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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묵상] 2019년 6월 30일 (일) [(녹) 연중 제13주일 (교황 주일)]

Berardus 2019. 6. 28. 07:53

    [금주의 말씀 묵상] 2019년 6월 30일 (일) [(녹) 연중 제13주일 (교황 주일)] 제1독서(1열왕 19,16ㄴ.19-21) 제2독서(갈라 5,1.13-18) 복음(루카 9,51-62) 자기를 위한다는 것 위기지학(為己之學)과 위인지학(為人之學). 유가(儒家)가 정통(正統)과 이단(異端)을 구분 짓는 기준이다. 위기지학이란 자기를 위한 배움이고 위인지학이란 타인을 위한 배움을 의미한다. 언뜻 보면 위인지학이 더 그럴싸해 보이지만 유가는 위기지학을 표방한다. 자기 없이 타인을 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위인지학은 타인의 시선이 삶의 기준이 된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서열을 짓고 붕당을 이룬다. 남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가장 쉬운 방법은 경쟁자 혹은 적을 만들어 그를 비난하고 싸워 이기는 것이다. 내면에 남는 것이 없다. 자기 것이 없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위기지학은 자기만을 위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여기서 '자기'란 이기주의적 자기는 아니다. 공자는 "참다운 인격완성이란 편협하고 자기만 아는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克己復禮為仁)고 말했기 때문이다. 참다운 자기가 된다는 것은 끊임없는 자기 극복의 과정이기도 하다. 자기 없는 자기. 사실 하느님과 하나된 자기를 말한다. 그것이 복례(復禮), 즉 하늘의 뜻과 질서를 따르는 것이다. 오늘은 교황 주일이다. 교황님에 대한 대표적인 수식어는 '하느님의 종들의 종'(Servus Servorum Dei)이다. 세속적 관념의 황제는 권력의 최고 정점에 있고 백성들을 종으로 여기지만 교회의 황제는 모든 백성의 종으로 존재한다. 황제라는 이름과 종이라는 이름 사이의 역설은 복음적 메시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첫째가 되는 것은 꼴찌가 되는 것이며 가장 높아지려는 자는 가장 낮아져야 하는, 세속적 가치에 대한 전복인 것이다. 이 역설과 전복은 '나'에 대한 질문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참으로 나 자신이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나를 버리라. 이것의 정점에 예수님의 죽음이 존재한다. 오늘 제1독서인 열왕기서의 엘리야는 자신의 후계자인 엘리사를 만나 가사(袈裟)를 전수하듯 자신의 예언자 의복을 엘리사에게 걸쳐 준다. 겨릿소를 몰던 엘리사는 그날로 자신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엘리야를 따른다. 자신의 생계를 위한 겨릿소와 쟁기는 자신의 삶을 보장해 줬던, 그래서 자기를 지탱해 주던 상징물이다. 그래서 그가 버린 것들은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라 과거를 지탱했던 자기 자신인 것이다. 이제 그가 가야 할 길은 자기의 길이지만 결국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길이 된다. 참으로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의 시작인 것이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가 갈라티아인들에게 던진 메시지는 참다운 자유를 얻는 것, 그래서 참으로 자기를 위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단어가 가진 뉘앙스를 적절히 조절해 사용한 다음의 구절이 흥미롭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매지 마십시오.…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갈라 5,1.13) 여기서 1절의 '종살이'와 13절의 '섬기십시오'는 희랍어의 δούλος(노예, 종)의 명사형과 동사형이다. 종살이가 죄의 노예가 되는 것이라면 섬김은 사랑으로 인한 노예살이가 된다. 노예살이라는 점에서 전자와 후자는 동일하지만 후자는 참다운 자유에 이르는 길이다. 자유란 육체의 욕구에 따른 방종이 아닌 타인을 섬김으로 인해서 성취되는 것, 즉 자신을 버림으로 인해 참다운 자기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바오로의 말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고 그것은 참으로 나를 위한 길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이다. 내가 내 자신이 되지 않는 자유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우리는 흔히 자유와 방종을 혼동한다. 자유를 마치 '마음 내키는 대로 하는 것' 정도로 착각하는 것이다. '마음 내키는 대로'라는 말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마음이란 공자의 말마따나 '생기고 사라지는 데 있어 정해진 시기가 없고 그 방향을 알 수 없는 것'(出入無時莫知其鄉)이다. 아무런 방향성 없이 움직이는 것을 자유라고 한다면 이는 동물의 정해진 운명보다 무가치하고 슬픈 일이다. 이런 무가치한 방종과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는 그곳에 자유의 참된 시작이 있다. 이제 인간에게 스스로 자기 운명의 한 꼭짓점을 담당할 위대한 권한이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자유는 선택권만을 지닌 것에 제한되지 않고 그 자유를 완성할 책임도 그 안에 지니고 있다. 자유가 무작위한 자유 운동이 되지 않도록, 그래서 끊임없이 창조되는 생명의 질서에 부합하는 선택이 되도록 하는 책임이다. 육욕이 원하는 대로 방종한 삶을 산다면 죄의 노예가 되고 성령이 원하는 대로 노예가 된다면 참다운 자유를 얻는다는 것이 오늘 바오로 사도의 권고이며 부탁이다. 참다운 자유란 진정한 자기가 되는 것이지만 거기엔 나를 극복하는 일이 필요하다. 복음에 나타난 세 부류 제자의 모습도 이것을 시사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겠다고 나서는 이에게는 그 길이 얼마나 어려운지 말씀하시고 당신이 따르라고 부른 사람에게는 더 큰 것을 요구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예수님을 따랐는지 복음은 전해주지 않는다. 다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자신의 구미나 예상과는 언제나 같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듯하다. 사실 우리는 내 자신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나의 내밀한 욕망을 지지해 줄 피상적 지식에 근거한 고집스런 계획과 구상을 가지고 있다. 분명한 것은 나의 열망은 언제나 참다운 길을 제시하는 하느님의 계획에 의해 부단히 수정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분명히 드러난 사건이 바로 죽음을 맞이하던 때의 예수님이다. 아버지의 뜻을 묻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가야 할 길이고 그것이 예수님 자신이 되는 길이셨다. 나의 고집을 버림으로 인해 내가 되는 신비. 그 무한한 자유의 공간에 유일한 이정표가 있으니 그것은 사랑이다. 타인의 시선에 이끌리지 않고 온전히 내가 될 수 있는 자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버리는 사랑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사도 바오로의 오늘 말씀처럼 말이다. "사실 모든 율법은 한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계명입니다."(갈라 5,14)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우선 나를 버려야 한다. 그 사랑의 한 가운데에서 우리는 잃어버렸던 참다운 나를 발견한다. '너와 하나가 된 나'가 그것이다. 나도 버리고 너도 버리지만 우리 안에서 너와 나가 동시에 되살아난다. 이것이 참으로 나를 위한 길, 부활의 길일 것이다. -서강휘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기획처장)- [한주간 전례] 2019년 7월 일 1(월) [(녹)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8,18-22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둘러선 군중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기적을 보고 당신께 밀려든 사람들 앞에서 제 자들이 우쭐대지 못하게 하려고 그러셨을까요? 그때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을 목격한 그는 예수님을 스승님으로 모시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머리 기댈 곳조차 없는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굴이나 보금자리를 가지는 짐승과 달리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은 불확실한 유랑 생활에 몸을 맡겼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세상의 인정과 행복을 뒤로하고 스스로 불확실한 세계 속으로 들어선 이들로, 하느님 외에는 다른 어떤 것에도 의지할 곳이 없는 이들임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끝나자마자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고 당신을 따라나서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당신을 따르라 권고하십니다. 이는 부모가 죽어도 제사를 지내면 안 된다거나, 부모를 공경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당신을 따라나서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그 무엇이든 피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충 쉽게 가르치심으로써 되도록 많은 이들을 제자로 만들려 하지 않으시고, 모든 것을 버리고 철저히 하느님께 의탁하는 이들만 참 제자로 받아들이십니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느님께 철저히 의탁하는 의인 열 명, 아니 단 한 명만 있어도 세상 파멸이 오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창조 이래로 세상 종말 때까지 하느님께 철저히 의탁한 의인으로, 우리를 파멸에 빠지지 않도록 해 주시는 분이 한 분 계심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2019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8,23-27

    삶의 풍랑을 맞지 않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부유해도, 아무리 큰 권력을 쥐고 있어도, 아무리 평온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모든 사람은 크고 작은 풍랑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주님께 매달리며 하소연합니다.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주님께서 침묵 중에 계신다고 여길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바람대로 주님이 따라 주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분명히 이야기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사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분입니다. 다만, 우리 뜻이 아니라 당신 뜻에 따라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에, 그분의 해결 방식이 우리 마음에 들지 않을 뿐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스스로를 하느님과 동등한 위치에 세워 두고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어 하는 철없는 인간에게 주님만이 온 세상 만물의 주인이심을 보여 줍니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을 퍼부으시며 죄악을 없애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의탁하는 이들을 위하여 기꺼이 구원의 손길도 내밀어 주십니다. 물론, 롯이 바라는 방식은 아니지만 하느님께서는 롯에게 가장 좋은 길을 마련해 주십니다. 온갖 만물을 당신 뜻대로 이끌어 가시는 하느님께서는 나에게도 가장 좋은 길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풍랑을 마주하더라도 겁내지 말고 믿음을 굳건히 합시다. -염철호 요한 신부- 2019년 7월 3일 (수) [(홍) 성 토마스 사도 축일]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쌍둥이'라고도 불렸다(요한 20,24 참조). 갈릴래아 출신의 어부였던 그는 매우 강직한 제자로 드러난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해치려고 했던 베타니아 마을로 가시려 하자 이를 만류하던 다른 제자들과 달리, 토마스는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 하고 큰 용기를 보였던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지 못한 토마스는 강한 불신도 보였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시자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하고 고백하였다. 이러한 토마스 사도는 인도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복음묵상] 요한 20,24-29

    오늘 복음에서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을 뵈었다는 다른 제자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런 토마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의 의심을 야단치지 않으시고, 토마스의 방식에 따라 그를 믿음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바라신 것은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토마스는 바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외칩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두고 직접 "하느님"이라고 외친 이는 토마스가 유일합니다. 조금 전까지 의심이 가득하였던 인물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바로 믿음의 인간으로 변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심을 고백한 것입니다. 요한 복음서는 시작부터 말씀이 하느님이셨다고 이야기하는데, 그 사실을 토마스가 직접 고백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 말씀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믿음이 중요함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당신을 직접 보지 못하였지만 당신을 따르는 이들, 제자들의 증언을 듣고 당신을 따라나선 이들이야말로 참으로 대단한 믿음을 지닌 이들이고 행복한 이들임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직제자가 아닌 우리 모두가 제자들만큼, 아니 제자들보다도 더 행복한 이들임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보지 않고 믿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바오로 사도는 믿음을 주님께서 주시는 은사라고 말합니다(1코린 12,9 참조). -염철호 요한 신부- 2019년 7월 4일 (목)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9,1-8 오늘 제1독서에서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여 외아들마저 제물로 바치려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후손을 통하여 모든 민족에게 복을 내리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이들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복을 받게 된 사람들, 곧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외아들 이사악이 아니라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로 내어놓으심으로써 당신께서 약속에 충실하신 분임을 드러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중풍 병자 한 사람을 데려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고쳐 주시기 전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유다인들 사고방식에 따르면 병이 들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부정한 상태, 곧 죄의 상태에 있음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죄를 용서해 준다는 말은 그를 죄의 상태, 곧 병에서 풀어 준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관점에서 볼 때 병 자체가 죄를 의미하지는 않기에, 중풍 병자를 치유하는 것 자체가 죄를 용서해 주는 행위는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의 약속이, 곧 죄의 용서가 이루어지게 되었음을 유다인들이 자기네 방식으로 깨닫게 해 주시려고 죄인으로 여기던 중풍 병자의 병을 치유해 주십니다. 그렇게 우리 모두가 죄를 용서받고 다시금 하느님의 축복 속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음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육신의 고통만을 없애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죄를 용서받아 하느님과 화해하여 영원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2019년 7월 5일 (금) [(홍)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신심 미사] 한국인 최초의 사제로서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21년 충남 솔뫼에서 태어났다. 양반 가문이었으나 그의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르술라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1801년 신유박해 때 집안이 몰락하였다. 김대건은 열여섯 살인 1836년 사제가 되고자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길을 떠났다. 1844년 부제품을 받은 그는 선교 사제의 입국을 돕고자 잠시 귀국하였다가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1845년 8월 17일 상하이의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고국에 돌아온 김대건 신부는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 사제의 입국 통로를 개척하려다가 1846년 6월에 체포되어 여러 차례 문초를 받고 9월 16일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4년 5월 6일 서울에서 한국 순교자 103위를 시성하면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정하상 바오로와 함께 한국의 대표 성인으로 삼았다. [복음묵상] 마태오 10,17-22 예수님의 제자들은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의회에 넘겨져 회당에서 채찍질을 당할 뿐만 아니라,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갈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가족들의 미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벌어지는데, 그분의 참된 제자라면 끝까지 스승이신 예수님을 버리지 않고 증언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젊은 나이에 순교한 것도 이런 제자로서의 사명 때문입니다. 교회는 김대건 신부처럼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의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들의 피로 양육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언한 신앙 선조들의 모범을 따라, 그들이 걸어간 십자가의 길에 동참합니다. 그러나 종종 십자가 밑에서 주님을 증언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분의 이름을 더럽히지는 않을까 걱정하기도 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환난 중에 내버려 두시는 분도, 우리를 박해하는 이들을 그냥 내버려 두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박해하는 이들을 결코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또한 당신의 이름 때문에 박해받는 이들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큰 사랑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주님의 제자들은 환난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희망은 그들을 결코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2019년 7월 6일 (토) [(녹)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9,14-17 제1독서에서 레베카와 야곱은 이사악을 속이고 장자권, 곧 하느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레베카와 야곱이 마치 속임수로 에사우에게 갈 장자권을 가로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25장 23절에서 주님께서는 이미 레베카에게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말해 주신 바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레베카는 주님의 뜻에 반하여 에사우에게 축복을 내리려던 이사악을 막고, 주님의 뜻대로 야곱에게 축복이 돌아가도록 만듭니다. 어떻게 보면 이사악을 속였다기보다는, 잘못된 이사악의 행위를 바로잡아 준 셈입니다. 실제로 에사우는 장자권, 곧 하느님의 축복을 빵과 불콩죽에 팔아넘길 정도로 업신여기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둘째였던 야곱이 축복을 받는데, 그가 바로 이스라엘의 조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왜 단식을 하지 않는지 묻습니다. 이스라엘의 올바른 이라면 누구나 하느님 앞에서 단식을 해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신랑이 그들과 함께 있기에 '슬퍼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단식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되었음을 슬퍼하며 행하는 참회의 표지였는데, 예수님 당신을 통하여 이미 혼인 잔치, 곧 메시아 시대가 열렸고, 혼인 잔치의 신랑인 메시아가 그들과 함께 있으니 굳이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들도 곧 신랑을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때가 되면 제자들은 단식하게 될 것입니다. 슬퍼할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담길 것이기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구약의 백성이 슬퍼하듯이 그렇게 슬퍼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약의 백성은 비록 신랑을 빼앗겼지만, 그 신랑을 곧 되돌려 받을 것입니다. 아니 그 신랑과 영원히 함께 살 것입니다. 그렇게 다시는 단식하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빵을 배 불리 먹고 마시는 그런 시대를 살아갈 것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 7월이 시작되는 주간입니다. 장마가 시작되어 여기 남부지방에는 많은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6월의 마지막이 어렵게 지날 듯합니다. 모두에게 피해 없이 장마가 지나길 다함께 기도합시다. -Berard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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