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
호리지차 천리지류(毫釐之差 千里之謬).
털끝만큼의 차이가
돌이킬 수 없는 착오를 낳는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차이인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가갈 수
없을 만큼의 거리로 벌어진다는 뜻이다.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그른 것은 그른 것이지
적당히 옳고 적당히 그른 것이란 없다.
애초에 털끝의 차이라 해도 차이는 차이이며
극복할 수 없는 간격도 거기서 비롯된다.
그러니 첫발을 어떻게 떼느냐가
그 이후의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마음에 거리끼는 미세한 가책을
무시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루카 13,26)
오늘 복음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
시도하던 자들이 집주인에게 했던 말이다.
언뜻 보면 이들은 항상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던 사람들처럼 보인다.
외견상 주님과의 거리가 매우 가까워
잘 지내는 듯 보이지만
어딘가 서먹함과 거리감이 느껴진다.
그렇다고 딱히 뭐라 비난할 구실도 없어 보인다.
그런데 다음 구절에서 주인은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루카 13,27)
그들이 조금
부족하다 해도
늘 함께 있었던 사람들에게
하는 말 치고는
그 비난의 수위가 높다.
하지만 그들의 어정쩡하고
방관자적인 삶은
시작부터 이러한 결과를
이미 내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들은 주인과 함께 있기는 했지만
한 번도 주인의 삶에
깊이 동참하지 않았던 자들이다.
주님의 기쁨과 슬픔을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보기만 했고,
그래서 타인으로부터
비난받지 않을 정도로만 살았던 사람들.
처음의 미온적 태도가
비록 깃털처럼 가벼운 것이었을지라도
마지막에 가서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주인과 항상 함께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그들이 불의를 일삼는 자들이라
비난받으며 거부된 이유는 무엇일까.
구원받을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라 질문한 그는
아마도 유다인이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만으로
구원될 수 있다는
선민의식(選民意識)에 젖어 있던 사람이다.
그들에게 구원이란
이스라엘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공허한 이념의 산물일 뿐이다.
이러한 이분법은 유사 이래 계속돼 온 이데올로기다.
귀족인가 아니면 평민인가.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정략적 결혼과 인간적 욕망, 위선,
거짓을 감추기 위한 몇 가지
교양 있는 태도를 익히는 것뿐이다.
구약의 후계자라 자처한 바리사이들이
그토록 율법을 강조한 것도 같은 이유다.
자신의 인생을 진심으로 책임지고
한발 한발
성실하게 걸어가는 것을 생략하고
글자와 이념에 숨어 사는 삶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반사되는
우아함만으로 내면의 위선과 욕망을
감추는 정도가 그들에게 최선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역시 적당한 선에서 단절된다.
상대방의 아픔과 슬픔에
진정으로 동참하지 못하고
고고한 자세로 바라보거나
점잖게 훈계하려 들 뿐
참으로 나누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이 속해 있던 자기들만의
리그에 할당된 영토는 너무나도 협소하다.
그들은 정말 어디에서 온 '사람'들일까.
그들이 사는 세계를
대다수의 평민들은 알지 못한다.
주인의 질문이기도 하다.
스스로 선택됐다는 우월감으로
좁은 문에 서 있던 자들은
그 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들에게 그렇게나 좁았던 문이
어느새 모든 이에게 활짝 열려 있는
대문으로 변모하는 아이러니를 오늘 복음에서 만난다.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루카 13,29)
사방(四方)에서 몰려든 사람들이란
선민의식이라는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던
이스라엘에게서 배척된 이들이다.
소위 이방인이라 불리는 사람들.
그들이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기 위해
어떤 수고를 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자신들의 출신 성분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잔치에 초대됐다는 것이며
그들은 그것에 응답했다는 사실이다.
이제 하느님 나라에는 특정한 자격 요건이 필요하지 않다.
제1독서에서
"나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모으러 오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보리라“
(이사 66,18)라고 한
주님의 말씀처럼 모든 이에게
하늘나라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그런데도 '자신들만' 초대됐다고 여기는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위해
그 문을 스스로 좁게 만들었다.
이것이 그들이 결국 하느님 나라 잔치에
참여할 수 없게 만든 원인이다.
모든 이에게 열려 있던 문을 좁은 문으로 만든 자들은
하느님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라고 하신 말은
하늘나라의 문이 정말로 좁다는 말이라기보다
너희들 스스로 만들어 놓은
그 좁은 문으로는 하늘나라에 들어 올 수 없다는
경고에 더 가깝다.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신분 상승을 어렵게 만든 귀족적 혈연이나
우리사회의 상류계급이 세워 놓은 계층 바리케이드는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좁은 문이다.
하느님 나라에 초대된 수많은 이방인들과
좁은 문을 통과하기 녹록지 않은
이스라엘의 차이는 아주 미미한 것이었다.
삶으로 동참할 것인가
아니면 삶을 이념과
계급에 가둬 둘 것인가의 차이다.
특권 계층에 속해 있다는 이념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할 뿐 아니라
행복하고 인간적인 삶조차도 보장해 줄 수 없다.
세련되지 않고 투박하더라도
진지하게 일궈 나가는 매일의 삶 안에
구원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소위 좋은 가문과 배경을 바탕으로
성공한 사람의 맵시보다
햇볕에 그을린
어머니의 얼굴과
노동으로 거칠어진 아버지의 손마디가
더 아름답게 여겨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에게 아름답게 보이는 삶이
하느님 보시기에도 그런 것이다.
계급사다리의 상층부라고해서
그것이 하늘과 가까운 것도 아니요
행복을 보장해 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른 사람이 그 위치에
오르지 못하게 한 좁은 문이
스스로를 가둘 것이다.
물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만으로
그 문을 통과할 수 없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작은 차이가
천 리나 되는 거리를
만드는 것이라면
그 거리를 좁히는 것도
작은 변화에서 시작된다.
회개를 통한 용서의 은총은
우리에게 허락된 넓은 문이다.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인생은 짧고 하느님 나라의 시간은 길다.
-서강휘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기획처장-
[한주간 전례]
2019년 8월 26일(월) [(녹)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23,13-22
오늘 독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여러분을 모두 기억하며 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바오로 사도는 신자들이 그동안 겪은 역경과
박해에도 그들이 보여 준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노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항구한 희망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사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인간의 활동이 아니라
하느님과 우리를 인격적인 관계로
맺어 주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늘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임을 일깨워 줍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두고 "불행하여라,
너희 ……들아!"로 시작하는
예수님의 세 가지 불행 선언은,
각각 하느님 나라,
개종자를 얻으려는 행위,
맹세에 관한 것이며
그들의 위선을 꾸짖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모습과 종교를 왜곡하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의 태도는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열린 마음과 열정과 기쁨도 없이
무미건조하게 하느님을 믿는 이들을 주변에서 봅니다.
이런 태도는 마음은 멀어지고
입술로만 하느님을 공경하는 헛된 예배 행위입니다.
나아가 이는 '늘 해 오던 것'만 굳게 지키며,
새로운 바람을 두려워하여
시대의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철저한 전통주의를 고집하며
오래된 옷과 가구의 냄새를 제거하는
신선한 산들바람에 창문을 닫게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하려면 인간의 대답,
곧 믿음은 행실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믿음은 매일의 삶을 살아가는
능동적이고 역동적인 힘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믿음과 사랑은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믿음과 삶의 분리,
믿는 것과 행동하는 것의 분리,
생각과 말과 행위의 분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2019년 8월 27일 (화) [백] 성녀 모니카 기념일
모니카 성녀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어머니로,
332년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의
타가스테(오늘의 알제리의 수크아라스)에서 태어났다.
신심 깊은 그녀는 남편을 개종시키고,
방탕한 아들 아우구스티노의
회개를 위하여 정성을 다하였다.
마니교에 깊이 빠져 있던
아우구스티노가 회개하고
세례를 받게 된 데에는 어머니 모니카의
남다른 기도와 노력이 있었다.
그녀는 아들이 회개의 길로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은
387년 로마 근처의 오스티아에서 선종하였다.
모니카 성녀는 그리스도교의
훌륭한 어머니의 모범으로서 많은 공경을 받고 있다.
[복음묵상] 마태오 23,23-26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할 때마다 환난과 박해,
극적인 상황을 자주 접해야 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을 통하여 알 수 있듯이,
필리피에서 바오로와 그의 동료는
사람들에게 붙잡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하느님을 찬미하며
기도를 드렸습니다(16,16-40 참조).
고난을 겪고
모욕을 당한 사람은
보통 용기를 잃고 자신의 활동을
계속할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안에서 용기를 얻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느님의 선물로 여깁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자세도 일러 줍니다.
자녀들을 품에 안은 어머니처럼
신자들에게 따뜻한 애정을 보여 주고,
그들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려는
희생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두고,
십일조와 의식의 순수함에 대한
그들의 위선을 지적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접적이고 대조적이지만,
성경에 비추어 하늘 나라의 의로움에 따라
종교적 특성을 새롭게 정리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율법을 지키셨고
또 인정하셨습니다(마태 5,20 참조).
작은 일을
잘 지키려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계명의 핵심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존경하는 의로움과
나약하고 비천한 사람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는 자비,
그리고 하느님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되는 계약의
근본적인 조항을 잊지 않는 신실입니다.
(마태 22,34-40 참조).
외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행실은
올바른 마음과 일치해야 합니다.
마음의 회개와 내면적인 승리는
행실을 늘 더욱 좋게 만들어 줍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5).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2019년 8월 28일 (수) [백]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354년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의
타가스테(오늘의 알제리의 수크아라스)에서
모니카 성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즐기는 가운데
마니교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 모니카 성녀의
끊임없는 기도와 이탈리아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영향으로 회개하고 입교하였다.
391년에 사제가 된 그는 5년 뒤 히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아우구스티노 주교는 이단을 물리치며
교회를 수호하는 데 일생을 바치는 가운데
참회의 자서전 「고백록」 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430년에 선종한 그는 중세 초기부터
'교회 학자'로 존경받고 있다.
[복음묵상] 마태오 23,27-32
바오로 사도는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고 "경건하고 의롭게
또 흠 잡힐 데 없이" 살면서
복음을 전한 자신의 삶을 들려줍니다.
그는 공동체 앞에서 설교하거나
대화를 나누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아버지가 자녀들을 대하듯
신자들이 참으로 성숙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격려하며,
하느님께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강조합니다.
또 신자들이 복음을 인간의 작품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으로 받아들인 사실에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을 주제로,
외적으로 깨끗한 행실과는 대조적으로
내적으로 타락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지적하며 비난하십니다.
무덤에 회를 칠하는 팔레스티나 관습은,
무덤을 쉽게 알아보게 하여 지나가는 사람들이
무덤을 피하고 법적으로
더럽히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무덤의 아름다운 겉모습은
더러움으로 가득 찬 그 내부의 실재도 숨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을 두고,
겉은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 대부분이 보여 준 엄격한 율법 준수는,
하느님의 법과 모순되는 삶을
감추려는 가림막일 따름입니다.
그들은 과거의 예언자들과
의인들의 묘를 꾸미고 기념비를 세우면서,
이스라엘 역사의 큰 인물들이 보여 준
충실함을 자신들의 영광으로 돌립니다.
그러나 실제로 참고 견뎌 내는
유일한 예언자들은 무덤에 묻힌 죽은 이들입니다.
그들의 쓸모없는 과거 회상은
그들 조상이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이었음을 분명하게 해 줍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사도들과
선교사들을 박해하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이루고야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바리사이들의 자기만족 대신
회개의 결실을 묻고 계십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2019년 8월 29일 (목) [홍]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여자에게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마태 11,11).
예수님의 이 말씀처럼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앞서서
그분의 길을 닦고 준비한 위대한 예언자이다.
이러한 요한은 헤로데 임금의 불륜을 책망하다가
헤로데의 아내 헤로디아의 간계로 순교하였다.
(마르 6,17-29 참조).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한 것은 4세기 무렵
그의 유해가 있던 사마리아의 지하 경당에서 비롯되었다.
[복음묵상] 마르코 6,17-29
역사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 안티파스,
곧 헤로데 2세의 명령으로 죽음을 당합니다.
헤로데 1세의 손녀이며
아리스토불루스의 딸인
헤로디아가 자기 형제의 아내였음에도,
헤로데는 페트라의 임금
아레타스의 딸인 합법적인 아내와 이혼하고,
아직 남편이 살아 있는
헤로디아를 남편과 헤어지게 하여
자기 아내로 삼았다고 합니다.
헤로데는 바로
헤로디아 때문에
세례자 요한을 죽였고,
딸이 모욕받은 사실에
분개한 아레타스와 전쟁을 벌입니다.
이 전쟁에서 헤로데의 군대는 전멸하였는데,
이는 요한을 죽인 죄의 대가를 치른 것이라고
요세푸스는 기록하고 있습니다(『유다 고대사』 18,5,2 참조).
"동생(필리포스)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혼인에 관한
성스러운 명령을 폐기한
헤로데를 향하여
대담하게 외쳤던 말입니다.
시대의 예언자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헤로데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살인 계획을 세워
실행해 보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사람을 보내어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요한을
죽일 기회를 찾던 헤로데는,
자신의 생일을 맞이하여
호사스러운 왕실에서
죽음의 연회를 베풉니다.
외모를 뽐내고 고개를 까닥거리며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음탕한 춤을 추는 헤로디아의 딸,
손님들의 쾌락과
방탕 속에서 헤로데의 무모하고
경솔한 맹세가 요한의 죽음을 앞당깁니다.
쟁반 위에 담은 요한의 머리가
춤에 대한 상으로 주어집니다.
자신의 혀를 다스리지 못한 헤로데는
요한의 머리를 베었지만
그의 소리는 없애지 못하였습니다.
요한의 혀는 잠잠하게 만들었지만
의로움과 마음의 회개를 전하는 그의 소리는
가라앉히지 못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폭력적인 죽음을 당하였지만
오늘도 폭군의 죄악을 침묵하지 않고 고발하는
의인의 모습으로 자주 나타납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2019년 8월 30일 (금) [(녹)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25,1-13
바오로 사도는
이전에 테살로니카 신자들을
"주님께서 더욱 자라게 하시고
충만하게"(1테살 3,12) 해 주실 것이라고 빌고,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행실
("더욱더 그렇게 살아가라.")에 맞는
주님의 은총을 간절히 바랍니다.
죄를 피하려고만 하면 유혹이 더 늘어나고
부정적이고 암담한 상황에 마주하여 심각한 위험에 빠집니다.
그러나 긍
정적인 사고로 살아가는 사람은
저절로 죄를 피하고 자신의 영성 생활의
역동성에 힘입어 보호를 받습니다.
거룩하게 사는 것!
바로 하느님의 뜻에 맞는 생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몸을 존중하고
거룩하게 보존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하여
사랑스러운 긴장 관계와 기다림에 대한 충실,
곧 그리스도인의 깨어 있는 자세를 제시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피동적인 자세가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의 노력과 책임이 필요합니다.
이 비유의 주인공은
똑같은 숫자로 둘로 나뉜
열 처녀가 아니라
늦게 도착한 신랑입니다.
당시 팔레스티나의 혼인 관습에 따르면
신랑을 기다리는 동안에
신부와 함께한 처녀들은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모든 비유의 핵심인 하느님 나라는
오늘도 혼인 잔치로 표현됩니다.
모든 면에서 고유한 의미를 지닌 우화가 아니더라도,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거룩한 교부들을 통하여,
비유에서 다양하게 등장한 인물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기다리는 신랑은 예수님을 뜻하고,
그분의 지체는 재림의 지연을 뜻합니다.
한밤중에 예상하지 못한 그분의 도착은
주님께서 오실
예견할 수 없는 시간을 나타내고,
신랑을 맞이하는 열 처녀는
주님을 기다리는 공동체를 뜻합니다.
혼인 잔치에 들어가거나 거부당하는 것은
심판의 판결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기다리며
늘 깨어 준비하고 있습니까?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2019년 8월 31일 (토) [녹]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25,14-30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하느님에게서 사랑의 계명을 받아
잘 실천한다고 칭찬하면서
더욱더 그렇게 하라고 권고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듯이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갈라 5,6).
은총은 풍부한 열매를 맺게 해 주는 생명의 씨앗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향하여
탈렌트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멀리 떠나는 부유한 주인이
자기 재산을 세 명의 종에게 맡겨
저마다 제 능력에 따라 벌어들이게 합니다.
분명 비유에서 주인은 예수님을,
주인의 여행은 주님께서 하늘에 오르심을,
주인의 돌아옴은 주님의 재림을 나타냅니다.
종들은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깨어 있어야 하는 성실한 그리스도인들을 나타냅니다.
셈을 하는 것은 심판의 심사를,
판결은 다시 한 번
축제의 관례적인 모습으로 상징되는
하늘 나라에 함께하거나
거기에서 내쳐지는 것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실수하는
죄인임을 살펴보고
깨닫는 일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과도한 안전의 열매인 무책임과 무관심,
게으름과 편안, 이기주의와 경직된 두려움은,
그리스도인이 오늘날에 저지를 수 있는
사회적인 대죄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당신의 탈렌트를
적극적으로 잘 활용하였는지 물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받는 탈렌트는
당신 나라의 재산과 재물,
곧 구원, 믿음, 당신 사랑과 우정 ……,
그다음에 자연적인 선물,
곧 생명과 건강, 지식과 의지,
가족과 교육, 계획과 노동 등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교 성소는
다른 모든 것을 요약하는 큰 탈렌트입니다.
이 모든 선물과 탈렌트는 우리가
개인적이고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선물과 탈렌트의
소유자가 아니라 관리자일 뿐입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
이제 처서(處暑)가 지나서
제법 아침저녁은
날씨가 신선한 가을날의 전형입니다.
오곡백과가
무르익어가는
가을 날씨처럼
우리 자신도
주님에 대한 믿음을
살찌우는 한 주 되어보십시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