으로 부임한
페네(C. Peynet, 裵嘉錄) 신부는 1906년 1월에 성당 신축 공사에 착수하여
이듬해 8월(음) 48칸의 목조 성당을 완공한 뒤
10월 1일 드망즈 신부 주례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당시 수류 본당은 김제 · 부안 · 정읍 · 순창 · 고창 · 담양
장성 일대에 걸친 넓은 지역을 관할하였다.
또 본당에서는
교육 사업으로 1909년 3월에
인명학교(仁明學校)를 설립했는데,
설립 당시 학생수는 65명이었고 교사는 3명이었다.
인명학교는 1913년에 정식 인가를 받았으며,
1918년에는 여학교도 개교했으나 재정 상태가 빈약하여
학교 유지가 어려워짐에 따라 결국 1928년에
재인가를 받지 못하고 폐교하고 말았다.
▲성당 외부
한편 5대 주임 뤼카(L. Lucas, 柳嘉鴻) 신부 때에는
성가회(聖家會)에 가입하여 그 규칙을 지키는 가정이
100여 세대나 되는 등 신앙생활에 열심한 가정들이 많았으며,
그 후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교세가 급성장하자
본당에서는 인근의 본당들과 피정 · 성체 거동 행사 등을
합동으로 추진함으로써 공동체 활성화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1930년 초에는 4곳에 공소를 신설하였으며, 1
935년 1월에는 김 토마스와 최 시몬이 율치 공소에 야학을 설립하여
한글과 경문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또 1937년 2월에
8대 주임으로 부임한 석종관(石鍾寬) 신부는
이듬해에 원평 공소를 설립하고 공소 강당을 마련하였고,
9대 주임 최재선(崔再善) 신부는 교세 증가에 더욱 박차를 가하여
1940년 1월에 있은 김제 · 금산 · 수류 지역 회장과
유지들의 피정 때 각 지역별로 전교사 1명을 더 두기로 결정하였다.
일제 말에 이르러서는
지역민 400여 세대가 모두 신자가 되자
주민 교육은 곧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이 되었다.
이에 따라 10대 주임 이약슬(李若瑟) 신부는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돕는 한편, 관내 유일의 초등학교이던 ‘
화율초등학교’ 학생들의 교육을 전담시킬 목적으로
1944년 8월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를 초청하였다.
그러나 1950년에 발발한 한국 전쟁으로
본당 신자 50여 명이 사망하였고 성당마저 화재로 소실되었다.
성장과 변모 한국 전쟁으로 인해
수류 본당 관할 지역은 1951년부터 13대 주임 김반석 신부가 부임해 오는
1960년 3월까지 김제 본당에 편입되어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 지역 신자들은
1959년에 성당 · 사제관 · 수녀원을 건립하는 등
본당 승격을 위해 노력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1961년 4월 25일 교구의 지시에 따라
김반석 신부는 성당을 교통이 편리한 원평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후 1966년 4월 8일에 다시 수류로 환원되었는데,
이때 격하된 원평 공소를 1977년 12월에 본당으로 승격시키면서
금산면 · 봉남면 · 금구면 · 정읍군 옹동면 지역을 이관하였다.
▲교육관
한편 15대 주임 권영균(權寧均) 신부 때는
가톨릭 구제회의 지원으로 상화와 복호에 저수지 축조 사업을 벌여
극빈 신자들을 위한 구제 사업을 전개했고,
1980년 6월에는 사제관이 신축되었으며,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분원을 폐쇄한 지 30여 년 만인
1982년 3월에는 ‘미리내 성모 성심 수녀회’를 초청하였다.
그리고 1986년 3월에는 성당 내에 생필품 구판장을 마련하여
그 이익금을 주일학교 후원금으로 사용하였다.
[출처 : 김성희, 한국가톨릭대사전 제8권에서 발췌]
1980년대 이후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면서 수류 성당은
65살 이하는 청년회에 들어야 할 정도로 ‘어르신’ 본당이 됐다.
하지만 수류 성당은 이제 젊은이들이 찾아오는 곳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2000년을 전후해 약 7만㎡(2만여 평)의 부지에 조성한 야영장과
수영장을 중심으로 본당 주일학교를 비롯한
청소년들의 여름 수련장으로 새롭게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특히 2003년 개봉된 영화
‘보리울의 여름’ 촬영지로
일반에게 알려진 후 수류를 찾는 외부인들도 부쩍 늘었다.
2009년 전라북도 김제시의 모악산 권역 종합개발 지역에 포함돼
야영장과 수영장, 교육관 등을 새롭게 보수한 수류 성당은
2010년 7월 17일 수류청소년야영장 내에
산촌체험관을 건립해 축복식을 가졌다.
김제시의 산촌생태마을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건립된
산촌체험관은 연면적 905㎡(약 274평) 규모의 2층 건물로,
사무실 · 식당 · 주방(1층)과 큰방 2개 및 작은방 10개로 이뤄진
숙박시설(2층)을 갖추고 있다.
산촌체험관의 건립으로 수류청소년야영장은
수영장과 숙박시설을 갖춘 청소년 수련시설로 거듭나게 됐으며,
아울러 숙박 문제로 순례에 어려움을 겪던
‘아름다운 순례길’ 이용자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전망이다.
[최종수정 2011년 11월 14일]
▲ 제대와 십자가
수류 성당 : 120년 넘게 교우촌 명성 이어온 '성소 못자리'
어김없이 계절이 바뀌었다.
무상을 전하는 생명들의 몸짓이 아름답다.
사계를 두고 변해가는 자연의 색조가 마냥 경이롭기만 하다.
계절이 변할 때마다 풍경이 세상의 풍경만이 아니라
마음의 풍경으로 다가오는 까닭은
인간도 어김없이 자연에 순응하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창조 질서에 순응하며 믿음을 키워가는 아름다운 사람들과
마음의 풍경을 함께 산책하기 위해 믿음의 고향
김제 수류 성당을 찾았다.
김제는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지역이다.
추수가 끝난 광활한 벌판을 따라 후백제 견훤의 한이 서린 고찰
금산사가 있는 금산면을 지나 화율리로 들어서
한가한 시골길을 한참 가다보면 상화마을이 나온다.
수류 성당은 상두산을 마주한 상화마을 입구
넓은 언덕배기에 자리잡고 구원에 목마른 순례자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수류 본당은 전주 전동 본당과 함께
1889년에 설립된 유서 깊은 본당이다.
신앙의 힘으로 뿌리내리고 친교로 새순을 내밀어
사랑으로 복음의 열매를 맺어온 지난 세월의 경륜을 웅변하듯
성당 맞은편에는 족히 100년은 넘어 보이는
아름드리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당산나무인 듯한 이 고목이 성당과 어울려
운치 있는 풍경을 자아내는 것이 여간 정겹지 않다.
수류 성당이 자리잡기 전 당산나무 그늘 아래에 몰려든 사람들이
신분 구분이 없었듯이 성당을 찾는 이들도 높고 낮음이 없으니
얼마나 조화로운가! 수류성당의 이러한 조화로움이
마음의 풍경으로 다가온다.
▲성 요셉상
수류 본당은 1895년 9월까지
모악산 깊은 골짜기에 있는 배재마을
(현 전북 완주군 구이면 안덕리)에 자리 잡았다가
그해 10월 수류에 있는 전주 이영삼 진사의 재실을 매입,
심산궁곡을 떠나 평야지대로 나왔다.
당시 주임이었던
라크루(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는
재실을 성당과 사제관으로 개조해 사용했다.
당시는 동학혁명이 막 끝난 뒤라
마을에 성당이 들어서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주민들은 떠나고,
그동안 제대로 미사에 참례하지 못했던 각처 신자들이 이주해와
주민 400여 가구가 모두 신자인 완전한 교우촌을 이루었다.
수류는 지금도 교우촌 명맥을 유지해
마을 주민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다.
현 수류 성당은 1959년에 다시 지은 벽돌조 건물이다.
이전 성당은 프와넬(파리 외방전교회) 신부가 설계해 1906년 착공,
이듬해 8월에 준공한 48칸의 목조건물이었는데
그 모습이 익산 나바위 성당과 흡사했다고 한다.
이 목조 건물은
1950년 9월 24일 인민군들과 빨치산들이
주일미사에 참례하기 위해
성당 안에 모여 있는 신자들을 몰살하고자
성당에 불을 질러 전소됐다.
다행히 성당에 갇혀 있던 신자들은
화마를 피해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었으나
인민군과 빨치산에게 체포돼 50여명의 신자가 순교했다.
또 수류에 피란(避亂)와 있던 당시 전주 교구장 김현배 주교와 신부 8명,
수녀 14명이 체포돼 전주 교도소와 원평 교도소,
금산면 내무소로 압송되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휴전 후 수류 본당 신자들은
구호물자를 적립해 성당 신축 경비를 마련했다.
신자들은 소실된 옛 성당처럼 목조 건물을 짓지 않고
직접 냇가에서 모래와 자갈을 채취해와 벽돌을 만들어 성당을 지었다.
성당 지붕은 옛 성당이 불탈 때 주워 모아두었던 함석을
그대로 사용했다.
수류 성당은 이렇듯 한국전쟁 순교자들의 피흘림과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 자신의 안위보다
하느님 성전을 먼저 지은 신자들의 희생으로 지어졌다.
마치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을 찾아낸 사람이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사듯(마태 13,44 참조) 수류 신자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연장시켜줄 양식을 내다팔아
세상의 보물보다 더 값진 하느님의 집을 지은 것이다.
성당 내부는 단순하다.
너무 단순해 오히려 돋보인다.
나무로 치장된 제단에는 장막 위에 세워진 십자가와
그 양편에 성 요셉상과 예수성심상이 장식돼 있다.
또 감실 앞에는 성모자상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벽면 양편에 십자가의 길 14처가 설치돼 있다.
이것이 모두다. 더 이상의 장식은 하나도 없다.
군더더기 없이 전례와 기도에 필요한 것으로만 꾸며져 있다.
▲성당 내부
수류 성당은 2004년 지붕 교체작업을 벌였다.
인민군 방화에도 이겨낸 함석들이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삭아 곳곳에서 비가 샜기 때문이다.
오늘의 수류 신자들도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그랬듯이
경제가 최악으로 어려운 이때,
특히 수입 농산물 개방으로 농촌 살림이 궁핍해질 대로 궁핍해진 이때
자신의 것을 내놓아 성전을 보수하고 있다.
수류 성당은 신부님과 스님이 지도하는
두메산골 어린이 축구팀의 이야기를 그린 가족영화
'보리울의 여름' 촬영지가 되면서 일반인들에게 최근 많이 알려졌다.
영화에 나오는 화율 초등학교는
수류 본당이 1909년 개교해 해방 때까지 운영해 왔던
인명학교의 후신이다.
영화에 나오는 수류 성당의 서정적 풍경에 매료된 관광객들과
사진가들이 지금도 수류 성당을 찾고 있다.
성당 뒤편 옛 돌담길과 마을을 가로지르는 개울,
계단식 논과 밭, 그리고 야트막한 농가들,
수류 성당이 있는 상화마을이 더욱 마음의 풍경으로 다가오는 것은
사랑이 있는 삶터이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300여명 신자들이 마을을 이루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수류는 김영구ㆍ정재석ㆍ서정수 신부 등
본당 출신 사제 15명을 배출, 옛 교우촌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출처 : 평화신문, 2004년 11월 21일, 리길재 기자,
-내용 일부 수정(최종수정 2011년 11월 14일)]-
■ 순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