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이루는 사랑의 불쏘시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는 은총에 은총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증언하신 참사랑은
갈등과 분열로 잃어버린 평화를 다시 찾는 원동력이 됩니다.
연중 제20주일의 복음 말씀은 힘들더라도
그리스도인이 평화를 이루는
사랑의 불쏘시개가 되라는 부르심으로 들립니다.
제1독서에 나오는
예레미야 예언자는
치드키야 임금 때(기원 전 6세기)
예루살렘이 바빌론 군대에 점령당하고,
지도자들은 유배지로 끌려가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처절한 시기에 산 증인입니다.
이스라엘을 도우러 이집트 군대가 출동하자
바빌론군은 일시적으로 포위를 풀고
물러가는 것(예레 37,5)을 본 대신들은
하느님께서 구원해 주신 것으로 착각합니다.
예레미야는
"바빌론 군대는 물러가지 않고
도성을 불태울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예레 37,9)을 선포합니다.
대신들은 그의 말이 군인과 백성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재앙을 바라니 그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선동합니다.(예레 38,4)
유약한 임금은 그를
저수동굴에 가두지만 그는 타협하지 않고 대립합니다.
유다 지도자들에게 반대의 표적이 되어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로마 4,18)
믿음에 충실한 동정 마리아와 사도들과
수많은 신앙의 증인들이 우리의 수호자이니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가자고 촉구합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고
부활의 영광 속에 '영원한 도성'(히브 13,14)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계시는 믿음의 영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로 사랑의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 하십니다.
아람어 문화권에서 '세상'은
진흙으로 만든 '화덕'으로도 풀이됩니다.
화덕의 연료는 동글납작하게 만든
낙타분에 소금을 뿌려 말린 것입니다.
소금은 연료를 태우는 촉매제(불쏘시개) 역할을 합니다.
소금이 불쏘시개 역할도 하지 못한다면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맙니다.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평화를 누리라는 가르침으로 새깁니다.
(마태 5,13; 마르 9,50; 루카 10,34)
성경에서 “불”은 하느님의 현존이고,
변화시키는 성령의 힘을 나타냅니다.
엘리야가 가르멜 산에서 바알 예언자들과 대결할 때
그가 기도하자 주님의 불길이 번제물을 태웠습니다.
(1열왕 18,38)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루카 3,16)이라고 설교했습니다.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은
제자들의 마음을 채우고
내면을 정화시켜 사랑의 불을 타오르게 했습니다.
사랑의 불이 타오르려면
주님께서 받아야할 세례가 있습니다.
세례는 순교의 은유적 표현(루카 12,50)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수난과 십자가로
세례의 원천(마르 10,38; 요한 19,34)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세례는 옛 삶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새 삶을 시작하는 거룩한 성사요 은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반대의 표적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아우성치던 군중 심리를 예견하신 것일까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주시는
주님(요한 14,27)의 말씀이 우리를 일깨웁니다.
세상의 평화는
전쟁이 없는 힘의 균형 상태나
심리적인 안정을 두고 말합니다.
군비경쟁이 지속되는 한
힘의 균형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인권이 무시되고, 불의와 불신,
교만과 위선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마음의 평화를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의 평화(shalom, irene)는
하느님의 본성, 강복, 안심, 안녕, 풍요,
번영, 조화, 화해, 기쁨, 완성 등 적어도 열 가지의
의미(사회교리 488-495)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평화는
주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때
내려지는 하느님의 선물임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을 것인가 아닌가가 분열의 기준입니다.
믿음은 영성생활의 기초입니다.
주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요한 5,24)
믿음이
우리의 영혼 안에 자랄수록
성령의 불은 타오르기 마련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응답하여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때
성령의 선물인 평화로 주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할 때
신앙공동체의 참 가족이 됩니다.
(마태 12,50; 마르 3,35; 루카 8,21)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진리의 말씀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교 인도주의에 이바지하는 것이
인간다운 세상을 건설하는 길입니다.
애덕의 실천에는 가난한 이들의 생계보장과
의료서비스 같은 문제에 우선적인 배려가 요구됩니다.
예수님을 알면 사랑의 계명을 지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은 삶의 최고의 규범입니다.
참사랑은 진리 안에서 인간을 변화시키는 완덕의 최고봉입니다.
성체성사와 생명의 말씀이
일치의 원동력이 되고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순례의 여정에서 이기와 위선과 교만을 태워버리고
주님과 함께 사랑의 불쏘시개가 될 때
하느님의 선물인 평화가 주어집니다.
주님의 평화는 믿음에서 오는
“나의 기쁨이요 나의 평화”(요한 15,11)입니다.
-김창선(요한 세례자) 가톨릭영성독서지도사-
-▲명동성당의 야경-
[한주간 전례]
2019년 8월 19일(월) [(녹)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9,16-22
오늘 독서는
판관들이 다스리는 동안에
선택된 백성의 역사를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느님을 포기하고
그들의 현실적인 욕망을
채워 줄 수 있는 다른 신들을 섬기며,
이집트 종살이 탈출과 해방,
곧 구원의 큰 행위를 잊어버리고
늘 똑같은 죄를 저지릅니다.
주님의 진노와 처벌은 그들의 행실에 따른 결과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들의 잘못으로 다시
억압과 종살이의 상황에 빠집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시려고 판관들을 세우십니다.
판관들은 하느님께 용서를 빌고 중재합니다.
그러나 판관이 죽은 뒤에 그들은
하느님의 눈에 악한 일을 다시 저지릅니다.
이는 참으로 인간이 저지르는 죄의 단조롭고 슬픈 역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회개로 이끄십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모든 상황에서
그리고 저지른 모든 죄악에도 아랑곳없이,
하느님을 믿고 충만한 생명을 회복하려고
자비로우신 주님께 돌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충실은 인간의 불충실보다 탁월합니다.
오늘 복음은,
인간적인 충실은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면서
우리에게 외적인 가르침을 제시합니다.
마음에 들어찬 재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유롭고 전적으로 따라가는 것을 가로막습니다.
많은 재물을 가진 사람은 옛 법을 충실하게 지키지만,
복음의 새로움을 향하여 확실하게 뛰어들 용기를 갖지 못합니다.
참된 보물을 차지하려고
모든 것을 멀리하는 것이 성공적인 인생의 비밀입니다.
여기에서 재물은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을 가로막는 온갖 애착을 상징합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2019년 8월 20일 (화)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베르나르도 성인은
1090년 프랑스 디종의 근교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그는 시토 수도회에 입회하였고,
뒤에 클레르보 수도원의 아빠스(대수도원장)가 되었다.
베르나르도 아빠스는 몸소 모범을 보이며
수도자들을 덕행의 길로 이끌었다.
또한 그는 교회의 분열을 막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신학과 영성 생활에 관한 저서도 많이 남겼다.
1153년에 선종한 베르나르도 아빠스를
1174년 알렉산데르 3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1830년 비오 8세 교황은 성인을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복음묵상] 마태오 19,23-30
오늘 독서는
기드온이 하느님의 선택을 받고
미디안족의 손아귀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파견을 받는 내용입니다.
모세와 비슷하게 부르심을 받은 기드온은
자신이 하느님의 사명에 부적합한 사람임을 알고 있습니다.
"저의 씨족은 므나쎄 지파에서 가장 약합니다.
또 저는 제 아버지 집안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가장 보잘것없는 집안의
가장 약한 씨족에서
이렇게 약하고 무의미한 도구를 선택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기드온과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나약하고
무능력하다고 느낄 때,
우리의 수단이 우리에게 맡겨진
활동에 부적합하게 나타날 때,
사방에서 온갖 형태의 환난과,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극복할 수 없는 장해물이 다가올 때,
우리는 실망해서는 안 됩니다.
좌절하고 한탄하기보다는
주님에 대한 신뢰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재물의 위험을
경계하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재물은 일상생활에서
엄청난 특전을 가져다줍니다.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고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에
넉넉한 예물도 바칠 수 있고
많은 호의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재물은 도움이 아니라
시기와 질투를 일으키는
주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입니다.
부유한 사람의 상황은
영적인 관점에서 위험할 수 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도 재물을
자기 삶의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재물에 매인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재물을 멀리하고 재물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하늘 나라에 쉽게 들어가며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힘만이 이런 자유를 행사할 수 있게 합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을 것입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2019년 8월 21일 (수) [백]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비오 10세 교황은
1835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858년 사제품을 받은 그는
20년 가까이 본당 사목자로 활동하다가
만투아의 주교와 베네치아의 총대주교를 거쳐,
1903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비오 10세 교황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재정립하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광대한 교회법을 현대화하여
새 법전을 편찬하고, 성무일도서도 개정하였다.
또한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 생활을 해치며
교회를 위협하는 오류들에 대항하여 싸웠다.
1914년에 선종한 비오 10세 교황은 1954년에 시성되었다.
[복음묵상] 마태오 20,1-16
오늘 독서는
기드온의 아들
요탐이 들려준 우화를 통하여
아비멜렉이 시도한 군주제를 비판합니다.
그러나 언젠가 군주제는 이스라엘의 유일한 임금이신
하느님과 경쟁 상대처럼 불신하는 자세로든,
임금 자신들이 부당한 수단을 동원하든 시작될 것입니다.
정권에 야망 있는 사람들에게
이 우화는 겸손에 대한 큰 교훈입니다.
명령한다는 것은 생산적인 활동이 아닙니다.
일하고 생산하는 사람들이 없다면
명령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포도밭 주인의 선함을 강조합니다.
밭 임자는 자기 포도밭에 일하러 온
다양한 일꾼들(이른 아침, 아홉 시쯤,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과 계속 합의합니다.
그러고는 저녁때가 되자 일꾼들에게
모두 똑같은 품삯을 지불합니다.
맨 먼저 온 이들은
주인의 대우가
부당하다며 불만을 터뜨립니다.
그러나 주인은 저마다 계약을 맺은
품삯을 주었기에 부당하지 않고,
맨 나중에 온 이들에게 맨 먼저 온 이들과
똑같은 품삯을 주었으므로 선하다고 말합니다.
하느님 나라와
비교 대상은 주인도,
일꾼도, 포도밭도 아니고,
통상적인 하루 노동의 품삯이며
모두가 똑같이 받는 한 데나리온입니다.
선한 주인은 거저 주시는 하느님을,
일꾼들은 사람들을 나타내고,
포도밭의 일은 사람들이 하는 일을 나타냅니다.
이 비유는 대부분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다인들로 이루어진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위한
마태오 복음사가의 교리 교육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새 백성은
포도밭에 맨 먼저
부름을 받은 이들과 같은
이스라엘 사람들뿐만 아니라
맨 나중에 부름을 받은 이들인
이방인들로도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받아들여야 하였습니다.
이것은 열려 있는 선교의 결실입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2019년 8월 22일 (목)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1900년 무렵부터 마리아께
'여왕'의 영예가 주어져야 한다는 요청이 많았다.
1925년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이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정해지면서 이러한 요청은 더욱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1954년 비오 12세 교황은
마리아께서 여왕이심을 선언하고
해마다 5월 31일에 그 축일을 지내도록 하였다.
그 뒤 로마 전례력의 개정에 따라,
마리아를 천상 영광에 연결시키고자
성모 승천 대축일 뒤로 옮겼으며,
축일 이름도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로 바꾸었다.
이날 교회는 성모 승천의 영광을 거듭 확인하며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우리를 위한 구원의 도구가 되신 것을 기린다.
[복음묵상] 마태오 22,1-14
오늘 독서는
입타 이야기를 통하여
잘못된 개념을 수정하려는
하느님 교육의 본보기를 보여 줍니다.
입타는 암몬 자손들에게
승리를 거두고 싶어 주님께,
그가 무사히 돌아갈 때,
그를 맞으러 집 문을 처음 나오는 사람을
번제물로 바치겠다고 서원합니다.
그는 서원한 약속을
물리칠 수도 없고
하나밖에 없는 딸을 바쳐야 하는
종교적 양심의 곤경에 놓입니다.
하느님께 약속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바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어떤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을 준비하는 잔치에 비유하십니다.
혼인 잔치에 다양한 사람들을 초대하였지만
저마다 다른 이유로 참석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임금이 다시 보낸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임금은 살인자들의 고을을 파괴하고,
처음에 초대한 이들은 제외하고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초대합니다.
잔칫방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손님들로 가득 찹니다.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
곧 예언자들의 소식을 통하여
새 인류와 교회의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소개하시는 임금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맨 처음 초대를 받았던
유다인들에게 거부를 당하셨을 때,
하느님께서는 하느님 나라 잔치의 문을 모든 이,
곧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 죄인과 세리,
이교인과 이방인에게 열어 놓으십니다.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의 교회,
새 계약의 백성인 하느님의 새 이스라엘을 이룰
하늘 나라의 복음을 새롭게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살인자들이 살던 고을의 파괴는
분명 기원후 70년 티투스의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성전을 파괴한 것을 말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예수님의 종말론적 설교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하느님의 최후 심판의 예고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성전의 파괴로 구약 성경의 끝을 뜻합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2019년 8월 23일 (금) [(녹)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22,34-40
오늘 독서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뒤를 따르려고
고향과 종교를 버리는
룻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룻기는 이스라엘의 국경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구원 역사의 보편적인 소식을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 백성에 속하지 않으면서 더욱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멸시하던 모압 사람 룻이,
과부인 시어머니에게 충실함과 극진한 사랑을 보여 주면서,
뒷날 베들레헴의 가정으로 이어지는 구원의 연결 고리가 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바리사이들 간에
벌어진 논쟁에서 전개됩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은 라삐 학교가
모세 법을 갈라놓았던
613개의 계명을 감추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대화를 나누는 이들에게
잘 알려진 성경의 본문을 상기시키십니다.
먼저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 관해서
모든 경건한 유다인이
아침과 저녁마다 반복해서 바치던
'쉐마'(이스라엘아, 들어라!: 신명 6,4) 기도를 인용하십니다.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에 관해서는
레위기 본문(19,18)을 상기하십니다.
레위기에서 이웃의 개념은
친척과 같은 나라 사람만을 뜻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모든 남자와 모든 여자로 확대하십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주는 새로움은
두 가지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형제에 대한 사랑을
주님의 법의 핵심이요 본질로 정의하십니다.
그다음, 예수님께서는 법의 전문가들이
하느님과 이웃을 서로 달리 구분된 것으로,
그래서 다른 수준에서 해석하고 설명하던
두 계명을 통합하시고 이를 동일하게
여겨야 할 원칙과 요약으로 나타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은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 곧 성경 전체를 요약해 줍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2019년 8월 24일 (토) [홍]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갈릴래아 카나 출신이다.
필립보 사도가 인도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된
나타나엘과 동일 인물로 보고 있다(요한 1,45-51 참조).
예수님께서는 그를
참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칭찬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47).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주님께서 승천하신 뒤 인도와 터키로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아르메니아에서 순교하였다.
[복음묵상] 요한 1,45-51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첫 제자를 부르신 다음
필립보와 나타나엘을 만나시는 장면을 다룹니다.
예수님의 명성은 시리아 전역에 퍼져 있었습니다.
당시 나자렛 마을에 사는 주민의 상당수는
이교인들이었으므로, 유다인들 사이에서
이 마을은 경멸과 무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베드로와 야고보와 필립보는
예언자가 나오지도 않고 좋은 것이 나올 수도 없는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필립보와 나타나엘은 이미
율법과 예언서를 공부한 사람이므로 생각이 깊습니다.
그런 필립보가 "나를 따라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어느 누구에게 들은 일도 없으면서
곧바로 그분께 순종합니다.
그는 마치 기쁜 소식을 알려 주는 전령처럼
자기 동생 나타나엘에게 달려가,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서
성경이 말하는 그분이시라고 알려 줍니다.
"나자렛 출신"이라는 말을 들은
나타나엘은 의미심장한 반응을 보입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이 말은 듣는 사람마다 의심으로
또는 확인의 물음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나타나엘은 필립보가 들려준 말보다
성경에서 메시아는 베들레헴,
곧 다윗의 고을에서 나와야 한다는
예언서의 말을 존중하고 있었으므로,
불완전하지만 메시아에 대한
신앙 고백을 하게 됩니다.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이런 나타나엘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
거짓이 없는 사람"이라고 칭찬하십니다.
이런 만남으로 나타나엘은 그리스도께 충실하면서
나중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한 명으로 특별한 증인이 될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야곱이 꿈속에서 본 환시,
땅에서 하늘까지 닿아 있는 층계처럼,
그리스도를 하늘과 땅을 연결해 주시는 분으로
우리에게 드러내 주십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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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도
이젠 한풀 꺽일 기세입니다.
가을바람과 함께
주님께 묵상하는 한 주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