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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2년 7월 3일 (일) 연중 제14주일

Berardus 2022. 7. 2. 05:53

[금주의 말씀묵상]

2022년 7월 3일 (일)

연중 제14주일

제1독서 이사 66,10-14ㄷ 

제2독서 갈라 6,14-18 

복음 루카 10,1-12.17-20


"사랑하고 섬겨라” 세상에 우리를 보내신 예수님

빈손으로 제자들을 파견하신 주님
생각과 의지, 명성과 편안함 대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삶 살아야



■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고 하십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너무나 뜻밖입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왠지 제 생각에는 제자들을 보내는 거면,

뭔가 많이 챙겨 보내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 같은데요.

뜻밖에 주님은 빈손으로 제자들을 보내십니다.

예전에 제가 시골 본당에 있을 때

한국 외방 선교회 신학생이 공소 체험을 왔었습니다.

지금은 신부님이 됐는데요.

그분과 이야기할 때도 저는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분에게 물었습니다.

“나중에 선교 나가서 일을 하려면 후원회도 조직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분들을 많이 알아야겠네요.”

그분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뭔가 베풀어야 한다는 마음보다는 그

분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때는 마음으로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요.

마음 한켠에 그러한 마음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빈손으로 보내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낯선 곳에 가는 것이면 이방인이 되는 것일 텐데요.

그러면 ‘힘도 있고 돈도 좀 있고 능력도 있어야

도움도 되고 일도 해 나가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 나는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텃밭에 씨앗을 사다가 심었습니다.

심으면서는 ‘이게 싹을 틔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비가 시원하게 오고 하루 이틀 지나니까,

작은 새싹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보리는 얼마나 힘이 센지

흙덩이들을 밀치고 싹을 틔우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신기하고 놀라워서

볼 때마다 “와~” 하는 소리가 나옵니다.

새싹을 틔운 이후에도 자라고 성장하는

야채들의 모습을 보면 너무 신기합니다.

땅속의 씨앗과 땅 위의 나무,

그 두 가지 그림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이 세상 만물이

내 생각 그 이상의 것이라는 느낌이 들게 합니다.

오늘 아침 기도하면서 그 부분이 새삼

신기해서 한참 머물러 있었습니다.

씨앗은 나무의 모습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씨앗이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하느님은 우리의 씨앗에 나무가 있고,

우리 생각 그 이상의 것이 있음을 알려 주십니다.

씨앗은 그것을 알고 죽을 수 있을까요?

어떤 씨앗은 땅속의 세상이 만족스러울지도 모릅니다.

땅속이 안전과 평화를 가져다준다고 느낄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내 몸, 생각, 의지, 명성,

그리고 세상이 편안함을 주고 전부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아름답고 최고인 것으로 여길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은 그 너머에 있습니다.

마치 ‘싹을 틔우는 씨앗을 볼 때 자아내는 감탄’과도 같습니다.

내 몸과 생각과 의지와 명성과 세상에 죽고

그 너머의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모습이 주님에게

가장 큰 기쁨이고 가장 마음에 들어 하실 모습인지도 모르겠죠.

우리는 그 너머를 생각하며

세상에 대해 죽고 있을까요?

죽어야 할 목록을 적어 보다가 ‘명성’이라는 단어가

꽤 오래 제 안에 머물러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 피정하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굉장히 불편하게 여겨지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다 이뤘다고,

또 성공했다고 하시는데 뭔가 불편했습니다.

왜 불편할까, 궁금해 하며 반복해서 기도하는데,

문득 제 머릿속에 이런 생각들이 지나갔습니다.

제가 추구하는 성공은 그런 성공이 아니었던 겁니다.

더 중요한 자리에서 더 많은 일을 하고,

여러 본당을 다니고 지나면서 더 많은 사람이

기억하고 따라다니는 그런 모습이

성공이라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성공을 바라보았습니다.

‘십자가 죽음, 그리고 그 곁에 선 제자 한 사람과 어머니.

그것이 성공이라면’ 그걸 바라볼수록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성공의 모습이 힘을 잃고,

그분이 보여 주시는 성공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쓰시는 대로’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 어머니가 제 자식을 위로하듯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

예전에 제가 있던 섬 본당에는

신자들이 많이 기억하는 외국인 선교사 신부님이 있었습니다.

그 신부님을 초대해서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식사 중에 대화를 나누면서,

신자들이 그 신부님을 그렇게 많이 기억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그 신부님이 몇 번을 반복하신 단어 중에 하나가 ‘관심과 사랑’입니다.

신부님의 삶이 그 관심과 사랑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30여 년 전에 섬 본당에 공소가 많았는데요.

신부님은 그 공소들을 정말 자주 방문하셨습니다.

혼자도 많이 다니셨지만, 주교님이 본당에 오실 일이 있으면,

주교님을 모시고 공소를 방문하셨습니다.

그래서 한 섬에 사는 신자 분은 “아주 오랜만에 미사를 봉헌해 본다.

주교님을 처음 본다”고 감동하셨다고 합니다.

다른 공소 신자 분들도 신부님을 항상 공소에 관심을 가지고

자주 방문하시는 분으로 기억합니다.

또 병자 영성체를 매주 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시니까 신자들이 본당에 아무 불만이 없었고요.

자주 방문한 그 환자 교우의 가족들이 신자가 됐다고 합니다.

또 신부님이 자주 가시고 인사하시던 길가에

모든 분들이 신자가 된 적도 있고요.

그런 걸 보면 정말 ‘관심과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낍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빈손으로 보내는 뜻이

그 신부님 삶과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내면서도 세상의 힘과 권력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과 섬김으로 다가가기를 바라시리라 생각합니다.

-김기현 요한 세례자 신부-

▲이탈리아 로레토지역 바실리카성당 외부전경



[한주간 전례]

2022년 7월 4일 (월) [녹]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9,18-2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손’이라는 단어에 주목해 봅니다.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예수님께서 ……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우리에게 두 가지의 손을 소개합니다.

하나는 ‘사람의 손’입니다.

간절함과 믿음으로

‘손’을 내미는 데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아픔을 인정하는 동시에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하기에 그렇습니다.

혈루증을 앓는 여자의 ‘열두 해’가 그 손을 만들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손’으로 사람을 살리는 손입니다

. 성전에서 솟아나는 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살아나듯(에제 47,9 참조),

예수님의 손이 닿은 소녀가 살아납니다.

예수님의 손에서 사람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손’이 보입니다.

단순히 건강을 회복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고 하신(창세 1,31 참조)

새로운 창조가 오늘 예수님의 손에서 시작됩니다.

여인의 간절함과 믿음은

그가 예수님의 옷을 만지게 하고,

회당장의 간절함과 믿음은 예수님의 손을 움직이게 합니다.

오늘 저마다 삶의 자리에서 겸손과 용기의 손으로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 그분을 만지고,

하느님의 손이 내 삶에 닿아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기를 청해 봅시다.


-(김인호 루카 신부)-

2022년 7월 5일 (화) [홍]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 신심 미사

한국인 최초의 사제로서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21년

충남 솔뫼에서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르술라 사이에 태어났다.

양반 가문이었으나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1801년

신유박해 때 집안이 몰락하였다.
김대건은 열여섯 살인 1836년 사제가 되고자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길을 떠났다.

1844년 부제품을 받은 그는 선교 사제의 입국을 돕고자

잠시 귀국하였다가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1845년 8월 17일

상하이의 진자샹[金家巷]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고국에 돌아온 김대건 신부는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 사제의 입국 통로를 개척하려다가 1846년 6월에 체포되어

여러 차례 문초를 받고 9월 16일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4년 5월 6일

서울에서 한국 순교자 103위를 시성하면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정하상 바오로와 함께 한국의 대표 성인으로 삼았다.
한국 교회는 순교자 현양을 위하여 과거 대축일이었던

7월 5일에 성대하게 신심 미사를 드리기로 하였다

(주교회의 2019년 추계 정기 총회).

[복음묵상] 마태오 10,17-22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제자들을 파견하며 들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복음 선포에 대한 두 가지 사실을 알려 줍니다.

첫째, 복음 선포는 혹독한 방해와 맞닥뜨리게 되는데

그 방해의 주인공이 ‘사람’이라는 점

, 둘째, 복음 선포는 어떠한 방해에도 힘을 주시는

“아버지의 영”께서 계시기에 멈추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 김대건 신부님에게서

현실이 된 예수님의 말씀을 만납니다.

복음이 전하는 제자들의 처지와 승리를 교회에서 본 신부님은

“세상 풍속이 아무리 치고 싸우나 능히 이기지 못할지니, ……

성교 두루 무수 간난 중에 자라왔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옥중 서간 스물한 번째 편지 [마지막 회유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살이 안내서』, 39면 참조)라고 하셨고,

아울러 당신이 천주교인이냐고 묻는

관장의 질문에 “나는 천주교인이오. ……

나는 배교하기를 거부하오.”(김대건 신부님의 옥중 서간

스무 번째 편지, 29면)라고 답하시며

무엇을 말해야 할지 일러 주시는 ‘아버지의 영’을 드러내십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실천하는 삶은

일상에서 환호가 아닌 방해를 만납니다.

방해가 두려워 시작을 못 할 때가 있고

적당히 흉내만 낼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방해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는

방해의 순간에 오시는 아버지의 영을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희망이 아니라 두려움만을 보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희망을 안고 담대하게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게 해 달라고

성 김대건 신부님께 특별한 전구를 청해 봅시다.


-(김인호 루카 신부)-

2022년 7월 6일 (수) [녹]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0,1-7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까이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를

모두 고쳐 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가까이”는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당신의 삶에 더 깊이 참여하라는 뜻이며,

이것이야말로 제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더러운 영들이 쫓겨나고

병자와 허약한 이가 치유받는 것은

성경에서 ‘하느님 나라의 승리’를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서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승리가

당신의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한편 열두 제자의 이름이

“사도”라는 호칭으로 소개됩니다.

복음을 읽으면서 이 부분을 지나칠 때가 많습니다.

이미 익숙한 이름들이기도 하지만 그 명단에 자신

또는 친밀한 이들의 이름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본당에서 봉사자를 선발하여 명단을 발표하여도

교우들은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그 명단에 올릴 마음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런 마음이 어찌 신자들뿐이겠습니까?

사제품을 받으며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이사 6,8)라고 바쳤던

기도가 점차 “쟤가 있지 않습니까?

쟤를 보내십시오.”라는 기도로 바뀌어 가는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당신 제자들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승리를 계속 이루십니다.

그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빠져 있지는 않은지 확인해 봅시다.


-(김인호 루카 신부)-

2022년 7월 7일 (목) [녹]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0,7-15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하신 단호하고 구체적인 명령이 소개됩니다.

평상시의 예수님 모습과 다르게 제자들을 실전에 투입하시며

이르시는 말씀이기에 복음을 듣는 이도 덩달아 긴장하게 됩니다.

제자들에게 이르신 아홉 가지 명령 가운데

두 번의 금지 명령은

‘지니지 말아야 할 품목’에 관한 것입니다.

전대에 금, 은, 구리, 돈이 담겨 있거나

여행 보따리에 여벌 옷도 신발도 담겨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 자신을 보호할 최소한의 도구인 지팡이도 금지됩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선뜻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리 떼가 가득한 세상에 파견되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더 꼼꼼하고

넉넉하게 챙겨 주어야 할 것들인데 말입니다.

제자들이 무척 서운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 예수님께 어느 정도의 양은 허락해 달라고

청해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금지 명령의 핵심은 지니지 말아야 할

품목과 양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지니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지니고 가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어릴 적 학교에 갈 때

준비물을 챙겨 주시던 부모님이 떠오릅니다.

다 챙긴 것 같은데 꼭 하나씩은 빠뜨립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세상으로 나가는

우리 모두에게 준비물을 챙겨 주십니다.

불안해하며 많은 것을 챙기려고만 하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을 꼭 챙기라고 하십니다.


-(김인호 루카 신부)-

2022년 7월 8일 (금) [녹]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0,16-23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아버지의 영이시다.>

오늘 복음에서는 당신의 사명을

수행한 결과가 회당에서의 채찍질이요,

모든 이로부터의 미움, 그

리고 형제들과 부모 자식 사이에서의

분열과 죽음임을 소개하시며,

그런 상황 안에서 절대로 좌절하지 말라고

이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즉각적인 만족과 보상에 익숙한 시대에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마음이 평화롭기를,

가족이 서로 화합하고 안정을 이루기를 바라지만,

그와는 달리 혼란과 갈등을 체험할 때가 많기 때문이지요.

때때로 자신의 기대와는 다른 상황을 마주한 이들이

신앙의 무익함을 외치며 교회를 떠나는 것을 봅니다.

복음을 따르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반드시 장애물을 만납니다.

주일을 지키느라 때로는 가족들, 친구들과 다툼이 생기기도 하고,

좋은 일을 하면서도 혼자만 잘났냐는 질투를 사기도 하며,

누군가를 배려하느라 손해를 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우리에게

위로의 말씀을 건네시는 듯합니다.

‘슬퍼하지 마라. 복음 때문에

네 안에서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리는 표징들이니.

용기를 내어라. 절대 그것으로 끝이 아니니.’

복음 때문에 어떠한 혼란과 다툼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부끄러워하고 슬퍼해야 할 일입니다.

지금 누린다고 생각하는 안정과 평화가 그들이 받을 보상의 끝이기 때문입니다.


-(김인호 루카 신부)-

2022년 7월 9일 (토) [녹]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0,24-33
<육신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늘 복음에서는

‘두려움’이라는 단어가 네 번이나 나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대상’과 관련되어 쓰였습니다.

‘의회에 넘기고, 채찍질하고,

미워하고 죽이려는 자들’(마태 10,17-23절 참조),

곧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이

바로 제자들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그들”입니다. 세

번째는 ‘두려워해야 할 대상’으로,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하느님이십니다.

네 번째는 제자들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인데,

하느님께서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실 만큼

귀한 이들이 바로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과

‘두려워해야 할 것’이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며 허세를 부릴 때도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 말고는 모든 것이 두려울 때도 있습니다.

자신과 가족의 건강과 노후, 그리고 일과 사랑에서는 두려움을 느끼지만,

진실을 말하고 정의를 외치며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는

‘겁쟁이’가 되었는지조차 모를 수도 있습니다.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는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아니라 엄마,

아빠에 대한 믿음 때문에 넘어지지 않습니다

.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머리카락 한 올도 손댈 수 없다는 믿음이 꼭 필요합니다.


-(김인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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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입니다.
장마와 무더위가 동시에 시작되고 있습니다.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많은 비가 내려 피해도 났습니다.

가뭄속에 단비가 된 곳도 있으니

지역마다 상황에 따라많은 비가

좋기도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이와 다르지 않음을 반성하게 합니다.

 

-Berardus-