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의 ‘착한 목자’ ■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 반대로, 제1독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이들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거주하던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말씀을 전합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명망 있는 인사들을 안식일에 초대하여 회당에서 연설을 듣는 관습이 있었는데 본문은 이 도시의 사람들이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말을 듣기 위하여 “거의 다 모여 들었다”(사도 13,44)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사도들의 말을 듣고자 모여드는 것을 보고 “유다인들은 시기심으로 가득 차 모독하는 말을 하며 바오로의 말을 반박”(44절) 합니다. 바오로는 하느님의 말씀을 배척한다면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46절) 판단한 것이라고 보고 다른 민족들에게 말씀을 전하겠다는 담대한 태도를 취합니다. 그러자 “다른 민족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였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진 사람들은 모두 믿게” 됩니다.(48절) 이렇게 ‘하느님의 백성’은 그분의 말씀을 듣는 데서부터 형성되는 것입니다. ■ 어린양이시며 목자이신 분 제2독서인 묵시록의 내용도 “하느님의 백성”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계약을 연상시키는데(창세 22,17 참조)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묵시 7,9)를 형성하고 있고, 국가나 민족의 구별 없이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온 이들로서 광대한 보편성을 가집니다. 이는 이스라엘에게 국한되던 구원의 범주가 이제 모든 인류에게 개방되었음을 알려줍니다. 이 새 이스라엘은 “어린 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한 이들인데(14절) 이는 예수님의 죽음이 그들을 죄에서 벗어나 깨끗한 상태로 건너가게 하였음을 선언합니다. 이러한 희생과 봉헌은 예수님을 그들의 목자로 세우게 하는 결정적 사건이 되어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17절)십니다. “어린양”은 이제 “목자”가 되신 것입니다. 서슬 시퍼런 분노와 목숨을 건 투쟁으로 일궈낸 안정이라 하더라도 그 정치적 현실이 인간을 온전히 구원하지 못함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부의 축재와 성공을 통해 살기에 가장 편리한 환경을 만들었다 해도 그것이 비인간화와 결핍의 허기를 무력화시키지 못함도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정치·경제적으로 구원할 제왕적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그 어떤 영화나 화려함도 인간이 구현해야 할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행복과 충만, 자유와 해방을 주지 못함을 깨달으면서 진정한 구원의 실체를 묻기 시작합니다. 그 답은 존재를 바쳐 믿고 보호하며 이끌어주는 목자적 메시아의 등장이었습니다. 부질없는 저항이나 집요한 탐욕에 대한 추구는 현재를 더욱 불안하고 불행하게 할 뿐입니다. 오히려 하느님이 건네주시는 주변의 작은 사랑과 우정을 알아보고 그 빛이 인도하는 복음을 향해 걸어갈 때 오늘, 지금, 여기에서 누릴 온전한 기쁨과 충만은 완성됩니다. -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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