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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묵상] 2019년 7월 28일 (일) [(녹) 연중 제17주일]

Berardus 2019. 7. 27. 06:39

    [금주의 말씀 묵상]
    2019년 7월 28일 (일) [(녹) 연중 제17주일]
    제1독서(창세 18,20-32) 제2독서(콜로 2,12-14) 복음(루카 11,1-13)


      7월의 기도 기도 그녀는 늘 어딘가가 아프다네/ 이런데가 저런데가/ 늘 어느 곳인가가 아프기 때문에/ 삶을 열렬히 살 수가 없노라고/ 그녀는 늘상 자신에게 중얼거리고 있지 지연된 꿈, 지연된 사랑/ 유보된 인생/ 이 모든 것은 아프다는 이름으로 용서되고/ 그녀는 아픔의 최면술을/ 항상 자기에게 걸고 있네 (중략) 그러나 그녀는 아마도 병을 기르고/ 있는 것만 같애 -삶을 피하기 위해서(김승희 시 '객석에 앉은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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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포자기(自暴自棄). 맹자에 나오는 말이다. 우리들이 흔히 사용하는 '포기한다'는 말은 여기서 비롯됐다. 스스로 단념한다는 일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한자를 들여다보면 그 뜻이 더 무겁다. 스스로를 포악하게 해 자신의 삶을 내팽개친다는 말이다. 단순히 단념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폭행을 가해 못쓰게 만들어 아무것도 희망하지 않는 것이다. 희망이 사라진 인생, 내팽개쳐진 삶에 대해 그가 혹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핑계를 대는 것뿐이다. 늘 자신의 삶을 핑계에 가둬 버리는 삶은 그래서 꿈과 사랑 모두를 지연시켜 결국 나의 삶을 미래로 유보시킨다. 그녀는 시인의 말처럼 '아프다는 핑계'로 없었던 병, 더 깊은 병을 만들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열렬히 무언가를 희망해 보지 않는, 그래서 그냥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자포자기의 병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청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명령하신다. 이 명령은 익숙해져 버린 삶의 문법에 갇혀 무엇을 청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수동적으로 그저 살아내고 있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하시가이 고지라는 심리학자는 우리의 삶은 무의식이 정하고 이 무의식은 우리의 평상시 언어가 결정한다고 말한다. 부정적인 언어, 수동적인 태도에 지배됐던 삶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희망적이며 긍정적인 언어를 사용함으로 시작된다. 청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것은 새로운 삶으로 돌아서는 시작이다. 할 수 없다는 여러 가지 핑계를 대지 말고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소망하고 청해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9-10) 그런데 우리는 이 말을 들을 때면 두 가지 생각을 연이어 하게 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과연 온전히 개방된 질문인지 묻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내가 지닌 인간적 소망을 떠올리고 그것이 이뤄지기를 희망하고 하느님께 청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소망들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게 돼 있다. 내가 청한 나의 승진이, 가족의 건강이, 더 많은 재물이 혹시 사사로운 욕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그것이 하느님께서 달가워하시는 것인지 되묻게 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우리는 청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스스로 알아차리게 된다. 이 알아차림은 지속적인 소망의 과정에서 얻게 되는 결과다. 어쩌면 정성스럽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청한다는 것은 소망의 정화과정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생각의 끝자락에 우리는 소망의 근거나 배경이 되는 매우 단순한 하나의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진정으로 소망해야 할 것은 오직 '하느님'뿐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모든 것이면서 동시에 참다운 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구하고 청하고 두드리라'는 말씀은 단순하게 내가 욕구하는 것들을 지속적으로 나열하거나 무기력한 삶에서 벗어나라는 말에 제한되지 않고 내 소망의 근원인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릴 때까지 멈추지 말라는 말과도 같다. 내가 소망했는데 결국은 하느님의 소망을 묻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실현해 낼 수 있을까. 그래서 이 노력은 나의 노력이면서 동시에 성령의 인도하심이다. 성령은 언제나 우리를 소망케 한다. 삶을 미래에 유보시키거나 이런저런 핑계로 꿈과 사랑을 지연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소망하게 하는 힘이다. 이 힘은 나의 소망과 두드림이라는 응답을 통해 지금 이 자리에서 현재화된 삶이 된다. 성령의 뜻이 나의 뜻이 되는 순간이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고 반문하신 것도 이런 이유다. 우리의 소망이 결국 하느님의 소망과 같아지는 것, 그것이 기도다. 회피된 인생, 무기력한 삶 앞에서 우리의 삶을 되돌리는 언어는 결국 기도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구하고 청하라는 명령에 앞서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알려 주신다. 기도는 하고 싶은데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던 제자들에게 알려 주신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도 명확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기도하는 법을 물었던 제자들은 이미 '청하고 찾고 두드린'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소망해야 할 것은 하느님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는 것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이며, 반대로 필요 이상의 현세적 욕망은 거부돼야 한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그리고 우리들의 궁극적인 소망, 즉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이르도록 하는 것은 용서하는 것을 통해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소서) 이것을 믿고 실천하는 것을 방해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기를 마지막으로 청하는 것이 주님의 기도다. 이 유혹이란 희망을 저버리게 만드는 부정적 언어와 핑계일 것이다. 우리의 삶이 메마르고, 우리가 꿈과 희망을 유보하고 있다면 지금 당장 청하고 찾고 두드릴 일이다. 우리에게는 청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도가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서강휘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기획처장, - [한주간 전례] 2019년 7월 29일(월) [(백) 성녀 마르타 기념일] 마르타 성녀는 라자로의 동생이자 마리아의 언니로서 예루살렘과 가까운 베타니아에서 살았다. 나흘이나 무덤에 묻혀 있던 라자로는 예수님의 기적으로 다시 살아난 인물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집에 머무르실 때 언니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으나 동생 마리아는 가만히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루카 10,40)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카 10,41-42). 주님의 이 말씀에 따라 마르타 성녀는 활동적인 신앙인의 모범으로, 마리아 성녀는 관상 생활의 모범으로 공경받고 있다. [복음묵상] 요한 11,19-27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라자로와 마리아의 누이로 예수님을 극진히 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 당신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의 집을 방문하시는데(요한 12,2 참조), 그때부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잡히시던 날까지 그분을 모셨던 이가 바로 마르타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 마르타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되살려 주시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시며 그들 집, 곧 베타니아로 가십니다. 그러자 마르타는 주님이 계셨더라면 라자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며 오빠를 살려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면서 마르타는 예수님이야말로 메시아이자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깊이 믿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믿음을 보시고 라자로에게 생명을 되돌려 주십니다. 이렇게 보니 마르타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봉사로 똘똘 뭉친 여인이 분명합니다. 주님을 믿는 이들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살릴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되돌려 주시는 것은 단순한 육신의 숨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되찾아 주시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 생명은 창조 이전부터 우리에게 계획된 생명으로 이 땅에서 이미 우리 모두가 누리고 있는 생명이며 육신의 숨이 끊어진다 하더라도 계속 이어지는 그런 생명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라자로에게 되돌려 주시고자 하는 생명은 육신의 숨이 아니라 바로 이 영원한 생명이었습니다. 라자로가 되돌려 받은 육신의 생명은 다시 끊겼지만 그가 되돌려 받은 영원한 생명은 세상 종말이 오더라도 영원히 이어질 것입니다. 오늘 마르타는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많은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2019년 7월 30일 (화) [(녹)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3,36-43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자마자 첫째 계명을 어깁니다. 모세가 산 위에서 돌판을 새기는 도중 산 아래에서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우상 숭배에 빠진 것입니다. 이에 화가 나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약속된 땅으로 올라가지 않겠다고 선언하시며, 그들이 당신 백성이 아니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다행히 모세의 중재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다시 당신의 백성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시고 그들과 여정을 함께 떠나겠다고 말씀하시며, 그들과 다시 계약을 맺으십니다. 제1독서는 이렇게 하느님과 모세가 다시금 계약을 맺는 대목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라지 비유를 설명하시며 종말 때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이 모두 불구덩이에 던져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남 이야기같이 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하듯이 우리 가운데 죄가 없어 하느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 3,20; 7,24 참조). 참 다행스러운 일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중개로 하느님과 새로운 계약을 맺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덕분에 부족한 우리가 용서받아 하느님과 함께 있을 수 있게 되었고, 또 의롭게 되었으며, 불의한 자로 취급받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중개는 모세의 중재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모세의 중재는 실패로 끝이 났지만, 그리스도의 중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이 미사성제를 봉헌하며, 그분 구원 업적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다시 한 번 그리스도 덕분에 우리 모두 구원에 이를 수 있게 되었음을 기억하고, 부족한 우리를 당신 제자로 삼아 주신 그리스도께 감사드립시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불의한 일을 저지르거나, 남을 불의하게 만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합시다. 물론, 부족해서 계속 무너지는 우리지만 무한하신 주님의 사랑에 의탁한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한 노력을 완성해 주실 것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2019년 7월 31일 (수) [(백)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은 1491년 스페인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군인이 된 그는 전쟁에서 입은 부상을 치료받다가 현세의 허무함을 깨닫고 깊은 신앙 체험을 하였다. 늦은 나이에 신학 공부를 시작한 이냐시오는 마흔여섯 살에 사제가 되었고, 이후 동료들과 함께 예수회를 설립하여 오랫동안 총장을 맡았다. 그는 『영신 수련』 등 많은 저술과 교육으로 사도직을 수행하였으며, 교회 개혁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1556년 로마에서 선종하였고, 1622년에 시성되었다. [복음묵상] 마태오 13,44-46 제1독서에서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눈 모세는 얼굴의 살갗이 빛납니다. 여기서 '빛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카란'인데, '뿔'이라는 의미를 지닌 '케렌'과 같은 어근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로마 시내에 위치한 쇠사슬의 성 베드로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가 제작한 모세 상에도 뿔이 달려 있습니다. 사실, 구약 성경에서 '뿔'은 하느님의 권능과 힘을 상징합니다. 번제 단이든, 분향 제단이든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는 제단에는 뿔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속죄 제사를 바칠 때, 제물의 피를 제단의 뿔에 발랐습니다. 게다가 죄를 지은 사람이 이 뿔을 잡으면 그를 처벌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권능을 지니신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은 나의 뿔"이라고 노래합니다. 이 '뿔'은 주님 권능을 실행하는 도구이기도 하였습니다. 숫양 뿔로 만든 나팔은 기쁜 소식, 곧 구원을 알려 주는 도구였고, 사무엘 등 예언자들은 '뿔'에다가 기름을 채워서, 임금들을 축성하였습니다. 이렇게 보니 제1독서에서 모세의 얼굴이 빛났다는 말은 모세가 바로 이 뿔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뿔 자체이신 하느님을 만나, 뿔을 도구로 받은 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 뒤 얼굴을 너울로 가립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를 두고 자신의 얼굴에 나타나는 빛이 사라지는 것을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더 이상 너울이 필요 없는 참빛을 보게 되었다고 강조합니다. (2코린 3장 참조). 오늘 복음이 말하는 기쁜 보물, 진주는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참빛이신 하느님을 만나 그분과 영원히 함께 살게 된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발견한 보물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2019년 8월 1일 (목) [(백)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알폰소 성인은 1696년 이탈리아 나폴리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신심이 두터웠던 그는 법학을 공부하여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사제의 길을 선택하였다. 1726년 사제품을 받은 알폰소는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를 설립하고, 올바른 그리스도인 생활을 위한 설교와 저술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그는 나폴리 근처에 있는 고티의 교구장 주교로 활동하다가 다시 수도회로 돌아가 1787년에 선종하였다. 윤리 신학의 대가로 존경받던 알폰소 주교를 1839년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복음묵상] 마태오 13,47-53 오늘 독서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모세가 세운 성막에 대하여 매우 자세하게 서술합니다. 증언판을 궤 안에 모신 성막은 이스라엘에게 하느님 현존의 표지입니다. 이 성막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를 건너갈 때 움직이는 성소였습니다. 이 성막이 세워진 뒤, 주님께서는 구름으로 천막을 덮으시고 당신 영광의 현존을 드러내십니다. 히브리인들이 볼 때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거처를 두셨다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큰 위로의 동기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 보편적으로 현존하시지만, 여기에서는 당신과 대화를 허락하시는 개인적인 현존을 다룹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 안에 현존하시기를 바라십니다. 구약 성경에서 성막은 만남과 안전의 장소, 다른 천막과 거처, 곧 사람이 되시면서 우리 가운데에 당신 천막을 세우실 주님 말씀의 천막에 대한 예고이며 전조입니다. 처음에 이 거처는 동정 마리아였습니다. 주님 탄생 때에 성령의 구름이 그를 덮었고 주님의 영광이 가득 채워졌습니다. (루카 1,35 참조). 이제 땅 위에 머무르시는 하느님의 참된 거처는 예수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물의 비유를 들어 하늘나라에 대하여 가르쳐 주십니다. 모든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모든 지체가 모두 좋은 사람들은 아닙니다. 세상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도 좋은 이들과 악한 이들이 공존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세상 종말에 좋은 이들은 받아들이고 악한 이들은 가려내시는 하느님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준엄한 경고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나태한 삶과 그릇된 확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2019년 8월 2일 (금) [(녹)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3,54-58 오늘 독서는 이스라엘의 축일들, 곧 목축이 잘되기를 기원하는 파스카 축제, 땅을 일구어 얻은 맏물을 창조주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치는 누룩 없는 빵의 축제인 무교절, 그리고 주간절 또는 추수절, 광야에서 보낸 시간을 기억하는 속죄일과 초막절에 대하여 일러 줍니다. 우리는 날마다 일의 노예가 되어 생기 없이 권태롭고 반복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일은 이따금 우리를 억누르고, 우리의 많은 시간과 관심을 빼앗으며 이웃에게 마음을 쓰는 것마저 막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이 큰 축일들을 지내면서 자유롭고 기쁘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리하여 모세를 통하여 백성에게, 주님과 이웃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주님을 위한 축일들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십니다. 오직 주님 안에서만, 그리고 주님을 통해서 우리는 관대하고 진정한 마음으로 서로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축일은 두 가지 목적을 지닙니다. 첫째, 주님을 위한 시간을 마련하고 기도와 찬미와 찬양으로 그분과 하나 되고자 우리를 자유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둘째, 이웃을 더 기쁘게 맞이하고 말을 들어주며, 우리 시간과 일을 기쁨과 자유와 특히 사랑으로 그들과 함께 나눌 기회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하느님의 원의를 자기 것으로 삼아 한 해 동안 많은 축일을 제정하여, 예수님께서 주님과 부활로 이룩하신 새로운 삶을 기뻐하며 살아가게 합니다. 이따금 사람은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놀라운 일에 맞서려는 마음을 갖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같은 고향 사람인 예수님께서 위대한 예언자이심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저 단순한 "목수의 아들"로 여기고 맙니다. 우리는 이웃이 잘되는 것을 기뻐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지, 아니면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지 성찰해 봅시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2019년 8월 3일 (토) [(녹)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4,1-12 오늘 독서는 50년째마다 지내는 희년의 제정으로 해방과 용서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계획을 소개합니다.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고, 사용하고 있는 땅은 하느님의 소유이므로 손대지 말고 그대로 놓아두어야 합니다. "너희는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희년을 통하여 종살이와 재산 몰수와 강제 노동에 한계를 정해 놓습니다. 희년은 정의의 해입니다. 바로 여기에 "너희는 동족끼리 속여서는 안 된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라는 원칙이 있습니다. 모든 정의는 이런 신적 토대에 바탕을 두며 특히 아버지의 유일한 부성애에서 기원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 형제 관계가 드러날 때 특별히 가치가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죄를 용서하는 희년을 선포하는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 한 부분을 읽으십니다(루카 4,16-21 참조). 언뜻 보기에 죄는 하느님의 율법에서 해방되는 행위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가장 힘든 종살이에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요한 8,34)이고,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더욱더 중대한 죄를 저지르기에 이릅니다. 헤로데는 거침없이 당당하게 말하고 화를 내며 용기 있게 꾸짖는 예언자 세례자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가둔 다음 목을 베어 죽입니다. 그는 초대한 손님들 앞에서 한 맹세와 약속의 종이며, 특히 자신이 저지른 죄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악에서 자유롭게 되고, 우리와 세상의 모든 실재가 온갖 억압에서 다시 일어서기를 바라십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 8월이 시작되는 주간입니다. 휴가철로 접어드는 시기 짧은 휴가기간이겠지만 지친 몸과 마음에 충분한 휴식시간이 되시길 빕니다. -Berard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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