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동자에 주님을 담는 '행복'
무엇인가를 집중하여 바라보면
바라보는 대상이 눈동자에 고스란히
비쳐진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깨어있는 시간 내내,
주님을 기억하고 바라보는 마음으로 지낸다면
내 눈동자에도 뚜렷이 주님의 모습이 새겨져서
모두에게 주님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그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바라볼 때에
그 안에 계신 예수님을 기억할 수만 있다면,
틀림없이 우리 눈동자에는 주님의 모습이
뚜렷이 비쳐질 것이라 싶었던 것입니다.
루카 사도는 오늘 말씀이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서로 밟힐 지경으로
혼잡했던 상황에서 "몇몇 제자"들에게만
들려주셨다는 사실을 굳이 밝힙니다.
이를 통해서 주님께서는 온 세상을 향하여
당신의 말씀을 선포하시지만
우선 '받아들일 만한' 신앙인의 마음 밭에
집중적으로 말씀의 요지를
심어 주려하신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듯합니다.
때문에 말씀을 듣는
마음을 단정히 추스르고 싶습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갈 몇몇 제자에게만 들려주시는
내밀하고 소중한 내용을 마음을 모아 정중하게 새겨듣고 싶습니다.
당신께서 알려주신 '의무사항'을 꼼꼼히 챙겨서
오직 그분께만 집중하여 그분만을 바라보며
그분을 고스란히 눈에 담고 싶습니다.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변방, 이스라엘의 작은 촌락을 오가며
몇몇 고장에서만 하느님의 뜻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직접 뵙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던 모두가 전부,
하느님을 믿고 삶이 변화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사라지지 않고 수천 년을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쉼 없이 오늘 이 시간까지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교회를 통해서, 지금 우리를 통해서
온 세상에 당신의 외침이 전해지기를 고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역시 모든 인류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간절히 자신의 처지가 변화되기 원하는
몇몇 사람에게 주님 말씀의 능력이 임할 것입니다.
복음을 거푸 읽으며
강론을 준비하는데
야릇하게도 자꾸만 마음이 2독서에
딱 한 번 언급되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게 쏠렸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이야말로 2독서의 주제인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이 되는
믿음을 제대로 살아냈다는 사실이
마음에 박혀 지워지지 않았던 겁니다.
어쩌면 이야말로
모든 신앙인들이 꿈꾸는 로망일 테니까요.
무엇보다 아브라함의 삶이 오직
"믿음으로" 그분의 뜻을 실행하기에
거침없이 나아갈 수 있었던 바탕에는
사라의 내조가 일조했다는 사실에
마음을 점령당한 느낌이었달까요?
오래오래 생각을 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약속을 철저히 믿었기에
정든 고향을 등지고 타향에서
나그네처럼 살기로 작정한 우직한 남편
아브라함의 결단에 사라가
전혀 군소리 없이 따랐던 모습을 말입니다.
나아가 주님께서 "사라는 아브라함을 주인이라고 부르며
그에게 순종하였습니다"(1베드 3,6)라시며
사라의 삶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셨다는 사실도 기억났습니다.
솔직히
창세기가 전하는
사라의 모습은
우리가 인식하는
현모양처와는 거리가 있는 듯 보입니다.
외려 자기주장이 매우 강하여서
양순한 남편 아브라함을
좌지우지하는 듯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렇게 남편을 쥐락펴락하는 부인,
변덕도 죽 끓듯 하여
도무지 덕스러워 보이지 않는 사라를
하느님께서는 칭찬하십니다. 의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남편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여종 하갈과의
동침을 권해 놓고서는 싹 안면을 바꾸고,
하갈을 구박하는 것도 모자라서
하갈이 낳은 아들 이스마엘을 미워하며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속이 좁아터진 아낙의 모습일 뿐이니 말입니다.
드디어 아브라함에게 집에서 쫓아낼 것을
요구하는 걸 보면서 저절로
'이런 악처가 있나' 싶을 지경이니 말입니다.
무엇보다
그냥 넘길 수 없는 것은
이렇게 극성맞은 사라의 주장에
하느님께서 역성을 들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핏줄을 쫓아낼 생각에
마음이 산란하고 언짢아진 아브라함에게
오히려 "사라가 너에게 말하는 대로
다 들어 주어라"(창세 21,12)고 하시다니,
과연 하느님의 정의는 무엇인가 싶어집니다.
그럼에도 사라는 평생 동안
'남편에게 순종하였다'고 단언하고 계시니,
진정 아이러니라 싶은 겁니다.
그런데
곰곰이 따져 생각하면
하느님의 관점을 이해하게 됩니다.
부인인 사라가 사사건건 아브라함이 내린
믿음의 결정에 대해서 바가지를 긁으면서
툴툴대거나 '못 살겠다'며
고향에서 눌러 살자고
고집을 부렸다면 어떠했을지?
제아무리 믿음이 굳센 아브라함이라도
한결 같이 믿음의 여정을
걸어내기 힘들었을 것이라 싶은 겁니다.
그러니 사라는 믿음의 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헤아렸던
현명한 분이라 깨닫게 되는 겁니다.
남편이 나아가는 하느님을 향한 길이
험하고 힘들어도 마다치 않고
오히려 격려했던 지혜의 소유자였음을 느끼게 됩니다.
때문에 오늘 주님의 말씀을
교회에 들려주는
보편적 가르침으로 듣습니다.
서로를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아브라함을 향했던 사라의 마음으로
교회를 섬겨달라는 당부라 싶습니다.
우리 모두가 사라처럼
지혜롭기를 기대하시는 것이라 싶습니다.
마침내
당신의 교회인 우리 모두가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고 기다리는"
섬김의 관계를 형성하라는 뜻이라 새깁니다.
오늘 주님께서 사라의 이야기를 통해서
모든 아내들에게, 특히 그리스도의 신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당신이 원하는
부부의 모습을 살아달라고
당부하신 것이라 짐작해 봅니다.
주님의 아내가 되었으니
신랑이신 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따라 달라는 음성이라 듣습니다.
사랑은 그리움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늘 주님을 그리워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도
우리와의 만남을 기대하며 마음이 설레실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주님의 그리움의 고백입니다.
우리와의 해후를 기다리는 설렘의 기록입니다.
때문에 성경에는 참 행복의 모습이 스케치 되어 있습니다.
그분께 보여드릴 삶이 어여쁘도록
최선을 다했던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히브 11,6)라고
믿음인에게는 "세상이 가치 없는 곳"(히브 11,18)
이었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믿음이야말로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고 기다리는 사람의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써 "약속의 공동 상속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날 '몇몇 제자'들의 눈동자에는
주님의 모습이 선명하게 아로새겨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처럼 저와 교우님들이 모두,
주님을 향한 사랑의 그리움으로,
눈동자에 주님을 담고 지내게 되시길,
하여 이웃에게 주님을 뚜렷이 보여주는
축복의 삶을 살아가시길 간청합니다.
-장재봉 신부 (부산교구 월평본당 주임,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19년 8월 12일(월) [(녹)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7,22-27
오늘 독서는
하느님의 능력에 대하여 말합니다.
사람은 큰 권한을 잡으면
가끔 폭군이 되기도 합니다.
반면 하느님의 힘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신중함과 관심 그리고 정의에 관한 관심을 수반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위대하고 힘세며 경외로우신" 분이십니다.
또한 "사람을 차별 대우하지 않으시고
뇌물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며, “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고,
이방인을 사랑하시어 그에게
음식과 옷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의 선익을 추구하시는 분이십니다.
모세가 제시하는 계명과
규정 가운데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한 것은,
이방인으로까지 확대되는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가족,
친구들, 지인들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와 무관하지만 힘없고 빈곤한 사람,
하느님 사랑의 대상으로 간주되는 이방인에게도
사랑하는 마음을 열어 놓으라고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고 싶다면,
우리도 관대하게 열린 마음으로
난민과 이민을 포함한 이방인을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신중하심과 힘에 감탄합니다.
임금들은 이방인들에게서 세금을 거둡니다.
성전 세를 내라는 재촉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 집을 위한 세금을
내실 필요가 없음을 잘 알고 계시면서도
당신의 특권을 내세우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매우
신중하게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필요한 세금을 마련하시려고
당신 능력을 사용하십니다.
우리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진 것 없고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을 돕는 데 우
리 능력을 이용해야 합니다.
만일 이것이 다른 이들에게
피해나 걸림돌이 될 위험이 있다면
우리 권리마저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2019년 8월 13일 (화)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8,1-5.10.12-14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약속과 요구 사이의
긴밀한 결합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마치고
여호수아에게 자리를 물려줍니다.
그러나 변함없는 사실은,
하느님께서 몸소 이스라엘 사람들과
계속해서 함께하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들을 두려워해서도 겁내서도 안 된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와 함께 가시면서,
너희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으실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 안에
하느님께서 늘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에는 강력한 요구가 뒤따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너희는 힘과 용기를 내어라!" 하시고,
여호수아에게도
"힘과 용기를 내어라!" 하고 이르십니다.
우리는 참된 희망이 피동적이지 않음을 봅니다.
참된 희망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이며 용기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에 따르면,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모든 것을 기다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청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느님께서 아무것도 하시지 않는 것처럼,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희망은 우리 나름대로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개입하시기를 기다리면서
게으르고 한가하게 머무르기 위한
구실이 될 수 없습니다.
다른 한편 그리스도인의 용기는
오늘 복음이 보여 주는 것처럼 겸손이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제자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이르십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우리가 바라는 대로 모든 것이
정확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요구를 하지 말고,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이 업적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깨달으면서
하느님의 업적을 위하여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2019년 8월 14일 (수) [홍]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성인은
1894년 폴란드의 즈둔스카볼라에서 태어났다.
14세 때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한 그는
1917년 성모 신심 단체인 '성모의 기사회'를 설립하였다.
이듬해 로마에서 사제품을 받은 콜베 신부는
평생을 선교사로 살아가다가
독일의 폴란드 침공 때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혔다.
여기서 한 수감자가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수용소에서는 한 명이 탈출하면
열 명을 지목하여 처형하는 벌이 있었다.
이에 따라 지목된 열 명 가운데 한 사람이
자기에게는 가족이 있다며 울부짖자
콜베 신부는 그를 대신하겠다며 앞으로 나갔다.
결국 콜베 신부는 다른 아홉 명과 함께
굶겨 죽이는 아사 형벌을 받고 처절한 옥중 생활을 하다가
1941년 지하 감방에서 선종하였다.
이러한 그를 1982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자비의 순교자'라 부르며 시성하였다.
[복음묵상] 마태오 18,15-20
오늘 독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약속된 땅에
들어가기 전에 일어난 모세의 죽음 이야기입니다.
가장 위대한 예언자이며 하느님 곁에서
열정적인 중재자였던 모세가 죽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귀시던" 사람이지만,
신비로운 하느님의 징벌로 약속된 땅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모세는 여러 가지로
자격을 갖추었고
하느님께 은총을 받았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이집트 탈출로 시작된
큰 계획을 마칠 수 없습니다.
그는 중요한 일을 하였지만,
이제 여호수아에게
그 일을 마무리하는 임무를 맡깁니다.
이는 구약 성경에서 규칙적으로 돌아오는 주제이고,
어떤 일도 하느님 계획을
완전하게 성취하지 못하였음을 알게 해 줍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조건을 알려 줍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아름다운 성당을 지어 바치는 곳에
당신도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하느님의 거처는 무엇보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모인 공동체인 반면,
외형적인 건물은 부차적일 뿐입니다.
우리는 외형적인 건물이 없어도
성찬례를 거행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현존과 활동을 받아들이는
공동체가 존재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공동체의 갈등에 대한 해결을 지시하십니다.
공동체의 분열은 주님의 현존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죄를 짓고 형제를 모욕할 때,
처음에는 단둘이,
그다음에는 둘이나 세 사람의 도움을 받아,
마지막에는 공동체 전체의 도움을 받아,
서로 간의 친교를 회복하고
주님의 현존을 맞이할 수 있도록
대단히 신중하게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라고 권고하십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2019년 8월 15일 (목) [백] 성모 승천 대축일
오늘은
'하느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께서
지상 생애를 마치신 다음
하늘로 불려 올라가셨다는
신앙 교의에 따라
성모님의 승천을 기리는 의무 축일이다.
성모님의 승천은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초대 교회 때부터 내려오는 전승에 따른 것이다.
1950년 비오 12세 교황은
성모 승천의 신비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다.
성모 승천은 그리스도 안에서
산 모든 사람이 누리게 될 구원의 영광을
미리 보여 주는 '위로와 희망의 표지'이다.
[복음묵상] 루카 1,39-56
오늘 전례는 몸과 마음으로
하늘의 영광에 들어 높여진 마리아의 승천을 경축합니다.
제1독서는 천상 성소에 있는 계약의 궤와
용으로 표현된 악의 세력을 피하여
아기를 밴 태양을 입은 한 여인의
장엄한 표징으로 마리아를 회상합니다.
마리아의 승천을 직접 언급하지 않지만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의
표상 안에서 마리아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능력과
왕권으로 보호를 받는
광야의 여정을 체험한
새로운 백성의 변화를 지탱하는
교회 안에서 전형과 본보기로 있습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하여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맏물로 되살아나신 뒤에는
그리스도께 속한 이들,
곧 그분을 믿고 생명을 얻은 이들이 뒤따릅니다.
그들 가운데 첫째는 그리스도의 어머니이며
예수님의 삶과 수난과 죽음에 긴밀한 방식으로 결합된 마리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마리아의 승천이 아닌
엘리사벳을 방문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마리아는 동정의 몸에
그리스도를 잉태하기 전에
동정의 마음으로 그분을 낳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그의 몸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을 통하여
그의 마음에 그분을 낳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동정 마리아께서는 천사의 예고로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과 몸에 받아들이시어
'생명'을 세상에 낳아 주셨으므로
천주의 성모로 또 구세주의 참어머니로
인정받으시고 공경을 받으신다"(교회 헌장 53항).
하느님 백성은
아직도 지상을 순례하는 나그네입니다.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승천은
지상을 헤매는 우리에게 위로와
확실한 희망의 표지가 됩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 정성을 다하여 믿으셨기에
마리아에 대한 신심은 실천적이고 정성스러워야 합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2019년 8월 16일 (금) [(녹)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9,3-12
늘 독서는
여호수아가 주도하는
스켐 집회에 대하여 들려줍니다.
엄숙한 모임으로 진행된 스켐 집회에서
여호수아는 온 백성 앞에서,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이집트에서의 해방과 약속된 땅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보여 주신
구원과 호의의 근본적인 행위들을 상기합니다.
모든 일은 하느님의 활동,
그분의 충실과
사랑을 보여 주는 매우 명백한 표징입니다.
주님께서는 온 백성에게
여호수아의 입을 빌려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한 것은 너희의 칼도 너희의 화살도 아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너희에게
너희가 일구지 않은 땅과
너희가 세우지 않은 성읍들을 주었다.
그래서 너희가 그 안에서 살고,
또 직접 가꾸지도 않은 포도밭과
올리브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게 되었다."
이런 하느님 말씀에 대한
여호수아와 온 백성의 대답은
감사와 신뢰와 충실의 표현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십니다.
"나는 너희가 애쓰지 않은 것을
수확하라고 너희를 보냈다"(요한 4,38).
이처럼 우리는 선택과 책임 앞에 놓여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혼에 관한 바리사이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창조주께서 원하신
혼인이 지닌 존엄성을 일깨워 주십니다.
불가 해소적인 혼인만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혼인으로 뗄 수 없는 친교를
맺게 해 주신 하느님 계획과 상통합니다.
이혼장은 사람들 마음이 완고해서 허락된 것이기에
모든 경우 주님을 따르는 제자에게 허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혼인 자체가 절대적인 선익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하늘 나라 때문에"
혼인의 가치를 포기하는 은총을 받는 이들도 있고,
복음을 전하려고 온전히 헌신하는
마음의 자유 상태를 지닌 동정 생활을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2019년 8월 10일 (토) [녹]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9,13-15
오늘 독서를 보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을 섬기는 일에 관하여
나눈 대화에서
몇 가지 놀라운 점이 드러납니다.
첫째는,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님을 섬기라고 명령하면서
그들에게 자유롭게 선택하라고 합니다.
그다음, 백성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풀어 주신 하느님을 섬기겠다고 하자,
여호수아는 이를 확인하는 대신 백성에게
방해와 난관을 제시하면서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단념시키려고 애씁니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렇게 엄한 자세를 보이는 것은,
백성의 형식적인 선택에서 오는
위험을 피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맺는 계약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진지한 일입니다.
이는 삶과 무관한 외적 의식,
곧바로 기억에서 사라질 의식뿐만 아니라,
생각과 말과 행위를 포함한 사람
전체와 관련된 근원적인 책임을 묻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책임을 떠맡도록
아무도 강요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십니다.
하느님과 계약을 맺는 데
관여한 사람은 진지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인간의 품위는 바로 중요한 책임을 맡고
이를 유지하는 그의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스켐에서 백성에게
선택과 책임을 일깨운 뒤에 그들과 계약을 맺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멀리하려고 하는
어린이를 받아들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오는 사랑에
온전히 자유로운 마음을 보이시면서,
모든 이, 특히 철부지 같고
덜 성숙한 어른들의 그릇되거나
기회주의적 태도를 보이지 않는
어린이들을 기쁘게 맞이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대를 막론하고
가정과 교회가 당연히
보여 주어야 할 관심이라고 선포하시듯이,
어린이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십니다.
악의 없이 열린 마음을 갖고 있는 어린이들은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의 상태를 상징합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는 요즘입니다.
폭염경보가
전국적으로 발령되는 날이 많아
건강에 조심하셔야 하겠습니다.
이번 주는
성모승천대축일과
광복절이 있는 주간으로
성모님의 전구로 일본과의 관계가
바로 이웃처럼 잘 지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