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말씀 묵상]
2019년 8월 4일 (일) [(녹) 연중 제18주일]
제1독서 (코헬 1,2; 2,21-23)
제2독서(콜로 3,1-5.9-11)
복음(루카 12,13-21)
탐욕은 감정이 아닌 이성의 문제
스크루지 영감. 어릴 적 읽은 그림책
「크리스마스 캐럴」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나눔과 공감이 결핍된 삶, 모
든 것을 긁어모아 축적하는 삶의 함정을
분명하게 학습시킨 책이었기에,
스크루지는 세상의
모든 아이들에게 불길한 운명의 대명사였고,
'할아버지'보다 '영감'이라는 호칭으로
무례하게 불러도 되는 부도덕한 인물이었으며,
미워하고 지탄해도 되는 탐욕의 아이콘이었습니다.
어른이 되어서 스크루지를 다시 떠올려보니
그의 문제는 재산을 나누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윤리·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상실과 불안에 대한
두려움을 다스리지 못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조금 더 생각해보니
그의 문제는 두려움의 원인을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못한
지성의 문제라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심각한 파업상태에 들어간 어떤 기업의 소유주가
서슬 시퍼런 투쟁의 분위기 속에서도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지금은 분배할 때가 아니라
기업주에게 더 많은 재화를 모으게 할 때'라고
인터뷰하는 내용을 보면서, 정녕 탐욕은
어리석음을 더욱 내재화시키는 도발이고,
그러므로 소유에 대한 집착은
철저히 이성의 문제임을 깨달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늘 전례의 본문들은 근심과 공포,
불안으로 인해 발생한 인색함과
그 두려움의 끝이 어떤 어리석은 종말로 이어지는지,
그 여정을 이성적 통찰과 지혜로 가르쳐줍니다.
■ 복음의 맥락
루카복음은 크게
예수님의 공생활 이전(1~4,13)과
공생활 중(4,14~24,53)의
이야기로 구분되는데
공생활 이야기는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옮아가는 공간적 흐름을 배경으로 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정 중(9,51~19,28)에 발생하며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그분의 가르침을 통해
서서히 진리에 도달하게 되는 과정 중에 있음을 암시합니다.
군중 가운데에 있던 한 사람이
형제들 간의 유산분쟁에 대하여 의뢰하고,
예수님은 재산과 재물에 대하여
우리가 가져야할 자세를 비유를 통해 가르쳐 주십니다.
■ 하느님 앞에 부유하다는 것
예수님의 비유는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루카 12,16)라는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그리스어 본문을 그대로 직역해보면
"어떤 부유한 사람의 땅이 많은 소출을 내었다"가 됩니다.
새 번역 성경이 문장의 주어를
"부유한 사람"으로 본 것에 비해
그리스어 본문은 "땅"을 주어로 하고 있는 것인데,
인간이 그 어떤 노력과 공헌을 다 한다하여도
결과를 내고 그에 상응하는 열매를 맺게 하는
주체는 하느님이심을 선언하는 내용입니다.
사실 비유 속에 나오는
부자의 본질적 문제는 창조자이신 하느님에 대한
구체적이고 올바른 인식의 결여에 있었고,
하느님에 대한 '앎'이 없으니
당연히 그분과의 관계를
맺지 못한 채 살아온 삶이 문제였습니다.
다음에 등장하는 문장 역시 이러한 사태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17절)
"내가 수확한 것"이라는 표현은 수확물의 진정한 주인과
주체가 누구인지를 여전히 깨닫지 못하는 상황을 드러내줍니다.
결국 그가 받은 '은혜'는 '재앙'으로 변하게 되는데
하느님이 주신 은혜를 선물로 인식하지 못한 어리석음,
은혜의 결과를 하느님의 일을 위해
나누지 못한 탐욕이 비극을 자초한 형벌이 됩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20절)
이 문장에서도 여전히 주어는 하느님이십니다.
인생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21절)이 되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 허무로다, 허무!
재물을 영원히 소유하려는 집착이,
인간의 한계와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어리석음'의 결과라는 복음의 관점은
제1독서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첫 문장에 무려 5번이나 등장하는 단어
'허무'는 히브리어 '헤벨'에 해당하며 '숨',
'입김'처럼 금방 없어지는 것, 찰나의 것을 의미합니다.
숨이나 입김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지만 중요하다고 해서
이를 부여잡거나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려할 때
그 숱한 노력들은 부질없고 무가치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숨'이 찰나적 성격을 가지고 있듯이
찰나적인 것들을
삶의 본질인양 소유하려하고,
하느님의 선물을
자기 것인 양 사용하려하면
인간의 모든 노력은
"허무"로 돌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그 모든 노고와 노심으로
인간에게 남는 것이 무엇인가?
그의 나날은 근심이요 그의 일은 걱정이며
밤에도 그의 마음은 쉴 줄 모르니
이 또한 허무이다."(코헬 2,22~23)
코헬렛의 저자는
찰나적이고 잠시적인 것을 영구하게 간직하려는
노력의 무의미함을 지적하면서 삶을 살아가는
가장 현명한 모습은
모으고 쌓아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이 현실에서 최선을 다하고
그것을 누리는 것에 있음을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지나친 걱정, 지나친 심각함,
지나친 근심은 모두 헛된 것입니다.
걱정한다는 것은 그만큼 아직도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이성적으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방증이기 때문입니다.
■ 새 인간을 입은 사람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콜로 3,1~2)
제2독서에서 바오로가 촉구하는 것 역시
인간이 마주해야할 모든 현실적 문제들을
불성실하게 혹은 하찮게 여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일, 공부, 가족, 재산, 건강 모두 삶을 위해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다만 이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 안에서 추구하라는 것이고,
이러한 삶을 사는 이를 "새 인간"이라고 표명합니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9절)
역사를 계급투쟁의 산물로 보는 시각은
언제나 권력과 계급을,
자본의 축적으로 확보되는 결과물로 인식합니다.
자본의 축적이 힘이 되는 사회는
그것의 분배를 주장하는
노동자 계급과의 마찰을 불가피하게 내포할 수밖에 없고,
이 모든 악순환은 파괴와 선동의 원인이 되어
더욱 가혹하고 고통스러운 불안을 산출합니다.
노동과 헌신의 결과를
하느님이 주신 선물로 알고
감사하며 누리고,
이를 기꺼이 나누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그 결과에 지배당하고
치열한 과정 속에 자본의 노예로 전락하는
파국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여 발생한 여러 범죄들은
도덕과 윤리를 상실했기 때문에 나온 결과이지만,
사실 도덕과 윤리는 감정보다 이성의 결여로 발생합니다.
잘 알지 못하기에 의심하고
고독해하며 공허가 가슴을 채워 분노하고
혐오하여 스캔들을 낳습니다.
삶의 찰나성과 재물의 소유가 주는
불안을 지혜롭게 간파하여
인색과 탐욕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나에게 허락된
현실적 가치에 집중하고 감사하는 것,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축복을 누리는 것,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행복이며 확실한 구원의 길입니다.
부의 축적과 소유에 집착하면
급기야 소유의 노예가 되어
결국 소유 당하게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
[한주간 전례]
2019년 8월 5일(월) [(녹)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4,13-21
오늘 독서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평과
모세가 취한 태도를 들려줍니다.
주님께서는 약속된 땅을 향한 여정에 있는
당신 백성에게 만나를 양식으로 주십니다.
그들은 날마다
주님께서 주신 만나에 의지해야 하지만
이 만나는 그들을 만족시켜 주지 못합니다.
광야에서 울부짖는 백성의 불평은
현재의 불확실하고 위험한 상황에 대한 한탄과
더 안전한 상태에 대한 그리움의 표출입니다.
"너무나 무거운 짐"이 된 이런 상황에
부담과 위기를 느낀 모세도 주님께 불평합니다.
모세는 자신을 죽여 달라고 주님께 청할 만큼 실의에 차 있습니다.
이런 부담은 때때로
우리의 의욕까지 잃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가엾은 군중을 보시고
빵을 늘리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수님을
따라나선 군중은 불평할 시간이 없습니다.
제자들은 모세가 취한 태도를 보여 줍니다.
사실 처음에 그들은 군중을 돌려보내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라고
예수님께 제안하면서 모든 책임을 면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해결을 거부하십니다.
상황에 대한 책임을 맡으시고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십니다.
이런 상황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는 없고
실제로 모든 것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이라도
군중과 함께 나누려는 뜻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를 본받지 않으시고,
불평하지도 않으시며,
다만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십니다.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니다.
어려운 상황에서의 불평은
모든 해결 가능성을 막고
상황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갑니다.
반면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감사는,
온갖 어려운 상황을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기쁘게 극복하게 해 줍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2019년 8월 6일 (화) [(백)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 17,1-2).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은
공관 복음이 공통적으로 전하는 이 말씀에 따른 것이다.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을 기리는 축일이다.
오늘 축일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9월 14일)의 40일 전에 지낸다.
교회의 전승에 따라,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40일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인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보여 주시고자
거룩한 변모의 표징을 드러내셨다.
1457년 갈리스토 3세 교황이 로마 전례력에 이 축일을 도입하였다.
[복음묵상] 루카 9,28ㄴ-36
오늘 독서는
모든 이의 재판관이며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연로하신 분으로 나타나,
세상의 주인인 "사람의 아들" 같은 이에게
왕권을 주시는 환시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종"으로서 겪으시는 수난 때에,
장차 영광스러운 심판관으로 오시는
"사람의 아들"의 표상을
당신 자신에게 부여하며 완성하실 것입니다.
거룩한 변모 축일인 오늘,
모세와 엘리야가 나누는
거룩한 대화 내용을 전해 주는 루카 복음을 듣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전에 야이로의 딸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것을 목격한 세 제자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십니다.
주님께서 기도하실 때
그 모습이 영광스럽게 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올리브산에서
죽음의 고뇌를 겪으시기 전에,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승리를 거두신 당신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십니다.
그 제자들은 장차 하느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승리를 목격하고,
믿음의 순수함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때 말씀과 행위에서 능력에 찬 예언자들이며,
장차 오시기로 한 메시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에 싸여 나타나서,
주님께서 세상을 떠날 일을 이야기합니다.
모세는 메시아의
예형과 그림자로서 율법을 나타내고,
엘리야는 메시아의 길을 준비한 인물로 예언을 나타냅니다.
둘 다 혹독한 시련을 겪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에서 겪으실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하여 예언하십니다.
곧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시고
돌아가시는 것은 하느님의 계획이며,
이는 하느님께서 성경과 율법과 예언자들을 통하여
오래 전부터 밝혀 주신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머지않아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탈출은 당신의 떠나가심,
곧 당신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
구원자의 수난은 특별한 찬양의 대상입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2019년 8월 7일 (수) [(녹)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5,21-28
오늘 독서는
주님 앞에서 아직도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이 부족함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백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하셨고,
이집트를 빠져나오고 몇 달 뒤에
그 땅을 차지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분부에 따라
모세가 가나안 땅을
정찰하라고 보냈던 사람들이 돌아와서,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지만 "그 땅에 사는 백성은 힘세고,
성읍들은 거창한 성채로 되어 있습니다."라고 보고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의 약속을 믿고 쳐 올라가지 않고,
오히려 어려움과 장해에 골몰하며
실망에 빠져 "밤새도록 통곡"합니다.
이는 자신들의 소심함에 따른 슬픔의 눈물입니다.
주님께서는 깊은 상처를 준
당신 약속에 대한 이런 믿음이
백성에게 부족함을 참지 못하십니다.
"너희가 저 땅을 정찰한 사십 일,
그 날수대로,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너희는 사십 년 동안 그 죗값을 져야 한다."
"악한 공동체"에 속하면서
하느님께 투덜거리는 사람은
누구도 약속된 땅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약속된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불신에 따른 처벌입니다.
오늘 복음은 가나안 여인의
뛰어난 믿음의 본보기를 보여 줍니다.
그는 주님의 은총에 대한
어떤 권리도 갖고 있지 않지만,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마귀 들린 딸을 고쳐 달라고 간절히 청합니다.
자신을 강아지에 비유하시는 예수님의 대답에도
그분의 말씀을 겸손하게 받아들입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총은 당신 사랑의 선물입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충만한 가나안 여인처럼
하느님의 자비하심에서 오는 은총을 얻고자
우리는 끊임없이 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2019년 8월 8일 (목) [(백)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도미니코 성인은 1170년
스페인 북부 지방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덕을 쌓는 데 몰두하던 그는 사제가 되어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열정적인 설교로 사람들을 회개의 길로 이끌었다.
도미니코 사제는 1206년
설교와 종교 교육을 주로 담당하는 도미니코 수도회를 세우고
청빈한 삶과 설교로
복음의 진리에 대한 철저한 탐구를 강조하였다.
1221년에 선종한 그를 1234년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복음묵상] 마태오 16,13-23
오늘 독서는
광야에서 마실 물이 떨어지자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아론에게 몰려가
시비하면서 불평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오게 하시어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시면서,
모세와 백성 사이에 일어난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해 주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 바위가 그리스도라고(1코린 10,4 참조)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 그리스도인 삶에 근본적인 실재를 제시해 줍니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의
두 가지 차원에 대하여 성찰할 수 있습니다.
첫째, 믿음이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베드로 위에 세운 교회를 이루고자
형제들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팔레스티나에 계셨을 때
군중은 그분을 보고 따라나섰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을 참으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하느님 아버지의 깨우침에 힘입어
예수님을 메시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믿음을 보시고,
그 위에 당신의 공동체, 곧 교회를 세우십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선물을 통하여
하느님을 우리에게 알게 해 주는 신학적 덕목입니다.
믿음은 지식이나 문화의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과 맺는 관계의 문제입니다.
이는 하느님 말씀을 마음으로 듣고
그분께 순종하는 것을 뜻합니다.
믿음은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느님의 활동이므로
우리가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는 특별한 선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그분께 순종하는 믿음은 교회와도 관계를 맺습니다.
이런 관계에 힘입어
우리는 예수님 위에 세운 건물 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려고
그리스도께 다가가고 그분께 순종합시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2019년 8월 9일 (금) [(녹)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6,24-28
구약 성경은
선택된 백성을 향한
하느님의 개인적인 사랑을 드러내고,
오늘 독서에서 보여 주는 대로,
그런 사랑에 머무르는 방법을 알려 줍니다.
모세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개인적이고 생
생하며 심오한 관계를 맺으셨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온갖 시험과 표징과 기적,
전쟁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 가운데에서
데려오려고 애쓰셨고(이집트 탈출),
개인적으로 자연 현상을 통하여
당신 백성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주님께서
조상들을 사랑하셨기에
이 모든 것이
하느님 사랑의 표지라고 말합니다.
하느님과 이런 개인적인 관계에 머무르고자
이스라엘은 자신의 망상을 버리고
하느님 말씀을 들으며,
걸어가야 할 올바른 길을 알려 주시는
하느님의 가르침에 일치해야 합니다.
이기주의를 버리지 않고서는
사랑 안에 머물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바람과 일치하려고 애쓰지 않는다면,
그 사람과 진정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입을 빌려,
당신의 규정과 계명을 지키는 이는
참된 행복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하느님과 맺는 우리 관계의 개인적인 측면은
더욱더 분명해지고 강해지며 친밀해졌습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게 해 준 시나이산의 천둥 대신
이제 우리는 우리처럼, 우리 형제처럼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사랑은 표징과 기적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고통을 겪고 죽기까지
직접 대가를 보상하시는 당신의 희생으로도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사랑에 일치하는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자신과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가요?
- 봉환 스테파노 신부-
2019년 8월 10일 (토) [홍]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라우렌시오 성인은
스페인의 우에스카에서 태어났다.
로마 교회의 일곱 부제 중
수석 부제였던 라우렌시오의 임무는
교회의 재산을 관리하고
빈민들을 구호하는 일이었다.
로마의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박해자들이 교회의 보물을 바치라고 하자
라우렌시오 부제는 교회의 재산을 남몰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뒤
그들을 박해자들 앞에 데려갔다.
"이들이 교회의 재산입니다."
이에 분노한 박해자들은
라우렌시오 부제를 불살라 처형하였다.
258년 무렵이었다.
라우렌시오 부제는
가난한 이들이 바로 교회의 보물임을 일깨워 준 성인이다.
[복음묵상] 요한 12,24-26
오늘 독서는
성도들을 위한 구제 활동,
특히 예루살렘 교회를 도와주는
공동체의 선행을 들려줍니다.
사랑을 베푸는 행위는
씨 뿌리는 사람과 같습니다.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하는 선행은 위선적인 행위일 따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다하여 베푸는 사람에게
선행의 씨앗뿐만 아니라
열매도 풍성하게 늘려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섬김과 추종에 대하여 들려주십니다.
예수님을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 뜻대로가 아니라
그분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줄 때는 그
런 일을 자랑하려는 게 아니라
자비를 베푸는 마음으로 주어야 합니다.
선을 행하려는 뜻 말고 내가 뭔가를 얻으려는
다른 뜻을 조금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나아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께서는 영광의 길이 아니라
불명예와 역경의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도 같은 목적지에 이르러
주님의 거룩한 영광을 함께 누리려면
불평하지 말고 같은 길을 가야 합니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일을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이지만,
자기가 바라는 대로 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라우렌시오 성인은
식스토 2세 교황의 일곱 부제 가운데 한 명으로
직무에 충실하여 순교의 영광을 입었습니다.
발레리아누스 황제 때(258년) 식스토 2세 교황과
그의 동료 네 부제가 참수형을 당한 나흘 뒤에,
라우렌시오는 활활 타오르는 숯불 위에서 화형을 당하였습니다.
사랑의 열정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은
교회의 수많은 순교 성인들에게 전구를 청합시다.
- 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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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방학(放學)과
휴가(休暇)가 있는 주간이군요.
가족과 함께
행복(幸福)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만끽하시길 빕니다.
-Berardus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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