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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묵상] 2019년 7월 14일 (일) [(녹) 연중 제15주일]

Berardus 2019. 7. 13. 06:19

    [금주의 말씀 묵상]
    2019년 7월 14일 (일) [(녹) 연중 제15주일]
    제1독서(신명 30,10-14) 제2독서(콜로 1,15-20) 복음(루카 10,25-37) 실천하는 사랑, 영원한 생명의 열쇠 바야흐로 휴가철이 시작됩니다. 어떤 휴가를 계획하셨는지요? 교우님 모두가 어디에서나 주님을 모시고 진정한 쉼의 시간을 가지시길 원하며 하나, 부탁을 드리려 합니다. 아무리 짐이 많아도 제발 매일미사 책이라도 꼭 챙겨가 주십시오! 교회는 매일미사 책에 무려 열 장이 넘는 지면을 할애하여 전국 방방곡곡 어디에서나 미사참례를 거르지 않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모든 신자들이 언제나 어디에서나 하느님께 찬미 드리기 원하는 이 간절한 원의를 팽개치지 말아주시길 바라고 바랍니다. 즈음이면 늘 떠오르는 질문이 있습니다.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쉼 없이 주님을 찬양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가?"라는 고민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주님과 조우하는 행복을 누리시는지 여쭙고 싶고 참으로 그리 살아주시길 원하는 마음이 큰 탓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삶에서 제일 어려운 것, 나아가 곤혹스러운 것은 매 순간순간의 생각과 행동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아마도 사탄이 극악무도한 악을 행하도록 유혹한다면 우리는 망설임 없이 사탄과 맞설 것입니다. 단호히 거부하고 반드시 이겨낼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우리 같은 범인에게 굉장한 것이나 대단한 것으로 시험하지 않습니다. 늘 우리가 일상 안에서 수시로 판단하고 선택해야 할 선의 무게와 악의 무게를 비슷비슷한 중량감으로 위장합니다. 이래도 상관없고 저래도 괜찮아서 탈이 없을 것처럼 포장합니다. 모호하게 느껴서 불분명하게 인식하도록 마음에 올무를 놓습니다. 우리가 살아내는 삶의 문제는 언제나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결과 또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오지 않기 일쑤입니다. 한마디로 인생이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믿음의 문제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은데요. 믿음이 희미해질 때, 삶은 방향을 잃어버립니다. 빛을 잃고 어둠 속을 헤매게 됩니다. 때문일까요? 오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오직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 뜻을 실천해야 한다고 일러줍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추가해서 들려주십니다. 그날 하느님의 율법을 앞세우면서도 말씀을 실천하지 않았던 "어떤 사제"와 레위인들은 주님께서 날린 강속구에 뒤통수가 얼얼했을 것 같은데요. 아무리 뻔뻔한 사람이라도 영원한 생명을 누릴 대상에서 탈락될 것이라는 주님의 '돌직구'가 매섭지 않았을 리가 만무하니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경고 메시지는 분명하고 명료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인간의 조건을 똑 부러지게 말씀해 주시니까요. "너희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주님께서는 아픔을 지닌 이웃을 향한 연민, 즉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살아가는 "가엾은 마음"만 잃지 않아도 몸소 끝까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하십니다. "가엾은 마음"만 있다면 기꺼이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아"줄 뿐 아니라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소홀함이 없도록 조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진리를 밝혀주십니다. 사랑은 끝까지 마음을 쏟는 최선의 배려임을 일깨우신 것입니다. 희생이란 기꺼운 사랑의 결과일 뿐임을 알려주십니다. 고통 중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측은하다는 감성적 '생각'이 아니라 손해를 감수하면서 끝까지 보살피는 '행동'으로 완성된다는 사실을 새기게 됩니다. 이웃의 곤고함을 "가엾다" 여기는 생각만으로는 사랑에 미치지 못하기에 겨우 간단한 응급조치만 해주고서 돌아선다면 완성된 사랑에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라 헤아립니다. 때문에 나의 일이 급해서 "반대쪽으로"가 버렸던 사제나 자신의 정결한 믿음이 더럽혀질 것을 염려하여 "반대쪽으로" 지나쳤던 레위인의 모습이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지 않은지, 꼼꼼히 살피라는 당부로 듣습니다. 그날 사마리아인처럼 소중한 "두 데나리온"을 일면식조차 없는 가엾은 이를 위해 흔쾌히 사용하는 마음 폭을 지녔는지, 이웃의 나중까지도 무한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통 큰 배포를 가졌는지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의미라 싶습니다. 단지 "가엾다"는 생각을 갖는 것만으로 자신이 매우 선하고 엄청 착하게 살아가는 양 여기진 않는지, 심중을 꼼꼼히 뜯어보라는 말씀이라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 모두가 스스로의 삶을 정직하게 돌아보기를 원하시는 것이라 싶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에 맞게 고쳐서 살아갈 것을 강권하고 계심을 느낍니다. 한마디로 갖은 핑계를 대며 '생각'으로만 사랑하고 '말로'만 자비를 베풀려는 우리의 인색함을 슬퍼하신다는 고백이십니다. 아픈 이웃을 위해서 내 노새를 내어주고 터벅터벅 두 발로 걷기를 마다지 않는 모습을 오늘 우리에게서 보고 싶다는 고백이십니다. 어쩌면 우리가 넘어야 할 가장 험한 난관은 "최선의 방법을 알면서도 최선의 것을 선택하지 못하는 처지"가 아닐까 싶은데요. 이를테면 "이번 휴가 기간에는 성경을 꼭 읽어야지"라고 다짐했으면서도 성경은 무겁다는 이유로 부피가 작은 매일미사 책으로 바꿔 넣거나 "기도를 많이 바치겠다"라고 다짐했으면서도 그저 더 먹고 더 떠들고 더 흥분하느라 손에 묵주 한 번 쥐어보지 못하고 돌아오는 경우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도구입니다. 구체적으로 행하는 사랑만이 영원한 생명의 열쇠입니다. 더딘 듯 보여도 주님의 방법이 가장 힘이 셉니다. 그러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처럼 말하고 주님처럼 행동하려는 의지가 소중합니다. 행동하지 않는 지식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행동하지 않는 믿음은 허세이며 무의미한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면 상대를 좋다 하고 내가 받은 사랑만큼만 응대하는 세상의 방법으로는 주님 사랑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상대의 친절에 따라 내 마음과 행동이 적절히 반응하는 꼼수는 복음인이 사용할 방식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크고 웅대한 업적이 아닙니다. 그저 당신의 마음을 헤아려 살아주기만 원하십니다. 당신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아름다운 마음이 세상을 살리고 움직이고 변화시켜서 모두가 함께 더불어 밝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당신과 맺은 사랑을 변함없이 지켜달라고 간청하십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주님과 마음을 합하여 예배드릴 것을 원하십니다. 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은혜를 선물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마침내 주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이웃으로부터 "나도 주님의 자녀가 되고 싶다"는 고백을 듣게 되기를 소원하십니다. 여름의 한 가운데, 주님의 심정이 고스란한 복음의 이정표를 놓치지 말아 주십시오. 믿음의 나침반이 알려주는 올바른 방향을 선택해 나아가 주십시오. 하여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주님의 권고를 기억하여 '하지 않고' 물러서는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살아내 주십시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는 기쁨과 행복을 살아가시길 두 팔 벌려 축원합니다. -장재봉 신부 (부산교구 월평본당,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19년 7월 15일(월) [(백)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복음묵상] 마태오 10,34─11,1 제1독서에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이집트의 새 임금은 자기 백성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지혜롭게 다루어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수가 너무 많아져서 자신들에게 큰 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에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강제 노동을 시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억압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 번성하고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하느님 계획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구약 성경에서 '지혜롭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보니 파라오는 모든 것을 참 지혜롭게 대처한 듯합니다. 왜냐하면 파라오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 곧 "너의 후손은 …… 그들의 종살이를 하고 학대를 받을 것이다.“ (창세 15,13)라는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파라오는 자신도 모르게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파라오는 마지막까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 속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가족들이 서로 갈라서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집안 식구가 서로 원수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가족끼리 싸우라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를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면 가족이라도 과감히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사실, 가족을 사랑하고 그들을 마지막까지 지키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다만, 자기 가족만을 위하여 예수님을 버린다면, 진리를 외면한다면, 그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마저 죽음에 빠트리는 일이 됩니다. 이렇게 보니 오늘 복음은, 가족을 진정 사랑하는 길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충실하여 가족의 모든 구성원이 주님의 뜻에 따라 살도록 이끄는 것임을 이야기하는 듯합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2019년 7월 16일 (화) [(녹)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1,20-24 제1독서에서 파라오의 딸은 물에서 건져 낸 아이의 이름을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냈다."라는 의미로 "모세"라고 부릅니다. 모세 입장에서 볼 때 '건져 내어진 이'라는 의미를 지닌 '마수이'라는 이름이 더 적절해 보입니다. 그러나 파라오의 딸은 무의식적으로 '건져 내는 이'라는 뜻을 가진 "모세"라는 이름을 사용하는데, 모세는 이 이름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 바다에서 건져 내는 역할을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모 세가 구출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가 바로 파라오의 딸이라는 점이 참 역설적입니다.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 땅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데, 그의 딸이 모세를 구출해 냄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땅을 떠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줍니다. 더 나아가 파라오 역시 모세를 죽이려 하지만, 이 때문에 모세는 광야로 나가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코라진과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을 꾸짖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지역, 특히 카파르나움은 예수님의 활동 중심지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많은 가르침을 받았고, 많은 기적을 경험하였습니다. 어찌 보면 예수님께서 가장 많은 기적을 행하신 곳이 그곳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지 않습니다. 이렇게 보니, 믿음은 예수님 말씀을 많이 듣는다고, 또 그분이 일으키는 기적을 많이 본다고 생기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자주 경험하지만, 믿음은 파라오 같은 사람을 만나 극도의 어려움을 겪을 때 더 강해지나 봅니다. 어려움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에 대한 믿음이 굳건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릴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을 진정으로 만나고 참된 부활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를 두고 우리는 신앙의 역설이라 부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2019년 7월 17일 (수) [(녹)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1,25-27 제1독서에서 주님의 천사는 떨기나무 한가운데서 불꽃 모습으로 모세에게 나타납니다. 여기서 떨기나무는 히브리어로 '서네'입니다. 이 낱말은 잡초, 가시덤불, 덤불을 의미하는데, 금세 타고 없어질 듯한 존재라는 다소 부정적인 느낌을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서네 한가운데로부터 솟아오르는 불꽃 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시는데, 떨기가 불에 타는데도, 그 떨기가 타서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 상징 속에서 한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금세 타고 없어질 잡초, 덤불 같은 존재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머무시면서 그들을 태워 없애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하느님께서는 표징을 달라고 청하는 모세에게 한 가지 표징을 주십니다. 바로,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 모두는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이름을 가지신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복음이 이야기하듯이 세상 속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같은 존재, 곧 제1독서가 이야기하던 '서네' 같은 존재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서네' 같은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계시며 당신을 알게 해 주십니다. 자신이 '서네'임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며 하느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들은 결코 하느님 아버지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아버지를 알려 주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2019년 7월 18일 (목) [(녹)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1,28-30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당신 이름이 '야훼(에흐예)', 곧 '있는 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야훼를 글자 그대로 번역하자면, '나는 있을 것이다.' 또는 '나는 있다.'입니다. 이 낱말은 명사가 아니라 있음, 곧 존재를 나타내는 동사입니다. 이름은 단순히 그 사람에게 붙여지는 의미 없는 낱말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또 어떤 사명을 지니고 있는지를 알려 줍니다. 하느님의 이름도 마찬가지입니다. '야훼'라는 이름은 하느님의 특징, 곧 '우리와 함께 항상 계신 분', '아브라함 때도, 이사악 때도, 야곱 때도 계셨으며, 이스라엘 백성들, 더 나아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와도 늘 함께 계셔 주시는 분'이라는 특징을 잘 드러내 줍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억압받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다고 느꼈습니다. 하느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참으로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계셨음을, 당신이야말로 참된 '야훼'이심을 알려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라고 밝히시며 당신의 멍에를 메고 당신에게서 배우라고 권고하십니다. 여기서 '온유하다'라고 번역한 그리스어는 '프라위스'입니다. 이 낱말은 본디 히브리어 '아나빔'(가난한 이들)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하느님과 이웃 앞에서 자신을 철저히 낮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온유함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온유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온유한 이들은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마태 5,5 참조). 곧,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해 주셨던 그 땅, 하느님 나라를 얻게 될 것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2019년 7월 19일 (금) [(녹)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2,1-8 시간이 지나면서 오경의 율법을 실생활에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라삐들은 율법 규정을 실생활에 맞게끔 해석해 주곤 하였습니다. 유명한 라삐의 해석은 시간이 지나며 판례로 사용되어 엮였는데, 그렇게 등장한 것이 미쉬나, 탈무드 같은 미드라쉬입니다. 예수님 시대까지는 이런 판례들이 아직 권위 있는 책으로 엮이지는 않았고, 조상들의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곤 하였는데, 바리사이들은 그것을 율법에 버금가게 중요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보인 행동은 바리사이들이 중시하던 조상들의 전통을 거스르는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종파마다 율법을 해석하는 방법, 곧 '할라카'가 달랐습니다. 곧, 바리사이들의 할라카, 사두가이들의 할라카, 에세네파의 할라카가 저마다 달랐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할라카란 '길'이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할라카'에 따라 율법을 새롭게 해석해 주십니다. 안식일의 핵심은 희생 제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비이며, 당신을 통하여 안식일의 참된 의미, 곧 영원한 안식이 이루어짐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율법을 깨뜨리시는 분이 아니라, 율법의 참의미를 밝혀 주시는 분, 생명에 이르는 참된 할라카('길')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오늘날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새로운 규칙과 규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길, 곧 할라카에 따라 새로운 상황에 적합한 규정들을 만들어 갑니다. 그러나 우리도 이따금 바리사이들처럼 외적 규정을 만들고 지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예수님의 종이 아니라 규정의 노예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규정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되고, 모든 것의 주인이신 당신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래야 우리가 지키는 모든 규정이 참된 의미를 드러낼 것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2019년 7월 20일 (토) [(녹)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2,14-21 제1독서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이집트를 탈출합니다. 누룩을 넣어 반죽을 부풀릴 시간조차 없이 황급히 이집트를 떠나야 하였습니다. 머뭇거릴 수 없어 양식도 장만하지 못한 채 그들은 이집트 땅을 빠져나와야 하였습니다. 이제 그들은 뒤로 돌아설 수 없습니다. 오직 약속된 땅을 향하여 앞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그러나 그들 앞에 펼쳐진 것은 광야였습니다. 그리고 이집트는 끊임없이 그들이 나아가는 길을 방해할 것입니다. 물리적으로 방해하는 파라오도 있지만, 이스라엘 스스로 이집트에서 먹던 고기를 잊지 못하며 끊임없이 하느님께 한탄을 쏟아 낼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모든 방해물을 제거하시고 이스라엘을 결국 젖과 꿀이 흐르는 곳으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 그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없애려고 모의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종 메시아가 백성에게 올바름, 곧 하느님의 정의를 선포하리라고 예언한 바 있습니다. 하느님의 정의, 곧 하느님의 의로움이란 하느님께서 당신 약속을 지키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보니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통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졌음을, 드디어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시어 그들에게 영원한 나라, 곧 젖과 꿀이 영원히 흐르는 하느님 나라를 선사하셨음을 선포하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린양의 피가 필요합니다. 문설주 상인방에 발라 이스라엘의 첫째 아들만 살려 주던 그 어린양의 피가 아니라, 모든 이를 구원할 어린양의 피가 필요합니다. 그 피는 바로 예수님의 피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흘리게 할 예수님의 피가 결국 온 세상을 구원하게 되리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 이렇게 보니 바리사이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하느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이루시는 데 쓰이는 도구가 됩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 시원한 바람이 그리워지는 계절입니다. 더위와 함께 하반기의 시작이 벌써 중순을 지나고 있습니다. 올해의 충실한 결실을 위하여 미리한번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은 시간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 봉헌하며 ♥ 행복한 한 주 되시길 빕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