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들이 모두 태평성대를 구가할 때,
예언자들은 그 순간 멸망의 위험을 알아보고,
모든 이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도 그 순간 희망의 불씨를 발견합니다.
기원전 519년,
유배에서 돌아왔지만 아직 성전도 재건되지 않았고
기대하던 회복과 구원이 실현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던 때에
즈카르야는 환시를 보았습니다.
그가 본 첫째 환시에서는 예루살렘이 멸망한 지 칠십 년이 되었는데도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을 구하러 나서지 않으시는 모습이었지만,
둘째 환시에서는 하느님께서 시온을 가엾이 여기시고,
셋째 환시에서는 분명하게 구원을 예고하십니다.
화답송에서 노래한 내용도 유다 왕국의 멸망을 선포하던
예레미야가 패망 이후에나 성취될 미래를 예고한 부분의 말씀인데,
여기서 그는 멸망이 임박했음을 알면서도 그 멸망이 끝이 아니라고 선포합니다.
오늘 복음 바로 앞에는 예수님께서
어떤 아이에게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것을 전하는 내용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 기적을 보고 놀라워하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수난도 부활을 향한 여정의 한 부분이라는 점을
제자들마저 깨닫지 못합니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다.”
태평성대를 노래하면서 기뻐하는 이들에게 파멸을 선포하시고
그 멸망을 통해 쇄신을 이루시는 하느님의 계획,
당신을 메시아로 믿고 임금으로 세우려는 이들에게 수난을 예고하시는 예수님,
그리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 구원을 이루시는 하느님의 계획은
인간의 눈에는 받아들이는 것도 묻는 것조차도
두려운 신비일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